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상의 밤 슈테판 츠바이크 소설 시리즈 1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원당희 옮김 / 세창출판사(세창미디어)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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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테판 츠바이크는 단 한 번도 실망시킨 적이 없다. 이번에 읽은 <환상의 밤> 또한 그렇다. 대개의 츠바이크 작품이 그러하듯이 책을 손에 잡으면 멈추지 않고 읽게 된다. 너무 짧아서 아쉬울 정도이다. 이 작품은 불감증에 걸린 한 사나이가 ‘환상적인 밤’을 보낸 뒤로 어떻게 달라지는지를 밀도 있게 그려 나간다. 불감증에 걸린 남자와 환상의 밤이라? 이런 조합만으로도 당신의 머릿속에는 어떤 이미지가 그려질 것이다. 그러나 당신의 그런 상상을, 츠바이크는 그리 호락호락하게 허락하지 않는다.


주인공인 ‘나’는 교양 넘치는 고상한 시민이자 부자이다. 그는 인구 백만이 넘는 화려한 도시에서 최상류 인사들과 가깝게 교제하면서 남부러울 것 없이 지낸다. 연애기술도 탁월한 편이라 그다지 노력을 기울이지 않고도 여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으며 그야말로 무엇 하나 부족함 없는 생활을 한다. 잘 고른 넥타이, 좋은 책이나 자동차 여행, 카페에서 여성과 대화하는 한 시간에서 행복감을 찾을 줄 아는 사람. 삶을 누릴 줄 아는 진정한 ‘향유자’이자 세련된 멋을 아는 남자. 그는 ‘구김살이라고는 전혀 없는 마치 영국식 신사복처럼 사교계에서 완벽해 보이는’ 자신의 생활양식에 몰입해 있다.

그런데 무엇이 문제일까? 이 남부러울 것 없는 남자, 삶을 즐길 줄도 알고 행복도 느낄 줄 알던 이 남자에게 과연 무엇이 문제였을까? 어느 날 그는 미칠 듯한 공허감, 무력감, 권태에 빠진 자신을 발견한다. 자기의 내부는 ‘모든 물체를 반사할 따름인 유리알처럼 공허’하다는 생각만 든다. 삶이 지나치게 윤택하고, 고통도 고난도 없을 때, 보통의 많은 이들이 그러하듯이 ‘권태’ 그 자체에 빠져버린 것이다. 츠바이크는 이런 상태를 정확히 묘사한다. ‘삶의 모든 요구를 운명적인 것으로 받아들여 그 이상의 어떤 것도 시도하거나 쟁취하려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야말로 이미 긴장과 감정의 결핍, 삶 자체가 무기력함을 배태하고 있었던 것’(13쪽)이라고.


나라는 인간은 물속으로 침투되지 못하고 반사되기만 하는 빛처럼 표면적인 삶만을 살아왔던 것이다. 이런 무감동은 부패의 고약한 냄새조차 맡지 못하고 죽어 있는 상태, 무섭게 얼어붙은 감각 불능의 상태, 실제적인 육체의 소멸 단계에 이르러 있었다. (17쪽)

다른 사람들이 청춘이라고 칭하는 시절은 이미 나의 마음속에서 흘러가 버렸다. 그러나 청춘과의 이별이란 나에게 유별나게 서글픈 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나는 내 자신의 청춘 역시 별로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19쪽)


이런 그에게도 희망이 있을까? 그는 어렴풋하게나마 마음속으로 그 자신이 명예심이나 만족감에 안주하지 않기를 바라면서 강렬한 삶을 갈망하고 있음을 느낀다. 그리하여 우연히 찾은 경마장. 흥분과 광기, 열광, 또는 아쉬움과 비탄에 잠긴 사람들…. 경마장의 사람들은 하나같이 모두 눈에 불을 켠 채 무언가에 몰두하고 있다. 그런데 그는 이곳에서조차 동화되지 못하고 사람들을 냉정한 눈으로 관찰할 뿐이다. 흥에 취한 사람들을 지켜보면서 그들이 우스꽝스럽고 섬뜩하다고 여긴다. 심지어 ‘터무니없는 행동의 가소로움이나 발작과도 같은 비천함’에 참을 수 없는 모멸감을 느끼기도 한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흥분과 광기, 열광에 내재한 그 어떤 생명력에 미묘한 동경을 느끼기도 한다.

