[eBook] 가난한 사람들 열린책들 세계문학 117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지음, 석영중 옮김 / 열린책들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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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나의 친구이시여! 불행은 전염병입니다. 불행하고 가난한 사람들은 서로 전염되지 않도록 멀리 떨어져 있어야 합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가난한 사람들>의 이 구절을 읽는 순간 앗! 했다. 그때서야 깨달았다. ‘아, 내가 예전에 읽은 책이구나. 그런데 왜 까마득하게 잊었을까?’ 그럼에도 이 문장만큼은 생생하게 기억났다. 이 한 구절만으로 내가 이 책을 예전에 읽었구나, 기억해낼 정도로. 황급히 이 책을 언제 읽었는지 찾아보았더니, 오래전 <분신/가난한 사람들> 한 권으로 되어 있던 무렵에 읽었던 게 아닌가. 그런데 이렇게 새로울 수가. 나의 기억력이란 대체. 허허허. 읽을 책이 쌓였는데도 나쁜 기억력 때문에 예전에 읽은 책을 마치 처음처럼 읽다가, 어느 순간 아, 전에 읽은 책이구나, 깨닫게 되면 뭔가 억울해진다. ‘다른 책을 더 읽었을 텐데, 아깝다!’하는 심정이랄까. <가난한 사람들>을 이미 읽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도 처음에는 그랬다. 그런 줄도 모르고 전자책까지 구매했으니, 어이없어 웃음이 나왔다. 그럼에도 끝까지 읽었다. 왜냐하면 도스토예프스키, 도선생 작품이니까. 분량이 그리 부담스럽지 않고, 서간체 소설이라 술술 읽힌다는 장점도 한몫했다.

예전에는 이 작품에서 ‘물질적 가난함’이 어떻게 사람들을 생활은 물론 정신적 궁지로 몰아넣는가에 집중해서 읽었던 것 같다. 그런 부분이 눈에 더 잘 들어왔다. 그런데 이번에는 물질적 빈곤보다는 정신적 빈곤이 인간을 어떻게 파멸로 몰아가는지가 더 두드러지게 다가왔다. <가난한 사람들>은 도스토예프스키의 첫 작품이라 그런지 분량도 짧고, 등장인물도 많지 않으며, 줄거리도 단순하다. 중년의 가난한 하급 관리 ‘제부쉬낀’과 가난함과 병약함으로 인해 늘 세상 풍파에 시달리는 여인 ‘바르바라’ 사이의 우정(또는 애정)을 편지 형식으로 그려나간다. 그 둘 모두 ‘가난한 사람들’이며, 그들 주위 이웃들 또한 대부분 물질적으로 빈곤하다.

제부쉬낀과 바르바라가 주고받는 편지를 보면 둘 사이 감정의 온도 차이를 명확하게 알 수 있다. 제부쉬낀이 자신을 늙은 사람이라 칭하며 자기가 바르바라에게 쏟는 애정은 ‘아버지로서의’ 애정과 같다고 주장하지만, 사실 그건 하나의 안전장치로써, 바르바라를 안심시키기 위한 핑계와도 같음을 누구나 알 수 있다. 제부쉬낀은 바르바라를 한 여인으로서 사랑하고 흠모한다. 그러나 그 사랑을 진솔하게 표현하면 둘의 관계를 망가뜨려버릴 수 있기 때문에 ‘아버지와도 같은 보호와 우정’을 그 스스로 운운한다. 바르바라 또한 제부쉬낀의 도움의 손길과 우정과 애정을(때로는 부담스럽기도 하지만) 고맙게 여기며 받아준다. 그도 제부쉬낀에게 ‘사랑’을 말하기는 한다. 그러나 그 사랑은 제부쉬낀과 달리 이성적인 애정은 아니다. 둘 사이에 왜 이러한 온도 차이가 생겼을까? 단순히 나이 때문일까?

독자는 바르바라의 편지 속 ‘수기’를 통해 그 비밀을 알 수 있다. 그녀는 어느 날, 제부쉬낀에게 자신이 어쩌다가 부모를 다 잃고, 이토록 가난하고 병약한 신세가 되었는지를 털어놓게 된다. 그 이야기 속에는 그녀의 첫 사랑 ‘보끄로프스키’가 등장한다. 첫 사랑과의 일화에서 가장 눈길이 가는 부분은 바르바라가 그의 방에 몰래 들어가서 수많은 책을 보고 전율하는 장면이다. ‘그는 많이 배운 사람이었고 나는 어리석은 아이였다. 아는 것도 없었고, 책은 한 권도 읽은 적이 없었다. 나는 책의 무게로 인해 금방이라도 꺾어질듯 휘어 있는 기다란 선반을 부러운 눈으로 쳐다보았다. 화가 나고 슬펐다. 어떤 광기 같은 것이 나를 엄습해왔다.’ 바르바라는 책 앞에서 왠지 모르게 한없이 초라한 느낌을 받는다. ‘그의 책을 마지막 한 권까지 전부 다 읽고 싶다’는 강렬한 열망에 휩싸인다. ‘그가 아는 것을 나도 다 알아야 그와 우정을 나눌 자격이 생기는 거라고 생각했었나 보다.’라는 그녀의 고백으로 미루어보건대 바르바라는 누군가를 사랑하고, 호감을 느끼는 행위에서 정신적인 면, 즉 지적인 의사소통에 크게 의미부여를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처음부터 바르바라가 보끄로프스키에게 끌렸던 이유도 그가 그녀에게는 없었던, 지적인 면을 소유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만큼 그와 의사소통하기 위해서는 ‘책 읽는 행위’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녀가 보끄로프스키의 생일 선물로 ‘푸시킨 전집’을 사주려고 애쓰는 모습에서도 두 사람 사이 애정의 밑바탕이 된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실제로 이 둘은 책을 통한 교류로써 가까워지고 정신적으로 의지하는 사이가 된다. 바르바라는 이때의 경험으로 가난할지언정 정신적으로는 풍요로운 삶을 살아가게 된다.

그런 바르바라에게 제부쉬낀의 취향은 저속하게만 느껴진다. 물론 제부쉬낀은 보통의 하급 관리와는 달리 책을 읽으려 노력하고, 문학을 논하는 사람들과 어울리며 자신도 언젠가는 작가가 될 수 있지 않을까 꿈을 꾸기도 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제부쉬낀이 어울리는 문학가들이란 ‘라따자예프’처럼 저급한 연애 소설을 쓰는 이들이 대부분이다. 더욱이 이 라따자예프는 푸시킨을 낡아빠진 작가로 취급할 만큼 문학적 감각은 결여된 인물이다. 푸시킨 전집을 갖고 싶어 하던 보끄로프스키와 완벽하게 대조되는 인물인 셈이다. 그런데 제부쉬낀은 이런 라따자예프를 칭송하며 그가 추천한 작품들을 여과 없이 받아들인다. 제부쉬낀이 자신이 감동한 작품이라면서 편지에 써 보낸 통속 연애 소설은 민망하기 그지없다. 심지어 그는 고골이나 셰익스피어를 저주하기도 한다. 사정이 이러하니 그가 사랑해마지 않는 바르바라와 정신적 교감을 나눌 수 있는 가능성은 희박하다. 그러므로 그 둘 사이에 ‘사랑’이 싹틀 가능성은 더더욱 없어 보인다. 때문에 바르바라가 작품 끝 무렵에 내리는 ‘선택 아닌 선택’은 비극적이기는 하지만 당연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어차피 똑같이 정신적으로 빈곤한 사람이라면, 물질으로라도 풍요롭게 해줄 사람을 만나는 게 낫지 않겠는가.

