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는 날마다 축제
어니스트 헤밍웨이 지음, 주순애 옮김 / 이숲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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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는 날마다 축제>는 헤밍웨이의 에세이집으로 그가 젊은 시절 파리에서 머물던 몇 년 동안의 기록이 담겨있다. 헤밍웨이는 1921년부터 26년까지 파리에 거주하면서 글쓰기에 몰두했다. 당시 그는 젊지만 가난했고 미래는 어쨌든 불투명했다. 헤밍웨이는 자기 글에 대한 확신은 있었을지 몰라도 자신이 훗날 그렇게까지 유명한 작가가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 책에는 헤밍웨이가 머물던 파리 곳곳의 아름다운 풍경과 제임스 조이스, 에즈라 파운드, 거트루드 스타인, 피츠제럴드 등 그가 그곳에서 만난 예술가들의 이야기가 흥미롭게 펼쳐진다. 경마에 대한 그의 집착은 물론 그의 첫 번째 아내 해들리와 그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존과의 일상도 생생하게 그려진다. 헤밍웨이의 어린 시절부터 노년에 이르기까지의 갖가지 사진도 실려 있는데 이런 사진을 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내가 감동받은 것은 헤밍웨이가 글을 쓰기 위해 얼마나 열심히 자기 자신을 다독였는지, 그리고 꾸준히 치열하게 글을 쓰며 하루를 보냈는지에 대한 기록이다. 헤밍웨이를 인간적으로 크게 좋아할 수는 없지만 그의 글에 대한 태도만큼은 존경스럽다. 마음에 드는 글을 쓴 후에는 자기 자신에게 맛있는 빵과 시원한 맥주 한 잔을 상으로 주는 모습에서는 슬며시 웃음도 난다.

헤밍웨이는 매일 카페에서 글을 쓰고 그 후에는 그 글에 대해 잊기 위해 열심히 다른 책들을 읽었다. 쓰고 읽고 걷고 보고 먹고 마시고 이야기하고 사랑하고…. 파리에서 그가 보낸 시절을 요약한다면 이런 단어들로 정리할 수 있으리라. 비록 항상 허기를 느낄 만큼 가난했지만 이 에세이 속에서 헤밍웨이와 그의 첫 아내 해들리는 무척 행복해 보인다. 사람이 살려면 이렇게 살아야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비록 돈에 쪼들리지만 사랑하는 사람과 자유롭게 좋아하는 일을 하며 사는 그런 삶.

이 책을 읽다 보면 헤밍웨이뿐만 아니라 당시 파리에서 머물던 예술가들의 삶을 엿보는 기회도 주어진다. 비록 헤밍웨이의 시점으로만 바라본 그들의 삶이라 ‘공정하고 객관적’이라고 볼 수는 없지만 그 나름대로 재미있다. 또한 헤밍웨이가 읽은 책과 그 책을 쓴 작가들에 대한 그의 생각도 엿볼 수 있는데, 캐서린 맨스필드에 대한 헤밍웨이의 평가를 읽다가 나도 모르게 크게 웃고 말았다. 나는 맨스필드 단편의 읽으면서 좋다는 느낌을 받은 적이 없다. 왜 그녀의 단편이 그토록 높게 평가받는지 좀처럼 받아들이기 힘들었는데, 그녀에 대한 헤밍웨이의 평을 읽으면서 묘하게 동질감이 느껴졌다. 



우리가 파리로 오기 전 토론토에서 나는 캐서린 맨스필드가 대단히 훌륭한 단편소설 작가라는 말을 자주 들었지만, 실력을 갖춘 노련한 외과의처럼 간결하고 명쾌하게 글을 쓰는 체호프와 비교하면 그녀는 억지로 머리를 짜내 이야기를 꾸며 내는 겉늙은 여류 작가일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말해 맨스필드는 알코올을 뺀 맥주와 같았기에 차라리 맹물을 마시는 편이 나았다. 반면에 체호프는 투명하다는 점만 빼면 물과는 전혀 달랐다. 그의 작품 중에는 언론 기사문 같은 글도 더러 있었지만, 놀랄 만큼 뛰어난 작품도 여럿 있었다. (128쪽)


피츠제럴드와 그의 아내 젤다에 관한 에피소드도 상당 부분을 차지한다. 헤밍웨이가 기록한 피츠제럴드나 젤다에 관한 에피소드를 통해 보자면 이 부부는 상대하기 참 난감한 사람들 같다. 만약 내 주변에 피츠제럴드나 젤다 같은 사람이 있다면 난 그들을 친구로 곁에 두지는 않으리라. 그들은 항상 끊임없이 주변 사람들에게 징징대고 칭얼대는 느낌이랄까. 피츠제럴드와 젤다가 함께 하면서 서로를 갉아먹은 이야기는 피츠제럴드의 소설 <밤은 부드러워>의 소재가 되기도 했는데 나는 이 작품도 읽는 내내 지루했다. 헤밍웨이가 유일하게 극찬한 피츠제럴드 작품이라는데 어쩐지 우정 때문에 마지못해 치켜세워줬던 건 아닐까 싶기도.

글쎄, 잘은 모르겠지만 헤밍웨이는 작가적으로 자기보다는 일찌감치 인정받고 성공해있던 피츠제럴드를 부러워하기도 하고 조금은 시기하지 않았을까? 게다가 한 사람(헤밍웨이)은 상당히 마초적인 남자이고 한 사람(피츠제럴드)은 여성적이고 유약한 사람이니 이 두 사람이 친구로 함께 지내기란 애당초 좀 힘들어 보이기도 한다. 헤밍웨이는 피츠제럴드의 이런 징징대는(?) 성격을 못 견뎌한 것 같고, 어떤 면에서는 그런 징징대는 모습을 비아냥대기도 했다. 헤밍웨이 자신은 절대 그런 의도로 쓴 게 아니라고 우길지도 모르겠으나 ‘젤다의 고민’이라는 에피소드는 결정적으로 그런 의혹을 더욱 크게 한다.



