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를 심은 사람 - 개정2판
장 지오노 지음, 최수연 그림, 김경온 옮김 / 두레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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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책이 있다. 너무 유명해서 손이 가지 않는 책, 베스트셀러라서 왠지 의심이 가는 책, 제목만으로도 내용이 거의 짐작 가서 딱히 읽어보고 싶은 흥미가 일지 않는 책. 내게 장 지오노의 <나무를 심은 사람>은 이 세 가지 조건을 모두 채운 그런 책이었다. 단편이나 마찬가지인 무척 짧은 분량인데도 위와 같은 이유들 때문에 여태껏 손이 가지 않았다. 무엇보다, <나무를 심은 사람>이라는 제목이 모든 것을 말해주는 것 같아서 선뜻 손이 가지 않은 게 가장 크다. 그렇지 않은가? ‘나무를 심은 사람’이라니. 제목이 모든 내용을 말해준다. 실제로 이 책을 읽으면 몇 장 넘기지 않아도 역시, 짐작이 맞네 하고 생각하게 된다.


그럼에도 이 책을 일 때문에 읽게 되었다. 내가 원했던 것도 아니고, 애초에 관심이 딱히 가지 않았던 책. 그러다 보니 심드렁하게 책장을 넘겼다. 처음에는 정말 그랬다. 마치 이 책의 화자이자 장 지오노 본인이라고 볼 수 있는 ‘나’가 ‘엘제아르 부피에’를 처음 만났을 때만 하더라도 그를 그저 하룻밤 잠자리를 제공해준 평범한 양치기라고 생각했듯이 말이다. 나무를 심은 사람, 내가 아닌 여러 사람을 위해, 묵묵히 나무를 심고 그래서 숲에, 마을에 변화를 불러온 사람 ‘엘제아르 부피에’. 이 작품을 발표하면서 장 지오노가 “나는 사람들로 하여금 나무를 사랑하게 하기 위해, 더 정확히 말하면 나무 심는 것을 장려하기 위해 이글을 썼다”고 밝혔듯이, 처음 이 작품을 읽었을 때는 정말 ‘공동 선(善)을 위해 나무 심은 사람의 훌륭한 이야기로군- 제목이 다 로군’ 하고 책장을 덮었다.


그런데 참 이상하다. 어떤 구절 하나가 뇌리에 콕 박혀서 지워지지 않았다. ‘창조란 꼬리를 물고 새로운 결과를 가져오는 것 같았다. 하지만 엘제아르 부피에는 그런 데에는 관심이 없었다. 아주 단순하게 자신이 할 일을 고집스럽게 해 나갈 뿐이었다.’ (<나무를 심은 사람>,45쪽) 바로 이 구절. 며칠 뒤에 이 책을 다시 읽었다. 그리고 며칠이 지나 또 읽었다. 어느 순간 숭고한 감동이 밀려왔다. ‘엘제아르 부피에’의 삶을 지켜보노라니 살짝 눈물이 맺히기도 한다. 그런데 그 감동은 다른 이들의 그것과는 사뭇 다르다. 내가 감동한 까닭은 그가 여러 사람을 위해 나무를 심었다는 사실 때문이 아니었다. 물론 이 작품은 작가를 비롯해 거의 모든 사람들이 이야기하듯이 황폐한 땅에 나무를 심어 사람과 세상을 변화시킨 한 인간의 숭고함에 관한 글이다.


하지만 정말 엘제아르 부피에가 처음부터 모두를 위해 나무를 심었을까? 이 땅과 지구를 바꾸고 그로 말미암아 사람들을 달라지게 하려고, 그토록 큰 명분을 갖고서 도토리 100개를 고르고 심고, 그러기를 수십 년이나 혼자, 묵묵히 반복했을까? 물론 그랬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런 커다란 명분은 오히려 사람을 쉽게 지치게 만든다. 타인을 위한 일이라면, 그것은 곧 누군가가 알아주기를, 누군가의 응답을 기대하는 일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신이 한 일에 마땅한 응답이나 기대한 반응이 따르지 않으면 곧 지치고 만다.


그런데 나무 심는 행위 자체가 ‘엘제아르 부피’에 그 자신을 위한 일이었다고 생각하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그가 오로지 자신의 즐거움을 위해 행한 일이라면? 자신이 심은 나무들이 모여서 숲을 이루고 그 숲에서 향기로운 바람을 맞는 일이 그저 자기에게 더없이 큰 행복이었다면? 그래서 그 자신의 즐거움과 행복을 위해 묵묵히 날마다 수 십 년을 빠짐없이 그 일을 행해왔다면? 나는 어느 순간, 그가 도토리를 고르고 나무 심는 행위를 글 쓰는 행위에 대입해서 읽고 있었다. 도토리는 단어이며, 나무는 문장이고, 그 나무들이 자라서 일군 숲은 하나의 글이었다. 그 글은 소설이기도 하고, 에세이일 수도 있으며, 한 편의 시이기도 하다. 더 많은 여러 종류의 글일 수도 있다.


글 쓰는 행위나 나무를 심고 가꾸는 행위 모두 고독을 벗으로 삼아야 한다. ‘그 사람은 말이 거의 없었는데, 그것은 고독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특징이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에 차 있고 확신과 자부심을 갖고 있는 사람으로 느껴졌다.’(16쪽) 그러나 고독하되 정갈해야 한다. 실제로 ‘엘제아르 부피에’는 고독을 벗 삼아 살고 있지만 제대로 지어진 집에서 살림살이도 정갈하게 갖추고 살아간다. 혼자이면서도 산뜻하게 면도를 했으며 소박하지만 옷차림은 단정하기 그지없다. 그가 기르는 개조차 ‘주인처럼 조용했으며, 살살대지 않으면서도 상냥하게’ 군다. 이 모든 것이 그가 삶을 제대로 사는 법을 알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고독 속에서 양들과 개와 더불어 한가롭게 사는 것을 기쁨으로 여기고, 딱히 할 일이 없기에 죽어 가는 땅의 상태를 바꾸어 보기 위해 시작한 나무 심기. 그 나무 심기가 자기 자신의 기쁨이자 즐거움이 아니었다면 그토록 흔들림 없이 오래도록 그 일을 할 수 있었을까? 전쟁이 일어나더라도 불안을 느끼지 않고 파괴가 아닌, 창조의 기쁨을 날마다 자기 안에 심은 사람. 나는 엘제아르 부피에를 그렇게 본다.


