뱀과 물 배수아 컬렉션
배수아 지음 / 문학동네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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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루 아워’라는 말이 있다. 해 뜰 무렵과 해 질 무렵의 시간대를 의미하는 말로 이때는 하늘이 완전히 어둡지도 않고 그렇다고 밝지도 않아 푸르스름한 빛을 띤다. 그때 저 멀리 보이는 짐승이 개인지 늑대인지 구분하기 어려운 순간이 발생하기도 하는데, 때문에 이때를 ‘개와 늑대 사이의 시간’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밤도 아니고 낮도 아닌, 꿈도 아니고 현실도 아닌 그 어딘가. 나를 향해 다가오는 짐승이 개인지 늑대인지 구분할 수 없는 어렴풋한 시간. 배수아의 <뱀과 물>을 읽어나가면서 나는 ‘블루 아워’를 떠올린다.


배수아의 작품은 오랜만에 읽는다. 오래 전 <푸른 사과가 있는 국도>와 <나는 이제 니가 지겨워>를 읽던 시절, 그 무렵 배수아의 작품에는 어른이 존재하지 않았다. 아니, ‘어른’의 모습을 쉽게 찾아볼 수 없었다. <푸른 사과가 있는 국도>의 인물 중 한 사람은 스무 살을 전후로 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고 결국 언제까지나 ‘아이’로 머물게 된다. 또한 이 무렵 배수아의 작품에서는 사회는 존재하지 않고 개인만 존재한다. 가장 작은 단위의 사회라고 할 수 있는 가정의 모습조차도 굴절되어 있거나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는다. 


아주 오랜만에 읽은 <뱀과 물>에서도 이런 경향은 여전하다. 이 책에 실린 거의 모든 작품은 아이들이 주인공이다. 그리고 그 아이들 대부분은 부모가 없다. 있더라도 부재중이라서 아이들은 부모를 찾아서 여행길에 오른다(「눈 속에서 불타기 전 아이는 어떤 꿈을 꾸었나」, 「노인 울라에서」, 「1979」). 간혹 아이 곁에 있더라도 미쳐서 부모의 역할을 할 수 없다(「얼이에 대해서」) 그러나 예전 배수아의 작품과 크게 달라진 점이 있다면 <뱀과 물>이 그리는 세계는 ‘꿈’의 세계이다. 시공간도 불명확하며 이야기를 엮어가는 그들이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도 불분명하다. 어떤 작품에서는 아이의 성별도 뚜렷하지 않다(「눈 속에서 불타기 전 아이는 어떤 꿈을 꾸었나」, 「얼이에 대해서」, 「1979」, 「노인 울라에서」).


예전 작품이 현실에 굳게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면 <뱀과 물>의 작품들은 꿈을 꾸는 듯, 아니면 혼곤한 잠에서 깨어난 듯 몽환적인 세계를 그린다. 그런데 그 세계는 무척 매력적이다. 저 멀리서 걸어오는 아이가 소년인지 소녀인지, 아이인지 어른인지, 죽었는지 살았는지, 꿈속에 나타난 물체가 살이 찐 뱀인지 어린아이 몸인지, 모든 것이 혼란스럽고 흐릿하다. 그 모두는 ‘육체성을 상실했으며 모서리와 윤곽만’(「1979」) 보이는 희미한 세계이다. 그 안에서 ‘우리의 망상 속에서 누런 개처럼 돌아다니는 유령’(「1979」)과도 같다.


때때로 나는 기억해두고 싶은 꿈은 잠에서 깨어나 메모를 한다. 그 메모 속 단어들을 뒤늦게 살펴보면 퍼즐 조각처럼 단편적이다. 그런데 그 퍼즐들을 조각조각 맞춰나가다 보면 하나의 큰 그림이 보이기도 한다. 배수아의 <뱀과 물> 속 단편들은 그 퍼즐 조각 하나하나와도 같다. 그 조각들을 맞추다 보면 여전히 아리송한 빈틈이 있기는 하지만 하나의 큰 그림이 흐릿하게 눈앞에 그려진다. 그 그림은 다음과 같다. 눈이 내리는 사막 한 가운데 우뚝 서 있는 아이이기도 하면서 어른이기도 한, 때로는 엄마이기도 하고 또 때로는 할머니이기도 한 어떤 여성의 이미지.


「눈 속에서 불타기 전 아이는 어떤 꿈을 꾸었나」에서 ‘눈 아이’는 일곱 살 생일을 전후로 성별이 달라진다. 아이의 엄마는 마술사이며 아버지는 서커스단의 눈표범 조련사이다. 아이는 아버지를 찾아 스키타이족의 무덤을 찾아가고 있다. 이 이야기의 후속작이 틀림없는 「노인 울라에서」퍼즐 조각은 좀 더 또렷해진다. 아이의 아버지는 거인이다. 아버지는 언덕 위에 선 느릅나무처럼, 멀리서도 한 눈에 알아볼 수가 있다. 하지만 동시에, 마치 아버지가 읽어주는 그림책 속의 이야기처럼, 아버지는 아무것도 아니다. 아버지는 사령관일까? 눈표범 조련사일까? 


아이는 그곳에서 붉은 리본을 묶은 눈먼 소녀를 만난다. 그 소녀 또한 아버지를 찾고 있다. 소녀의 어머니는 여행을 떠난 뒤로 영영 돌아올 줄을 모른다. 자신을 ‘눈 아이’라고 말하던 눈먼 소녀가 사라진 뒤 ‘나’는 자신이 ‘눈 아이’라고 말한다. 이 아이 또한 일곱 살 생일까지는 사내아이로 살지만, 일곱 살 생일이 지나면 여자아이가 된단다. 나쁜 여왕이 어린 여자아이들을 잡아가기 때문이다. 


「눈 속에서 불타기…」와 「노인 울라에서」가 꿈결 같은 이야기라면, 그 이야기의 현실 버전은 「얼이에 대해서」가 아닐까. 얼이의 어머니는 마술사 대신 ‘미친년’이다. 얼이의 아버지는 서커스단에서 일하는 마술사인데, ‘우리’는 그의 마술을 한 번도 본 일이 없다. 얼이는 북쪽에 위치하는 ‘반두’에 가야 한다고 말한다. 그곳이 얼이의 고향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얼이는 반두에 가지 못한 채 시체로 발견된다. 한편, 이 이야기의 화자는 줄곧 소년처럼 묘사되는데, 뜻밖에도 ‘나’의 누나는 ‘나’를 사내아이가 아니라고 말한다. ‘눈 아이’와 ‘눈먼 소녀’가 ‘얼이’와 ‘나’로 대체된 것이다.