이렇게 <가난한 사람들>은 제부쉬낀과 바르바라 두 사람의 대비를 통해 정신적 빈곤함이란 과연 무엇일까를 생각하게 하는 한편, 물질적 가난함이 인간을 어떻게 궁지로 몰아넣는가도 놓치지 않고 세밀하게 그려낸다. 제부쉬낀이 분에 넘치게 바르바라에게 돈을 쏟아 부으며 궁핍할 대로 궁핍해지자 그의 편지는 점점 거칠어지고, 세상에 대한 불만도 커지며, 생활도 태도도 엉망진창이 되어 간다. 마치 바르바라의 아버지가 생전에 가난함에 몰리자 성격마저 변해버린 것처럼 제부쉬낀 또한 비슷한 전철을 밟아간다. ‘수많은 근심, 걱정, 슬픔, 거듭되는 불운들’이 가엾은 그들을 벼랑 끝으로 내몰며 바르바라의 아버지가 그러했듯이 제부쉬낀 또한 ‘의심도 많아지고 신경질적인 사람으로 변해’가며 ‘점점 더 절망 속으로 빠져 들면서 건강을 무시하기 시작’한 것이다. 성마르게 변한 제부쉬낀이 바르바라에게 보내는 편지 속 서명마저 무성의해진다. 예전에는 ‘당신의 충복이자 성실한 친구 마까르 제부쉬낀, 청렴결백한 당신의 친구, 한결같이 진실한 당신의 친구, 당신의 손가락 하나하나에 키스를 보내며’ 등등 온갖 수식이 난무하더니, 어느 순간부터 ‘마까르 제부쉬낀’, ‘M. 제부쉬낀’, ‘M.D.’ 등으로 변한다. 실제로 사람이 낭떠러지로 내몰리는데 저런 휘황찬란한 표현이 자연스럽게 나올 리가 있겠는가. 도스토예프스키의 이런 세심한 설정에도 감탄하게 된다.


가난한 사람은 까다로워요. 가난한 사람은 보통 사람과 다른 눈으로 세상을 쳐다보고 길거리를 지나는 사람들을 곁눈질로 쳐다봅니다. 주변을 항상 잔뜩 주눅이 든 눈으로 살피면서 주위 사람들의 한마디 한마디에 신경을 씁니다. 누가 자기에 대해서 뭐라고 하는 것은 아닐까, 혹은 다른 사람들이 <뭐 저렇게 꼴사나운 놈이 다 있어!>, <대체 저렇게 가난한 사람은 무슨 느낌을 갖고 살까?>, 아니면 <이쪽에서 보면 어떤 꼴을 하고 있고 저쪽에서 보면 또 어떤 꼴일까?> 등등의 말들을 할까 봐 남의 말에 일일이 신경을 씁니다. 모두 알고 있듯이 가난한 사람들은 발닦개만도 못한 인생이고 아무도 그들을 존중해 주지 않습니다. 누가 책에 뭐라고 쓰든 엉터리 3류 작가 족속들이 뭐라고 끼적이든 가난한 사람의 인생은 이전과 조금도 달라지는 것이 없습니다.

제부쉬낀은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만큼, 타인의 눈을 지나치게 신경 쓴다. 위 구절에서도 볼 수 있듯이, 극도로 궁핍해진 그는 주위 사람들이 자신을 어떻게 볼지, 그들의 시선 때문에 빈곤 상태가 더욱 견디기 힘들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제 목을 조이는 것은 사람들이에요. 그렇죠? 제 목을 조이는 것은 돈이 아니라, 일상생활에서 느껴지는 불안감, 사람들의 수군거림, 야릇한 미소, 비웃음입니다.’ ‘외투도 없이 다니는 것을 보고 저의 적들은, 그의 사악한 혓바닥은 뭐라고 지껄여 댈까요? 외투를 입고 신발을 신고 다니는 이유는 바로 사람들 때문이에요. 신발은 제 이름과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필요한 것이랍니다. 구멍 난 신발을 신고 다니면 명예도 이름도 땅에 떨어지고 마는 거죠.’ 술을 마시면 신발 밑창에 대한 생각도 나지 않는다면서 그는 점점 술에 취한 날이 많아져 간다. 극도의 물질적 가난과 정신적 가난 상태에 내몰린 제부쉬낀은 이젠 아예 책을 저주하기까지 한다.


그놈의 책, 책, 책! 도대체 책이 뭡니까? 책은 밑도 끝도 없이 헛소리를 늘어놓는 것에 불과합니다! 소설도 다 엉터리예요. 헛소리나 지껄이려고 쓴 거죠. 하릴없는 사람들이나 읽으라고 쓴 거라고요.

제부쉬낀의 상태를 보면 그 스스로 자존감이 없기 때문에 심한 빈곤에 시달리자 타인이 자신을 어떻게 볼까 전전긍긍하면서 더 급격하게 무너져감을 알 수 있다. 그가 좀 더 굳건했더라면, 스스로 자존감을 지킬 수 있을 정도로 정신적으로 풍요로웠더라면, 저 물질적 빈곤 상태를 조금은 의연하게 견디지 않았을까 싶어진다. 정신적 빈곤이 물질적 빈곤과 맞물리자 걷잡을 수 없이 몰락의 길을 걷게 된 것이다. 악순환이다. 물론 이렇게 물질적으로 궁핍함에 내몰렸을 때 정신적으로 버티기 쉬운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 그리 많지는 않으리라. 이어지는 불행에 대개는 의기소침해져서 모든 의욕을 상실해버릴 것이다. 가난함도 부유함도 타인의 시선에 민감한 사회라면 더욱 그럴 것이다.

제부쉬낀이 각하의 선의로 다시 일어서게 되는 장면은 그래서 의미심장하다. 그 스스로 각하가 건넨 1백 루블 때문이 아니라 각하처럼 높은 사람이 친히 ‘지푸라기 같이 하잘것없는 주정뱅이의 손을, 이 천한 손을 잡아주신 것이 감동스러울 따름’이라고 말하듯이, 자신을 한 사람으로 존중해준 행위에서 그는 다시 의욕을 되찾는다. 각하는 제부쉬낀의 ‘영혼에 새 숨을 불어넣어’준 것이나 다름없고 ‘그의 삶이 오래도록 달콤할 수 있도록’ 다시 이끌어준 것이다. 돈이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 존중해준 태도 때문에 그의 영혼이 다시 눈을 뜬다. 마침내 제부쉬낀은 떠나는 바르바라에게 푸시킨 책 한 권은 주고 가라고 말하기에 이른다. 무척 흥미로운 변화이다. 이런 ‘존중’은 스스로 얼마든지 할 수 있다. 어떤 상태에서도 자기를 존중하는 길, 정신적 빈곤으로 내몰리지 않는 길, 그 길은 곧 책 읽기라는 행위에 있다고 도스토예프스키는 <가난한 사람들>에서 말하고자 한 것은 아닐까. 그래서 저 ‘불행하고 가난한 사람들이 서로 전염되지 않도록 멀리 떨어져 있어야’ 한다는 구절은 정신적으로 빈곤한 이들이 함께 있으면 더 쉽게 구렁텅이로 내몰릴 수 있다고 이야기하는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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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목련 2018-11-05 13: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도스토예프스키와의 만남은 늘 뒤로 미뤄집니다. 꾸준하게 세계문학을 읽는 잠자냥 님의 리뷰를 통해 도전을 원하지만 시도했다가고 덮고 마네요. 최근엔 <지하 생활자의 수기>가 그러했어요. ㅠ.ㅠ 지인은 고비를 넘기면 괜찮다고 하는데 말이에요. 불행이 전염되는 대신 도스토예프스키 읽는 일이 전염되기를 바라봅니다. ㅎ

잠자냥 2018-11-05 13:27   좋아요 0 | URL
저도 10대 때 <죄와 벌> 읽은 뒤로는 도스토예프스키 안 읽다가 서른 넘어서 제대로 다시 읽기 시작했는데요, 엄청 재밌더라고요? ㅎㅎ 지인분 말씀처럼 어떤 고비(도스토예프스키가 좀 장황하죠?)만 넘기면 흥미롭게 읽으실 수 있을 거예요. 언젠가 도스토예프스키가 자목련 님에게도 전염되길 빌어봅니다! ㅎㅎ

북깨비 2018-11-05 15: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정말 강렬한 구절이네요. 잠자냥님의 마지막 말씀 역시 절절히 공감합니다. 정신적인 빈곤 상태에서는 동병상련보다는 마음이 건강한 이들과 함께 하는 편이 멀리 봤을때 좋은 것 같아요.