자넨 내가 젤다 외에 다른 어떤 여자와도 성관계를 맺은 적이 없다는 걸 알고 있잖나.”
“아니, 난 몰랐는걸.”
“내가 전에 얘기했던 걸로 알고 있는데.”
“아닐세, 자넨 내게 엄청나게 많은 이야기를 했지만, 그런 이야기는 하지 않았네.”
“내가 자네에게 물어보고 싶은 게 바로 그 문제야.”
“좋아, 뭔지는 모르지만 말해봐.”
“젤다는 내가 신체 구조상 어떤 여자도 행복하게 해줄 수 없다면서 그게 바로 그녀가 근본적으로 내게 불만을 느끼는 이유라고 하더군. 그녀는 그게 크기의 문제라고 하더라고. 그 말을 들은 뒤로는 결코 예전처럼 느낄 수가 없어서 난 진실을 꼭 알아야겠어.” (207쪽)


그렇다! ‘젤다의 고민’이란 바로 피츠제럴드의 성기가 작다는 것이다! 피츠제럴드는 이 때문에 고민이라며 헤밍웨이에게 상담을 해오고 헤밍웨이는 화장실까지 따라가서 피츠제럴드의 ‘그것’을 직접 보고는 결코 작지 않다고 다독여준다. 그래도 불안해하는 피츠제럴드를 위해 루브르 박물관의 조각상들 크기는 다 그렇다며 안심시켜 주지만 피츠제럴드는 여전히 못미더워하고 그런 그를 결국 루브르 박물관까지 끌고 간다. 그렇게 해서 계속 피츠제럴드를 안심시켜 주지만…. 결국 이 에피소드를 통해 헤밍웨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무엇일까? ‘피츠제럴드의 그것은 작다. 하지만 나는 아니다!’라는 게 아닐까?

헤밍웨이가 평생 자신의 남성성을 입증해보이려고 안간힘을 쓴 사람이 아니었다면 그저 이 이야기도 한 번 웃고 넘어갔을 테지만, 글쎄…. 헤밍웨이는 피츠제럴드의 남성스럽지 못한 면모(여자처럼 늘 징징대더니 알고 보니 ‘그것’도 작은 인간!)를 들춰냄으로써 교묘하게 깎아내리고 싶었던 건 아닐까. 그래서 어쩐지 헤밍웨이도 참 치졸하게 느껴지고, 이런 이야기를 이토록 여과 없이 만천하에 공개해도 되는 걸까 싶기도 하다. 자기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온전히 자신만의 이야기는 아니지 않은가?

이 책의 후반부에 이르러서는 해들리와 파리에서 행복하고 사랑스러운 나날을 보냈어도 결국 다른 여자에게 빠져버리는 헤밍웨이의 모습도 만날 수 있다. 헤밍웨이는 담담하고 고통스럽지만 무척이나 낭만적이게 그때의 일을 회고한다. 그러나 글쎄, 결국 아내를 곁에 두고 아내 모르게 다른 여자와 놀아난 이야기일 뿐이다(문제의 이 여자는 헤밍웨이의 두 번째 부인이 된다). 이 에피소드를 읽으면 글 잘 쓰는 사람은 자기변명도 참 멋지게 하는구나 싶어서 씁쓸해지기도 한다.

<파리는 날마다 축제>를 읽은 소감을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파리는 아름답고 인간들은 찌질하달까? 그러나 결국 그 ‘파리’를 멋들어지고 생동감 있게 하는 요소 중에 이런 찌질한 인간들을 빼놓을 수 없으니 인생은 참 오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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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7-10-16 13: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작가도 그렇고 예술가들도 모여서 두루두루 친하게 지내면 찌질한 모습을 보이기도 합니다. 카페에 모인 인상파 화가들이 그랬습니다. ^^

잠자냥 2017-10-16 14:05   좋아요 0 | URL
ㅎㅎ 어디 작가와 예술가만 그렇겠습니까. ㅎㅎ 인간이 모두 그렇지요. ㅎㅎㅎ

케이 2017-10-17 11: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헤밍웨이가 남성성에 집착하고 여러번 언급한 것이야말로 그가 여자들에게 시원찮다는 증거라는 글을 어디선가 봤는데, 맞는 말이라고 생각했어요. 헤밍웨이는 인간적으론 정말 정안가는 인물이예요..; 10년 전에 읽은거라 잘 기억은 안나지만, 밀란쿤데라가 소설 ‘불멸‘에서 헤밍웨이를 대놓고 비꼬는데, 그 부분 읽고 굉장히 통쾌했던 기억이 납니다. ㅋㅋ

잠자냥 2017-10-17 11:56   좋아요 1 | URL
ㅎㅎ 사냥이나 복싱 같은 스포츠에 집착한 것도 그렇고.... 심리학적으로 분석해보면 재미난 사람일 거 같아요. 그의 마초성 때문에 저도 헤밍웨이는 그닥 좋아할 수 없는 인간이었는데, 최근에 읽은 어떤 책에서 의외로 괜찮은 면을 발견했답니다. 그 이야기는 곧 다른 리뷰에서... ^^
 
남아 있는 나날 민음사 모던 클래식 34
가즈오 이시구로 지음, 송은경 옮김 / 민음사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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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 연휴에 친구와 술을 마시고 있는데, 또 다른 친구에게서 문자가 왔다. 노벨문학상을 가즈오 이시구로가 받았다는 메세지였다. 소식을 듣고 조금 뜻밖이었지만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그 소식을 전한 친구나 나나, 실은 마음속으로는 마거릿 애트우드가 받기를 바랐고, 하루키는 절대 받지를 않길 바랐다. 그리고 둘 다 가즈오 이시구로 작품은 예전부터 좋아했던 터였다. 그래서 우리 둘 모두 나쁘지 않은 소식이라고 생각했다.


그 소식을 듣고 또 하나 떠오른 것은 민음사가 이번에 입 좀 찢어지겠네 하는 생각이었다. 민음사는 모던클래식 시리즈로 일찍부터 가즈오 이시구로 작품을 내놓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이 시리즈를 통해 가즈오 이시구로의 작품 중 가장 처음으로 <나를 보내지 마>를 읽었고 그 다음에는 <녹턴>을 읽었다. 두 작품 모두 괜찮았기에 그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남아 있는 나날>을 세 번째로 읽은 기억이 난다. '기억이 난다'라고 말하는 까닭은 사실 이 작품들을 읽은 지 꽤 되었기 때문이다. 다 읽고 난 뒤, 나는 이 작품을 그의 대표작으로 꼽는 일에 반기를 들고 싶어졌다. 그 뒤로 그의 다른 작품들도 읽었는데 가즈오 이시구로 작품은 편차가 심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어떤 작품은 꽤 좋지만(<나를 보내지 마>), 어떤 작품은 썩 좋지 않고(<위로 받지 못한 사람들>, <우리가 고아였을 때>), 또 어떤 작품은 과대평가 되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 과대평가 된 작품 중 하나가 바로 이 <남아 있는 나날>이다.  