그는 과연 이 권태의 늪, 무엇에도 감동할 줄 모르는 생활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경마장의 뜨거운 열기도 그를 어찌하지는 못한다. 그저 이렇게 우스꽝스러운 인간들을 지켜보다가 돌아가야만 하는가? 자리를 뜨려고 하는 찰나- 뒤에서 한 여인의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그는 그 여인이 어떤 유형일지 온갖 상상의 나래를 편다. 상상은 꽤 자극적이다. 돌아볼까 말까? 호기심에 고개를 돌리는 그. 눈앞에 나타난 여인은 그의 상상과는 사뭇 다르다. 그럼에도 꽤 관능적이다. 여인은 어느 장교를 희롱 중인데, 그의 시선도 즐길 만큼 대범하다. 그녀와 눈싸움 아니, 기 싸움을 벌이는 그. 이 놀이가 은근히 즐겁다. 

장교와 사귀는 사이인가 싶은데 난데없이 비속하기 그지없는 뚱뚱한 사내가 나타난다. 그녀의 남편이다. 경마에 빠진 남편과 함께 경마장을 찾은 여자는 그 와중에도 다른 남자를 유혹하고 있던 것이다. 이 기묘한 부부와의 만남은 뜻하지 않은 사건으로 그를 몰아간다. 환상의 밤이 그에게 펼쳐진다. 어떤 일이 벌어질까? ‘경마에 빠진 남편과 관능적이고 방탕하기 짝이 없는 아내. 이런 부부와의 만남과 환상의 밤이라? 흠. 그렇고 그렇겠군.’ 생각하겠지만 무엇을 상상하든 당신의 상상대로 흘러가지는 않을 것이다.

이 작품을 읽은 뒤 문득, 중학교 때 한 사건이 떠올랐다. 어느 오후, 학교가 끝난 뒤 친구와 함께 집에 가던 길이었다. 슈퍼마켓 가판대에 놓인 바나나 한 무더기가 눈에 들어왔다. 나는 무엇에라도 홀린 듯, 그것을 훔쳐보기로 마음먹었다. 친구에게 무작정 “뛰라고 하면 뛰어” 말했다. 이윽고 나는 바나나를 들고 뛰었다. 친구도 뛰었다. 어느 골목에 이르러 친구와 나는 숨을 돌리면서 깔깔대고 웃었다. 바나나는 친구에게 모두 줘버렸다. 나는 바나나를 좋아하지 않았다. 친구는 “먹고 싶지도 않은 걸 왜 훔쳤어?” 물었지만 나는 그냥이라는 말만 했다. 훔친 이유는 없었지만 바나나를 들고 달리던 순간만큼은 그 어느 때보다 심장이 세차게 뛰었다. 단지 달리고 있어서가 아니다. 훔쳤다는 사실. 얌전한 모범생이었던 내가 금기를 깼다는 사실에 흥분하고 열광했던 것이다. 그때 나는 심심했을까? 그저 중2병이었을까?

슈테판 츠바이크의 <환상의 밤>은 이런 인간의 심리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규율과 질서를 존중하던 도덕적인 시민이 어떤 사건을 계기로 새로운 자신을 자각한다. 그의 냉담한 표면의 바닥 어딘가에는 여전히 뜨거운 열정의 샘물이 흐르고 있었고, 그것은 ‘우연’이라는 마법의 지팡이에 이끌려 그의 심장 위까지 치밀어 오른다. 완전히 죽어버린 줄만 알았던 그의 내부에 세속적인 삶의 비밀스런 활화산이 여전히 타오르고 있었음을 깨닫게 된다. 그때까지 그가 그토록 무감동하고 권태로운 삶을 살았던 것은 ‘사회적 망상, 소위 젠틀맨의 오만함에 의해 불구화되고 유린되었던 것’임을 깨닫는다.

그는 '그 일'을 계기로 자신의 비참함의 가장 깊은 곳, 그 맨 밑바닥까지 내려가게 된다. 거기서 ‘상황이 가져다 준 소름끼치는 굴종’을 마음껏 즐긴다. 생전 처음으로 야생적이고 충동적인 것, 비천한 것 속에서 그 자신과의 친밀성을 느낀다. 그리하여 ‘실종자나 다름’없었던 그는 ‘온전하고 무한한 세계의 문을 열고 그 안에 깊숙이 들어가’ 있게 된다. 그리고 마침내 무디고 미온적이며 공허했던 자신의 과거를 참회하기에 이른다. 그에게는 과연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인간의 마음을 그 어떤 이보다 날카롭게 꿰뚫어볼 줄 알았던 츠바이크는 이 짧은 작품 안에서도 권태와 무기력에 빠진 인간, 그리고 그런 인간이 어떻게 다시 그 무력감에서 벗어나게 되는지를 세밀하게 뒤쫓는다. 인간의 모순과 결점을 너무나도 잘 알았던 츠바이크였지만 그래도 인간에게서 희망을 놓지 않았던 것 같다. 그래서 그런지 이 작품의 마지막 문장은 마음을 울린다. 슈테판 츠바이크답다는 생각을 하면서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아마 누구라도, 이 책을 끝까지 읽은 사람이라면 나와 같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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