잠자냥 2018-11-05 16:02   좋아요 1 | URL
도스토예프스키 작품에는 이런 강렬한 구절이 참 많지요. ㅎㅎ 북깨비 님 말씀대로 정말 정신적으로 수세에 몰린 상태일 때는 마음이 건강한 이들과 함께 하는 게 치유나 회복의 힘이 큰 것 같습니다.

카알벨루치 2018-11-05 18: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언제쯤 도스토예프스키에게 갈까요???첩첩산중이라

잠자냥 2018-11-05 20:06   좋아요 1 | URL
그 길은 들어서기가 어렵지 한 번 가면 쭉쭉 가게 될 길임은 확실합니다! ㅎㅎ

희선 2018-11-09 01: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난한 사람들, 하니 빅토르 위고 소설 불쌍한 사람들(레 미제라블)이 생각납니다 지금 생각하니 두 사람은 다른 나라 사람이군요 빅토르 위고는 가난하고 힘든 사람을 불쌍하게 여겼군요 가난해도 책을 본다면 그 가난을 버틸 수 있을까요 돈이 없어도 마음은 넉넉하면 좋을 텐데, 그런 사람은 세상에 그렇게 많지 않을 듯합니다 그걸 도와주는 게 책일지도 모르겠네요


희선

잠자냥 2018-11-09 10:05   좋아요 1 | URL
말씀하신 것처럼 돈이 없어도 마음은 넉넉하면 좋을 텐데, 사실 돈이 없으면서 그러기는 쉽지 않죠. 이래저래 가난한 이들에게 이 세상은 살아가기 힘든 곳 같습니다....

얄라알라 2018-12-15 14: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축하드립니다^^

잠자냥 2018-12-15 18:26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당 ㅎㅎ
 
내가 그대를 잊으면 - 트루먼 커포티 미발표 초기 소설집
트루먼 커포티 지음, 박현주 옮김 / 시공사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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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가운 벽>, <티파니에서 아침을>, <인 콜드 블러드>, <다른 목소리, 다른 방>, <풀잎 하프>..... 카포티의 작품을 하나 읽어나가고, 마침내 국내에 소개된 그의 작품을 다 읽었을 때는 무척 아쉬웠다. 안타까웠다. 그는 이미 죽었고, 이 땅에 알려진 카포티의 작품은 다 읽은 셈이나 마찬가지였으므로. 좋아하는 작가의 작품을 모조리 읽어치웠을 때는 뿌듯한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헛헛함이랄까, 아쉬운 마음이 더 크다. 물론 그럴 때는 그의 작품을 처음부터 다시 읽어도 좋다. 그렇지만 새로운 작품을 읽는 재미에 어떻게 비교할 수 있으랴.

카포티의 신간 알림 메일이 날아왔을 때는 조금 놀랬다. 반신반의했다. 비슷한 작품을 우려먹는 책이 아닌가 싶었다. 그런데 이 책, <내가 그대를 잊으면>은 그렇지 않았다. 그의 죽음 뒤 30년 만에 발견된 카포티 미발표 유고집이란다. ‘미발표’ 이 세 글자에 눈이 돌아간다. 내가 읽은 적이 없는 작품이다. 심지어 그가 10대 시절에 쓴 작품이라고 한다. 심장이 뛰지 않을 수 없다. 카포티의 작품을 좋아하는 이들이라면 이 소식을 듣고 모두 나와 같은 심정이지 않았을까?

이 작품들은 대체 어디서 발견된 것일까 궁금하다. 아니,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뉴욕도서관에서(그렇다, 영화 <뉴욕라이브러리에서>의 주인공인 그 뉴욕도서관!) 발견되었다는 게 아닌가! 나는 영화를 본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이 문구를 발견했던 터라 그 사실이 더욱 남다르게 다가왔다. ‘역시 도서관이군!’ 그렇다면 뉴욕도서관에서는 어떻게 발견한 것일까? 뉴욕공립도서관에는 트루먼 카포티 저장고가 있다고 한다. 한 편집자와 기자가 카포티의 마지막 유작인 <응답받은 기도>의 나머지 부분을 찾던 중 이 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던 그의 미발표 초기 단편들을 ‘우연히’ 발견한 것이다. ‘차가운 벽’이나 ‘미리엄’은 10대 시절에 쓰였고, 카포티는 청소년 시절부터 단편을 쓰면 꾸준히 잡지사에 투고했다고 한다. 때문에 10대 시절에 쓰인 작품이 더 있으리라고 예상 가능했고, 그런 예상에서 출발, 마침내 찾아낸 이 원고들은 사람들의 눈길을 끌고도 남을 만했다.

<내가 그대를 잊으면>에는 카포티가 열네 살부터 열일곱 살 무렵에 쓴 단편 14편이 실려 있다. 첫 작품 ‘길이 갈라지는 자리’를 읽을 때부터 나는 미소 짓는다. 카포티 작품답다. 두 부랑자가 어딘가를 향하고 있다. 소년인 ‘팀’과 어른 ‘제이크’. 이렇다 할 집도 절도 없는, 가정 바깥으로 몰린 소년과 사회에서 자리 잡지 못한 소외된 어른의 조합. 카포티 작품에서 곧잘 볼 수 있는 인물 유형이다. 이 두 사람은 굶주림에 지쳤고 행색도 말이 아니다. 그나마 다행이랄까 소년은 집으로, 엄마가 계신 곳으로 돌아가는 길이다. 엄마에게 자신이 벌었다고 자랑스럽게 내보일 돈은 무엇보다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다. 다만 자기 옆에 있는, 이 아저씨가 조금 의심스럽다. 자꾸만 자기 돈을 노리는 것 같다. 그런데 아뿔사, 정말로 돈이 사라지고 만다. 팀은 돈을 잃어버린 채 집에 갈 수 없다고, 이 꼴로 엄마를 볼 수는 없다면서 길길이 날뛴다. 제이크에게 훔친 돈을 내놓으라고 울부짖는다. 둘 사이에 희미하게 존재하던 떠돌이로서의 유대감마저 완전히 끊어질 듯하다. 정말로 제이크는 팀의 돈을 훔쳤을까?

이렇게 이야기하면 얼마쯤 스포일러를 하는 셈이나 마찬가지인데, 이 작품 끝부분에 이르렀을 즈음에는 카포티답다는 생각을 하면서 미소 지을 수 있었다. ‘길이 갈라지는 자리’는 카포티의 다른 작품에서 곧잘 볼 수 있는, 소외받은 이들끼리의 연대나 우정을 엿볼 수 있다. 무엇보다 부모 없는 아이에게 일종의 버팀목 역할을 해주는 어른이 존재한다. 물론 그렇다고 그 어른의 상황이 딱히 좋은 것은 아니다. 대개 그 또한 가난하고 외톨이며, 사회에서 외면 받는 존재이다. 마치 카포티의 다정한 숙모였던 ‘숙 포크’양처럼 말이다. 어린 시절, 부모의 이혼 뒤 외톨이로 지냈던 카포티는 ‘숙’ 숙모 같은 어른들 때문에 그나마 삶의 위로를 받을 수 있었고, 그 따스한 영향은 작품 곳곳에서 묻어난다. ‘길이 갈라지는 자리’는 그런 카포티 세계의 원형과도 같은 작품이다. 다음 작품인 ‘밀 스토어’ 또한 그렇다. 위험에 처한 아이와 그 아이를 위해 선뜻 구원의 손길을 내미는 어른의 이야기.