엘제아르 부피에는 영화 <피아니스트 세이모어의 뉴욕 소네트> 의 세이모어 번스타인을 떠올리게 한다. 그 영화 속에서 인상 깊은 장면 중 하나는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 작은 원룸에서 일어나 침대 겸 소파를 정돈하는 모습이다. 혼자 살면 침대를 접지 않고 그냥 둬도 될 텐데, 그는 굳이 침대를 접어서 소파로 만들어 놓는다. 집안을 말끔하게 정돈하고는 피아노 앞에 앉는다. 그는 그런 생활을 평생토록 이어 온 것이다. 혼자 있지만 언제나 정갈한 주변, 날마다 노트에 기록하는 음표 하나하나, 그리고 그 음들이 만들어 내는 피아노 소리. 그 음표는 엘제아르 부피에의 도토리 한 알 한 알이기도 하고 그 음표와 도토리는 내게 단어 하나하나로 다가온다.


나무 심은 사람 엘제아르 부피에도, 피아니스트 세이모어 번스타인도 내게는 이 덧없는 세상에서 인간이 더 없이 행복하게, 제대로 잘 살다 가는 모습을 온전히 보여주는 인물들이다. 어떤 응답을 바라고서 하는 일이 아니라, 자기의 행복과 즐거움을 위해 묵묵히 걸어간 길. 사람들과 어느 정도 거리를 둔 삶이기에 가능한 마음의 평화. 그런 삶 속에서 인간은 파괴가 아닌, 창조의 아름다움을 터뜨릴 수 있는 게 아닐까. 도토리가 나무가 되고, 숲을 이루듯, 나 또한 단어 하나하나를 심는다. 그 단어가 문장이 되고 숲에서 불어오는 산뜻한 바람 같은 글이 될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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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개츠비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7
F. 스콧 피츠제럴드 지음, 김영하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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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다시 읽게 될 줄은 몰랐다. 국내에 <위대한 개츠비> 번역본은 무수히 많고, F. 스콧 피츠제럴드의 작품도 이러저러한 출판사마다 내놓고 있다. 그런데도 나는 피츠제럴드에 무심했다. 첫인상이 안 좋았기 때문이다. 아주 오래 전 <위대한 개츠비>를 읽었을 때 이 작품에 대한 명성, 이 작품에 쏟아진 찬사에 좀처럼 동의할 수 없었다. 대체 왜? 개츠비라는 인물에도 별다른 매력을 느낄 수 없었고, 지루하기 짝이 없던 로맨스 소설 정도로 평가했다. 다시는 피츠제럴드 작품을 읽는 일은 없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다 소설가 김영하가 피츠제럴드를 번역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조금 솔깃해졌다. 어쩌면 <위대한 개츠비>에 대한 첫인상이 별로였던 이유는 번역이 이상해서는 아니었을까 하는 의혹이 줄곧 들었기 때문이다. 예전에 읽었던 <위대한 개츠비>는 결국 버렸기 때문에 어떤 출판사에서 나왔던 책인지 확인할 길이 없지만 아무래도 ‘번역이 이상했다’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을 듯하다. 왜냐하면 김영하 번역본 <위대한 개츠비>를 읽으며 피츠제럴드 작품의 매력을 뒤늦게 발견했고 그의 다른 작품들도 찾아 읽게 되었기 때문이다.
 
어느 날 서점에서 김영하는 고딩들의 대화를 듣다가 이 작품을 번역하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고딩들이 육두문자를 섞어가며 <위대한 개츠비>를 욕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소설 졸라 재미없다’ 등등 그때 김영하는 <위대한 개츠비>의 변호를 맡기로 마음먹었단다. 그때까지 나온 대부분의 <위대한 개츠비> 번역본에서 닉과 개츠비, 개츠비와 데이지가 서로 존대를 하는 등 한국말의 위계질서 때문에 그 젊은이들의 심정에 독자가 감정이입하기 무척 어려웠다는 생각이 들었다나.
 
실제로 내가 읽은 문학동네 세계문학의 <위대한 개츠비>에서는 닉과 개츠비, 개츠비와 데이지는 서로 반말을 한다. 20대의 그들답다. 닉, 개츠비, 데이지, 데이지의 남편인 톰 등 각 캐릭터의 개성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그러다 보니 이 소설을 이끌어가는 닉과 개츠비, 데이지 인물들을 저마다 이해하기도 훨씬 쉬웠다. 예전에는 이 인물들이 왜 이런 행동을 하는지, 해야만 했는지 이해하기 어려운 구석이 많았는데 이번에 읽은 김영하 번역본으로는 아, 이럴 때 그 또는 그녀는 그럴 수밖에 없었겠다 싶어진다. 외면했던 피츠제럴드에 대한 관심을 살려준 옮긴이에게 고맙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서점에서 개츠비를 욕했던 그런 고딩 중 하나였을 내가 다시 피츠제럴드를 읽고 싶어졌으니 김영하의 ‘변호’는 조금은 성공했다고도 볼 수 있으리라.
 
<위대한 개츠비>는 무척 낭만적이다. 조금은 쓸쓸하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다. 그 슬픔과 쓸쓸함은 이 작품이 한때 전부였으나 어느덧 잃어버린 세계,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세계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개츠비 자신은 이룰 수 있으리라 생각하지만 도저히 이룰 수 없는 꿈, 이미 조각나 버린 꿈이라는 것을 이 작품을 읽고 있는 독자들은 알고 있기 때문에 <위대한 개츠비>를 읽다 보면 낭만적인 분위기 속에서 왠지 모를 아련한 슬픔 같은 것이 전해져 온다.
 
