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시 골트 이야기
윌리엄 트레버, 정영목 / 한겨레출판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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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의 일이다. 그 기억은 유년 시절 내내 또렷하다. 내가 어린 시절에는 ‘말 리어카’라는 것이 있었다. 아저씨가 말이 매달린 리어카를 끌고 이 동네 저 동네 다니면서 코흘리개들한테 100원씩 받고 10분 정도 말을 태워주는 그런 거였다. 요즘 이 말 리어카는 좀처럼 볼 수 없고 가끔 드라마나 영화 속에서 옛 시절을 그리는 장면 속에 추억처럼 등장하고는 한다.

드라마나 영화 속에서 말 리어카를 보면 나는 어김없이 어린 날의 공포가 떠오른다. 나는 이 말 타기를 좋아해서 동네에 말 리어카가 오면 신나게 달려가곤 했다. 그런데 초등학생 정도만 되도 덩치가 커져서 이 말은 작게 느껴진다. 때문에 초등학생이 이 말을 타는 것은 어쩐지 좀 우스워진다. 나 또한 초등학교 입학 전에만 말을 탔던 것 같다. 그 뒤로는 동생들이 말을 탈 때면 조금 부러운 눈으로 그 주위를 맴돌곤 했다.

그런 오후 중 하나였다. 학교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나는 이 말 리어카를 봤다. 아홉 살 즈음이었다. 그 말 리어카에는 풍선, 정확히 말하자면 비치볼 비슷한 것이 주렁주렁 매달려있었다. 아이들은 말을 타다가 손으로 그 풍선을 툭툭 치고는 한다. 그런데 그날 나는 말을 타지도 않으면서 그 풍선을 툭 쳤다. 리어카 앞을 지나가다가 위에 매달린 풍선들을 하나씩 툭툭툭 친 것이다. 말을 타지 못해서 심술이 났던 것일까 아니면 단지 그저 장난이었을까.

그런데 이윽고 생각지도 못한 일이 일어났다. 말 리어카 아저씨가 자기 머리통만 한 돌을  들더니 나에게 던지려고 달려오는 게 아닌가. 나는 너무 놀랍고 무서워서 순간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그런 가운데도 어쩐지 도망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달리기를 못하던 나였지만 정말 죽을힘을 다해 뛰었다. 얼마쯤 위협하다 말겠지 했던 아저씨는 계속 돌을 들고 쫓아왔다. 나도 내리 달렸다. 어떻게 어른이 아이한테 풍선 좀 쳤다고 저 큰 돌을 던지려고 하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풍선을 친 게 그렇게 나쁜 일일까? 죽기 살기로 달렸더니 어느 순간 아저씨는 보이지 않았다.

나는 워낙 말이 없던 아이였기 때문에 이런 일이 있어도 집에 아무 말 하지 않았다. 다만  그날 뒤로 더 이상 그 리어카를 똑바로 쳐다볼 수 없었다. 집 근처에 말 리어카가 보이면 멀찍이 돌아오곤 했다. 그 아저씨는 내가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고 중학생이 될 때까지도 그 리어카를 끌고 다녔다. 그즈음에야 그 아저씨가 그토록 난폭하게 굴었던 이유를 어렴풋이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는 정신지체자였던 것이다. 그 사실을 알고 난 뒤 그가 보통 어른들과는 달리 판단력이 떨어질 수 있음을 이해하게 되었지만 한편으로는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날의 공포는 또 더 끔찍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는 정말로 그 돌덩어리를 내게 던졌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윌리엄 트레버의 <루시 골트 이야기>를 읽다 보니 묘하게도 어린 시절 말 리어카 아저씨와의 작은 소동(?)이 떠올랐다. 어린 아이가 장난삼아 툭툭 쳐댔던 풍선. 순간 몹시 화가 난, 판단력이 떨어지는 정신지체자의 난폭한 행동. 이런 작은 우연이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결과를 불러와 그 순간 정말 불행한 일이 일어났다면 내 인생은 지금쯤 어떤 방향으로 달라졌을까? 그리고 또한 그 아저씨의 인생은? 조금 극단적으로 말해서 나는 어쩌면 이 글을 쓰고 있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만큼 그 돌덩어리는 무시무시하게 컸다.

삶에는 이렇듯 의도하지 않았는데도, 자기 뜻과는 달리 불행한 결과를 불러오는 순간이 있다. <루시 골트 이야기>의 루시 또한 어린 시절 한 순간의 그릇된 판단, 아니 조금 맹랑한  실수로 말미암아 상상하지도 못한 일을 불러오게 된다. 그리고 그 결과는 정말로 그녀 삶을 송두리째 뒤흔든다. 삶의 방향 자체가 바뀌어버리는 것이다. 하지만 루시가 어찌 알았으랴. 아이로서 자기 의사를 확고하게 밝히고 싶었던, 마음대로 뭐든 결정해 버리는 부모님에게 작은 복수 또는 반기를 들고 싶었던 그 생각이 그토록 끔찍한 결과를 불러오게 될 줄이야. 더욱이 자기 삶만 바뀐 게 아니다. 부모님은 물론 그 주변인들의 삶까지 완전히 달라진다.