10대에 쓴 작품들이라 그런지 또래 이야기도 많다. ‘이것은 제이미를 위한 거예요’의 테디는 카포티의 또 다른 모습으로도 보인다. 테디의 부모는 자기들만의 생활에 빠져 아이에게 진심으로 관심이 없다. 그것은 유모 또한 마찬가지이다. 그런 테디는 공원에서 뜻밖의 행복을 발견하게 된다. 마법처럼 나타난 개 한 마리는 소년의 외로움을 계속 달래줄 수 있을까? 탈옥수에 대한 호기심 때문에 숲 속으로 들어가는 소년이 주인공이 되기도 하며(‘늪의 공포’), 수업 시간에 집중하지 못한 채 자기만의 공상에 빠져드는 10대 소녀 이야기인 ‘세계가 시작되는 곳’ 또한 카포티의 어린 시절의 한 모습이 아닐까 싶어 슬며시 웃음 짓게 된다. 때로는 자기도 제어할 수 없는 도벽을 지닌 소녀가 등장하기도 하고(‘힐다’), 고향을 떠나 도시로 가는 청년을 사랑하는 젊은 아가씨가 주인공이 되기도 하다(‘내가 그대를 잊으면’). 이 작품은 남루한 현실 속에서도 사랑의 환상이나 낭만을 꿈꾸는 아가씨가 등장한다는 점에서 <티파니에서 아침을>이 떠오르기도 한다.

<내가 그대를 잊으면>의 이 어린 작가는 그때부터 세상과 떨어져 사는 이방인들, 소외받고 힘없는 약자들을 연민어린 눈으로 바라볼 줄 알았다. 마을의 놀림거리이자 기피 대상인 노파 벨 랜킨 양을 향한 따뜻한 시선이 인상적인 ‘벨 랜킨 양’은 종종 보이는 아름다운 문장도 돋보인다. ‘바깥에서는 오래된 굴뚝에서 솟아오른 연기가 나른하게 구불거리는 구름이 되어 오르다 마치 얼어붙은 것처럼 푸른 안개에 잠긴 집 위에 걸렸다.’(58쪽)와 같은 문장들……. 차곡차곡 썼다 지웠다를 반복하면서 문장에 고심하는 소년 카포티의 모습이 떠오른다. 백인 소년과 남부 출신 흑인 요리사 '루시'와의 짧은 우정을 그린 작품 '루시' 또한 그렇다. 소년은 루시와 헤어지는 순간에 그녀에게 선물을 건넨다. 사탕 한 상자, 루시가 가장 좋아하는 간식인 초콜릿을 씌운 버찌, 그리고 잡지 한 묶음. 소년의 따뜻한 마음이 고스란히 내게도 전해지는 느낌이다. 이 작품 속 루시는 건강하고 밝고 생명력이 넘친다. 비록 소외된 계급이지만 카포티는 그런 이들을 그저 동정의 대상이 아닌, 생명력을 지닌 활기찬 존재로 그리고 있다. 이렇듯 <내가 그대를 잊으면>은 주변인들을 보듬고 그들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끌어내는, 한 천재 작가가 어떻게 서서히 영글어갔는지를 생생하게 엿볼 수 있다.

카포티는 열한 살 무렵에 ‘진지하게 글을 쓰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는 매일 학교에서 집으로 와 세 시간 동안 글을 썼다. <내가 그대를 잊으면>을 읽으면 그의 말이 결코 거짓이 아님을 확인할 수 있다. 물론, 이 작품집을 읽노라면 그의 대표 단편집인 <차가운 벽>에는 미치지 못하는 설익은 듯한, 어딘가 어설픈 느낌을 받게 된다. 당연하다. 그럼에도 감탄하게 된다. 한편으로는 ‘열폭’하기도 한다. ‘이런 작품을 열 몇 살에 썼단 말이야?’ ‘역시 난 안 돼!’ 마음속으로 절규한다. <내가 그대를 잊으면>은 풋풋하다. 싱그럽다. 섬세하다. 외롭고 쓸쓸하면서도 아름답다. 따뜻하다. <차가운 벽>의 카포티는 <내가 그대를 잊으면>을 쓸 때의 카포티와 세상을 보는 시선, 또 그걸 표현하는 면에서는 크게 차이가 없다. 단지 기술적으로 크게 향상되었다고나 할까. 아마도 그가 10대 시절부터 날마다 진지하게 글을 썼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일 것이다. <내가 그대를 잊으면>은 그가 그렇게 빼어난 작가가 되는 과정을 고스란히 엿볼 수 있다. 카포티에 대한 애정과 열 몇 살에 이런 작품들을 썼다는 점에서 내게 이 책은 아낌없이 별 다섯 개짜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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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나무 2018-11-01 10:3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몇 년 전 카포티 전집을 친구 생일선물로 선물한 적이 있어요.
선물부터 하고 내 것은 이후에 장만하자 였는데 여지껏 장만을 못하고 있었고, 그리고 카포티를 깜빡 잊고 있었지 뭐에요. ㅎㅎㅎ;;
저도 신간이라고 했을때 좀 의아했는데 카포티가 10대에 쓴 소설이라니! 저 역시 열폭과 절규를 오가게 될까봐 읽기가 두려워지긴 하지만 그래도 반가운 신간이 아닐 수 없네요! ^^

잠자냥 2018-11-01 10:39   좋아요 1 | URL
저는 그 전집 출간되었을 때 이미 카포티 책은 다 갖고 있어서 ㅠㅠ 전집을 구매하지는 않았거든요. 그런데 그게 품절되고 나니 괜히 아쉽더라는...ㅎㅎㅎ
10대에 이런 작품을 쓰다니 정말 열폭입니다. 하하하.

카알벨루치 2018-11-01 11: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0대 쓴 글에도 열광하시다니 카포티가 대단한 작가인가 봅니다 저도 발을 들여놓아야겠네요! ㅎ

잠자냥 2018-11-01 11:06   좋아요 2 | URL
ㅎㅎ 그런데 이 책은 제가 카포티를 좋아하기 때문에 지극히 주관적인 애정으로 별 다섯 개를 준 것이라... 만일 카포티를 입문하시려고 한다면 그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인 콜드 블러드>나 <차가운 벽>을 먼저 읽으시기를 추천합니다.

카알벨루치 2018-11-01 11:08   좋아요 1 | URL
입력완료 장바구니 담기 끝! 잠자냥님 감사요
 
연애의 기억
줄리언 반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다산책방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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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오후, 대형 쇼핑몰에서 나는 본다. 부부가 아이와 함께 저녁을 먹으러 나왔다. 음식점은 이미 만원이고 그들은 번호표를 받고 줄을 서서 기다리는 중이다. 아내는 전화 통화를 하느라 바쁘고 아이는 아이대로 제 또래와 노느라 정신이 없다. 바로 그때, 나는 남편의 눈, 뭐라 설명할 수 없는 눈을 보고야 말았다. 그는 세상의 모든 권태와 짜증, 분노와 증오가 뒤섞인 눈으로 아내의 뒤통수를 쏘아보고 있었다. 아내는 통화중이라 남편의 시선을 알지 못한다. 그렇게 남자는 아내를 더없이 증오하는 눈으로 흘겨보았다. 통화가 끝날 때까지. 그 눈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이 세상에서 가장 미워하는 사람을 바라봐도 그럴 수는 없으리라. 그들도 한때는 사랑을 했겠지. 그러니까 아이도 낳으며 함께 살고 있겠지. 그래, 그들도 한때는 사랑했을 것이다. 그들만이 간직한 하나의 이야기가 있을 것이다.