개츠비가 자신의 전부를 걸었던 그 세계, ‘데이지’로 상징되는 그 세계는 정말 과연 그럴 만한 가치가 있던 것일까? 이 책의 제목처럼 ‘위대한’ 개츠비 보다는 이런 바보 같은 녀석, ‘바보 같은 개츠비’라는 생각이 떠나질 않는다. 이것 보라고, 자네가 그렇게 평생을 건 그 여자는 그럴 가치가 없는 사람이라니까! 나도 모르게 중얼거리게 된다.
 
그러나 남들이 보기에 도무지 아닌 사람도 어떤 사람에게는 절대적인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처럼 개츠비에게 데이지는 그런 존재다. 선망하는 동경의 대상이었고, 뜨겁게 사랑한 첫사랑이었고, 가진 것이 없어서 놓아줄 수밖에 없던 사람이었기에 그 아쉬움은 더 컸으리라. 그렇기에 성공하면 가질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그녀이지만 데이지에게 개츠비는 개츠비에게 있어 데이지의 존재 같지는 않았다. 때문에 이 관계는 비극적이다. 평생 데이지만을 사랑했던 자신처럼 데이지 또한 그러리라 믿고 싶었겠지만 데이지는 ‘개츠비도 사랑했고, 그렇다고 톰을 사랑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그런 그녀의 말에도 공감할 수밖에 없다.
 
개츠비는 평생 무모할 정도로 자신의 첫사랑을 간직했다는 점에서 ‘위대’하다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사람이 무언가 한 가지를 그토록 오랜 세월 간직하고 지켜 나가는 일은 그만큼 어려운 일이니까. 그러나 그 세계 때문에 허상 같은 삶을 살다간 그이기에 ‘바보 같은 놈’이라는 생각을 지울 길이 없다. 자신의 죽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도 장례식에 오지도 않는 그런 여자를 끝까지 사랑하다 간 아주 바보 같은 놈. 그래서 <위대한 개츠비>는 안쓰럽고 아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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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이 2018-03-20 13: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잠자냥님! 잘 지내시죠. 여전히 리뷰 꾸준히 올리시고, 저는 또 감사히 잘 보고 있답니다.
저는 이 책... 열린책들 번역본으로 읽었는데, 다 읽고나서 잠자냥님께서 처음에 그러셨던 것 처럼 대체 왜??? 란 생각하며 미묘하게 내 취향이 아니다.. 너무 감상적이다. 너무 낭만적이다.(부정적 의미) 란 생각만 했던 기억이 나요.
나랑은 맞지 않았지만, 다 읽고 나서 이 작품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왜 좋아하는지는 알 것 같긴 했어요.
잠자냥님 리뷰 보니 다시 읽으면 어떨지 궁금하긴 하네요.

잠자냥 2018-03-20 13:25   좋아요 1 | URL
잘 지내시죠? ㅎㅎ 저도 요즘 회사 일이 너무 정신없어서 책을 많이 읽지도 리뷰를 잘 쓰지도 못하고 있는데~ 이렇게 잘 읽고 계시다는 댓글을 읽으면 힘이 나네요. ㅎㅎ 어릴 때 읽었던 것보다는 좋았지만.... 그래도 피츠제럴드는 다른 작품이 더 좋은 것 같아요. 저는... ㅎㅎ 그리고 사실 개츠비도 어떻게 보면 좀 스토커 같기도 ㅋㅋㅋㅋㅋ

케이 2018-03-20 17:1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잠자냥님 다시 생각해보니 열린책들 아니고 민음사 번역본 이예요. 별 거 아닌데 정정하러 왔어요. ㅋ 그리고 저 요즘 루이자 메이 올컷의 가면 뒤에서 (이제서야) 읽는 중인데 너무 재밌어요.!!

잠자냥 2018-03-20 17:21   좋아요 0 | URL
ㅎㅎ 민음사면 김욱동 교수 번역본이 것 같군요- 전 다음에 다시 한 번 읽어본다면 김석희 번역본으로 한 번 더 읽어볼까 싶기도 하지만... 아마 안 읽을 것 같고요. ㅎㅎ <가면 뒤에서> 정말 재밌죠?!!!! 손에 땀이 나는 흥미진진!!
 
방랑기 창비세계문학 41
하야시 후미코 지음, 이애숙 옮김 / 창비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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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따금 중고서점에 가서 책을 판다. 갖고 있어봤자 짐만 될 것 같은 책들을 주로 처분한다. 나는 웬만해서는 책을 팔지 않는데, 그래도 가끔 팔고 싶은 책이 나온다. 대부분은 책을 판매한 돈으로 다시 중고 책방에서 다른 책을 산다. 엄밀한 의미로는 책 교환이 맞는 셈이다. 그런데 며칠 전에는 책을 팔아서 생긴 돈으로 다른 책을 사지 않았다. 중고 서점에서 눈에 띄는 책이 없기도 했지만, 올해 이미 책을 많이 산 터라 그것들을 다 읽을 때까지는 책 사는 것을 자제하려고 마음먹었기 때문이다.

마침 집에 원두가 딱 떨어졌다. 그래서 나는 책을 판 돈으로 원두를 200그램 사고, 여과지도 샀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는 마트에 들러서 이것저것 먹을거리도 샀다. 책 여섯 권과 바꾼 돈 3만 7천 원은 그렇게 순식간에 온전히 먹을거리로 변한 것이다. 뱃속으로 들어갈 것들과 교환해서 집으로 오는 길에 문득 하야시 후미코의 <방랑기>가 떠올랐다. 작품 속 나, 즉 하야시 후미코도 책을 판다. 읽은 책은 거의 되파는 것 같다. 그녀 또한 그렇게 생긴 돈으로 먹을거리를 산다. 나와 다른 점이 있다면, 그녀는 그 음식이 배고픔,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굶주림을 해결하기 위해 사용되고 나는 커피나 맥주, 과일처럼 허기를 채우는 것과는 거리가 먼 품목이다. 기호식품이랄까. 굳이 먹지 않아도 상관없을 그런 것들이다. 그래서 그런 것일까. 내 곁을 떠난 책에도, 맞바꾼 음식에도 크게 특별한 감정이 들지는 않는다.