“언제까지 사내아이처럼 개구쟁이 짓만 하고 다닐래? 넌 여자애잖아. 너 때문에 창피해서 동네에서 고개를 못 들겠어.” (「얼이에 대해서」,72쪽)

“어린 여자아이를 잡아간다는 악령 이야기는 마술사가 꾸며낸 미신일 뿐이니까. 겁낼 필요 없어. 더 이상 사내아이 흉내를 낼 필요도 없어.”  (「얼이에 대해서」,76쪽)


반두로 간다면서 사라진 얼이는 어디로 갔을까? 정말 죽은 것일까? 「도둑 자매」에는 줄곧 살아있는 줄 알았지만 실은 죽은 아이가 등장한다. 아이는 자신이 죽은 것이냐고 묻는다.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고 다른 소녀가 답한다. ‘어머니가 도랑에 집어던진 너를 내가 건져 올렸지만, 그건 어쩌면 너무 늦었을지도 모른’다고(「도둑 자매」). 소녀를 죽인 사람은 소녀에게 달콤한 도넛을 건넨 돼지 장수였을까? 아니면 함지박을 이고 가는 식모아이나 책가방을 든 여학생들이 나타나면 흙먼지 자욱한 길가에 지프를 세우고 “태워줄까?”하고 묻던  멋쟁이 젊은 남자일까? 이 작품에서 소녀는 ‘어린 시절이라고 불리는 거무스름한 낡은 주물 거울에 영원한 작별을 고한다’ (「도둑 자매」).


그렇게 어린 시절과 작별한 아이는 교사가 되는데, 여교사이기도 하고(「뱀과 물」), 남교사이기도 하다(「1979」). 어쩌면 이 사실은 중요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어차피 그 둘은 하나이니까. 일곱 살 전에는 소년이었다가 일곱 살 이후로 소녀가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남교사는 키 큰 소녀를 자기도 모르게 욕망하기도 하고, 리우진이라는 학생의 성별을 오해하기도 한다. 그런데 리우진의 존재를 인식한 다음, 그 아이의 자리를 유심히 살피니, 마치 단 한 번도 사람이 앉지 않았던 것처럼 보인다. 잊고 간 연필이나 지우개, 책상 위의 낙서, 칼로 그은 자국, 납작하게 말라붙은 껌 등 아이들 책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흔적이 전혀 없다. 심지어 냄새조차 없다. 아이는 존재했던 것일까? 아니, 어린 시절은 존재했던 것일까? 남교사에게 그의 동생이 하는 말은 의미심장하다. 


“어린 시절은 망상이에요. 자신이 어린 시절을 가졌다는 믿음은 망상이에요. 우리는 이미 성인인 채로 언제나 바로 조금 전에 태어나 지금 이 순간을 살 뿐이니까요. 그러므로 모든 기억은 망상이에요. 모든 미래도 망상이 될 거예요. 어린아이들은 모두 우리의 망상 속에서 누런 개처럼 돌아다니는 유령입니다.” (「1979」, 94쪽)

「1979」에서 교사는 죽은 아기의 몸뚱이를 본다. 「뱀과 물」의 여교사 또한 그렇다. 아니, 정확히 그녀는 꿈에서 태아를 씹어 먹는다. 이 아이는 얼이가 아닐까? 아니면 「도둑 자매」 속 죽은 소녀일까. 그 둘 다일 수도 있다. 남교사가 뱀인지 아이인지 구분하기 어려운 꿈을 꾼다면 여교사는 매일 밤 꿈속에서 뱀과 물을 본다. 그러다가 문득 눈을 뜨면 늙은 길라가 자신을 빤히 내려다보고 있다. 어린 길라, 여교사 길라, 늙은 길라는 평생 동안 생명 있는 것들과 불화해왔다. 그중 최초는 자신의 아버지였고 가장 마지막은 여교사 자신이다.


‘모든 것이 시작과 동시에 늙었고, 살기도 전에 너무도 오래되었던’ 어느 날 떠돌기 시작한 길라. 그녀 또한 어머니도 아버지도 없다. 그녀 앞에 문득 나타난 여승은 말한다. ‘꿈은 글과 마찬가지로 직관의 일종’이라고. ‘어쩌면 너는 아이가 아닐지도 모른다’고. “네 안에는 아주 늙은 네가 살고 있을지도 몰라. 늙은 그녀가 너무 이른 시기에 밖으로 나오지 못하도록 해라. 만약 그녀가 미친 닭처럼 순식간에 훨훨 날아가 버리면 너는 평생 그녀를 쫓아다녀야 하는 거야. 아니면 그녀가 너를 쫓아다니겠지.”(「뱀과 물」, 206쪽)


여교사는 자신의 어린 시절을 ‘막 덤벼들기 직전의 야수와 같았다’고 기억한다. ‘염세적인 사람은 일생에 걸친 일기를 쓴다. 그가 어린 시절에 대해서 쓰고 있는 동안은 어린 시절을 잊는다. 갖지 않는다. 사라진다.’ 말한다. 여교사의 이런 생각은 어린 시절은 망상과도 같으며, 우리는 이미 성인인 채로 언제나 바로 조금 전에 태어나 지금 이 순간을 살 뿐이라는 「1979」 속 동생의 말과도 통한다. 


이렇듯 배수아의 <뱀과 물>은 모서리와 윤곽만 보이는 희미한 세계에서 ‘우리의 망상 속에서 누런 개처럼 돌아다니는 유령’과도 같은 어린 시절을 그린다. 그런데 그 시절은 이미 지나간 것이 아니라 현재 내가 살고 있는 시간이기도 하며 어쩌면 앞으로 살아갈 시간이기도 하다. 소설의 공간이 모호하듯이 시간 또한 뒤섞여 흐른다. 순서대로 흐르지 않는다. 나는 아이였다가 어른이었다가 소년이었다가 소녀이기도 하며, 엄마였다가 할머니이기도 하다. 반두의 여왕이었을지도 모를 할머니(「기차가 내 위를 지나갈 때」)는 어쩌면 아버지를 찾아 나섰던 ‘눈 아이’가 아니었을까?「기차가 내 위를 지나갈 때」의 ‘잭’의 말처럼 ‘우리의 경험이란, 사실 우리의 직관이 눈에 보이는 형체를 입고 나타나는 것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삶은 그냥 거울 속에서 태어났다가 죽는 것이고,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 저절로 있다가, 언젠가 그레이하운드를 타러 가게 될 것’이라고(「도둑 자매」, 184쪽) 이 꿈결 같은 이야기는 매혹적으로 속삭인다. 당신 또한 이 흥미진진한 퍼즐을 직접 맞춰보고 싶지 않은가? 미로와도 같은 <뱀과 물>을 헤매다보면 틀림없이 당신은, 이 작품과 당신과의 ‘비밀스러운 결속’에 기뻐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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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0-01 21:3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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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0-01 21:4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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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0-02 01:1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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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0-02 09: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eBook] 세상이 끝날 때까지 아직 10억년 열린책들 세계문학 52
A.스뜨루가쯔키 외 지음 / 열린책들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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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어나는 책을 감당하지 못해 드디어 이북리더기(크레마 사운드)를 마련했다. 사둔 종이책이 많아서 그것부터 읽느라 이북리더기에 이렇다 할 작품을 구매해서 다운받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드디어 처음으로 산 책이 <세상이 끝날 때까지 아직 10억년>이다. 전자책 시장은 종이책에 비해 아직은 선택의 폭이 넓지 않아서 사고 싶은 책이 드문데, 다행히 열린책들 세계문학시리즈에서는 좀 구매하고 싶은 책이 있더라.