<남아 있는 나날>은 이런 종류의 소설을 영화화하는데 탁월한 재주를 가진 제임스 아이보리의 동명 영화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나는 영화를 보지는 않았지만 이 작품을 읽는 내내 그 영화에서 주인공 ‘스티븐스’ 역을 맡은 안소니 홉킨스의 이미지가 머릿속에 그려졌다. ‘스티븐스’는 집사다. 영국에서는 누구나 알아주는 귀족집안 달링턴가의 충실한 심복이자 집사이며 그는 그러한 자신의 위치에 크나큰 자부심을 지녔다. 그러나 그 달링턴가도 어느덧 쇠망하고 미국인 갑부인 페러데이에게 달링턴 홀과 스티븐스는 넘겨졌다. 페러데이는 한 번도 달링턴 홀을 떠난 적이 없는 스티븐스에게 잠깐 동안의 여행을 권유한다. 고심 끝에 스티븐스는 일주일간의 여행을 떠나고 그 여행길에서 자신이 살아온 인생을 돌아보기 시작한다. 그 회고 속에 1920~30년대의 유럽 사회와 달링턴 홀, 그리고 스티븐스의 과거가 잔잔하게 교차하며 이야기는 흐른다.
 
언젠가 로베르트 발저의 <벤야벤타 하인학교>를 읽으며 ‘하인’을 양성하는 학교라는 소재도 그렇지만 스스로 ‘하인’이 되겠다고 학교를 찾은 주인공 보며 충격을 받은 적이 있다. <남아 있는 나날>의 집사 ‘스티븐스’를 보고 있노라면 어떤 면에서는 <벤야멘타 하인학교> 속의 인물을 만났을 때의 당혹감이 느껴진다. 오히려 당혹감은 더 크다고 할까? 어쩔 수 없이 ‘계급적’ 위치 때문에 ‘집사’라는 직업을 가질 수는 있을지언정, 과연 인간이 그런 자신에게 자부심을 느낄 수가 있을까? 나로서는 도저히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었다. 물론 스티븐스는 자신의 의무를 그 어떤 순간에도 놓지 않았던 ‘프로페셔널’한 집사로 스스로에 대한 자부심이 큰 듯하지만…. 글쎄 스티븐스의 삶을 지켜보는 관찰자의 입장에서는 어쩐지 그의 자부심은 오히려 끊임없는 ‘자기변명’으로 밖에는 들리지 않는다.

그토록 ‘위대한 집사’로 살아가고자 아버지의 임종도 외면할 수밖에 없었고 사랑하는 사람도 놓칠 수밖에 없던 사람이라니! 얼마나 답답하고 한심한가! 그러면서도 ‘나는 집사로서 그렇게 밖에 할 수 없었고 그것은 최선이었다.’며 계속 되뇌는 모습은 끝끝내 비겁해 보일 뿐이다. 게다가 그토록 위대하게 우러러본 그의 주인 ‘달링턴 경’은 또 어떤 사람인가. 달링턴 경이 지시한 일이기 때문에 정의롭지 못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저 ‘묵묵히’ 행동하는 스티븐스는 도저히 인간적으로 좋아할 수는 없는 사람이었다. 나는 소설을 읽을 때는 어떤 한 사람이고 등장인물에게 몰입이 돼야 하는데 스티븐스는 이런 점에서 공감하기 어려운 주인공이었다. 가즈오 이시구로는 이런 답답한 인물을 통해 ‘인생에서 진짜 중요한 가치’를 독자에게 전하고 싶었겠지만…. 그의 서정적인 문체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이 딱히 아름답게 느껴지지 않은 이유는 아마도 내가 주인공에게 애정을 느끼지 못해서가 아닐까 싶다.
 
스티븐스는 여행에서의 회상을 통해 자기 인생의 어떤 부분은 많이 잘못되었음을 깨달았겠지만 그가 ‘남아 있는 나날’에서 얼마나 크게 다른 삶을 살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그는 여행에서 돌아가 여전히 달링턴 홀에서 새로운 주인 ‘페러데이’를 위해 또 다른 봉사를 열심히 할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저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에서 잘못된 부분을 깨달았다는 것만으로 만족해야 할까? 그것만으로도 스티븐스의 인생이 헛되지 않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러기엔 그의 인생이 너무 많이 지나갔고 상대적으로 남아 있는 나날은 참 짧아 보인다. 조금 더 일찍 깨달았다면….

인생을 살면서 사람들은 적어도 한두 번쯤은 후회를 하기 마련이다. 그때 그랬다면 어땠을까? 내가 이렇게 살지 않고 그렇게 살았다면 어땠을까 하는 쓸데없는 가정, 혹은 후회. 무언가 일이 좀 잘 안 풀릴 때 인간은 특히 그렇다. 요즘의 내가 딱 그렇다. ‘잘 못 살아온 게 아닐까?’ 이런 생각이 불쑥불쑥 자주 찾아온다. 스티븐스와는 정반대의 고민이다. 스티븐스처럼 오히려 ‘일’에 ‘프로페셔널’한 사람으로 살아왔다면 어땠을까 하는 그런 후회. 정답은 잘 모르겠지만 스티븐스와 비교하면 적어도 나는 그처럼 ‘허망한 일’, ‘허상’ 때문에 진짜 소중한 것들을 놓치고 살지는 않았다는 위안은 든다. 순간순간 행복하고 즐거웠기 때문에 그 ‘순간’을 놓쳤다는 이유로 후회스럽지는 않다. 그런데도 왜 ‘잘 못 살아온 건 아닌가?’ 하는 의문은 계속 드는 걸까. 내 ‘지나온 날’은 그런데 내 ‘남아 있는 나날’은 어떻게 살아야할까. 조금 더 일찍 깨달을 수만 있다면 좋으련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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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7-10-13 11: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 가지 오류를 집어내자면 소설에 등장하는
주인공의 이름은 스티븐슨이 아니라 스티븐스
랍니다.