하야시 후미코는 어떨까? <방랑기>의 그녀는 늘 굶주림과 싸운다. 배고픔이 가장 가까운 친구이다. 글을 써서 근근이 끼니를 이어가지만, 그 돈은 몇 푼 되지 않고, 어머니와 새아버지까지 부양하는 처지다. 저축은커녕 돈이 주머니에서 머물 틈이 없다. 그러기에 그녀는 아주 어린 시절부터 생활 전선에 뛰어든다. 잡일꾼, 사무원, 여공, 카페 여급, 식모 등등 닥치는 대로 일한다. 그러면서 틈틈이 책을 읽고 문학가의 길을 꿈꾸며 글을 쓴다. 그 치열한 기록이 바로 <방랑기>이다.

이 작품을 읽노라면 크누트 함순의 <굶주림>이 자연스레 떠오른다. 함순의 <굶주림> 속 인물, <방랑기>의 인물도 모두 작가 자신을 대변한다. 문학에 대한 열정을 지닌 채, 글쓰기를 멈추지 못하는 주인공들이 모두 배고픔이라는 가장 원초적인 삶의 문제 때문에 한없이 고통받는다. 그리나 <방랑기>의 그녀도 <굶주림>의 그도 생활에, 삶에, 인생에 무릎 꿇지는 않는다. 바로 거기에서 묘한 감동이 일어난다.

<방랑기>의 주인공은 하야시 후미코, 그녀 자신이다. 1920년대 여자 혼자 몸으로 세상 온갖 풍파에 맞선 것이다. 그녀는 앞서 언급한 것처럼 부모 부양의 의무까지 지고 있다. 더욱이 가족들은 그녀가 책상 앞에 앉으면 돈이 저절로 나오는 줄 알고 있으니 그녀로서는 더 미칠 노릇이다. 누군가에게 기대고 싶은 마음이 없는 것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남자에게 기대지도 않는다. 오히려 남자에게 기대는 것을 한심하다고 생각한다. 때로는 카페 여급으로 일한다는 이유만으로 남자한테 두들겨 맞기까지 한다. 그러면서도 자기 밥벌이는 굳건히 해나간다. ‘후지 산이여! 너에게 머리를 숙이지 않는 여자가 홀로 여기 서 있다’ 이렇게 외치며 꿋꿋하게 자신의 길을 추구해나간다. 그 모습에 나도 모르게 응원을 보내게 된다.



내 일은 성냥갑을 붙이는 일이나 재봉틀 부업과는 다르다. 책상 앞에 앉기만 하면 원고가 돈이 된다고 생각하는 가족들에게 지금의 내 심정을 솔직하게 말해봤자 소용도 없다. 차라리 재봉틀 페달을 밟으며 부업을 하는 편이 즐거울지도 모르겠다. (284쪽)

목에 분을 바른 것을 보고 노무라 씨는 정말로 여급답다며 질책한다. 네, 저는 여급이라 어쩔 수 없어요, 라고 했다. 여급이 뭐가 나쁜 거야? 무슨 일이라도 해야지. 다른 사람이 먹여살려주지도 않는데……. (384쪽)


<방랑기>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단어는 ‘배고픔’ 그리고 ‘문학’이 아닐까. 그녀 머릿속에는 프롤레타리아도 부르주아도 없다. 그저 흰쌀밥으로 만든 한줌의 주먹밥이 먹고 싶을 뿐이며, ‘남아 있는 배추를 씹으며 하얀 쌀밥의 맛을 상상’하기를 즐긴다. 톨스토이나 체호프의 작품을 즐겨 읽으며 그들의 천재성에 감탄하고 그들을 닮고 싶어 하지만 언제나 밀려오는 것은 좌절뿐이다. ‘천재를 언제나 꿈꾸지만 이 천재는 굶주린 채 먹는 것에만 정신이 팔려 범재로 끝나버릴’것 같다. ‘도대체 어디에 가면 평화롭게 밥을 먹을 수 있는가’(346쪽) 고뇌할 뿐이다.

허기와 싸우기 위해 오늘도 생활 전선에 뛰어든다. 그녀의 굶주림은 이토록 처절하지만 불쌍하다거나 가여운 느낌이 들지는 않는다. 밝고 씩씩한 모습으로 생활에 맞서기에 그런 것일까? 어찌 보면 한없이 짐처럼 여겨지기 쉬운 가족에게도 따스한 애정을 잃지 않았기 때문일까? 나도 그녀처럼 이렇게 삶의 무게에 지지 않고 살아나가야 할 텐데, 용기를 얻거나 마음을 다잡게 된다. 아마도 이런 점 때문에 <방랑기>가 출간 무렵 그토록 많은 사람에게 읽혔던 게 아닐지.

배고픔과 문학에 대한 개인적 열정만이 가득한 기록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 시절 가난한 사람들의 생활이나 풍경 묘사도 빠지지 않는다. 그런 묘사를 통해 당시 사회에 대한 그녀만의 예리한 시선도 엿볼 수 있다. 자신처럼 빈곤 속에서 하루하루 힘들게 살아가는 주변 사람들을 바라보는 눈은 연민으로 가득하다. 하지만 사회를 바라보는 눈은 날카롭다. 그렇다고 통렬하게 비판적이거나 하지는 않다. 문학적으로도 아름다운 표현이 때때로 눈에 들어와 뇌리에 남는다. 이따금 보이는 그녀가 직접 쓴 시들도 그 진실함에 가슴을 울린다.