이북리더기로 한참 재미나게 <세상이 끝날 때까지 아직 10억년>을 읽고 있을 때였다. 3분의 2쯤 읽었을 때였나? 그러니까 거의 발단-전개-위기를 지나 절정에 이르렀을 즈음이었는데, 책을 읽던 중 잠시 딴 짓을 하다가 다시 리더기를 집어 들었더니, 기계가 화면 보호 상태에서 멈춰버렸다. 단추란 단추는 모두 눌러보면서 기계가 정상적으로 작동하게 하려고 온갖 애를 썼는데도 먹통이다. 아아아아- 이것이 바로 시스템 다운이란 말인가.

리셋 버튼을 누르기 위해서는 바늘이 필요했다. 아주 작은 그 구멍 안에 바늘을 집어넣어야만 했다. 아니, 그런데 집에 바늘이 없다! 아아아아. 이 무슨 날벼락인가. 그날 밤 나는 리셋 버튼을 누르기 위해, 그리하여 굳게 봉인된 <세상이 끝날 때까지 아직 10억년>의 절정에 다시 접속하기 위해 온갖 방법을 강구했지만 끝내 실패하고 궁금증을 가득 안은 채 잠들어야만 했다. 내일 꼭 바늘을 준비하리라…….

다음날, 옷핀을 구해서 리셋 버튼을 누르는 데 성공했다. 크레마 사운드가 다시 작동한다. 자, 이제 다시 읽어볼까! 기쁜 마음으로 읽던 페이지를 찾는다. 아니,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기기가 읽던 페이지를 찾아가는가 싶더니 배터리가 0%라면서 아예 전원이 나가고 말았다. 화면 보호 상태로 밤새 켜진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니 배터리가 방전된 것이다. 하아. 거참, 나는 이북리더기를 충전하느라 몇 시간을 또 기다려야만 했다.

이런 이야기를 구구절절 하는 까닭은, 바늘을 찾고, 충전하는 동안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 책의 절정, 드디어 진실에 닿을 무렵, 잘 작동하던 기기가 난데없이 다운되고, 가까스로 리셋에 성공하니, 이제는 충전을 해야만 그 진실에 접근할 수 있는 사태. 바로 이 상황이 혹시, 이 책, 이 작품의 진실에 닿지 못하게 하려는, 아니면 그 시간을 최대한 지연시키려고 하는 어떤 거대한 세력이 기획한 하나의 음모가 아닐까 하는……. <세상이 끝날 때까지 아직 10억년>의 진실에 닿기까지 ‘아직 10여 쪽’- 그런데 그걸 이 지구의 어떤 거대한, 내가 미처 알지 못하는 세력이 방해하는 것이다.

망상이 지나치다고? 그러나 이 책을 읽은 사람이라면, 그래서 흠뻑 이야기에 빠졌던 사람이라면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도 남지 않았을까? <세상이 끝나기까지 아직 10억년>이 바로 그런 세계를 그리고 있기 때문이다. 연구에 몰두하던 천문학자 말랴노프에게 어느 날 갑자기 이상한 일이 시작된다. 아침부터 전화가 계속 잘못 걸려오고, 주문하지도 않은 식료품이 배달되지를 않나, 급기야 아내의 친구라면서 낯선(그렇지만 미모의) 여인이 찾아오기도 한다. 게다가 그 여인은 좀처럼 돌아갈 생각을 하지 않는다. 이런 일로도 모자라, 이웃에 살던 스네고보이가 말랴노프를 만난 뒤로 시체로 발견된다. 이런 모든 정황은 말랴노프에게 불리하게 돌아가고, 형사는 그를 범인으로 단정 짓는 분위기이다. 그런데다가 이게 웬일인가? 알리바이를 증명해줄 여인, 아내의 친구는 그새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이 모든 상황이 그저 운 나쁜 어느 하루의 해프닝일까? 만일 당신에게 이런 일이 일어난다면 지독하게 운이 나쁜 하루, 그렇지만 결국 다 좋게 해결될 일이라고 생각할 것인가? 혹시 이 모든 게 모종의 세력이 당신에게 가하고 있는 암묵적인 협박이라면?

동료들의 이야기를 종합해 진실에 점차 다가가는 말랴노프는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된다. 우주에 존재하는 어떤 4차원 문명이 오래전부터 말랴노프를 비롯해 바인가르텐, 구바르, 스네고보이, 글로호프 등을 관찰(명백히는 감시)하고 있던 것이다. 그런데 이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천문학자, 정밀 공학자, 물리학자, 생물학자 등등 그들 모두는 ‘학자’로 지적 업무에 종사하면서 모두 현재 어떤 중요한 실험이나 발견을 마무리 짓는 단계에 와 있다는 점이다. 우주에 존재하는 그 4차원 문명은 그들의 연구를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지켜봐왔다.

그들의 연구가 어떤 지점에 이를 것 같으면(그러니까 절정에 이르러 어떤 결론을 도출할 과정에 다다를 즈음이면!), 4차원 문명은 그 연구를 저지하기 위해 최대한 자연스럽게 연출한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한다. 예를 들어 바인가르텐에게는 어느 날 문득 연구소 소장 자리가 제의되거나 연구소에서 바캉스 스캔들이 일어나기도 한다. 그의 주의를 흩트리기 위해 희귀한 동전이 담긴 동전함의 발견되기도 한다. 모든 것은 우연이 아니다. 4차원 문명이 정한 대로 작동하는 것이다. 4차원 문명은 그들이 만일 협조한다면 모든 속물적 욕망을 기꺼이 충족시켜 줄 것이라고 약속한다. 그러면서 당장 바인가르텐에게 선물을 주는데, 그것은 직업 우표 수집가가 아니면 가치를 상상도 못할 정도로 희귀한 우표가 가득 담긴 꾸러미였다.