처음에는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날지 무척 궁금해서 책장을 숨 가쁘게 넘긴다. 그러다가 그 일이 일어난 뒤로는 루시의 삶과 그 부모의 삶이 너무나도 안타까워서, 인생이 어쩌면 이럴까 싶어서 먹먹해진다. 삶이 다 이런 것은 아닐까? 어쩌면 지금 이 순간에도 이 지구 곳곳에서 단 한 순간의 잘못된 판단으로 인생이 꼬이기 시작하는 사람들이 수없이 많을지도 몰라, 그런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런데도 인간은 몹시 어리석어서 같은 실수는 아닐지언정 비슷한 실수를 또 저지른다. 루시만 하더라도 그렇게 자기 자신을 괴롭히며 유형지에서의 삶과 비슷하게 살아가지 않아도 됐을 텐데, 끝없이 자신에게 형벌을 가한다. 삶에서 길을 잃어버린 것이다.



그가 길을 잃지 않았다면 그들은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윌리엄 트레버, <루시 골트 이야기>, 187쪽)


삶의 길을 잃어버린, 방향을 상실한 루시 앞에 우연히도 ‘길을 잃어버린’ 한 사람이 등장한다. 그리고 바로 그 사실, 길을 잃었다는 사실 때문에 그는 루시를 만나게 된다. <루시 골트 이야기>는 인생에서 ‘길을 잃어버리는’ 의미를 생각해보게끔 한다. 레이프는 길을 잃었기 때문에 루시를 만난다. 루시는 레이프처럼 진짜로 길을 잃은 것은 아니지만 어떤 의미로든 어린 시절의 잘못된 판단으로 인생의 길을 잃고 스스로를 유폐하는 형벌을 내린다. 어디 루시만 그러할까. 그녀의 부모도 그리고 무엇보다 그들의 삶에 이런 영향을 끼치게 한 ‘그 사람’도 길을 잃어버린 것과 다름없다. 그 어둡고 쓸쓸한 길에도 과연 빛은 있을까?

윌리엄 트레버의 많은 작품들이 그렇듯이 <루시 골트 이야기> 또한 무언가를 잃어버린 사람들의 쓸쓸한 삶이 조용히 그려진다. 그렇게 잘못된 방향으로 한 번 꺾여버린 인생은 쉽사리 행복한 삶으로, 극적으로 변화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그들의 삶이 완전히 불행하게만 느껴지지는 않는다. 길을 잃어버렸을지언정, 그리고 그 길에서 또 다시 자기 삶을 더 어두운 곳으로 이끄는 어리석음을 보일지언정, 결국에는 그 어두운 터널을 빠져나가는 법을, 빛을 찾는 법을 인간은 스스로 알아낼 수 있는 존재임을 <루시 골트 이야기>는 조용하지만 묵직하게 전하기 때문이다. 그 감동은 책을 덮고도 오래도록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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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블린 사람들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43
제임스 조이스 지음, 진선주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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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조이스의 <더블린 사람들 : Dubliners>은 그의 난해한(?) 문학세계에 처음 도전하는 이들에게 적당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럼에도 이 작품을 읽기 시작했을 때 좀 당혹스러웠다. 불친절하다는 느낌이 컸다. 15개의 단편이 모두 갑자기 시작해서 느닷없이 끝나고,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주인공은 과연 어떤 사람인지, 주인공과 각 인물들의 관계는 무엇인지 도통 감 잡기 어려울 때가 많았다.  


15편의 단편은 말 그대로 ‘더블린’에 거주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각 에피소드의 주인공들이 서로 연관이 있는 걸까? 궁금했는데, 더블린에 사는 사람들이라는 걸 제외하고는 거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앞의 세 이야기를 제외하고는 화자도 모두 다르다. 화자에 따라 이야기의 느낌도 달라진다. 때문에 초반에는 ‘역시 난해한 것인가?!’하는 느낌도 있고 조금 지루하고 따분하기도 했다. ‘재미있자고 보는 책, 왠지 읽어야 할 작가니까, 의무감에 읽을 필요가 있을까? 이런 태도는 내 가치관(?)과도 맞지 않잖아?’하며 꾸역꾸역 책장을 넘겼다. 그러나 미련 없이 확 내려놓지는 못하고….


그러다 몇 편의 단편을 넘기니 서서히 탄력이 붙기 시작했다. 몇몇 단편은 꽤 마음에 들었고, 책을 덮을 때쯤엔 ‘와, 잘 썼다’하는 탄성이 나왔다. ‘더블린’에 사는 사람들의 모습은 그다지 행복하지 않다. 종교적으로는 부패했고, 경제는 궁핍하고, 가정은 화목하지 않다. 꿈은 좌절되기 쉽고, 어디론가 떠나고 싶지만 떠나지 못하고 현실에 매여 있거나 탈출할 기회가 주어져도 용기가 없어 무기력하게 주저앉는다. 종교 못지않게 정치도 부패했고, 대다수 사람들은 알코올에 취해있다. <더블린 사람들> 15편의 삶은 모두 그렇다. 무기력감이 팽배하다. 언젠가 보았던 로버트 알트만의 영화 <숏컷>이 떠오르기도 한다.

