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그대를 잊으면 - 트루먼 커포티 미발표 초기 소설집
트루먼 커포티 지음, 박현주 옮김 / 시공사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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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가운 벽>, <티파니에서 아침을>, <인 콜드 블러드>, <다른 목소리, 다른 방>, <풀잎 하프>..... 카포티의 작품을 하나 읽어나가고, 마침내 국내에 소개된 그의 작품을 다 읽었을 때는 무척 아쉬웠다. 안타까웠다. 그는 이미 죽었고, 이 땅에 알려진 카포티의 작품은 다 읽은 셈이나 마찬가지였으므로. 좋아하는 작가의 작품을 모조리 읽어치웠을 때는 뿌듯한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헛헛함이랄까, 아쉬운 마음이 더 크다. 물론 그럴 때는 그의 작품을 처음부터 다시 읽어도 좋다. 그렇지만 새로운 작품을 읽는 재미에 어떻게 비교할 수 있으랴.

카포티의 신간 알림 메일이 날아왔을 때는 조금 놀랬다. 반신반의했다. 비슷한 작품을 우려먹는 책이 아닌가 싶었다. 그런데 이 책, <내가 그대를 잊으면>은 그렇지 않았다. 그의 죽음 뒤 30년 만에 발견된 카포티 미발표 유고집이란다. ‘미발표’ 이 세 글자에 눈이 돌아간다. 내가 읽은 적이 없는 작품이다. 심지어 그가 10대 시절에 쓴 작품이라고 한다. 심장이 뛰지 않을 수 없다. 카포티의 작품을 좋아하는 이들이라면 이 소식을 듣고 모두 나와 같은 심정이지 않았을까?

이 작품들은 대체 어디서 발견된 것일까 궁금하다. 아니,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뉴욕도서관에서(그렇다, 영화 <뉴욕라이브러리에서>의 주인공인 그 뉴욕도서관!) 발견되었다는 게 아닌가! 나는 영화를 본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이 문구를 발견했던 터라 그 사실이 더욱 남다르게 다가왔다. ‘역시 도서관이군!’ 그렇다면 뉴욕도서관에서는 어떻게 발견한 것일까? 뉴욕공립도서관에는 트루먼 카포티 저장고가 있다고 한다. 한 편집자와 기자가 카포티의 마지막 유작인 <응답받은 기도>의 나머지 부분을 찾던 중 이 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던 그의 미발표 초기 단편들을 ‘우연히’ 발견한 것이다. ‘차가운 벽’이나 ‘미리엄’은 10대 시절에 쓰였고, 카포티는 청소년 시절부터 단편을 쓰면 꾸준히 잡지사에 투고했다고 한다. 때문에 10대 시절에 쓰인 작품이 더 있으리라고 예상 가능했고, 그런 예상에서 출발, 마침내 찾아낸 이 원고들은 사람들의 눈길을 끌고도 남을 만했다.

<내가 그대를 잊으면>에는 카포티가 열네 살부터 열일곱 살 무렵에 쓴 단편 14편이 실려 있다. 첫 작품 ‘길이 갈라지는 자리’를 읽을 때부터 나는 미소 짓는다. 카포티 작품답다. 두 부랑자가 어딘가를 향하고 있다. 소년인 ‘팀’과 어른 ‘제이크’. 이렇다 할 집도 절도 없는, 가정 바깥으로 몰린 소년과 사회에서 자리 잡지 못한 소외된 어른의 조합. 카포티 작품에서 곧잘 볼 수 있는 인물 유형이다. 이 두 사람은 굶주림에 지쳤고 행색도 말이 아니다. 그나마 다행이랄까 소년은 집으로, 엄마가 계신 곳으로 돌아가는 길이다. 엄마에게 자신이 벌었다고 자랑스럽게 내보일 돈은 무엇보다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다. 다만 자기 옆에 있는, 이 아저씨가 조금 의심스럽다. 자꾸만 자기 돈을 노리는 것 같다. 그런데 아뿔사, 정말로 돈이 사라지고 만다. 팀은 돈을 잃어버린 채 집에 갈 수 없다고, 이 꼴로 엄마를 볼 수는 없다면서 길길이 날뛴다. 제이크에게 훔친 돈을 내놓으라고 울부짖는다. 둘 사이에 희미하게 존재하던 떠돌이로서의 유대감마저 완전히 끊어질 듯하다. 정말로 제이크는 팀의 돈을 훔쳤을까?