제임스 아이보리의 영화는 잘 만든 것 같습니다.

소설이 (조금) 과대평가된 것 같다는 부분에 공감합니다.
아무래도 맨부커상 수상의 광휘 때문이 아닐까요.

잠자냥 2017-10-13 11:50   좋아요 0 | URL
하하하. 감사합니다. 줄기차게도 스티븐*슨*이라고 해놨네요. ㅎㅎ 수정해야겠습니다.
영화가 원작보더 더 유명했던 걸로 기억합니다. 아마 영화덕을 톡톡히 본 원작이라고 봐도 무방하지 않을까 싶을 정도고요. ㅎㅎ

공쟝쟝 2021-07-04 22:5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얽ㅋㅋㅋㅋ 저만 별 세갠줄 알았는데 여기 별 세개 또 있는데 잠자냥님ㅋㅋㅋ 그쵸? 스티븐스 할ㅈㅐ여… 앞으로의 나날은 일이 전부인 삶이 아니기를..

잠자냥 2021-07-04 23:50   좋아요 1 | URL
으윽 저 이 작품 별로 안 좋아해요. 스티븐스 노예 근성 어쩔….;
 
시키와 소세키 왕복 서간집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수필비평선집
나쓰메 소세키.마사오카 시키 지음, 박지영 옮김 /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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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뚜라미 소리가 들리는 가을밤이라 그랬을까, 오랜만에 빗소리가 들리는 밤이라 그랬을까. 그 밤, <시키와 소세키 왕복 서간집> 마지막 부분을 읽다가 울컥 무언가 치밀어 오르더니 끝내 눈물이 흘렀다. 죽음을 앞둔 시키의 마지막 편지와 그 편지를 받기 전에 시키에게 보낸 소세키의 편지. 모든 것을 알게 된 뒤, 그러니까 시키의 부고를 들은 다음 그 소식을 전해준 이에게 보낸 담담한 소세키의 답신을 읽을 때 끊임없이 눈물이 흘렀다. 책을 덮고 나서도 베개가 젖을 만큼 울었다.

지금 이 글을 쓰면서 그 편지들을 떠올리니 또 눈물이 나려고 한다. 이 모두가 시키와 소세키의 편지를 가을밤에 읽은 탓일까. 스물두 살 때부터 서른다섯. 13년 가까이 그 누구보다 가까웠을, 그 어떤 이보다 자신을 가장 잘 이해했을 친구. 그런 이의 죽음을, 그 소식을 마주한다는 것은 어떤 기분일까. 도저히 내가 헤아릴 수 없는 세계이지만 그 먹먹함은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아서 눈물이 흐른다. 소세키가 너무나도 담담하게 친구의 죽음을 받아들였기에 슬픔은 더욱 크다. 나쓰메 소세키는 영국으로 유학 떠날 때부터 ‘살아서 다시 만난다는 것은 도저히 이룰 수 없으리라’ 생각했다니 시키의 죽음을 어느 정도는 예상했던 것 같다. 그런데도 그 담담한, 모든 것을 체념하고 달관한 듯한 문장에서 눈물은 솟구친다. 시키와 소세키- 이 두 사람의 우정은 이렇게 나를 울린다.

나는 인간관계에 큰 뜻이 없다. 어릴 때부터 혼자서도 잘 놀았고 내가 크게 노력하지 않아도 주변에서 친구들이 먼저 다가왔기에 친구라는 존재에 목마른 적은 없다. 그래서 그런 걸까? 마음에 들지 않는 구석이 조금만 보여도 참 쉽사리 친구를 끊었다. 그러고 나서 후회한 적도 딱히 없다. 이제 내 주위에 남은 ‘친구’라고 부를 수 있는 존재는 열손가락? 아니 그보다도 한참 적다. 그럼에도 나는 내 삶에, 그 관계에 충분히 만족한다. 지금의 우정이 오래 이어진다면 바랄 게 없지만 혹 그렇지 못하더라도 그러면 또 그러려니 하고 살아갈 것이다. 이렇게 덤덤한데도 그 친구들이 죽는다고 생각하니 조금 슬프다. 언젠가 그들이 하나둘씩 세상을 떠나고 그 죽음을 받아들여야만 하는 날이 오리라고 생각하니 눈물이 난다. 이게 다 가을 탓이다......

시키와 소세키의 우정이 딱히 부럽지는 않았다. 나에게도 어언 10년 넘도록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친구들이 있으며 시키와 소세키가 그랬듯 나와 내 친구들도 취미가 비슷해서 가까워졌다. 만나면 어디서도 잘 하지 않는, 아니 할 수 없는 문학 이야기를 나누고 서로 이 책 저 책 묻는다. 물론 시키와 소세키가 주고받은 편지처럼 품격 넘치는 대화는 아니지만..... 마사오카 시키, 나쓰메 소세키- 한 사람은 시인이자 수필가로 또 한 사람은 소설가로 일본 문학계에 큰 획을 그은 인물들이니, 그 빼어난 문장으로 주고받은 편지들은 더없이 아름답다. 그리고 그 관계 또한 문장만큼이나 아름답다.

1889년 스물두 살 동갑내기로 처음 만난 그들은 관심 있는 공연이나 문학(주로 하이쿠) 이야기로 가까워진다. 서로 주고받은 편지 속에서 그 대화들은 해가 갈수록 한결 풍요롭고 해박하며 윤택해진다. 친구 사이이니 때로는 짓궂은 농담을 주고받기도 하지만 그 조차도 품위를 잃지 않고 서로를 향한 깊은 애정이 늘 그 바탕에 흐른다. 때로는 날카로운 설전이 오가기도 한다. 서로 문학적 가치관 차이에서는 뜨끔할 정도로 훈계하기를 서슴지 않는다. 비판과 질타 설전이 매섭다. 하지만 절대로 상대를 ‘비난’하거나 그로 말미암아 관계가 변질되지는 않는다. 가벼운 인간관계에 익숙한 오늘날엔 참 생소한 풍경이리라.