혹시 이런 일이 당신에게도 일어난다면 어떨까? 당신이 하는 어떤 일을 누군가가 내내 감시하다가, 그 일을 견제하기 위해 당신의 온갖 속물적인 욕망을 채워주겠다고 제안한다면? 당신은 자신이 하던 그 위대한(?) 일을 계속해나갈 것인가 아니면, 속물적 욕망이 가득 채워진 안락한 삶을 선택할 것인가? 이 책에는 그런 선택의 기로에 선 인물이 등장한다. 물론 이미 보이지 않는 존재인 ‘그들’의 협박에 굴복해 속물적인 욕망을 받아들이고 안락하게 살아가는 인물도 있다. 여전히 눈앞에 펼쳐진 그런 유혹에 어떻게 할까 고민하는 인물도 있고, 끝까지 그들에게 맞서 싸우기로 결심하는 인물도 있다.

그렇지만 그 4차원 문명, 세상이 창조된 때부터 존재했던 ‘9인 연합’이라는 존재에 맞서 싸우기란 쉽지 않아 보인다. ‘인류의 모든 과학 업적을 수집하여 자신들이 지배’하고 ‘인류가 과학 기술의 진보를 자기 파괴의 목적에 이용하지 못하도록 통제’하는 일에 목적이 있는 그 전지전능한 이들에 맞서 싸우기는 쉽지 않다. 말랴노프의 말처럼 ‘만일 그들이 어떤 전투적인 외계인이거나 아니면 4차원의 세계로부터 온 흡혈귀 같은 침략자들’이었다면 상황은 훨씬 편했으리라. 그러면 ‘적어도 다른 모든 사람들과 운명 공동체’였을 테니까. 그러나 이들은 아무도 모르게, 철저하게 혼자서 파멸할 운명이다.
 
때문에 4차원 문명에게 항복하고 ‘변절자’와도 같은 삶을 살고 있는 한 인물에게는 비난의 감정보다는 연민이 든다. 나라도 그렇게 하지 않았을까? 그를 이해하고 공감하게 된다. ‘항복한다는 것은 과히 유쾌한 일이 아니죠. 과거에 사람들은 항복한다기보다는 차라리 스스로 목숨을 끊는 쪽을 택했죠. 무슨 고문이나 감방 생활, 아니면 처형당하는 것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수치스러워서 그랬지요.’라고 말하는 그. ‘용감한 자들 가운데서 자기만이 비겁한 게 수치스러’워서 다른 이들도 모두 똑같이 비겁하길 바라는 그. ‘자신의 추한 모습을 마주 대할 용기가 없는’ 그. 하지만 그가 안락한 삶을 살고 있다고 해도 그리 행복해 보이지는 않는다. ‘아직 목숨은 부지하고 있지만 더 이상 예전의 자신이 아니’기 때문이다. 부서진 육체, 부서진 영혼…….

거의 모든 SF 작품이 그렇듯이 <세상이 끝날 때까지 아직 10억년> 또한 SF 외피를 입었지만 그 속내를 들여다보면 소련 사회에 대한 은유로 읽힌다. 억압적인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자행되는 감시와 처벌. 체제에 위협이 되는 학자나 과학자 같은 지식인 무리, 협박과 회유. 그 속의 변절자 등등. “우리 앞에는 전쟁이 기다리고 있는 셈이야. 그들의 무기는 은폐야. 그러므로 우리의 무기는 폭로야. 우리가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은 동포들에게 이 사건을 폭로하는 거야. 우리의 말을 믿을 정도로 상상력이 있고 또 한편 학계의 고위층 간부들을 설득할 만한 권위가 있는 동료들을 먼저 선정해야 해.”라는 베체로프스키의 말은 이 모든 일들이 그저 전지전능한 우주의 어떤 존재와 나약한 지구인의 싸움이 아니라, 공고한 체제와 그 체제를 위협하는 인물들과의 싸움임을, 그것의 은유임을 여실히 보여준다.

‘인류는 자신들도 의식하지 못하는 가운데 이 미지의 4차원 문명의 주의를 끌게 되었다’. ‘우리는 무의식중에 4차원 문명의 영역으로까지 침범했고, 따라서 그들은 인류의 진보를 통제’하기로 결정했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인간은 모두 어떤 위대한 일을 하기로 태어났는데, 대개의 인간이 그저 평범한 소시민으로 살다 죽고 마는 것은 모두 저 거대한 우주. 4차원 문명, 9인 연합이 그려놓은 ‘큰 그림’의 하나가 아닐까. 우주의 항상성을 지키기 위해 보통의 인간들은 소시민으로 살다 죽는 것이다. 그리하여 ‘선의 이쪽 편에 남아 차를 마시거나, 맥주를 마시거나, 맥주와 보드까를 섞어 마시’며 ‘승진이나 소문 등에 관해 주절거리고, 자동차를 사기 위해 저축을 하고, 가사에 보탬이 되기 위해 따분하고 시시한 공식 연구에 손을 대며’ 그저 그렇고 그런 삶을 살다 가는 것은 아닐까.

물론 말랴노프에게는 사랑하는 아내 ‘이르까’와 토끼 같은 자식 ‘보브까’가 있고 그의 그런 소시민적 선택으로 아이는 무사히 자랄 것이다. 그러나 말랴노프가 생각하듯이 아이는 절대로 그가 바라던 유형의 청년으로 자라지 못할 것이다. 그에겐 이미 ‘자식이 그래 주길 바랄 권리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소시민으로서 살게 될 자신을 그리면서 혼자 중얼거리는 말랴노프의 마지막 말은 무척 쓸쓸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서글프다. ‘그리고 그 아이는 절대로 나를 자랑스럽게 여기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중대한 발견을 할 수도 있었지만 너를 위해서 ....... >한 아빠일 것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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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이 2018-09-14 14: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근 1년 고민하고 크레마 사운드 구매했어요. 전자책이 가벼워서 정말 좋긴한데 말씀하신 것 처럼 작동이 멈추는 일이 엄청 자주 생긴답니다. ㅜㅜ 그래서 저는 리셋버튼용 클립을 가방에 넣어가지고 다녀요. 안정적으로 작동하진 않지만, 대체로 만족하고, 지금은 전자책 구매량이 실제책 구매량보다 훨씬 많아요.
‘세상이 끝날 때까지 아직 1억년‘ 은 학자들끼리 대화할 때 학자들 속마음 유추할 수 있게 서술된 부분이 재밌었어요. 술 다 떨어져서 아쉬워 하는 장면 특히 좀 기억에 남아요. 온 우주가 저지할만큼 대단한 학자인데도 너무나 소심한 밀랴노프한테도 좀 정이 갔고요.
저는 공상과학영화를 무지 좋아하는데, 결국 내가 봤던 무수한 영화도 이런 소설같은 훌륭한 선행 텍스트(?)가 있어서 탄생했구나... 란 생각하면서 읽었어요. 억압된 체제에서도 많은 소련 예술가들이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고차원적 활동인 ‘창작‘ 을 했구나!! 란 생각에 잠시 좀 가슴이 벅차기도 했어요. (ㅋㅋㅋ 너무 거창해버려)

