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망스 세계문학의 숲 52
스탕달 지음, 임미경 옮김 / 시공사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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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사랑받기를 간절히 바라면서도 스스로 사랑하기를 금지한 사람이 있을까? 스탕달의 <아르망스>에는 그런 인물이 등장한다. 주인공 ‘옥타브’가 바로 그렇다. 이제 스물인 이 청년은 아름다운 외모에 독특한 언행과 남다른 분위기, 귀족 신분 등 그 어느 하나 남에게 뒤질 것 없는, 치명적인 매력까지 겸비한 인물이다. 오직 하나 흠이 있었다면 귀족임에도 부유하지 못하다는 점인데, 그 마저도 운 좋게 해결되어 200만 프랑을 손에 넣을 희망이 생긴다. 그리하여 옥타브는 말 그대로 사교계의 ‘꽃’이 된다.

옥타브를 사교계에서 유독 빛나보이게 하는 그 남다른 분위기는 그의 독특한 성격에서 비롯된다. 그의 부모가 걱정하듯이 옥타브에게는 ‘우울증’ 증세가 심각한 것이다. 염세적이고 그 무엇에도 쉽사리 만족하지 못하고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삐딱하게 보는 시선. 때문에 옥타브는 세속적 삶을 떠나 신에게 자신의 생을 바칠 생각을 하기도 하고, 독서에 몰두하는 등 세상의 일에는 초연한 태도이다. 그의 아버지는 아들의 공부 병이 또다시 도질까 봐 걱정하며 그저 옥타브를 하루 빨리 결혼시키고자 한다. 이제 200만 프랑이라는 재산도 생길 터이므로 아들은 남부러울 것 없는 혼사를 치를 수 있다. 과연 옥타브의 삶은 아버지 뜻대로 흘러갈까?

안타깝게도 그리 될 것 같지는 않다. 옥타브는 사교계의 속물스러움과 천박함에 진저리를 친다. 내로라하는 집안 출신들이 모인 사교계에서도 드러내놓고 금전을 숭배하는 행태를 ‘오 인간이란 얼마나 비천한지!’ 외치며 자기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기도 한다. 그가 보기에 ‘어디를 둘러봐도 천박함뿐’이며 거기에 맞서려면 영혼이 아름다운 사람을 찾아내는 방법밖에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런 옥타브는 우연히, 사촌누이인 ‘아르망스’가 그녀의 친구와 나누는 대화를 듣게 된다. “할 수 없지 뭐. 그이도 다른 사람들과 똑같은걸! 나는 그이가 훌륭한 심정을 지녔다고 생각했어. 그런데 200만 프랑을 손에 넣을 희망이 생기자 사람이 바뀌고 말았어!”(61쪽) 아르망스의 이 말은 벼락처럼 옥타브 위로 떨어진다. 모두가 돈을 숭배하는 세상에서 돈을 경멸하는 여자, 가난하고 기댈 곳 없는 처지임에도 돈을 숭배하지 않는 여자. 옥타브는 그녀를 자신이 존경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되고 서서히 관심을 갖게 된다. 사실 아르망스는 오래전부터 옥타브를 마음에 두고 있었다. 그런데 부자가 된 옥타브가 사람이 변했다고 생각하면서 그에게 실망하던 참이었다. 옥타브는 이 모든 오해를 풀기 위해, 아르망스에게 다시 존중받기 위해 온갖 애를 쓴다.

이런 과정을 지켜보노라면 이 둘의 우정을 빙자한 사랑은 곧 옥신각신하다가 이루어질 것 같다. 아, 그런데 옥타브와 아르망스 이 두 연인의 사랑은 어딘가 묘한 구석이 있다. 특히 옥타브가 그러하다. 그는 스스로 ‘절대 사랑에 빠지지 않겠노라’고 맹세한 인물이다. 아르망스에게 자기도 모르게 관심이 가고 그녀의 모든 행동 하나하나에 온 신경을 모으고 전율하면서도 그것이 사랑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저 깊은 우정, 존중하고 존중받는 관계,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믿고 의지할 수 있는 그런 존재라고 생각한다. 아니, 그렇게 믿고 싶어 한다. 아르망스는 아르망스대로 답답하다. 옥타브를 그토록 사랑하면서도 가난한 자신이, ‘처지에 비해 지나치게 부유한 사람과 결혼한다는 비난을 무릅쓰고 싶지’ 않아서, 심지어 옥타브 또한 그런 의심을 할까봐 그와 결혼하기를 거부한다. 그저 ‘우정’이라는 이름으로 옥타브 곁에서 그를 오래 지켜봐야 한다고 번번이 다짐한다.