테니스코트. 하필이면 테니스코트다. 폴과 수전은 테니스코트에서 만난다. 나는 슬쩍 미소 짓는다. 문득 내 이야기가, 나의 단 하나의 이야기, 아니 너와 나 사이에만 존재하는 하나의 이야기가 떠오른다. 내가 너를 테니스코트에서 만났듯이, 폴과 수전도 테니스코트에서 서로를 발견한다. 여름날의 뜨거운 햇살, 테니스공을 쫓느라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던, 그럼에도 유독 너만은 눈에 들어왔던 그 기억을 떠올린다. 함께 팀을 이룬 폴과 수전은 게임을 하며 서로를 알아간다. 게임하는 방식, 포핸드 백핸드 공을 치는 법, 상대를 배려하는 자세, 코트에서 다른 사람을 대하는 태도를 통해 서로를 파악한다. 너와 내가 그러했듯이. 테니스코트에서 너 같은 사람을 만나다니! 폴과 수전처럼 우리는 ‘개별적이고 자신들에게 특수한 것’을 본다. 나와 너의 사랑은 얼마나 놀라운가! 그에 비하면 폴과 수전의 사랑은 조금 뻔해 보인다. 그런데 폴과 수전 또한 그들 나름대로 경이로워한다. 그들에게는 우리의 사랑이 진부해 보이리라. ‘모든 연인이 자신들의 관계를 두고 하는 착각일 것이다. 자신들은 범주와 표시를 다 벗어나 있다’(27쪽)고 생각하는.


줄리언 반스의 <연애의 기억 The Only Story>은 읽는 이의 머릿속에 절로 사랑 이야기를 떠올리게 한다. 아니, 마음이라고 해야할까? 사랑이 실패로 끝났을지언정, 흐지부지되었을지언정, 또는 애초에 시작도 못했거나 자기 혼자만의 마음속에서만 있는 일이었을지언정, 이 세상에 존재했던 자기만의 사랑 이야기, 그 단 하나의 이야기를 돌아보게 한다. 그것도 ‘압도적인 일인칭’으로. 지금 여전히 사랑을 지속중인 사람이라면 그가 떠올리는 장면들은 대개 장밋빛이리라. 사랑에 빠진 폴처럼 그 또는 그녀의 웃음, 웃는 방식에 주목하고, 폴에게 수전의 이빨이 남다르게 다가왔듯이 남들은 잘 알지 못하는 사소한 신체적 특징 또는 결점(다른 이에게는 결점으로 보이더라도 나에게는 더할 수 없는 매력인!)에 열광할 것이다. 그러나 사랑이 이미 끝났거나,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남긴 채 사랑이 자기 삶에서 빠져나간 사람이라면 그 기억은 고통스러울 것이다. 한 사람이 “우리 참 행복했는데”하고 말할 때 다른 한 사람은 “우린 진짜로 행복했던 적이 없어.” 말하듯이, 끝난 사랑은 대개 서로 다른 기억을 공유한다. 그렇다면 ‘행복한 기억과 불행한 기억 가운데 어느 게 더 진실할까?’(289쪽). 이 질문에 누구도 쉽게 답할 수는 없으리라. “사랑에서는 모든 것이 진실인 동시에 거짓”(331쪽)이기 때문에. 감정적 기록은 역사책과는 달리 그 진실은 항상 변하며, 양립할 수 없을 때도 진실이기 때문에(289쪽). 


<연애의 기억>에서는 ‘사랑’이라는 단어 못지않게 ‘기억’이라는 말이 자주 등장한다. 인간의 부정확한 기억이 빚어내는 생의 희비극에 대한 반스의 통찰은 이미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에서 빛을 발한 적이 있다. 한때는 서로 사랑했고, 어쩌면 사랑에 빠졌었다고 기억(착각)하는 남자의 제멋대로 부풀려지거나 또는 축소된 기억, 즉 윤색된 기억. 진실을 알 수 없는 모호한 기억의 엉킴으로 인한 삶의 비극에 관한 이야기들……. 그러고 보니 폴은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의 토니와 닮았다. 철저히 폴의 관점에서 그려진 수전은 토니가 묘사한 베로니카를 떠올리게 한다. 그때, 젊은 토니는 ‘역사는 승자들의 거짓말’이라고 했고 그런 그에게 토니의 선생은 ‘패배자들의 자기기만’이라고 말했다. 에이드리언은 ‘역사는 부정확한 기억이 불충분한 문서와 만나는 지점에서 빚어지는 확신’이라고도 했다. 그들의 이런 말들은 한 사람의 일생, 즉 개인의 역사에도 고스란히 투영할 수 있다. 역사와는 달리 한 사람의 일생에는 승자도 패자도 없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때문에 나이 든 토니가 ‘역사는 살아남은 자, 대부분 승자도 패자도 아닌 이들의 회고에 더 가깝다’고 이야기할 때 그 역사는 곧 한 사람의 생이 된다. 누군가의 삶은 주로 그의 기억에 의존해서 만들어지는, 결국 평범한 이들의 회고에 가깝기 때문이다. 그렇게 <연애의 기억>속 폴의 사랑 이야기가 된다. 진실일 수도 있고 때로는 완전한 기만일 수도 있는 어느 사랑의 역사….  


폴이 기억하는 그의 첫사랑은 처음에는 눈부시다. 도발적이다. 열아홉과 마흔여덟이라는 나이 차이도 그렇지만 부모의 잔소리 또는 암묵적인 협박, 미스터 매클라우드와 그 사이에서 낳은 두 딸의 존재 등 그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는 자유분방함까지. 첫사랑의 역사에 어울릴만한 모든 조건을 두루 갖추고 있다. 물론 이것은 어디까지나 폴의 관점, 폴의 처지에서 그렇다. 폴보다 삶을 많이 보았고, 그것을 이해한 여자, 그래서 곧잘 웃음을 터뜨리는 수전, 그녀에게는 폴이 첫사랑도 아닐뿐더러 처음부터 비극의 씨앗을 품은 위험한 관계였을지도 모른다. 아니, 수전에게 사랑이란 그녀가 희미하게 언급했던 첫사랑이 사라진 뒤 미스터 매클라우드를 거쳐 폴에 이르는 동안 내내 어떤 고통을 싹틔울 수밖에 없는 관계였을지도 모른다. 매클라우드와 함께할 때부터 있었던 음주벽이 그녀의 그런 쓸쓸한 심정을 보여주는 것은 아닐까. 어쨌든 수전의 이야기는 그녀의 입을 통해 듣지 못했으므로 무엇이 진실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그럼에도 수전이 폴을 바라보며 ‘내 평생 어디 있었어?’라고 할 정도로 사랑했던 것만큼은 진실일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게 잘못되어버렸을 때 수전은 도저히 이겨내지 못한 게 아니겠는가. 


인생의 황혼기에 폴은 첫사랑의 눈부신 기억을 쫓는다. 거기에는 행복한 기억도 괴로운 기억도 존재한다. 그의 이야기를 듣노라면 행복했던 순간보다도 고통스러운 사랑의 흔적으로 사람들과 거리를 둔 채 고독하게 지낸 한 남자의 인생이 보인다. 그의 사랑을 받았던 존재 수전은 더 말할 것도 없다. 그럼에도 그는 그 단 하나의 이야기를 구구절절 말한다. 폴처럼 대부분의 많은 사람들은 사랑에 빠진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어 한다. 사랑이 끝난 뒤라면 더욱 그렇다. 비탄에 잠겨 자기의 역사, 이제 끝나버린 어느 사랑 이야기를 들려주기를, 그 생생한 고통을 누군가와 함께 나누기를 바란다. ‘자신의 이야기에, 그것이 식어버린 뒤에도 오랫동안, 집착하는 것’이다. 끝이 좋지 않아서 ‘나쁜 사랑’일 수밖에 없는 그 사랑에도 여전히 좋은 사랑의 잔재, 기억은 포함된다. 수전을 기억하는 폴이 그러하듯이 말이다. 처음부터 완벽하게 ‘나쁜 사랑’은 존재할 수가 없다. 그렇지 않은가? 