두 사람의 편지를 읽다 보면 소세키가 시키에게 많은 것을 빚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마사오카 시키는 소세키에게 하이쿠 첨삭지도를 해준 스승이기도 하며, 또 어떤 의미에서는 소세키가 문단에 나아갈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준 고마운 사람이기도 했다. 아니 이런 시키의 혜택을 설명하는 게 무슨 의미이랴, 어린 시절부터 딱히 의지할 곳 없던 고독한 나쓰메 소세키에게 정신적 뿌리가 되어준 것만으로도 시키는 그에게 가장 아름다운 사람이었을 것이다.

이 둘은 함께 있기보다 떨어져 있던 때가 더 많았다. 아주 가끔 은근하게 벗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전한다. ‘달은 동쪽에/ 자네는 지금쯤엔/ 자고 있을까’ 소세키는 잠못 드는 밤에 시키를 그리워하며 시키는 시키대로 ‘언제나 대형이 도쿄에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이런 마음도 지나치지 않아서 향기롭다. 편지를 보면 마사오카 시키는 소세키에 비해 좀 더 발랄하고 짓궂은 것 같다. 그러면서도 섬세하고 예민한 성정은 소세키 못지않다. 소세키는 또 소세키대로 얼마나 덤덤한지. 자기 결혼 소식조차도 참 무덤덤하게 전한다. 그런 가운데서도 자신이 여자로 태어났다면 기생집에서 일을 해서라도 시키의 학비를 대주고 싶다고 한다. 친구를 생각하는 그 마음에 흐뭇한 미소가 지어지다가도 ‘이 면상 때문에 안 되겠다’는 부분에서는 크게 웃고 만다. 아니, 나쓰메 소세키, 친구에게는 이런 농담도 할 줄 아네?!

사람이 만든 지위란 본디 허영이고 대학을 졸업하지 않으면 먹고살 수 없다는 사정도 아니니, 목숨을 소중히 여겨 여유롭게 공부하는 것이 옳다고 보네. 학자금상의 곤란에 대해서도 그러리라 짐작만 하고 있었을 뿐, 특별히 말씀드릴 묘안이 없구먼, 아무리 내가 기계로 된 거북 새끼를 발명하는 재능이 있어도, 열린 입에 팥떡을 던져 넣는 법을 알고 있다 해도, 그것만은 도저히 결론이 나지 않네. 내가 여자로 태어났다면 잠깐 청루(靑樓)에 몸을 담아 그대의 학비를 돕는다는 식의 별스러운 일도 가능할 테지만...., 그것도 이 면상으로는 어렵겠지. (104쪽 - 1891년 24살 소세키가 시키에게 보내는 편지)

편지를 하나씩 읽어갈 때마다 세월이 흐르고 그들도 조금씩 나이 들어간다. 정신적으로도 성장하고 우정도 더욱 깊어간다. 문학적으로도 서로 조금씩은 진일보한다. 소세키가 결혼도 하고 영국 유학도 떠나는 사이 안타깝게도 시키의 병세는 점점 더 나빠져만 간다. 서양에서 지내는 생활이 궁금한 시키를 위해 소세키가 영국 유학 시절을 상세하게 기록한 편지에서도 자못 친구를 생각하는 그 마음이 느껴져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시키가 병으로 몹시 고통 받을 때도 소세키는 건강을 걱정하는 염려를 담은 편지보다도 그저 묵묵히 시키를 위해 유학 생활을 꼼꼼히 기록해서 보낸다. 값싼 위로의 말보다도 친구가 정말 좋아하는 것을 말없이 행하는 이토록 진중한 우정이라니.....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에 살던 문학청년들이 주고받은 편지. 그 참된 우정의 기록은 그들이 주고받은 하이쿠처럼 은은하게 오래도록 여운이 남을 것 같다.



수세미꽃 피고

객담에 목이 막힌
부처로구나

객담이 한 말
수세미물도
이제 소용없어라

엊그저께의
수세미물도
이젠 그만 받았네.

-죽음을 앞둔 시키가 마지막으로 남긴 하이쿠




쓰쓰소데로
따라가지도 못한
가을날 운구

피워서 올릴
향불도 하나 없이
저무는 가을

연무 자욱한
도시에 떠도는가
그림자처럼

귀뚜리 소리
옛일을 그리면서
돌아가야지

부르지 않은
억새밭에 혼자서
돌아온 사람

-시키의 부고를 들은 뒤 지은 소세키의 하이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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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9-26 16:1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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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9-26 16:2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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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망 좋은 방」 을 읽고
전망 좋은 방 열린책들 세계문학 28
E. M. 포스터 지음, 고정아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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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문학 작품을 읽다보면 좀 지루한 감이 없잖아 있다. 너무 길다 싶을 정도로 불필요한 세부 묘사라든지 시대적 배경이 현대와 동떨어지기 때문에 소설에 몰입이 덜 된다든지 하는 것들. 그런데 E.M 포스터의 작품은 그 배경이 현대와 살짝 동떨어져 있어도 흥미진진하고 무척 재미있다. <전망 좋은 방> 역시 지금으로부터 약 100년 전의 시대 배경을 소재로 삼고 있지만 무척이나 흥미롭다.

이 책은 ‘로맨스’ 소설이다. 책 표지에 있는 남녀를 보면(1985년 제임스 아이보리의 동명 영화의 한 장면이다) 주인공 ‘루시 허니처치’와 어떤 남자가 나중에 잘 될 것인지 뻔히 보인다. ‘행복한’ 해피 엔딩을 맞이하는 뻔한(?) 결말의 로맨스 소설인데도 흥미롭게 읽히는 것은 포스터의 아이러니컬한 문장이 큰 역할을 한다. 비꼬는 듯, 비아냥대는 듯, 곳곳에서 키득키득 웃음을 유발한다. 그러면서도 이 작품은 ‘아름다움’을 잃지 않는다. 포스터의 소설이 거의 대부분 영화로 만들어진 이유는 아마도 생동감 있는 캐릭터, 마치 실제로 어떤 전경을 바라보는 듯한 생생하고도 아름다운 ‘묘사’가 아닐까. 특히 이탈리아의 제비꽃 밭에서 루시와 조지가 키스를 하게 되는 장면 묘사는 이 작품에서 가장 아름답고 로맨틱한 장면 중 하나가 아닐까 싶다.