이렇듯 스탕달의 <아르망스>는 그 누구보다 서로에게 사랑받기를 갈망하면서도 스스로 사랑을 금지한 대책 없는 두 연인의 밀당을 숨 가쁘게 그려나간다. ‘밀당’이라고 표현하기는 했지만 이 밀당은 계산된 것이 아니다. 두 사람이 각자 자신에게 부과한 ‘절대 상대를 사랑해서는 안 되는 이유’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비롯되는 일이다. 이 책을 읽다 보면 몹시 궁금해진다. 아르망스야 자신의 처지 때문에 옥타브를 거부한다고 해도, 옥타브는 왜 스스로 사랑을 금지했을까? 그 어린 나이에 무엇 때문에 ‘결코 사랑에 빠지지 않겠다는 맹세’를 하게 된 것일까? 그 ‘비밀’이 궁금해서라도 이 책은 페이지가 술술 넘어간다.

첫 작품 <아르망스>를 써내기 이전에 일찍이 <연애론 De l'amour>을 썼던 스탕달. 묘비명이 ‘살았노라. 썼노라. 사랑했노라’였던 만큼 스탕달은 연애의 달인이었다. 아니, 달인이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끊임없이 누군가를 사랑하고 사랑받고자 했다. 그런 그의 사랑에 대한 생각이 <아르망스>에는 고스란히 담겨 있는 듯하다. 옥타브와 아르망스를 지켜보노라면 사랑의 여러 속성을 볼 수 있다. 옥타브는 사랑에 빠지지 않겠노라고 결심했지만, 사랑이 어찌 그리 마음대로 되는가. ‘인간의 능력을 넘어서는 과제를 스스로 짊어진 셈’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끊임없이 불행했다. 그 가혹했던 시간을 뒤로 하고 드디어 한 사람을 찾아낸 그. 옥타브는 ‘사랑에 빠진’ 자신을 발견한다. 냉소적이고 삐딱하게만 보이던 세상이 달라 보인다. 이런 경험은 사랑을 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겪어보지 않았을까?


옥타브가 느끼는 행복감이 커질수록 그의 정신도 한층 더 명민해졌다. 그동안 알아차리지 못하고 무심히 지나쳤던 많은 것들이 눈에 들어온다는 사실이다. 그 세계의 가증스러운 모습이 좀 더 참을 만해 보였고, 무엇보다 그 세계가 자신을 향해 내보이던 적대감을 누그러뜨린 듯이 느껴졌다. 결국 그가 깨달은 사실은 이 세상이 ‘그를 겨냥해서’ 적대감을 퍼붓는다는 생각이 그 자신의 오만이라는 점이었다.(<아르망스>, 121쪽)

‘내가 있는 이곳이 인간의 사막’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그러기는커녕 이름은 모르지만 절친한 친구가 스무 명은 있는 느낌이었다.’ (<아르망스>, 127쪽)


사랑하는 자신을 최초로 발견한 그에게는 온 세계가 달라 보이고, 모든 것의 의미가 남다르게 다가온다. 그런데 인간의 마음은 참으로 간사하기에 이 사랑이 완전한 것일까? 의심하고 의혹에 쌓이고 때로는 질투에 눈이 멀기도 한다. 옥타브와 아르망스 또한 이 유혹에서 자유롭지는 못하다. 젊기에 어쩌면 심하게 흔들린다. 옥타브는 아르망스가 자신을 좋아하는 것은 자기에 대한 환상에 빠져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기도 하고, 비밀을 솔직하게 털어놓으면 자신을 동정할 것이라고 믿는다. 한편 아르망스는 사교계 사람들이 옥타브에 대한 자신의 감정이 가짜라고 의심할 것이라며 전전긍긍하기도 하고 평범한 결혼 생활로 사랑이 식어가는 것을 지켜보는 일은 고통이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옥타브가 나를 계속 아껴준다고 할지라도, 그가 내 마음을 의심하지 않을까. 내가 재산을 보고 그를 택했다고 생각하는 게 아닐까’하며 행복을 지키기 위해서는 절대로 청혼을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고 갈팡질팡한다.