사랑은 아주 다양한 방식으로 한 사람의 삶에 자국을 남긴다. 좋은 쪽에 남기기도 하고, 나쁜 쪽에 남기기도 한다. 하나의 사랑 이야기를 간직한 사람도 있을 테고 저마다 개별의 하나하나의 사랑 이야기를 여러 개 간직한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 사랑이 이어져 하나의 삶이 된다. 아내를 더없이 증오에 찬 눈으로 쏘아보던 남자. 그 남자에게도, 그 여자에게도 분명, 사랑은 있었을 것이다. 서로 지독하게 따분해하는 것을 넘어서서 극도로 증오하는 듯한 한 쌍. 그들에게 공통점이 있을 거라고는, 그들이 아직도 함께 사는 확실한 이유가 있을 거라고는 상상할 수도 없는 한 쌍. 그러나 ‘그들이 함께 사는 건 단지 습관이나 자기만족이나 관습이나 그런 것 때문이 아니’다 ‘한때, 그들에게 사랑 이야기가 있었기 때문’(75~76쪽)이다. 그리고 이런 사랑이야기는 모두에게 곧 단 하나의 사랑 이야기이자, 단 하나의 인생 이야기이다. 


처음에는 폴이라는, 그리 호감 가지 않는 인물이 들려주는 사랑 이야기에, 팔짱을 낀 채 조금은 관조적인 자세로 책을 읽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가슴이 저려왔다. 폴이 늙고, 수전은 더 늙고, 그들의 사랑이 어긋나기 시작한 무렵이었을 것이다. 찬란했던 사랑이, 자신들은 틀림없이 영원하리라고 믿었던 그 사랑이 뒤틀리는 순간. 그래서 특별함을 잃어버리고 그저 그렇고 그런, 흔한 사랑이 되는 순간이었을 것이다. 모든 사랑은 끝이 있다는 참혹한 진실을 알려주는 순간이었을 것이다. 그때 나는 쓸쓸하고도 비통했다. 사랑이 그렇듯 사랑을 하는 모든 사람들의 삶 또한 그렇기 때문이다. 찬란하리라고, 나의 사랑과 삶만큼은 타인과 다를 것이라고 믿고 살아가지만 진실은 친절하지 않다. 어떤 식으로든 연인들은 시간의 밖에 있다는 망상에서 깨어나야 할 때가 오듯이, 인생 또한 그렇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다 닳아버린 세대’가 될 즈음에 그런 깨달음은 더 깊게 다가온다. 그럼에도 폴과 수전은 사랑했고, 사람들 또한 사랑할 것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사랑 때문에 행복하거나 또는 괴롭거나 할 것이다. 나와 너의 기억이 어떻게 다르든 모든 연인은 진실을 말하며, 사랑과 진실은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사랑 속에 사는 것은 진실 속에 사는 것’(243쪽)이기에 멈추지 않고 사랑하고 살아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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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0-18 11: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10-18 12: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환상의 밤 슈테판 츠바이크 소설 시리즈 1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원당희 옮김 / 세창출판사(세창미디어)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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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테판 츠바이크는 단 한 번도 실망시킨 적이 없다. 이번에 읽은 <환상의 밤> 또한 그렇다. 대개의 츠바이크 작품이 그러하듯이 책을 손에 잡으면 멈추지 않고 읽게 된다. 너무 짧아서 아쉬울 정도이다. 이 작품은 불감증에 걸린 한 사나이가 ‘환상적인 밤’을 보낸 뒤로 어떻게 달라지는지를 밀도 있게 그려 나간다. 불감증에 걸린 남자와 환상의 밤이라? 이런 조합만으로도 당신의 머릿속에는 어떤 이미지가 그려질 것이다. 그러나 당신의 그런 상상을, 츠바이크는 그리 호락호락하게 허락하지 않는다.


주인공인 ‘나’는 교양 넘치는 고상한 시민이자 부자이다. 그는 인구 백만이 넘는 화려한 도시에서 최상류 인사들과 가깝게 교제하면서 남부러울 것 없이 지낸다. 연애기술도 탁월한 편이라 그다지 노력을 기울이지 않고도 여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으며 그야말로 무엇 하나 부족함 없는 생활을 한다. 잘 고른 넥타이, 좋은 책이나 자동차 여행, 카페에서 여성과 대화하는 한 시간에서 행복감을 찾을 줄 아는 사람. 삶을 누릴 줄 아는 진정한 ‘향유자’이자 세련된 멋을 아는 남자. 그는 ‘구김살이라고는 전혀 없는 마치 영국식 신사복처럼 사교계에서 완벽해 보이는’ 자신의 생활양식에 몰입해 있다.

그런데 무엇이 문제일까? 이 남부러울 것 없는 남자, 삶을 즐길 줄도 알고 행복도 느낄 줄 알던 이 남자에게 과연 무엇이 문제였을까? 어느 날 그는 미칠 듯한 공허감, 무력감, 권태에 빠진 자신을 발견한다. 자기의 내부는 ‘모든 물체를 반사할 따름인 유리알처럼 공허’하다는 생각만 든다. 삶이 지나치게 윤택하고, 고통도 고난도 없을 때, 보통의 많은 이들이 그러하듯이 ‘권태’ 그 자체에 빠져버린 것이다. 츠바이크는 이런 상태를 정확히 묘사한다. ‘삶의 모든 요구를 운명적인 것으로 받아들여 그 이상의 어떤 것도 시도하거나 쟁취하려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야말로 이미 긴장과 감정의 결핍, 삶 자체가 무기력함을 배태하고 있었던 것’(13쪽)이라고.


나라는 인간은 물속으로 침투되지 못하고 반사되기만 하는 빛처럼 표면적인 삶만을 살아왔던 것이다. 이런 무감동은 부패의 고약한 냄새조차 맡지 못하고 죽어 있는 상태, 무섭게 얼어붙은 감각 불능의 상태, 실제적인 육체의 소멸 단계에 이르러 있었다. (17쪽)

다른 사람들이 청춘이라고 칭하는 시절은 이미 나의 마음속에서 흘러가 버렸다. 그러나 청춘과의 이별이란 나에게 유별나게 서글픈 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나는 내 자신의 청춘 역시 별로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19쪽)


이런 그에게도 희망이 있을까? 그는 어렴풋하게나마 마음속으로 그 자신이 명예심이나 만족감에 안주하지 않기를 바라면서 강렬한 삶을 갈망하고 있음을 느낀다. 그리하여 우연히 찾은 경마장. 흥분과 광기, 열광, 또는 아쉬움과 비탄에 잠긴 사람들…. 경마장의 사람들은 하나같이 모두 눈에 불을 켠 채 무언가에 몰두하고 있다. 그런데 그는 이곳에서조차 동화되지 못하고 사람들을 냉정한 눈으로 관찰할 뿐이다. 흥에 취한 사람들을 지켜보면서 그들이 우스꽝스럽고 섬뜩하다고 여긴다. 심지어 ‘터무니없는 행동의 가소로움이나 발작과도 같은 비천함’에 참을 수 없는 모멸감을 느끼기도 한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흥분과 광기, 열광에 내재한 그 어떤 생명력에 미묘한 동경을 느끼기도 한다.

그는 과연 이 권태의 늪, 무엇에도 감동할 줄 모르는 생활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경마장의 뜨거운 열기도 그를 어찌하지는 못한다. 그저 이렇게 우스꽝스러운 인간들을 지켜보다가 돌아가야만 하는가? 자리를 뜨려고 하는 찰나- 뒤에서 한 여인의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그는 그 여인이 어떤 유형일지 온갖 상상의 나래를 편다. 상상은 꽤 자극적이다. 돌아볼까 말까? 호기심에 고개를 돌리는 그. 눈앞에 나타난 여인은 그의 상상과는 사뭇 다르다. 그럼에도 꽤 관능적이다. 여인은 어느 장교를 희롱 중인데, 그의 시선도 즐길 만큼 대범하다. 그녀와 눈싸움 아니, 기 싸움을 벌이는 그. 이 놀이가 은근히 즐겁다. 

장교와 사귀는 사이인가 싶은데 난데없이 비속하기 그지없는 뚱뚱한 사내가 나타난다. 그녀의 남편이다. 경마에 빠진 남편과 함께 경마장을 찾은 여자는 그 와중에도 다른 남자를 유혹하고 있던 것이다. 이 기묘한 부부와의 만남은 뜻하지 않은 사건으로 그를 몰아간다. 환상의 밤이 그에게 펼쳐진다. 어떤 일이 벌어질까? ‘경마에 빠진 남편과 관능적이고 방탕하기 짝이 없는 아내. 이런 부부와의 만남과 환상의 밤이라? 흠. 그렇고 그렇겠군.’ 생각하겠지만 무엇을 상상하든 당신의 상상대로 흘러가지는 않을 것이다.