이렇게 이야기하면 얼마쯤 스포일러를 하는 셈이나 마찬가지인데, 이 작품 끝부분에 이르렀을 즈음에는 카포티답다는 생각을 하면서 미소 지을 수 있었다. ‘길이 갈라지는 자리’는 카포티의 다른 작품에서 곧잘 볼 수 있는, 소외받은 이들끼리의 연대나 우정을 엿볼 수 있다. 무엇보다 부모 없는 아이에게 일종의 버팀목 역할을 해주는 어른이 존재한다. 물론 그렇다고 그 어른의 상황이 딱히 좋은 것은 아니다. 대개 그 또한 가난하고 외톨이며, 사회에서 외면 받는 존재이다. 마치 카포티의 다정한 숙모였던 ‘숙 포크’양처럼 말이다. 어린 시절, 부모의 이혼 뒤 외톨이로 지냈던 카포티는 ‘숙’ 숙모 같은 어른들 때문에 그나마 삶의 위로를 받을 수 있었고, 그 따스한 영향은 작품 곳곳에서 묻어난다. ‘길이 갈라지는 자리’는 그런 카포티 세계의 원형과도 같은 작품이다. 다음 작품인 ‘밀 스토어’ 또한 그렇다. 위험에 처한 아이와 그 아이를 위해 선뜻 구원의 손길을 내미는 어른의 이야기.

10대에 쓴 작품들이라 그런지 또래 이야기도 많다. ‘이것은 제이미를 위한 거예요’의 테디는 카포티의 또 다른 모습으로도 보인다. 테디의 부모는 자기들만의 생활에 빠져 아이에게 진심으로 관심이 없다. 그것은 유모 또한 마찬가지이다. 그런 테디는 공원에서 뜻밖의 행복을 발견하게 된다. 마법처럼 나타난 개 한 마리는 소년의 외로움을 계속 달래줄 수 있을까? 탈옥수에 대한 호기심 때문에 숲 속으로 들어가는 소년이 주인공이 되기도 하며(‘늪의 공포’), 수업 시간에 집중하지 못한 채 자기만의 공상에 빠져드는 10대 소녀 이야기인 ‘세계가 시작되는 곳’ 또한 카포티의 어린 시절의 한 모습이 아닐까 싶어 슬며시 웃음 짓게 된다. 때로는 자기도 제어할 수 없는 도벽을 지닌 소녀가 등장하기도 하고(‘힐다’), 고향을 떠나 도시로 가는 청년을 사랑하는 젊은 아가씨가 주인공이 되기도 하다(‘내가 그대를 잊으면’). 이 작품은 남루한 현실 속에서도 사랑의 환상이나 낭만을 꿈꾸는 아가씨가 등장한다는 점에서 <티파니에서 아침을>이 떠오르기도 한다.

<내가 그대를 잊으면>의 이 어린 작가는 그때부터 세상과 떨어져 사는 이방인들, 소외받고 힘없는 약자들을 연민어린 눈으로 바라볼 줄 알았다. 마을의 놀림거리이자 기피 대상인 노파 벨 랜킨 양을 향한 따뜻한 시선이 인상적인 ‘벨 랜킨 양’은 종종 보이는 아름다운 문장도 돋보인다. ‘바깥에서는 오래된 굴뚝에서 솟아오른 연기가 나른하게 구불거리는 구름이 되어 오르다 마치 얼어붙은 것처럼 푸른 안개에 잠긴 집 위에 걸렸다.’(58쪽)와 같은 문장들……. 차곡차곡 썼다 지웠다를 반복하면서 문장에 고심하는 소년 카포티의 모습이 떠오른다. 백인 소년과 남부 출신 흑인 요리사 '루시'와의 짧은 우정을 그린 작품 '루시' 또한 그렇다. 소년은 루시와 헤어지는 순간에 그녀에게 선물을 건넨다. 사탕 한 상자, 루시가 가장 좋아하는 간식인 초콜릿을 씌운 버찌, 그리고 잡지 한 묶음. 소년의 따뜻한 마음이 고스란히 내게도 전해지는 느낌이다. 이 작품 속 루시는 건강하고 밝고 생명력이 넘친다. 비록 소외된 계급이지만 카포티는 그런 이들을 그저 동정의 대상이 아닌, 생명력을 지닌 활기찬 존재로 그리고 있다. 이렇듯 <내가 그대를 잊으면>은 주변인들을 보듬고 그들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끌어내는, 한 천재 작가가 어떻게 서서히 영글어갔는지를 생생하게 엿볼 수 있다.