잠자냥 2018-09-14 15:44   좋아요 0 | URL
네, 저도 그 옷핀을 크레마 사운도 보관하는 가방에 넣어두었습니다. ㅋㅋ
전자책은 무엇보다 밤에 불끄고도 읽을 수 있어서 편리하더라고요. 암튼 저도 야금야금 전자책을 사게 되지 않을까 싶네요. 일단 보관과 휴대가 편해서 ㅎㅎ

말랴노프 참 인간적이라서 저도 정이 가더라고요. 마지막 선택도 짠하고... 맞습니다. 억압된 체제에서도 소련 예술가들은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고차원적인 창작 활동을 했지요! ㅎㅎㅎ


희선 2018-09-15 01:5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책을 보기까지 이런저런 일이 있었군요 그래도 끝까지 보셨으니 누군가의 방해는 물리쳤네요 누군가는 누굴지... 어떤 책은그 책과 비슷한 일을 일어나게도 하지 않나 싶어요 그건 그저 우연이고 잠깐 기계가 잘못 움직인 것일 뿐이겠지만... 오싹한 일은 아니지만 도서관에서 빌려본 책을 돌려줬는데 그게 처리가 안 된 적 있어요 그 책에 무서운 이야기가 담겨 있었는데, 그 책에는 이 책을 보면 이상한 일이 일어날 수도 있다는 말이 쓰여 있기도 해요

많은 사람이 4차원 문명, 9인 연합을 안다면 함께 싸우기라도 할 텐데, 몇 사람만 감시 당하고 하던 걸 그만둬야 한다면 힘들겠습니다 동료 찾기 어렵겠지만 아주 없지 않겠지요 소련에 살던 지식인이나 예술가 살기 어려웠겠습니다 그렇다 해도 다 사라지지 않은 걸 보면 사람, 인류한테 중요한 게 뭔지 말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희선

잠자냥 2018-09-15 10:02   좋아요 1 | URL
네, 하하하. 끝까지 무사히 잘 읽었습니다. 아니 그런데 도서관에 반납한 책이 제대로 처리되지 않은 일 왠지 오싹하네요. 심지어 그 책에 무서운 이야기가 담겨 있었다니 더... ㅎㅎ 말씀하신 대로 책에 몰입하다 보면 정말로 그 책과 비슷한 일이 일어나거나, 일어나는 것처럼 착시효과가 생기는 것 같아요. 그것도 다 독서병의 하나일까요? ㅎㅎ

진지하게 써주신 댓글 보고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감사합니다.
 
체실 비치에서
이언 매큐언 지음, 우달임 옮김 / 문학동네 / 2008년 3월
평점 :
품절


이언 매큐언의 <체실 비치에서>가 곧 영화로 개봉하는 것 같다. 이 책은 오래전에 읽었는데, 영화 포스터를 보고 기억이 가물가물해서 예전에 짧게 써둔 리뷰를 찾아 읽어보았다. 아, 이런 내용이었지- <체실 비치에서>는 이언 매큐언 작품 가운데 두 번째로 읽은 책이었다. 처음 읽은 책은, 이언 매큐언의 단편을 모은 <첫사랑, 마지막 의식> 이었다. 사람들은 <속죄>가 무척 좋다고 하던데 <속죄>는 이 작품을 원작으로 했던 영화 <어톤먼트>가 솔직히 너무 별로여서 읽고 싶은 생각이 싹 가셨던, 그래서 아직까지도 읽지 않았다.

<첫사랑, 마지막 의식>을 읽고 나서 가장 크게 들었던 생각은 이언 매큐언은 인간의 병적인 증세에 관심이 많은 작가인가 싶었다. '성장'에 두려움을 겪는 주인공을 묘사하거나, 스스로 성장해가면서 자기만의 유년 시절을 파괴하는 인물을 그리는 등 성장통에 관심이 많은 듯하다. 전체적으로 조금 기괴한 느낌도 든다. 그의 작품은 읽고 나면 그다지 유쾌한 기분은 들지 않는다.

<체실 비치에서>도 그런 주인공들이 등장한다. 플로렌스와 에드워드. 그들은 이제 갓 결혼한 부부이며, 체실 비치로 신혼여행을 왔다. 그런데 행복으로 가득찬 신혼여행이어야 할 텐데, 그들의 얼굴엔 언뜻 어두운 그림자가 스쳐 지나간다. 플로렌스는 그녀대로, 에드워드는 그대로 ‘첫날밤’에 대한 공포가 있기 때문이다. 플로렌스 쪽이 더 심한 듯하다. 연애를 하면서도 에드워드와의 키스나 신체 접촉에 늘 망설이던(혹은 혐오감을 드러내던) 그녀는 드디어 첫날밤이라는 '무시무시한' 일을 치르려니 도망치고 싶은 마음뿐. 한편 에드워드는 1년을 기다려 드디어 플로렌스와 함께 밤을 보낼 그 순간이 왔는데, ‘잘할 수 있을까, 잘해야 할 텐데’라는 부담으로 숨이 막힐 지경.

요즘은 어떻게 보면 이렇게 첫날밤때문에 고민하는 일이 생소하게 여겨질지도 모르지만 이 소설의 배경이 되는 1960년대는 그럴 법하다. ‘그 시절은 성 문제를 화제에 올리는 것조차 불가능하던 때’였기 때문이다.

마침내 공포의 순간은 다가왔고, 그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플로렌스가 그 한계를 넘지 못하고 그들은 신혼 첫날밤 서로에게 씻을 수 없는 모욕적인 말들을 퍼부으며 그날 밤으로 헤어지게 된다. 첫날밤에 헤어지는 사람들도 있다지만, 이런 문제로 헤어지는 사람들도 있을까 좀 궁금하기도 하다. 어찌 보면 단순히 섹스 문제가 아니라 ‘첫날밤’이라는 어른이 되는 통과의례 중 하나를 포기하고 달아난 플로렌스와 그런 그녀를 끝내 이해하지 못한 에드워드를 통해 결국 ‘인간이 어른 세계로 진입하는 것의 어려움, 또는 공포’ 이런 것들을 표현한 것은 아닐까.

어쨌든 이 작품을 두고 무척 아름답다, 서정적이다 이런 칭찬도 많던데, 솔직히 그런 건 잘 모르겠고, 이언 매큐언은 나랑은 좀 잘 맞지 않는 작가인 듯. 뭐 이런 결론을 내리며 책장을 덮은 기억이 난다. 꽤 오래전에 읽은 책인데, 지금 다시 읽어 보면 생각이 좀 달라질까? 영화는 어떻게 그려질지 조금 궁금하기도 하지만, 과연 내가 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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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이 2018-09-12 17: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잠자냥님. 음... 잠자냥님 리뷰에 적힌 내용만 봐선 영 제 취향은 아닐 것 같은 느낌이네요. 그냥 안 읽어야겠어요. 영화는 궁금해서 나중에 볼 지도 모르겠지만.