이 작품을 읽은 뒤 문득, 중학교 때 한 사건이 떠올랐다. 어느 오후, 학교가 끝난 뒤 친구와 함께 집에 가던 길이었다. 슈퍼마켓 가판대에 놓인 바나나 한 무더기가 눈에 들어왔다. 나는 무엇에라도 홀린 듯, 그것을 훔쳐보기로 마음먹었다. 친구에게 무작정 “뛰라고 하면 뛰어” 말했다. 이윽고 나는 바나나를 들고 뛰었다. 친구도 뛰었다. 어느 골목에 이르러 친구와 나는 숨을 돌리면서 깔깔대고 웃었다. 바나나는 친구에게 모두 줘버렸다. 나는 바나나를 좋아하지 않았다. 친구는 “먹고 싶지도 않은 걸 왜 훔쳤어?” 물었지만 나는 그냥이라는 말만 했다. 훔친 이유는 없었지만 바나나를 들고 달리던 순간만큼은 그 어느 때보다 심장이 세차게 뛰었다. 단지 달리고 있어서가 아니다. 훔쳤다는 사실. 얌전한 모범생이었던 내가 금기를 깼다는 사실에 흥분하고 열광했던 것이다. 그때 나는 심심했을까? 그저 중2병이었을까?

슈테판 츠바이크의 <환상의 밤>은 이런 인간의 심리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규율과 질서를 존중하던 도덕적인 시민이 어떤 사건을 계기로 새로운 자신을 자각한다. 그의 냉담한 표면의 바닥 어딘가에는 여전히 뜨거운 열정의 샘물이 흐르고 있었고, 그것은 ‘우연’이라는 마법의 지팡이에 이끌려 그의 심장 위까지 치밀어 오른다. 완전히 죽어버린 줄만 알았던 그의 내부에 세속적인 삶의 비밀스런 활화산이 여전히 타오르고 있었음을 깨닫게 된다. 그때까지 그가 그토록 무감동하고 권태로운 삶을 살았던 것은 ‘사회적 망상, 소위 젠틀맨의 오만함에 의해 불구화되고 유린되었던 것’임을 깨닫는다.

그는 '그 일'을 계기로 자신의 비참함의 가장 깊은 곳, 그 맨 밑바닥까지 내려가게 된다. 거기서 ‘상황이 가져다 준 소름끼치는 굴종’을 마음껏 즐긴다. 생전 처음으로 야생적이고 충동적인 것, 비천한 것 속에서 그 자신과의 친밀성을 느낀다. 그리하여 ‘실종자나 다름’없었던 그는 ‘온전하고 무한한 세계의 문을 열고 그 안에 깊숙이 들어가’ 있게 된다. 그리고 마침내 무디고 미온적이며 공허했던 자신의 과거를 참회하기에 이른다. 그에게는 과연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인간의 마음을 그 어떤 이보다 날카롭게 꿰뚫어볼 줄 알았던 츠바이크는 이 짧은 작품 안에서도 권태와 무기력에 빠진 인간, 그리고 그런 인간이 어떻게 다시 그 무력감에서 벗어나게 되는지를 세밀하게 뒤쫓는다. 인간의 모순과 결점을 너무나도 잘 알았던 츠바이크였지만 그래도 인간에게서 희망을 놓지 않았던 것 같다. 그래서 그런지 이 작품의 마지막 문장은 마음을 울린다. 슈테판 츠바이크답다는 생각을 하면서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아마 누구라도, 이 책을 끝까지 읽은 사람이라면 나와 같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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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망스 세계문학의 숲 52
스탕달 지음, 임미경 옮김 / 시공사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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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받기를 간절히 바라면서도 스스로 사랑하기를 금지한 사람이 있을까? 스탕달의 <아르망스>에는 그런 인물이 등장한다. 주인공 ‘옥타브’가 바로 그렇다. 이제 스물인 이 청년은 아름다운 외모에 독특한 언행과 남다른 분위기, 귀족 신분 등 그 어느 하나 남에게 뒤질 것 없는, 치명적인 매력까지 겸비한 인물이다. 오직 하나 흠이 있었다면 귀족임에도 부유하지 못하다는 점인데, 그 마저도 운 좋게 해결되어 200만 프랑을 손에 넣을 희망이 생긴다. 그리하여 옥타브는 말 그대로 사교계의 ‘꽃’이 된다.

옥타브를 사교계에서 유독 빛나보이게 하는 그 남다른 분위기는 그의 독특한 성격에서 비롯된다. 그의 부모가 걱정하듯이 옥타브에게는 ‘우울증’ 증세가 심각한 것이다. 염세적이고 그 무엇에도 쉽사리 만족하지 못하고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삐딱하게 보는 시선. 때문에 옥타브는 세속적 삶을 떠나 신에게 자신의 생을 바칠 생각을 하기도 하고, 독서에 몰두하는 등 세상의 일에는 초연한 태도이다. 그의 아버지는 아들의 공부 병이 또다시 도질까 봐 걱정하며 그저 옥타브를 하루 빨리 결혼시키고자 한다. 이제 200만 프랑이라는 재산도 생길 터이므로 아들은 남부러울 것 없는 혼사를 치를 수 있다. 과연 옥타브의 삶은 아버지 뜻대로 흘러갈까?

안타깝게도 그리 될 것 같지는 않다. 옥타브는 사교계의 속물스러움과 천박함에 진저리를 친다. 내로라하는 집안 출신들이 모인 사교계에서도 드러내놓고 금전을 숭배하는 행태를 ‘오 인간이란 얼마나 비천한지!’ 외치며 자기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기도 한다. 그가 보기에 ‘어디를 둘러봐도 천박함뿐’이며 거기에 맞서려면 영혼이 아름다운 사람을 찾아내는 방법밖에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런 옥타브는 우연히, 사촌누이인 ‘아르망스’가 그녀의 친구와 나누는 대화를 듣게 된다. “할 수 없지 뭐. 그이도 다른 사람들과 똑같은걸! 나는 그이가 훌륭한 심정을 지녔다고 생각했어. 그런데 200만 프랑을 손에 넣을 희망이 생기자 사람이 바뀌고 말았어!”(61쪽) 아르망스의 이 말은 벼락처럼 옥타브 위로 떨어진다. 모두가 돈을 숭배하는 세상에서 돈을 경멸하는 여자, 가난하고 기댈 곳 없는 처지임에도 돈을 숭배하지 않는 여자. 옥타브는 그녀를 자신이 존경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되고 서서히 관심을 갖게 된다. 사실 아르망스는 오래전부터 옥타브를 마음에 두고 있었다. 그런데 부자가 된 옥타브가 사람이 변했다고 생각하면서 그에게 실망하던 참이었다. 옥타브는 이 모든 오해를 풀기 위해, 아르망스에게 다시 존중받기 위해 온갖 애를 쓴다.

이런 과정을 지켜보노라면 이 둘의 우정을 빙자한 사랑은 곧 옥신각신하다가 이루어질 것 같다. 아, 그런데 옥타브와 아르망스 이 두 연인의 사랑은 어딘가 묘한 구석이 있다. 특히 옥타브가 그러하다. 그는 스스로 ‘절대 사랑에 빠지지 않겠노라’고 맹세한 인물이다. 아르망스에게 자기도 모르게 관심이 가고 그녀의 모든 행동 하나하나에 온 신경을 모으고 전율하면서도 그것이 사랑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저 깊은 우정, 존중하고 존중받는 관계,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믿고 의지할 수 있는 그런 존재라고 생각한다. 아니, 그렇게 믿고 싶어 한다. 아르망스는 아르망스대로 답답하다. 옥타브를 그토록 사랑하면서도 가난한 자신이, ‘처지에 비해 지나치게 부유한 사람과 결혼한다는 비난을 무릅쓰고 싶지’ 않아서, 심지어 옥타브 또한 그런 의심을 할까봐 그와 결혼하기를 거부한다. 그저 ‘우정’이라는 이름으로 옥타브 곁에서 그를 오래 지켜봐야 한다고 번번이 다짐한다.