우리는 언제까지 이렇게 바보처럼 살아야 하는 걸까? 언제까지고 쌜룰로이드 냄새나는 쌜룰로이드 생활이다. 하루 종일 덕지덕지 삼원색을 칠하며 태양과 격리된 비뚤어진 공장 안에서 벌레처럼 그저 한없이 긴 시간과 청춘과 건강을 착취당한다. 어린 여자들의 얼굴을 바라보면 너무나 슬퍼서 가슴이 저려온다. (40쪽)

함께 자는 사람들의 저마다의 고통이 늦은 밤 방 안에 가득 차면서 나는 나 혼자만의 방이 갖고 싶어졌다. (228쪽)

드디어 내 차례가 되었다. 이력서와 대조하면서 대체로 인품, 용모, 능력이 어떤지로 결정한다. 잠시 구경거리가 되고 나서, 엽서로 통보한다는 답변. 이런 일은 매번 똑같아서 익숙하지만 정말 재미없다. 잘못 태어났다고 생각한다. 아주 예쁘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그런데 내게는 아무것도 없다. 그저 튼튼한 몸만 있을 뿐. 살면서 우선 어떻게든 생활해나간다는 인간의 중요업무에서 언제나 나는 비참하게 실패했다. 나는 타락하기 딱 좋은 레디메이드. 고용주는 날카로운 눈을 가졌다. 이런 여자 따위를 고용할 리가 없다. (317쪽)

하숙생활은 인간을 관료형으로 만들어버린다. 전전긍긍 주위를 살피게 된다. 큰 인물이 될 수 없다. 월말에는 이불을 말리고 시골에서 온 우편환을 바꾸러 간다. 그것만으로도 하숙의 시간은 지나가버리지요. 제 경우가 아니에요. 여기 사는 학생들 얘기에요. 하이네형도 없고 체호프형도 없다. 그저 자기 자신을 잃어가는 훈련을 받고 있을 뿐. (337쪽)


살아갈수록 인생에서 자신이 원하는 것을 끝내 이룬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의 차이는 결국 어떤 상황에서도 자기의 꿈을 잃어버리지 않고, 끝까지 지켜내며 그것을 위해 얼마나 노력해 나갔느냐의 차이라는 생각이 든다. <방랑기>의 ‘나’ 그리고 <굶주림>의 ‘나’, 그들이 배고픔이라는 가장 원초적인 문제에 무릎을 꿇고 그저 하루하루 먹고사는 일에만 몰두했다면, 그리하여 글쓰기를 멀리했다면 하야시 후미코도, 크누트 함순도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방랑기>는 생활의 고단함 속에서도 굽히지 않고 글을 써 내려간 한 여자의 생생한 기록으로 내게는 참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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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 브로디 선생의 전성기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60
뮤리얼 스파크 지음, 서정은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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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이 책을 읽기 시작했을 때는 문득 한 영화가 떠올랐다. 학생들이 일제히 일어나 '오, 캡틴, 마이 캡틴'하고 외치던 <죽은 시인의 사회>-  <진 브로디 선생의 전성기>의 브로디 선생은 <죽은 시인의 사회>의 키팅 선생과 조금은 비슷한 느낌을 준다. 그녀를 따르는 '브로디 무리' 소녀들도 키팅을 따르던 학생들을 떠올리게 한다. 처음에는 정말 그랬다. 응? 그런데 이상하다. 몇 페이지 넘기지 않아서 바로 이 '진 브로디' 선생은 '존 키팅'과는 좀 다른, 어떤 면에서는 꽤 뒤틀린 인물임을 깨닫게 된다.

<진 브로디 선생의 전성기>를 장바구니에 담을 때는 그런 이야기를 기대했다. 꽤 진보적인 여선생이 어느 보수적인 학교에 들어가서 고리타분한 교육을 받고 자라는, 그러니까 현모양처가 되는 것이 가장 큰 목표인 여학생들에게 새로운 교육과 사상을 불어넣어 그들을 일깨우고, 다른 세계로 이끌어주는 작품이지 않을까 하는. 실제로 작품 초반에는 이 기대가 어긋나지 않는다. 브로디 선생이 아이들을 가르치는 '마샤 블레인 여학교'는 1930년대 가치관을 충실하게 학생에게 가르치 보수적인 학교이며 그곳 학생들 또한 그런 교육에 익숙하다.

그 시절, 진 브로디 선생처럼 진보적인 색채를 지닌 선생들은 보통은 진보적인 학교에 가서 자신의 교육 이념을 펼치곤 하는데, 그녀는 정반대라는 점에서 이채롭다. 브로디 선생은 그런 학교에 가봤자 자신이 할 일이 없다고 여겨, 오히려 마샤 블레인 여학교처럼 보수적 색채가 짙은 곳에서 가르치기를 고집한다. 자신이 팔을 걷어붙이고 할 일이 있는 '교육 공장'에 남기를 바란다. 거기서 그녀는 '밀가루 반죽을 부풀릴 효모 역할'을 하겠노라고, '아직 말랑말랑한 나이의 소녀를 내게 주면 그 애는 영원히 내 것이 될 거'(148쪽)라고 말한다. 때문에 그녀는 학교와는 어울리지 않을 뿐만 아니라, 사사건건 교장과 부딪힌다. 교장에게 진 브로디는 당연히 눈엣가시이며 어떻게 해서든 학교에서 쫓아내고 싶은 존재이다.

샌디와 제니 등 브로디의 총애를 받는, '브로디 무리'는 그녀의 가르침을 받으며 점차 다른 학생들과는 구별되는 특징들을 갖추며 성장한다. 그들은 멀리서 봐도 '브로디 선생 제자라는 태'가 난다. 허락된 과목 이외의 문화, 예술, 철학 등 교장의 표현을 따르자면 부적절하고도 쓸데없는 과목들을 잔뜩 배운 그녀들은 '브로디 걸스'로 학교에서 유명하다. 어떤 아이들은 그 무리를 경멸하고 미워하지만 또 어떤 아이들은 그 무리에 끼고 싶어 한다. 하지만 그런 기회는 쉽사리 허락되지 않는다. 브로디 선생의 입맛에 맞아야만 그 무리에 끼어들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바로 그녀의 모순, 어떤 면에서는 인간적 결함이라고 볼 수 있는 점이 드러난다. 진 브로디는 자신의 기준이나 눈높이에 맞지 않는 학생에게는 거침없는 표현을 써가면서 비하한다. 어쩌다 브로디 무리에 끼어들었지만 도무지 자기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소녀인 메리에게는 서슴지 않고 폭언을 한다. 이처럼 진 브로디는 자신의 기준에 비추어 열등하다고 생각하는 존재에게는 경멸 섞인 말을 아무렇지 않게 내뱉고 배척한다. 자신이 전지전능한 '효모'가 되어 자기 입맛에 맞는 말랑말랑한 '빵'을 만드는 일에 몰두한다.