이 작품의 제목이기도 한 ‘전망 좋은 방’은 여러 가지로 많은 점을 시사한다. 이탈리아 여행을 떠난 루시와 샬롯이 묵게 된 펜션의 방은 기대했던 것과는 달리 ‘좋지 않은 전망’을 갖고 있다. 창을 열고 이탈리아 풍경을 한껏 바라보기를 꿈꿨던 루시에게 ‘좋지 않은 전망’의 방은 얼마나 청천벽력인가! 낙담하고 있던 그녀에게 펜션의 또 다른 손님인 애머슨 부자가 나타나 자신들은 남자이니 ‘전망’ 따위는 필요 없다며 ‘전망이 좋은’ 자신들의 방을 사용하라며 루시와 샬롯에게 방을 바꾸기를 권한다. 이때 루시는 처음으로 어딘지 우울해 보이는 ‘조지 애머슨’을 처음 알게 된다. ‘전망 ’좋은 방’은 첫 번째로 루시와 조지가 서로 만나게 해주는 역할을 톡톡히 한다. 원래 사귀던 사람인 ‘세실’과 결혼을 약속한 뒤 루시와 세실이 나누는 ‘전망’에 관한 대화에서 ‘전망 좋은 방’이 갖는 두 번째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

그녀는 잠시 생각해 보고 나서 웃으면서 말했다. "어떻게 그렇게 잘 알죠? 정말 그래요. 아무래도 제가 시인인가 보네요. 당신을 생각하면 배경은 언제나 방 안이에요. 재미있는 일이네요!" 그런데 놀랍게도 그는 기분이 상한 것 같았다. "응접실입니까? 바깥 전망이 보이지 않는?" "네, 전망이 없는 방이에요. 그게 뭐 문제인가요?" "나는 당신이 나를 생각할 때 이런 넓은 야외를 떠올렸으면 좋겠어요." 그가 질책하듯 말했다. "세실, 무슨 말인지 정말 모르겠어요." 그녀가 다시 물었다. (p.156)

루시는 세실을 생각하면 ‘전망 없는 방’을 떠올리게 된다고 한다. 대부분의 독자는 아마도 이 구절을 읽으면 루시에게 걸맞은 상대는 역시 루시가 좋은 ‘전망’을 떠올릴 수 있는 ‘조지’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열려 있는 공간, 다른 모든 것들을 꿈꿀 수 있는 사람, 자신에게 주어진 교양, 인습, 세속적인 삶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기회를 줄 수 있는 사람, 즉 ‘좋은 전망’을 위해 스스로 자신의 ‘전망 좋은 방’을 포기했던 남자 ‘조지’가 ‘루시’가 찾고 있는 그 ‘남자’라는 것을 이 대화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이다. 이 사실을 미처 깨닫지 못하는 것은 ‘루시’뿐.

품격을 내세우는 영국 귀족들이 보기에 한없이 모자란 조지와 그의 아버지 ‘애머슨 부자’를 내세워 포스터는 케케묵은 인습과 고루한 예의범절에 갇혀 사는 ‘중세 시대’ 사람들을 꼬집는다. 그러면서 인간의 자유, 인습에 얽매이지 않는, 마음과 몸이 원하는 진실한 ‘사랑’에 대해 끊임없이 찬양한다. 100여 년이 지난 이야기지만 포스터의 <전망 좋은 방>이 지금도 여전히 많은 공감을 얻고 사랑을 받을 수 있는 것은 ‘좋은 전망’을 제시해 줄 수 있는 사람보다는 남들이 보기에 그럴듯해 보이는 사람을 선택하는 수많은 ‘중세 시대’의 사람들이 아직도 여전히 살아 숨쉬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열정이란 저항할 수 없는 것이어야 한다. 예의범절이라든가 심사숙고라든가 그 밖에 교양이라는 이름의 각종 족쇄를 잊는 것이어야 한다. 무엇보다 그것은 통행권이 있는 곳에서 허락을 구하지 않는 것이어야 한다. (p.158)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은 <루시가 조지 에머슨을 사랑한다>는 걸 분명히 알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루시의 입장에 선다면 그게 그렇게 분명하게 보이는 것은 아니다. 인생은 정리하기는 간단하지만 실제로 살기는 혼돈스러우며, 우리는 언제나 <신경>이라든가 다른 피상적인 말들로 내면의 욕망을 가려 덮으려고 한다. 그녀는 세실을 사랑했다. 조지는 그녀를 불안하게 했다. 누가 그녀에게 두 문장이 바뀌어야 한다고 말해 줄 것 인가? (p.206)

이런 식으로 갑자기 포스터(작가)가 개입하는 장면 너무 웃기다. ㅋㅋ

"하지만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그리고 그 사람보다는 제 사랑의 방식이 더 낫다고 확신합니다." 그는 잠시 생각했다. "맞아요. 제 방식이 더 낫습니다. 나는 당신이 내 품에 안겨서도 당신 자신의 생각을 하기를 원합니다." 그는 루시를 향해 팔을 내밀었다. "루시, 머뭇거리지 마요……. 이렇게 이야기할 시간이 없어요……. 지난봄에 그랬던 것처럼 그냥 나한테 달려와요. 그런 뒤에 내가 예의를 갖추고 모든 걸 설명할게요. 나는 그 남자가 죽은 뒤로 계속 당신을 좋아했어요. 당신 없이는 살 수 없어요. <부질없는 일이야. 다른 사람하고 결혼할 여자인걸> 그렇게 생각했지요. 그러다가 이 세상이 온통 물과 햇빛에 감싸여 눈부시게 반짝일 때 다시 당신을 만났어요. 당신이 숲에 들어왔을 때 나는 달리 중요한 건 아무것도 없다는 걸 알았어요. 나는 외쳤어요. 살고 싶어서, 내 인생에 기쁨을 줄 기회를 잡고 싶어서." (p.241)

꺄.. >_< 멋있는 조지!
 