카포티는 열한 살 무렵에 ‘진지하게 글을 쓰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는 매일 학교에서 집으로 와 세 시간 동안 글을 썼다. <내가 그대를 잊으면>을 읽으면 그의 말이 결코 거짓이 아님을 확인할 수 있다. 물론, 이 작품집을 읽노라면 그의 대표 단편집인 <차가운 벽>에는 미치지 못하는 설익은 듯한, 어딘가 어설픈 느낌을 받게 된다. 당연하다. 그럼에도 감탄하게 된다. 한편으로는 ‘열폭’하기도 한다. ‘이런 작품을 열 몇 살에 썼단 말이야?’ ‘역시 난 안 돼!’ 마음속으로 절규한다. <내가 그대를 잊으면>은 풋풋하다. 싱그럽다. 섬세하다. 외롭고 쓸쓸하면서도 아름답다. 따뜻하다. <차가운 벽>의 카포티는 <내가 그대를 잊으면>을 쓸 때의 카포티와 세상을 보는 시선, 또 그걸 표현하는 면에서는 크게 차이가 없다. 단지 기술적으로 크게 향상되었다고나 할까. 아마도 그가 10대 시절부터 날마다 진지하게 글을 썼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일 것이다. <내가 그대를 잊으면>은 그가 그렇게 빼어난 작가가 되는 과정을 고스란히 엿볼 수 있다. 카포티에 대한 애정과 열 몇 살에 이런 작품들을 썼다는 점에서 내게 이 책은 아낌없이 별 다섯 개짜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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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나무 2018-11-01 10:3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몇 년 전 카포티 전집을 친구 생일선물로 선물한 적이 있어요.
선물부터 하고 내 것은 이후에 장만하자 였는데 여지껏 장만을 못하고 있었고, 그리고 카포티를 깜빡 잊고 있었지 뭐에요. ㅎㅎㅎ;;
저도 신간이라고 했을때 좀 의아했는데 카포티가 10대에 쓴 소설이라니! 저 역시 열폭과 절규를 오가게 될까봐 읽기가 두려워지긴 하지만 그래도 반가운 신간이 아닐 수 없네요! ^^

잠자냥 2018-11-01 10:39   좋아요 1 | URL
저는 그 전집 출간되었을 때 이미 카포티 책은 다 갖고 있어서 ㅠㅠ 전집을 구매하지는 않았거든요. 그런데 그게 품절되고 나니 괜히 아쉽더라는...ㅎㅎㅎ
10대에 이런 작품을 쓰다니 정말 열폭입니다. 하하하.

카알벨루치 2018-11-01 11: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0대 쓴 글에도 열광하시다니 카포티가 대단한 작가인가 봅니다 저도 발을 들여놓아야겠네요! ㅎ

잠자냥 2018-11-01 11:06   좋아요 2 | URL
ㅎㅎ 그런데 이 책은 제가 카포티를 좋아하기 때문에 지극히 주관적인 애정으로 별 다섯 개를 준 것이라... 만일 카포티를 입문하시려고 한다면 그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인 콜드 블러드>나 <차가운 벽>을 먼저 읽으시기를 추천합니다.

카알벨루치 2018-11-01 11:08   좋아요 1 | URL
입력완료 장바구니 담기 끝! 잠자냥님 감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