메리를 향한 거침없는 발언을 목격하게 되면서부터 브로디 선생에 대한 의심이 들기 시작한다. 어라, 이 여자 좀 이상한데? 못됐다. 이런 느낌. 그러다 그 기묘함은 그녀가 무솔리니나 히틀러와 같은 파시스트를 동경하다 못해 옹호하는 장면에서 정점에 이른다. 더욱이 뒤늦게 밝혀지지만 그녀는 제자 중 한 사람을 프랑코 정권에 봉사하라면서 스페인에 보내기까지 한다. 심지어 그녀는 자신의 좌절된 사랑, 좀 더 직설적으로 말하자면 끝내 이루어지지 않은 자기의 성적 욕망을 제자 중 한 사람이 대신 이루어 주기를 꿈꾸고 교묘하게 부추긴다. 그때쯤에는 이 여자 참 기이하다, 뒤틀렸군, 이런 선생 곁에 있다면 제자로서 마음이 참 힘들고 복잡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게 된다.

이 작품은 학생들의 그 복잡 미묘한 감정 또한 놓치지 않는다. 샌디의 시선을 중심으로 과거와 현재를 오가면서 브로디 선생이 그려지는데, 그 시선을 좇다보면 분명, 샌디나 제니처럼 조금 똑똑했던 제자들이 어느 순간 진 브로디 선생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있음을 알게 된다. 처음에는 단순히 그녀의 독특함이나 남다른 생각에 매료되어 그녀를 추종하고, 개성 있는 무리를 이루고 있다는 사실 자체에 묘한 흥분을 느끼며 똘똘 뭉치던 아이들이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자신의 선생님이 지니고 있는 모순을 깨닫고 그녀를 냉정하게 바라본다. 그것이 바로 '성장'이리라.   


샌디는 문득 자신들 역시 행군중인 브로디 선생의 파시스트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냥 봐서는 모르지만, 사실 브로디 선생의 필요에 맞춰 무솔리니 무리와는 다른 방식으로 줄지어 걷고 있는 파시스트들. 그거야 그렇다 치고, 걸가이드를 향한 브로디 선생의 경멸에는 질투와 모순과 오류가 있었다. 어쩌면 걸가이드가 너무 강력한 파시스트 라이벌이라서, 그리고 그 사실을 견딜 수 없어서인지도 몰랐다. (43쪽)

“브로디 선생이 누군데?”
“내 선생님, 교양 넘치는 여자였지. 그 여자 자체가 에든버러 축제나 다름없었다고나 할까. 자기 아파트에 불러 차를 내주고 전성기 이야기를 들려주곤 했어.”
“무슨 전성기?”
“자기 인생의 전성기. 한번은 여행을 갔다가 이집트인 가이드에게 연정을 느끼고 돌아와 우리에게 그 이야기를 해준 적도 있었어. 몇 명 예뻐하는 아이들이 있었는데, 나도 그중 하나였지. 당신도 아는 다리 찢기 묘기로 그녀를 즐겁게 해줬거든.”
“하지만 미친 사람은 아니었어. 미치긴. 말짱했지. 자기가 뭘 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었고, 연애 이야기도 전부 해줬거든.” (36쪽)


작가 뮤리얼 스파크는 이 작품에서 '샌디'의 관점으로 진 브로디 선생이라는 모순되지만 도저히 미워할 수 없는 인물을 그려나간다. 브로디는 늘 자신의 전성기를 운운하면서 아이들에게 사람은 자기의 전성기가 언제인지 알아야 한다고, 그 사실을 잊지 말라고 이야기하지만 작품 후반부로 갈수록 그녀의 전성기는 이미 끝난 지가 오래임을 학생들은 물론 독자도 알게 된다. 아마도 그 순간은 학생들이 자기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면서 그녀의 모순을 깨닫고, 하나의 독립된 인간으로서의 싹을 틔우기 시작했을 즈음이 아닐까.


“내 생각엔.” 제니가 말했다. “브로디 선생의 전성기는 이제 끝이 난 것 같아. 계속 누가 자기를 배신했는지 알고 싶어 하거든. 전혀 예전의 브로디 선생이 아니야. 전에는 언제나 투지로 가득 차 있었잖아.” (167쪽)