사랑하는 사람들은 헤어질 수 없어요. 그럴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겠지요. 사랑을 비틀고 무시하고 혼탁하게 할 수는 있지만, 그걸 떨쳐 버릴 수는 없어요. 경험을 통해서 나는 시인들의 말이 옳다는 걸 알아요. 사랑은 영원합니다." 루시의 눈에 분노의 눈물이 솟구쳤다. 분노는 곧 사라졌지만 눈물은 남았다. "다만 시인들이 이걸 좀 말해줬으면 좋겠어. 사랑은 몸에 속하는 일이라는 걸 말이야. 몸 자체는 아니지만, 몸에 속하는 일이라는 걸. 아! 우리가 그걸 인정한다면 얼마나 많은 이 세상의 고통이 줄어들까! 그런 작은 솔직함이 우리 영혼을 해방시킬 텐데! 아가씨의 영혼 말이에요, 루시양! 나는 영혼이라는 말을 좋아하지 않아요. 이 말을 둘러싸고 퍼부어지는 미신들 때문에 말이오. 하지만 우리에겐 영혼이 있어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는 모르지만 분명히 있어. 그리고 아가씨는 지금 그 영혼을 억누르고 있어요. 그걸 가만 두고 볼 수가 없구려. (중략) 하지만 우리 아들놈이랑 결혼해요. 인생이 무엇인지 생각해보면, 또 사랑이 서로 응답하는 일이 얼마나 드문지를 생각해보면……. 아들놈하고 결혼해요. 이세상은 다 그런 일들을 위해 만들어진 거라고요." (293-294)




이탈리아 제비꽃 밭에서의 키스신 (상상했던 것과 비슷했다! 상상이 더 낭만적인가;)



꺄.. 이 장면 정말 낭만적이다; (루시 머리가 좀 웃기지만;;)



두근 두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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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9-19 13:1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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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9-19 15:0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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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7-09-21 14: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주 오래 전에 오스카 수상식에서
이 영화의 제목을 보고서 참 제목 한 번
기가 막히구나 싶었는데 포스터의 책이
었군요.

아쉽게도 영화나 책 모두 만나 보진 못
했지만, 그 시절의 기억을 안고 있네요.

잠자냥 2017-09-21 15:07   좋아요 0 | URL
영화와 책 모두 좋습니다. 언제 기회가 되신다면 꼭 한 번 만나보시길! ㅎㅎ
 
나의 사촌 레이첼
대프니 듀 모리에 지음, 변용란 옮김 / 현대문학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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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고난 이야기꾼, 아니 천재 이야기꾼이라는 표현이 무엇보다 적절한 작가들이 있다. 대프니 듀 모리에도 틀림없이 그런 작가 중 한 사람일 것이다. 대프니 듀 모리에의 단편선을 시작으로 <자메이카 여인숙>에 이어 <나의 사촌 레이첼>을 읽었다. 국내에 번역된 작품 가운데 아직 읽지 않은 작품은 <레베카>와 <희생양>. 두 작품이나 남아 있다니! 참, 다행이다!!

<나의 사촌 레이첼>은 확실히 재미있다. 이 작품보다 먼저 읽은 <자메이카 여인숙>도 흥미진진했지만 <나의 사촌 레이첼>이 이야기 몰입도로 치자면 별 두 개 정도는 더 주고 싶다고나 할까. 아니, 작품 전체적으로도 <나의 사촌 레이첼>이 여러 면에서 더 좋았다. 그저 단순히 책을 손에서 놓기 힘든, 흥미진진한 작품이라고만 하기엔 읽고 나서 한동안 이런저런 생각이 든다. 섣불리 결론 내릴 수 없어서 요즘 나는 주변 사람들에게 이 작품을 읽어보라고 권하고 있다. 읽어보고 이야기 좀 하자고. 이 서늘한 결말에 대해서.

사실 이런 작품은 줄거리, 그러니까 내용을 언급하는 것 자체가 이 책을 읽을 사람들에게 해서는 안 될 짓이다. 서스펜스가 작품을 압도하는데 이러쿵저러쿵 줄거리를 언급하는 일만큼의 만행이 또 어디 있겠는가. 그럼에도 <나의 사촌 레이첼>의 매력과 그 빼어남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몇 가지 이야기는 할 수밖에 없다. 그저 단순히 이 책 재미있으니까 꼭 읽어보라, 하기엔 설득력이 부족하지 않은가.

다들 잘 알겠지만, 혹시라도 ‘대프니 듀 모리에’를 잘 모르는 이들을 위해 짧게 언급하자면, 그녀의 별명은 이른바 ‘서스펜스의 여왕’ ‘히치콕의 뮤즈’이다. 히치콕의 그 유명한 영화 <새>의 원작을 쓴 사람도 그녀이며, 히치콕의 또 다른 영화 <레베카>의 원작자도 그녀이다. 대프니 듀 모리에가 쓴 작품들은 현재까지 50차례 이상 영화와 드라마화 되었다. <나의 사촌 레이첼>도 여러 번 영화로 만들어졌고, 곧 국내 개봉을 앞두고 있다. 원작을 다 읽은 지금, 영화도 꽤 기대된다. 스크린으로 만날 레이첼, 그녀는 어떻게 그려질 것인지…….

<나의 사촌 레이첼>은 처음부터 음울한 분위기로 시작한다. 서술자인 필립이 어린 시절 교수대에 목 매달린 사람을 본 광경을 떠올리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때문에 독자는 이 이야기가 행복한 결말은 아닐 것이라는 짐작은 쉽게 할 수 있다. 그럴 즈음 레이첼의 등장과 함께 예상대로 그들 사이에 무언가 불행한 일이 일어났음을 알게 된다. 필립과 앰브로즈 두 남자에게 일어난 일은 과연 무엇일까? 그 일은 어떻게 일어난 것일까?

“필립, 본인에겐 아무 결점이 없는데도 재앙을 불러오는 여자들이 더러 있단다. 좋은 여자들인 경우도 아주 흔하지. 그들은 뭐든 손을 대기만 해도 비극을 일으킨다. 너한테 내가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지 모르겠다만 꼭 해줘야 할 것 같구나.”

본인에게는 아무런 결점이 없는데도 재앙을 불러오는 여자, 그녀가 바로 ‘레이첼’일 것이라고 쉽사리 예상할 수 있다. 필립은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부모를 잃는다. 고아가 된 그가 안쓰럽던 앰브로즈는 어린 사촌에 대한 연민으로 필립을 데려다 키우기 시작한다. 필립과는 꽤 나이 차이가 나는 앰브로즈는 그만의 독특한 방식으로 필립을 훈육한다. 그는 어쩐지 여성혐오자, 아니 어떤 면에서는 인간혐오자로도 보인다.