이렇듯 스탕달의 <아르망스>는 그 누구보다 서로에게 사랑받기를 갈망하면서도 스스로 사랑을 금지한 대책 없는 두 연인의 밀당을 숨 가쁘게 그려나간다. ‘밀당’이라고 표현하기는 했지만 이 밀당은 계산된 것이 아니다. 두 사람이 각자 자신에게 부과한 ‘절대 상대를 사랑해서는 안 되는 이유’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비롯되는 일이다. 이 책을 읽다 보면 몹시 궁금해진다. 아르망스야 자신의 처지 때문에 옥타브를 거부한다고 해도, 옥타브는 왜 스스로 사랑을 금지했을까? 그 어린 나이에 무엇 때문에 ‘결코 사랑에 빠지지 않겠다는 맹세’를 하게 된 것일까? 그 ‘비밀’이 궁금해서라도 이 책은 페이지가 술술 넘어간다.

첫 작품 <아르망스>를 써내기 이전에 일찍이 <연애론 De l'amour>을 썼던 스탕달. 묘비명이 ‘살았노라. 썼노라. 사랑했노라’였던 만큼 스탕달은 연애의 달인이었다. 아니, 달인이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끊임없이 누군가를 사랑하고 사랑받고자 했다. 그런 그의 사랑에 대한 생각이 <아르망스>에는 고스란히 담겨 있는 듯하다. 옥타브와 아르망스를 지켜보노라면 사랑의 여러 속성을 볼 수 있다. 옥타브는 사랑에 빠지지 않겠노라고 결심했지만, 사랑이 어찌 그리 마음대로 되는가. ‘인간의 능력을 넘어서는 과제를 스스로 짊어진 셈’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끊임없이 불행했다. 그 가혹했던 시간을 뒤로 하고 드디어 한 사람을 찾아낸 그. 옥타브는 ‘사랑에 빠진’ 자신을 발견한다. 냉소적이고 삐딱하게만 보이던 세상이 달라 보인다. 이런 경험은 사랑을 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겪어보지 않았을까?


옥타브가 느끼는 행복감이 커질수록 그의 정신도 한층 더 명민해졌다. 그동안 알아차리지 못하고 무심히 지나쳤던 많은 것들이 눈에 들어온다는 사실이다. 그 세계의 가증스러운 모습이 좀 더 참을 만해 보였고, 무엇보다 그 세계가 자신을 향해 내보이던 적대감을 누그러뜨린 듯이 느껴졌다. 결국 그가 깨달은 사실은 이 세상이 ‘그를 겨냥해서’ 적대감을 퍼붓는다는 생각이 그 자신의 오만이라는 점이었다.(<아르망스>, 121쪽)

‘내가 있는 이곳이 인간의 사막’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그러기는커녕 이름은 모르지만 절친한 친구가 스무 명은 있는 느낌이었다.’ (<아르망스>, 127쪽)


사랑하는 자신을 최초로 발견한 그에게는 온 세계가 달라 보이고, 모든 것의 의미가 남다르게 다가온다. 그런데 인간의 마음은 참으로 간사하기에 이 사랑이 완전한 것일까? 의심하고 의혹에 쌓이고 때로는 질투에 눈이 멀기도 한다. 옥타브와 아르망스 또한 이 유혹에서 자유롭지는 못하다. 젊기에 어쩌면 심하게 흔들린다. 옥타브는 아르망스가 자신을 좋아하는 것은 자기에 대한 환상에 빠져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기도 하고, 비밀을 솔직하게 털어놓으면 자신을 동정할 것이라고 믿는다. 한편 아르망스는 사교계 사람들이 옥타브에 대한 자신의 감정이 가짜라고 의심할 것이라며 전전긍긍하기도 하고 평범한 결혼 생활로 사랑이 식어가는 것을 지켜보는 일은 고통이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옥타브가 나를 계속 아껴준다고 할지라도, 그가 내 마음을 의심하지 않을까. 내가 재산을 보고 그를 택했다고 생각하는 게 아닐까’하며 행복을 지키기 위해서는 절대로 청혼을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고 갈팡질팡한다.

옥타브와 아르망스를 지켜보노라면 비록 그 모습은 똑같지 않을지라도 누군가를 알게 되고, 사랑에 빠지고, 그 감정을 인지하고, 서로 마음을 확인하고 최고의 행복감을 맛보고, 그 뒤에 의심과 불안과 질투와 불안에 싸이고 등등 사랑이 전하는 온갖 감정을 느낄 수 있다. 아마도 연애에 일가견이 있던 스탕달 그 자신이 사랑에서 느낀 다양한 감정들을 여과 없이 인물들에게 투영했기 때문은 아닐까. <아르망스>는 중간 중간 드러나는 사랑에 대한 스탕달의 생각을 엿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더없이 행복한 사랑일지라도 폭풍우가 몰아치는 날은 있는 법이다. 사랑은 그 행복만큼이나 고통으로도 생명을 유지한다고 할 수 있다. (<아르망스>, 119쪽)

인생의 정수는 가슴으로 느끼는 감정에 있으며, 사랑은 숭고한 만큼 숭고하지 못한 모든 것을 잊게 해주는 터라, 우리는 긴 세월 속에서보다 단 얼마간의 순간 속에서 더 많은 삶을 살 수 있는 것이다. (<아르망스>, 181쪽)


옥타브를 비롯하여 갈팡질팡 하는 인물들. 그 생생한 캐릭터 때문에도 <아르망스>는 무척 흥미롭다. 옥타브의 모습은 <적과 흑>의 쥘리엥 소렐과도 닮았다. 아름다운 외모에 섬세한 감수성, 남다른 재능, 사회와 일정 거리를 둔 개인, 흔들리기 쉬운 마음과 그로 인해 비극적 연애의 주인공이 된다는 점까지. 스탕달은 옥타브와 쥘리엥 소렐에 이어 <파르마의 수도원>의 파브리스까지 소설사에서 잊기 힘든 강렬한 인물을 창조해냈다. ‘아이구, 이런 연애쟁이!’ 하면서 계속 스탕달의 작품을 읽게 만드는 힘은 무엇보다 이런 생생한 인물에 있을 것이다.

사실 <아르망스>는 별 다섯 개를 주고 싶었는데, 결국 하나 뺄 수밖에 없었다. 옥타브의 ‘치명적 비밀’ 때문이다. 대체 그는 왜 사랑하기를 스스로 거부했나? 그 비밀이 무엇이기에? 궁금증 때문에 미친 듯이 책장을 넘겼는데, 비밀은 끝끝내 작품 안에서는 밝혀지지 않는다. 이 허무함이란! 물론 작품 해설에서 그 비밀이 밝혀지기는 한다. 스탕달이 친구인 작가 메리메(Mérimée)에게 보낸 편지에 근거를 두고 옥타브의 비밀은 ‘이것’이라고 밝히는데……. 글쎄. 작품 안에서 독자가 직접 유추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면 더 좋았을 걸 하는 아쉬움이 여전히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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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18-10-10 14: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흠. 마지막 문단은 그냥 빼고 넘어가시지, 책을 꼭 읽어보게 만드시네요. ^^

잠자냥 2018-10-10 14:46   좋아요 1 | URL
ㅎㅎ 비밀이 밝혀지지 않는다는 것까지 밝히지 않으려고 했었는데요. 별 한 개 뺀 이유를 말하려다 보니 ㅎㅎㅎ
(만일 이 책 읽으실 계획이라면 온라인에 있는 책 소개도 보지 마세요!)

Falstaff 2018-10-10 15:44   좋아요 0 | URL
옙. 저 이런 정보도 무지 좋아합니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