이렇게 학생들은 진 브로디가 빚어내는 말랑말랑한 빵과 같은 존재에서 서서히 그녀와의 거리두기에 성공하면서 한 독립된 인간으로 '성장'한다. 그러면서 자신의 선생이 전성기를 지났을 때 오히려 연민을 느끼고, 한 인간으로서 부족한 점을 발견했을 때 안타까워할 줄 아는 어른이 되어간다. 겉보기에는 카리스마 넘치지만 그 안에는 그만큼의 모순도 존재하는, 너무나도 인간적인 브로디 선생. 그녀는 틀림없이 결함을 지닌 인물이다. 그 결함이 때로는 학생들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끼쳤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녀가 자신의 말랑말랑한 빵들에게 늘 해로운 효모 역할만을 한 것은 아님을, '브로디 무리'가 성장하는 과정을 지켜보면 알 수 있다. 한없이 이상적인 인물이었던 키팅 선생과는 조금 거리가 있지만 진 브로디는 인간적인 결함도 갖춘, 그러나 결코 미워할 수 없는 개성 넘치는 선생으로 오래 기억될 것 같다. '브로디 걸스' 그녀들에게도 그렇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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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북으로 가는 좁은 길
리처드 플래너건 지음, 김승욱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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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전쟁을 소재로 한 문학을 딱히 좋아하지 않는다. 특유의 전형성, 예측 가능한 내용들이 진부하기 때문이다. 그런 문학은 보통 이렇다. 전쟁이라는, 거스를 수 없는 운명의 소용돌이 속에 휘말려 들어가는 개인. 그 사람은 틀림없이 전쟁터로 끌려가기 전에 지고지순한, 또는 애절한 사랑을 하고 있다. 그 사랑이 한창 피어오를 즈음 전쟁이 터지고 그 때문에 불가항력적으로 두 연인은 헤어진다. 전쟁터로 끌려간 남자는 그곳에서 인간성을 말살해버리는  온갖 폭력에 시달리고, 더없이 끔찍하면서도 참혹한 죽음을 목격한다. 살아남는 것만이 유일한 바람이 되고, 애틋하게 연인의 얼굴을 떠올리면서 희망을 이어간다. 그러나 그 사랑은 전쟁으로 말미암아, 거기서 비롯된 온갖 오해로 인해 끝내 이루어지지 못한다. 거의 이렇지 않은가? 전쟁을 소재로 한 문학 작품 가운데 커트 보니것의 <제5도살장>처럼 참신한 작품을 찾아보기란 좀처럼 어렵다.

<먼 북으로 가는 좁은 길>이 나왔을 때, 책 소개를 통해 전쟁 소재 문학임을 알고는 위와 같은 이유들 때문에 외면했다. 예측 가능한 내용들이 펼쳐지겠지. 그런데 문학상은 보통 이런 어떤 엄청난 역사적 사건을 다룬 작품에 수상하는 일이 잦으니까, 맨부커상도 그런 선택을 했겠지.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도 그 상이 맨부커상이라는 점에서 아주 관심을 끊지는 못했다. 그러다가 <먼 북으로 가는 좁은 길 The Narrow Road to the Deep North>은 바쇼의 <오쿠로 가는 작은 길> 영어판 제목에서 따온 것이라는 글을 읽게 되었고, 바쇼의 하이쿠가 이 책에서 어떤 역할을 할까 자못 궁금해졌다.

책을 사서 읽기 시작했을 때는 역시 예측 가능한 내용들에 조금 김이 빠졌다. 내가 상상했던 내용과 거의 한 치도 어긋남 없이 전개되는 것이 아닌가. 뭇 남자들의 뜨거운 시선을 외면하고 도리고 에번스 앞에 당차게 나타나는 에이미- 이토록 진부하고 클리셰에 충실할 수가. 물론 도리고가 에이미를 다시 만나고 둘 사이의 장벽을 알게 되는 순간은 예상치 못한 전개라서 갑자기 흥미가 솟구쳤다. 그런데 이 또한 도리고와 에이미의 애절하고도 안타까운 사랑을 한층 극대화하는데 필요한 하나의 장치인 셈이지 않은가. 게다가 도리고, 미남 도리고. ‘모든 여자가 남몰래 갈망하는 남자’(482쪽) 도리고라니. 이런 설정에는 조금 실소가 나기도 했다. 그냥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좀 더 그의 고통과 번민이 더 잘 전달되었을 텐데 아쉬움이 남는다.

그 둘이 폭발적으로 서로에게 빠져들 즈음, 도리고는 전쟁터로 끌려가고 전쟁포로가 되어 숨이 붙은 것을 저주할 정도로 최악의 경험을 한다. 이 작품은 과거와 현재를 오가기 때문에 전쟁터에서 살아남아 이제는 전쟁영웅이 된 도리고의 모습이 과거와 교차하면서 드러난다. 전쟁에서 온갖 폭력에 시달리고 참혹한 광경을 지켜봤기에 현재 그의 모습은 살아남았지만 죽은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런 그는 방탕하고 무의미한 삶을 그저 이어나갈 뿐이다. 이 또한 작품을 읽기 전에 예측 가능했던 내용이다.

그런데 바쇼의 하이쿠, 그 하이쿠들이 이 작품을 조금 색다르게 만든다. 책을 읽다 보니 바쇼를 비롯해 잇사, 부손 등 일본 하이쿠 대가들은 물론 그들의 작품이 심심찮게 등장한다. 심지어 작품 속에서 나카무라와 고토 등 일본군들은 바쇼의 하이쿠가 일본 정신의 상징이라고 말하면서 포로들을 괴롭히거나, 그들 중 누군가를 죽이기 전에 하이쿠를 읊기도 한다.


철도를 위하여. 고타 대령이 찻잔을 들어올리며 말했다.
일본을 위하여. 나카무라가 자신의 잔을 들어올리며 말했다.
천황 폐화를 위하여! 고타 대령이 말했다.
바쇼를 위하여! 나카무라가 말했다.
잇사!
부손! (162쪽)

서로에게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하이쿠를 읊어주었다. 시 자체보다는 시에 대한 서로의 감수성이, 시에 깃듯 천재성보다는 시를 이해하는 서로의 지혜가 두 사람의 심금을 울렸다. 자신이 시를 안다는 사실 보다는 시가 자신들과 일본 정신의 고귀한 측면을 보여준다는 사실을 안다는 점이 감동적이었다. 그 일본 정신은 이제 곧 철로를 따라 매일 버마까지 이동할 것이고, 버마에서부터 인도까지 나아갈 것이며, 거기에서 다시 세계를 정복하게 될 터였다. 그러니까 지금은 일본 정신이 바로 철로고 철로가 바로 일본 정신인 거야. 나카무라는 속으로 생각했다. 바쇼의 아름다움과 지혜를 더 넓은 세상에 알게 될, 저 먼 북으로 가는 좁은 길인 거지. (163쪽)

이 작품을 읽다 말고 바쇼의 하이쿠에 관심이 생겨 <오쿠로 가는 작은 길>을 읽었다. 바쇼가 살았던 시대는 도쿠가와 이에야스(1543~1616)가 세웠던 에도 막부 초창기의 혼란스러움이 진정되고 도시를 중심으로 한 상인 계급 조닌(町人)들의 문화가 꽃피기 시작할 때였다. 철저하게 세속적인 조닌 문화의 쾌락주의는 무사 문화의 금욕적 윤리와 이중구조를 이룬다. 이렇게 감각적이면서도 동시에 금욕적이기도 했던 시대에 바쇼는 세상 흐름의 어느 것과도 전혀 다른 삶을 지향한다. 사람들이 도시로 몰려들 때 오히려 그는 도시를 떠나 멀고 먼 변방으로 고된 여행을 떠난다. 일본 동북부 지역 ‘오쿠’까지 2,400킬로미터에 이르는 길을 걸어서….