그러던 그가 건강 악화로 습하고 어두운 콘월 지방을 떠나 햇볕이 잘 드는 지역, 지중해 연안으로 여행을 떠나게 된다. 필립에게 저택을 잘 지키고 있으라는 말을 남기고 훌쩍 떠난 앰브로즈. 그런데 곧 돌아올 줄 알았던 그의 여행은 꽤 길어진다. 이따금 보내는 편지로만 소식을 알 수 있을 뿐인데, 그 편지로 필립은 앰브로즈가 한 여인을 만나고, 사랑에 빠지고 그녀와 결혼했음을 알게 된다. 평생 독신으로 지내겠다던 앰브로즈가 말이다! 문제의 여인, 그녀의 이름은 ‘레이첼’-

앰브로즈와도 먼 친척 관계이고 그러므로 필립과도 친척 관계인 레이첼. 결혼까지 했으니 곧 신부와 함께 돌아올 것도 같은데 앰브로즈는 여전히 돌아올 줄 모른다. 그러다가 청천벽력과도 같은 소식이 전해온다. 앰브로즈가 죽은 것이다! 죽기 직전 앰브로즈는 필립에게 전과는 사뭇 다른 편지들을 보내온다. 이런 상황에서 필립 앞에 레이첼이 나타난 것이다. 앰브로즈의 편지들 때문에 필립은 레이첼이 그의 죽음과 관계가 있으리라 생각하고 그녀에게 복수를 다짐한다. 그런데 인생사가 대부분 그렇듯이 그 결심은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인간의 감정은 계획할 수 없으며 예측할 수는 더더욱 없기 때문이다.

지금 말한 내용들은 거의 작품 초반으로, 500쪽을 훌쩍 넘는 분량 가운데 처음 50~60쪽에 다 드러나는 이야기들이다. 남은 400쪽 이상은 순전히 필립과 레이첼, 그리고 앰브로즈의 편지들로 이루어진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무척 흥미진진하다. 독자의 예상대로 가는 부분도 있고 전혀 뜻밖의 부분도 있다. 거의 모든 독자가 예상할 수 있듯이, 필립은 계획대로 레이첼을 대하지 못한다. 처음에는 그랬는지도 모른다. 적대적으로 무엇이든 삐딱하게 그녀를 대하기. 그런데 모두가 예상할 수 있듯이 그는 자기도 모르게 차츰 레이첼에게 매혹 당한다. 그리고 그 감정에 스스로도 놀라워한다. 어쨌든 그녀는 앰브로즈의 아내이지 않은가? 그가 이제는 죽었고 늘 검은 상복 차림의 그녀이지만, 그럼에도 필립은 레이첼을 향한 감정을 점점 숨기기 어려워진다. 필립과 레이첼은 어떻게 될 것인가.

자꾸만 결말이 궁금해서 마지막 장을 펼쳤다가, 마음을 가다듬고 다시 앞으로 돌아오기를 몇 번이나 반복하는 사이에 어느덧 그 마지막 장을 읽게 되었다. 책을 다 읽고 난 뒤에는 당혹감과 쓸쓸함, 연민과 같은 이 작품을 처음 읽기 시작했을 때는 전혀 예상치 못했던 감정에 휩싸였다. 이 작품에 그려진 사랑의 온갖 모습이 마음을 어지럽힌다. 이야기를 이끌어나가지만, 사실 100% 믿을 수 없는 화자인 필립. 게다가 앰브로즈의 편지는 과연 정말 진실만을 담았을까? 그 두 남자의 고통과도 같은 사랑, 그 열병과도 같은 상태가 이해가 되기도 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 사랑이, 그들의 시선이 정말 온당한가 의심하게 된다. 그들이 느끼고 바라본 ‘레이첼’은 진짜 ‘레이첼’일까? 헛헛하고도 쓸쓸한 감정이 몰려온다.

레이첼 또한 그렇다. 그녀의 이야기는 모두 진실일까? 그녀는 정말 선한 여자였을까? 아니면 팜므파탈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을까? 도무지 알 수 없다. 그녀는 죄인일까? 아니면 천사일까? 두 남자의 시선으로만 그려진, 그렇기에 ‘레이첼’이 아닌 ‘나의 사촌’인 레이첼, 필립이나 앰브로즈 두 남자에겐 그저 결국 ‘대상’일 수밖에 없는, 그들의 시선 속에 가두어진 ‘레이첼’- 그것이 진실한 그녀의 모습일까? 그러므로 영원히 누구도 그녀의 진실은 알 수 없는 것일까? 대프니 듀 모리에가 레이첼을 이르러 ‘이 여인은 천사인지 악마인지 결코 알 수 없을 것이다’ 했다는데 정말로 그렇다.

그런데 잘 생각해 보면 거의 모든 사랑이 그러하지 않은가. 누군가를 사랑하게 됐을 때 우리는 그 누군가를 잘 안다고 생각하지만 ‘잘 안다고 생각’하는 그 모든 것들은 자신이 만들어낸 환상일지도 모른다. 감정 상태에 따라 선한 얼굴이 악한 얼굴이 되기도 하고, 못나게 보였던 점들도 그 사람을 사랑하게 되면서 세상에 다시없을 장점으로 보이기도 한다. 모두 마음의 상태에 달렸다. 필립이 처음 봤을 때는 평범하다고 생각했던 레이첼이 그녀를 사랑하게 되면서 세상 그 누구보다 아름다운 여인으로 느껴지는 것처럼 말이다. 그 순수한, 완전무결할 것 같던 사랑이 뒤틀리는 순간은 의심과 질투가 찾아들어올 때이다. 필립과 앰브로즈 또한 그 덫에서 자유롭지는 않다. 덫에 걸린 두 남자가 뜨겁게 사랑하고 욕망한 ‘레이첼’- 그녀의 진실을, 참모습을 나는 좀 더 선한 쪽으로 해석하기에 이 작품의 결말은 몹시도 쓸쓸하고 애잔하다. 자, 필립과 앰브로즈의 눈이 아닌 당신만의 시선으로 '레이첼'을 바라보고 싶지 않은가?


덧: 작품을 읽을 분은 이 책 첫머리에 실린 로저 미첼 감독의 서문은 일단 넘기고 본 작품부터 읽으시라. 큰 스포일러는 없지만 그래도 작품을 다 읽은 뒤에 서문을 읽는 편이 더 좋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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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olcat329 2021-03-23 13: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마지막 팁~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