옥타브와 아르망스를 지켜보노라면 비록 그 모습은 똑같지 않을지라도 누군가를 알게 되고, 사랑에 빠지고, 그 감정을 인지하고, 서로 마음을 확인하고 최고의 행복감을 맛보고, 그 뒤에 의심과 불안과 질투와 불안에 싸이고 등등 사랑이 전하는 온갖 감정을 느낄 수 있다. 아마도 연애에 일가견이 있던 스탕달 그 자신이 사랑에서 느낀 다양한 감정들을 여과 없이 인물들에게 투영했기 때문은 아닐까. <아르망스>는 중간 중간 드러나는 사랑에 대한 스탕달의 생각을 엿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더없이 행복한 사랑일지라도 폭풍우가 몰아치는 날은 있는 법이다. 사랑은 그 행복만큼이나 고통으로도 생명을 유지한다고 할 수 있다. (<아르망스>, 119쪽)

인생의 정수는 가슴으로 느끼는 감정에 있으며, 사랑은 숭고한 만큼 숭고하지 못한 모든 것을 잊게 해주는 터라, 우리는 긴 세월 속에서보다 단 얼마간의 순간 속에서 더 많은 삶을 살 수 있는 것이다. (<아르망스>, 181쪽)


옥타브를 비롯하여 갈팡질팡 하는 인물들. 그 생생한 캐릭터 때문에도 <아르망스>는 무척 흥미롭다. 옥타브의 모습은 <적과 흑>의 쥘리엥 소렐과도 닮았다. 아름다운 외모에 섬세한 감수성, 남다른 재능, 사회와 일정 거리를 둔 개인, 흔들리기 쉬운 마음과 그로 인해 비극적 연애의 주인공이 된다는 점까지. 스탕달은 옥타브와 쥘리엥 소렐에 이어 <파르마의 수도원>의 파브리스까지 소설사에서 잊기 힘든 강렬한 인물을 창조해냈다. ‘아이구, 이런 연애쟁이!’ 하면서 계속 스탕달의 작품을 읽게 만드는 힘은 무엇보다 이런 생생한 인물에 있을 것이다.

사실 <아르망스>는 별 다섯 개를 주고 싶었는데, 결국 하나 뺄 수밖에 없었다. 옥타브의 ‘치명적 비밀’ 때문이다. 대체 그는 왜 사랑하기를 스스로 거부했나? 그 비밀이 무엇이기에? 궁금증 때문에 미친 듯이 책장을 넘겼는데, 비밀은 끝끝내 작품 안에서는 밝혀지지 않는다. 이 허무함이란! 물론 작품 해설에서 그 비밀이 밝혀지기는 한다. 스탕달이 친구인 작가 메리메(Mérimée)에게 보낸 편지에 근거를 두고 옥타브의 비밀은 ‘이것’이라고 밝히는데……. 글쎄. 작품 안에서 독자가 직접 유추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면 더 좋았을 걸 하는 아쉬움이 여전히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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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18-10-10 14: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흠. 마지막 문단은 그냥 빼고 넘어가시지, 책을 꼭 읽어보게 만드시네요. ^^

잠자냥 2018-10-10 14:46   좋아요 1 | URL
ㅎㅎ 비밀이 밝혀지지 않는다는 것까지 밝히지 않으려고 했었는데요. 별 한 개 뺀 이유를 말하려다 보니 ㅎㅎㅎ
(만일 이 책 읽으실 계획이라면 온라인에 있는 책 소개도 보지 마세요!)

Falstaff 2018-10-10 15:44   좋아요 0 | URL
옙. 저 이런 정보도 무지 좋아합니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