잠자냥 2018-09-12 18:00   좋아요 0 | URL
ㅎㅎㅎ 이상하게 이언 매큐언은 제 취향이 아니더라고요. 이 책 읽은 뒤로 <토요일>,<암스테르담>, <시멘트 가든>까지는 읽어봤는데...그냥 읽고 나면 기분 나쁘고 뭐 그랬던 기억이 나네요. 최근에 나온 <넛셀>에 다시 한 번 도전해볼까 싶어서, 도서관에서 빌려와서 읽기 시작했는데 결국 그냥 다 읽지 못하고 반납했어요. 하하하...

남들은 좋다고 하는데, 개인적으로 그닥 마음이 가지 않는 작가가 있는데, 이언 매큐언하고 필립 로스가 저는 영.... ㅎㅎ

영화 <어톤먼트> 보셨어요? 그 영화도 사람들은 좋다고 하는데 저는 그 영화의 진짜 주인공 ‘브라이오니‘(저는 광년이라고 부르겠습니다. ㅋㅋㅋ) 캐릭터가 너무 싫어서;; 도저히 감정 이입이 안 되더라고요. 원작인 <속죄>는 안 읽어봤지만 캐릭터를 그렇게 생생하게 만든 게 이언 매큐언의 장점이라면 장점일까요? ㅎㅎㅎ

케이 2018-09-12 18: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질투에 눈이 멀어 좋아하던 남자에게 성폭행범 누명을 씌운단 영화 소개를 읽고 이 이야기를 직접 보면 너무 짜증나겠구나 싶어 아직도 안 보고 있습니다. ㅋㅋ 속죄는 개뿔. 그런 미친 짓은 하나님께도 용서받지 못할 짓이에요!! 흠.. 근데 저는 전쟁 중 남녀의 사랑 이야기에는 약간 회의적인 거 같아요. 진짜 전쟁은 영화 ‘그을린 사랑‘ 이나 ‘풀메탈자켓‘ 에서 보여주는 모습 이상으로 지옥같을텐데, 남녀 사랑 이야기를 첨가하여 가끔 전쟁이 낭만적으로 그려지는 것도 좀 불만이기도 하고요.

잠자냥 2018-09-13 10:10   좋아요 0 | URL
네 맞아요. 그 인물이 바로 광년이 ㅋㅋ ‘브라이오니‘입니다. 그런데 이 인물이 나중에 ‘속죄‘하는 방법도 참 어처구니 없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너무나도 민폐인 캐릭터. 그런데 그 인물 말고도 말씀하신 것처럼 전쟁으로 헤어지는 두 남녀(영화 속에서는 키이라 나이틀리와 제임스 맥어보이)의 사랑도 저는 공감이 안 가더라고요. 저도 아마 전쟁 중과 같은 극한 상황에서 피어나는(?) 더 애틋해지는(?) 사랑이 엄청 나이브한 설정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그런 것 같아요. 전쟁 문학이나 전쟁 영화가 보통 너무 뻔한 스토리로 전개되는 것도 좀 그렇고요. ㅎㅎ

Falstaff 2018-09-13 12: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속죄>는 아예 영화를 안 보시고 읽는 편이 좋았을 듯합니다.
영화 먼저 보신 분들이 책까지 덩달아 읽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괜찮은‘ 보다 조금 더 좋은 책인데요. ^^;
<어톤먼트>는 한 영문학자가 뽑은, 원작을 가장 망해먹은 영화들 가운데 꼭대기에 있더랍니다. ㅎㅎㅎ

잠자냥 2018-09-13 15:06   좋아요 0 | URL
아하, 그렇군요. 원작을 가장 망해먹은 영화 ㅋㅋㅋㅋ
영화의 무지막지한 잔상이 너무나도 강렬해서 책은 영원히 안 읽을 것 같아요. ㅋㅋㅋㅋ
 
그의 옛 연인
윌리엄 트레버 지음, 민은영 옮김 / 한겨레출판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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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큼 가을이 다가왔다. 가을은 책 읽는 계절이라는 말 때문에 그런가, 부쩍 관심 있는 작가의 새로운 책 출간 소식도 들려온다. 그중 단연코 눈길을 끄는 이는 윌리엄 트레버이다. <그의 옛 연인>이라는 책을 본다. 제목도 그렇고 책 표지 이미지- 빨간 우체통에 편지를 넣는 손길 때문에 또 한 번 가을이 왔음을 실감한다. 옛 연인으로부터 오랜만에 전해져온 어떤 소식 때문에 일상이 흔들리는 내용이려나? 궁금하다. 이 신간을 더 기다리지 않고 사보는 것은 당연하다. 언제부터인가 윌리엄 트레버는 내게 그런 작가가 되었다.


<그의 옛 연인>을 사서 책을 펼쳐본다. 표제작인그의 옛 연인」부터 읽어볼까 싶었지만 왠지 이 책의 제목을 그렇게 뽑은 이유가 따로 있을 것만 같아서, 이 책을 대표하는 작품- 그러니까 하이라이트와도 같은 작품이려나 싶어서 아껴 읽기로 하고 순서대로 차근차근 읽기로 한다. 첫 작품인「재봉사의 아이」부터 읽는다. 언제나 그렇듯이 이야기의 시작은 평범하다. 평화로운, 조금은 따분해 보이는 자동차 정비소 풍경이 그려진다. 그러나 나는 안다. 곧 무언가가 일어날 것임을. 그리고 그 일은 아주 커다란 사건일 수도 있고, 또는 누구도 알아차리지 못하는 사소한 것일 수도 있다. 


재봉사의 아이」의 주인공은 ‘재봉사의 아이’가 아니다. 그럼에도 그 아이는 이 이야기의 주인공인 ‘카할’에게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긴다. 이름도 없이 그저 ‘재봉사의 아이’로 불리는 아이. 아버지가 누구인지조차 모르는 아이. 그런데 그 아이가 카할에게 지울 수 없는 멍에가 되어 남는 것이다. 그 ‘사건’을 아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아이의 엄마, 그러니까 재봉사인 그녀는 아는 것 같다. 하지만 마을 사람들에게 아이 엄마는 신뢰받는 인물이 아니다. 그녀의 이야기를 사람들이 과연 믿어줄까? 겉보기에 카할은 이 게임에서 승자처럼 보인다. 그냥 그렇게 모르는 척 살아가면 될 것 같다. 그런데 그게 그리 쉬울까? 재봉사의 아이는 평생 카할의 뒤를 쫓아다닐 것임을 이 책을 읽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예상할 수 있을 것이다.