그런 바쇼의 하이쿠가 전쟁터에서, 그것도 포로들을 가차없이 학대하는 나카무라나 고타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것은 꽤나 아이러니하다. 심지어 나카무라와 고타는 전쟁이 끝난 뒤에도 전범들이 재판 받고 처형당할 때도 운 좋게 살아남아 그 어떤 처벌도 받지 않은 채 오히려 승승장구한다. 자신들은 전범이 아니라, 천황의 선한 뜻을 실제로 행했을 뿐이라고 생각한다. 포로들을 학대한 것 또한 그 위업을 이루기 위한 하나의 과정이었을 뿐이라고 치부한다. ‘구타는 더 나은 선(善)을 위해 필요한 일’(357쪽)이었던 것이다. 하이쿠를 그토록 사랑했던 나카무라에게 천황은 하나의 시(詩)였다.


그가 무엇보다 사랑하는 것이 바로 시(詩)인데, 천황 폐하는 그 자체로서 시였다. 어쩌면 가장 위대한 시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시는 우주를 모두 포함했으며, 모든 도덕과 고통을 초월했다. 위대한 예술이 모두 그렇듯이, 천황 폐하라는 시 또한 선과 악 너머에 있었다. (478쪽)


나카무라는 선하기 그지없는 아내와 살면서 자신 안의 선한 모습을 발견하고는 깜짝 놀란다. 급기야 자신은 원래 착한 사람이었다고 생각하기에 이른다. 죽기 직전까지 바쇼의 하이쿠를 읽으며 ‘살아 있는 부처가 되려 했다’(444쪽)는 고타와 닮은꼴이다. 그렇게 반성도 참회도 속죄도 없이 자기 안의 선함을 발견했다고 기뻐하고, 살아 있는 부처가 되기를 바라면서 죽어간 전범들의 몰염치한 모습은 또 다른 비극을 잉태한다. 전쟁포로들에게는 씻을 수 없는 고통의 흔적인 녹슨 기차가 그들에게는 위대한 업적으로 남아 야스쿠니 신사에 전시해야 마땅한 존재가 되는 것이다.


거기서 그들이 본 것은 1944년 시암-버마 철로를 끝까지 다린 첫 번째 기관차가 껍데기만 남아 녹슬어 가고 있는 광경이었다. 기술자들은 그 기관차를 복구중이며, 그것을 일본으로 가져와 야스쿠니신사에 전시해서 자신들의 위대한 업적을 기리는 것이 궁극적인 목표라고 했다. (464쪽)


<먼 북으로 가는 좁은 길>은 이렇게 전쟁포로가 된 이들의 삶과 전쟁에서 천황의 선한 의지를 행했다고 말하는 일본군관들의 삶을 겹쳐 보여주면서 전쟁이 남긴 상처를 이야기한다. 이 책을 읽노라면 그 어떤 인물도 이 삶에서 승자는 없다는 생각이 든다. 도리고는 말할 것도 없고, 그와 얽힌 여성들- 앨런, 에이미. 에이미의 남편 키스 멀베이니. 그들 모두 삶이라는 덫에 걸린 패배자들이다. 나카무라나 고타 또한 마찬가지이다. 그들의 삶은 그들이 원하던 대로 굴러갔는가? ‘사람이 온 세상을 상대로 전쟁을 벌일 수는 있지만, 승자는 언제나 세상’(352쪽)인 것이다.


인생은 생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운이 어느 정도 작용했다. 대게 인생은 누가 미리 농간을 부려둔 카드와 같았다. 그러니 그저 다음 걸음을 제대로 내딛는 것이 중요할 뿐이었다. (283쪽)


도리고도 에이미도 ‘그 다음 걸음’을 제대로 내딛지는 못한 것 같다. 앨런이나 키스 또한 마찬가지이다. 앨런과 키스의 그 기만적 행위는 한편으로는 이해가 되면서도 어쩌자고 그러는지 탄식하게 된다. 그들 모두 ‘사랑’이라는 덫에 걸린 가엾은 포로들인 셈이다. 키스나 앨런은 둘 다 자신들이 덫을 놓았지만 그 덫에 걸리고만 것은 결국 자기들이 아니었을까? 그러므로 이 <먼 북으로 가는 좁은 길>은 전쟁 이야기면서도 전쟁과도 같은 삶의 이야기, 그 덫에 걸린 포로와도 같은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그토록 개인들의 욕망이 부딪히고, 때로는 국가와 개인의 욕망이 부딪히는 현장에서 역설적으로 바쇼의 하이쿠는 조용하고도 은은하게, 그러나 묵직하게 빛난다. 속세의 이 모든 고뇌를 벗어난, 달관의 삶. 침략과 살생이 자행되는, 가장 저열한 인간의 욕망이 들끓는 전쟁터. 그 극명한 대비 속에서 바쇼의 하이쿠는 슬프게 빛난다. 시(詩)가 되기를 바라지만 결코 시가 되지 못하는 삶, ‘먼 북’이라는 멀고도 먼 구원의 길. 그 애잔하고도 쓸쓸한 풍경이 이 작품을 한없이 쓸쓸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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