트레버가 빚어내는 인물들이 거의 그렇기 때문이다. 평범하게 일상을 사는, 특별할 것 없는 사람들. 그들에게 어느 날, 갑자기 어떤 일이 일어난다. 그리고 그 일을 계기로 삶은 그 일 이전의 삶과, 그 이후의 삶으로 변하고 만다. 곁에서 그 일이 무엇인지 지켜보는 사람이 없더라도 그 일을 겪은 당사자에게는 ‘무언가’ 커다란 지진과도 같은 파열이 일어난다. 평범하지만 악하지 않은, 보통 정도의 ‘양심’이나 ‘죄책감’을 가진 그들은 그 어떤 일을 겪고 난 뒤 앞으로 인생을 살아갈 때 그리 순조롭지만은 않으리라.


완벽한 관계,그의 옛 연인에는 연인 또는 부부가 등장한다. 겉으로 보기에 이들은 모두 안정적인 인생을 살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그 속내도 그러할까? 은 시작부터 심란하다. 남자와 여자가 어느 ‘방’에서 만난다. 그와 그녀가 ‘불륜’ 사이라는 것은 금세 알 수 있다. 그들은 왜 어느 방을 빌려 이렇게 몰래 숨어서 만나는 것일까? 피치 못할 사정이라도 있을까? 그녀, ‘캐서린’이 남자에게 털어놓는 이야기는 놀랍다. 그녀는 살해 혐의로 기소된 남편의 알리바이를 거짓으로 증언했다. 그 뒤로 9년 동안 결혼 생활을 유지해왔고 남편을 여전히 사랑한다고 생각하지만, 그 결혼 생활은 이미 그때 깨져버린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그렇기 때문에 ‘방’에서 낯선 남자를 만나고 있지 않은가. 


완벽한 관계 속 연인들도 그렇다. ‘단 한 번도 싸운 적이 없다’는 사실을 매우 자랑스러워하는 ‘프로스퍼’이지만, 그런 그에게 ‘클로이’는 문득 이별을 고한다. 그에게 자신이 있는 곳을 알리지도 않은 채 집을 나선다. 프로스퍼는 클로이를 찾아 그녀 부모님 댁을 방문하지만, 클로이의 부모는 딸의 행방을 알려주지 않는다. 그를 그다지 탐탁지 않아 하는 것 같다. 프로스퍼는 클로이에게 분명히 다른 사람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면서 둘이 곧잘 가던 카페에 홀로 앉아 자신의 연인이 다른 남자와 그 카페에 들어오는 모습을 상상하며 혼자 질투에 휩싸이기도 한다. ‘단 한 번도 싸운 적 없음’이 과연 완벽한 관계를 말해주는 증표일까? 클로이의 생각과 반응을 보면 그렇지 않음을 쉽사리 알 수 있다. 이 둘은 과연 예전처럼 지낼 수 있을까? 윌리엄 트레버는 어떤 가능성도 제시하지 않지만 프로스퍼와 클로이를 지켜보는 독자라면 그들이 다시 만나더라도, 그 관계는 예전 같지 않을 것임을 쉽사리 예상할 수 있다.


그의 옛 연인에 바로 그런 커플이 등장한다. 가을에 어울릴 법한 애틋하고도 아련한 사랑이야기일까 싶었는데, 보기 좋게 뒤통수를 맞았다. 시작부터 누군가의 편지를 훔쳐 읽는 사람이 나온다. ‘조이’는 남편 ‘찰스’의 편지, 그러니까 그의 옛 연인으로부터 전해온 편지를 훔쳐 읽고 있다. 그런데 그녀의 나이는 지긋하다. 이미 흰 머리가 성성하다. 조이는 아주 오래전부터 남편의 연인으로부터 온 편지를 훔쳐 읽어왔다. 찰스와 그녀가 통화하는 내용도 엿듣는다. 남편은 오늘도, 흰머리가 성성한 그 나이에도 옛 연인으로부터 소식을 듣고 ‘쇼핑’해야 할 것이 있다면서 집을 나선다. 조이는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눈을 감아준다. 아무렇지 않게 남편을 배웅한다. 그 부부의 일상은 아마도 평생 그래왔듯이, 그들이 눈을 감는 그날까지 그렇게 지속될 것이다.


<그의 옛 연인>의 원제는 <Cheating at Canasta>이다. 이 책에도 속임수 커내스터라는 단편이 실려 있다. 속임수가 있는 카드놀이. 어쩌면 인생이 그렇지 않을까? 부부나 연인처럼 상대를 속이기도 하지만, 자기 자신을 속이기도 한다. 부끄러움이나 수치감을 잊고, 아니 잊어야만 하는 남자는 스스로 양심을 속인 채 남을 협박하여 살아가며(아일랜드의 남자들), 십대 소녀 ‘애슬링’은 또래 소년이 맞아 죽는 광경을 보고도 모른 척 해야만 앞으로 살아갈 수 있다(객기), 엄마를 잃은 딸의 빈자리를 다른 여자로 채워주어야지만 가족이 다시 화목할 것이라는 아빠의 믿음(아이들)은 얼마나 허황된 것인가. 딸은 엄마를 잊을까봐 죄책감에 시달리고 있는데 말이다. 자식들을 생각하느라 죽음을 앞둔 남편에게 끝내 진실을 말하지 못한 어느 노부인(올리브힐에서)은 결국 그 죄책감으로 인해 남은 생이 평화롭지는 않다. 


이렇듯 윌리엄 트레버의 <그의 옛 연인>에는 크든 작든 양심을 속이고 죄책감에 시달리는 수많은 인물들이 나온다. 그런데 그 인물들을 바라보는 트레버의 시선은 그들을 단죄하는 ‘재판관의 눈길’이기보다는 이해와 연민으로 가득한 ‘인간의 눈빛’이다. 그들의 고통을 지켜보노라면 이런 생각이 든다. 누구나 삶과의 카드게임에서 이정도 속임수는 쓰고 있지 않은가? 오히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속임수조차 쉽게 잊어버리거나 자신을 합리화하는데 급급하지 않은가. 그러나 트레버가 빚어낸 인물들은 적어도 자기 자신의 양심의 소리, 죄책감에 귀를 기울일 줄 안다. 그리고 그로 인해 흔들리고, 대개는 스스로 유폐된 삶을 살아간다. 그러므로 그들의 삶을 지켜보노라면 안타까운 마음과 함께 쓸쓸한 여운이 오래도록 가시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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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울 레이터의 모든 것
사울 레이터 지음, 조동섭 옮김 / 윌북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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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찍은 사진 한 장은 때로 기나긴 문장보다 많은 것을 전한다. 사울 레이터의 사진이 그렇다. 몇 마디 말보다도 어떤 시보다도 아름답게 빛나면서 그의 사진을 바라보는 이의 마음에 몽글몽글 물기를 맺혀준다. 사울 레이터를 잘 몰랐음에도 단 한 장의 사진에 마음이 끌려 그의 사진집까지 구매하게 되었다. 책 표지를 장식한 사진. 눈 내린 길, 빨간 우산을 들고 걷는 한 사람의 이미지. 그 사진에 홀려 책 정보를 살펴본다. 몇 장의 사진이 더 눈에 들어온다. 아, 이 책을 갖고 싶다. 

어느 날 들른 서점에서도 검은 코트 차림에 빨간 우산을 든 이 여인의 사진 한 장은 줄곧 내 눈을 사로잡는다. 책을 펼쳐들고 사진을 한 장 한 장 넘겨본다. 아, 이 책을 사서 두고두고 보고 싶다. 그날은 마침 비가 내렸는데, 그의 사진과 함께 비는 촉촉하게 내 가슴에 스며들었다. 흰색과 검은색, 빨강의 단순한 조화. 눈 위에 찍힌 발자국. 무엇이 그토록 내 마음을 흔들었을까. 

오래전 나는, 사진작가들과 함께 일한 적이 있다. 보통 그들은 ‘빨강’이 있을 때 사진이 한결 좋아진다고 믿었다. 실제로 찍은 결과물을 보면 그랬다. 빨강은 사진을 살려주는 마법과도 같은 색이었다. 사진작가들에게 ‘빨강’이 어떤 의미인지 어렴풋이나마 알 수 있었다. 그래서 그랬을까? 레이터의 빨간 우산 사진을 처음 봤을 때는 의심했었다. 어쩌면 그 또한 ‘빨강’이 사진을 살려준다는 사실을 아는, 그래서 어쩌면 그런 흔한 기교로 사람들의 눈을 홀린 건 아닐까. 

그런데 그 비오는 날, 레이터 사진집을 보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내내, 그의 사진에는 ‘빨강’ 이상의 그 무엇이 있음을 느꼈다. 그날 이후, <사울 레이터의 모든 것>을 머리맡에 두고 주로 잠들기 전에 몇 페이지씩 넘겨본다. 사진만 쭉 훑어보고 나서는 곳곳에 적혀 있는 그가 남긴 말들을 읽어본다. 그래, 그래서 이런 사진이 나왔구나. 나는 이 한 권만으로 사울 레이터의 팬이 되고 만다. 이 땅에서도 그의 작품 전시회가 열리기를 간절히 바라게 된다.

‘이런 꿈을 꾸면 좋겠어.’ 잠들기 전, 그의 사진을 보며 생각한다. 빗방울 흐르는 창, 수증기 맺힌 창, 빨강 우산, 노랑 스쿨버스, 노랑 택시, 흰 눈이 하염없이 내리는 초록 가게, 꿈꾸듯 어딘가 먼 곳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눈길, 카페 구석에서 글을 쓰는 여인……. 틀림없이 자고 나면 기분 좋을 그런 꿈이다. 아니, 이미 꿈을 꾸고 있는지도 모른다. 사울 레이터의 사진은 그렇다. 어렴풋한 수증기와 빗방울, 왠지 따뜻할 것만 같은 하얀 눈, 꿈꾸는 사람들의 눈빛으로 인해 사진을 보고 있노라면 이미 꿈속 어딘가를 거니는 것 같다.  
   
지나간 시절, 1950년대나 60년대로 짐작되는 한때. 그 무렵을 살아가는 사람들 모습을 포착한 레이터의 사진은 아련한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그 시절이 꼭 좋았기 때문이 아니다. 그가 찍은 사람들은 하나 같이 쓸쓸하고 외롭고 고독한 이들이다. 그런데도 그의 렌즈를 통해 바라보면 그 외로움은 희석된다. 물기 어린 창이나 부옇게 흐려진 거울이 필터처럼 외로움과 고독감을 걸러준다. ‘뒷모습에서 더 많은 이야기를 듣는’다는 사울 레이터는 자기 존재를 드러내지 않고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저 조용히, 담담하게 전한다. 

때로 화려한 모델을 피사체 삼기도 했지만 그는 하퍼스 바자와 같은 잡지 사진을 찍기보다는, 거리에서 마주치는 사람들을 있는 그대로 담기를 원했다. 함박눈 맞으며 우편배달 하는 사람, 카페 웨이터, 구두닦이의 구두, 공사현장에서 나무판자를 옮기는 인부, 어딘가로 전화를 거는 남자, 간판을 그리는 사람, 기다리는 노인, 버스에 앉은 신사, 개와 산책중인 여인, 계단에 쭈그리고 앉은 남자, 카메라가 신기한 아이들, 풀쩍 뛰어내린 고양이, 볕을 쬐는 개, 창밖으로 나가고 싶은 듯한 마네킹까지…….  ‘사진을 보는 사람에게 사진가가 주는 선물은 일상의 간과된 아름다움일 경우가 종종 있다’고 한 사울 레이터의 말처럼 그가 찍은 사진들은 모두 우리가 무심코 지나치기 쉬운, ‘일상의 간과된 아름다움’을 대상으로 한다. 쉽게 지나치기에 그러고 나면 더욱 그리워질 사소한 것들.

브레송이나 윌리 로니스, 카쉬의 사진을 나는 좋아했다. 잘 찍은 사진은 모두 흑백 사진이라고 여겼다. ‘결정적 순간’을 이야기한 브레송의 말처럼 사진은 순간 포착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사울 레이터의 사진은 그 모든 생각을 뒤흔든다. ‘목적 없이 그저 세상을 바라본다’는 태도로 찍은 그의 소박하면서도 아련한 사진은 빨강 노랑 초록으로 빛난다. 모두가 흑백 사진을 고집하던 1950년대에 그는 컬러를 담는다. ‘미술의 역사는 색채의 역사다.’라는 생각으로. 그리고 그의 믿음은 옳았다. 그의 렌즈를 지나 세상 밖으로 나온 ‘색깔’들은 오래전부터 존재해왔지만, 이제 사울 레이터만의 ‘컬러’가 되어 보는 이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이토록 아름다운 빛깔로 이루어진 세계구나 새삼 깨닫게 된다. 

색채의 아름다움에 대한 사울 레이터의 예민한 감각은 그가 그린 그림에서도 엿볼 수 있다. 그의 사진만큼 그림 또한 무척 아름다워 몇 점이든 소장하고 싶어진다. 사진, 그림 모두 특별할 것 없는 대상을 담았지만 그만의 남다른 시선과 색채 감각 때문에 세상 유일한 사진이, 그림이 탄생한 것이다. ‘중요한 것은 장소나 사물이 아니라 자신의 시각’이라는 그의 말은 그래서 인상 깊다. ‘인생에서는 무엇을 얻는가가 아니라 무엇을 내놓는가가 중요하다’고 이야기한 사울 레이터. 그는 틀림없이 이 세상에 의미 있는 그 무언가를 남겨놓은 셈이다. 늘 가까이 두고 생각날 때마다 어느 페이지든 펼쳐서 보고 느끼고 싶은, <사울 레이터의 모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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