<더블린 사람들>처럼 한 도시에 거주하는 사람들의 삶을 그린 작품들은 꽤 될 것이다. 그런데 이 작품이 독특한 이유는 앞서 말했듯이 조금은(?) 불친절한 구조 때문이다. 이 사람은 이렇고 저렇고 어떤 사연이 있는데, 그 사연 때문에 이러저러하다고 ‘작가’가 개입하여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작가는 철저히 뒤로 숨어 있다. 카메라가 이 집을 비추다가 갑자기 다른 집을 비추듯이 그저 한 단면을 보여줄 뿐이다. 카메라가 비춘 그 시점부터 카메라가 또 다른 집을 비추기 전까지의 상황만으로 독자는 그 앞뒤전후를 파악해야 한다. 때문에 전통적인 서사구조에 익숙한 독자들은 처음에는 당혹감을 느끼지만 조금 익숙해지면 그 나름의 매력을 발견하게 된다. 마치 퍼즐을 푸는 기분이랄까.

단편을 읽어감으로써 당시의 아일랜드와 더블린의 상황에 대해 점점 더 알아가게 되기 때문에 읽는 게 더 수월해지기도 한다. 작가가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아도 점차적으로 그 무렵 시대 상황이나 종교, 정치의 부패, 사회의 타락 등을 유추해갈 수 있도록 짜놓은 구조와 사실적이면서도 담백한 묘사가 돋보인다. 게다가 독자의 상상력을 한없이 자극한다. “아이고 망측해라, 저 추잡한 짓을 하는 노인 좀 봐”라는 구절은 나오지만 ‘추잡한 짓’이 끝내 뭐였는지는 설명되지 않는다. 텍스트는 한 없이 열려있고, 작가의 존재는 보이지도 않고, 독자는 읽고 생각하기 나름이다.

이런 매력 때문일까,<더블린 사람들>은 왠지 한 번은 더, 다시 읽고 싶어진다. 이 책은 도서관에서 문학동네 번역본으로 빌려 읽었는데, 각주가 불필요할 정도로 많아서 흐름이 많이 끊겼다. 다시 읽어볼 때는 다른 버전으로 읽어봐야지. 제임스 조이스 한 단계를 넘었으니 ‘젊은 예술가의 초상’과 ‘율리시스’까지는 읽어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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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7-11-08 15: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조이스의 소설은 재미없어요. 그런데 얼마나 재미없는지 궁금해서 계속 읽게 돼요.. 《율리시스》가 그래요.. ㅎㅎㅎ

잠자냥 2017-11-08 17:15   좋아요 0 | URL
ㅎㅎ 얼마나 재미없는지 니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해보자! 이런 심리일까요. ㅎㅎㅎ

Falstaff 2017-11-08 21: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알라딘 서재에 서재 동무님 글을 볼 수 있는 기능이 있구먼요. 완전 형광등입니다. 한땐 얼리 어답터를 자부했는데 시간이란 놈이 거 참 힘이 세요.
전 이 책을 예전에 영문과 아가씨들이 가슴에 많이 끼고 다녀서 궁금해 읽었고, 이후에 돈 벌어서는 창작과비평사가 전두환 정권 시절에 문 닫고 창작사던가로 이름 바꿨을 때 한 권 사 보고, 이후에 언젠가 한 번 더 사보고, 마지막으로 요즘에 펭귄으로 다시 읽었군요. 왜 그랬는지 ㅎㅎㅎ 재밌어요. 인생이죠 뭐.
잠자냥님의 필력도 대단한데, 으쌰으쌰, 좀만 더 힘을 내보셔요!!! 응원하겠습니다.

잠자냥 2017-11-09 09:24   좋아요 0 | URL
하하, 아직 그 기능을 모르셨었군요! 전 그 기능으로 폴스타프 님 글 올라오면 바로 읽고는 한건데. ㅎㅎㅎㅎ 네 이 책은 문학동네 버전으로 빌려 읽고 펭귄버전으로는 사두었습니다. ㅎㅎ 조이스의 다른 작품도 곧 읽어봐야지요- ㅎㅎ

케이 2017-11-09 09: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읽고 좋아서 이것 저것 검색해 보다가, 제임스 조이스가 무기력한 조국 아일랜드 더블린 사람들을 비판하기 위해 썼다는 견해(?)를 읽었는데, 저는 전혀 그렇게 느끼진 않았어요. 그들을 비판하고 그들에게 각성할 것을 촉구하는 느낌은 전혀 받지 못했는데... 사람마다 느끼는 바는 참 다른 것 같습니다.
저는 이 책 읽을 당시 우울감을 어떻게든 극복하려고 몸부림치던 때였는데, 뭘해도 안되던 중병이 이 책 읽고 한번에 치유됐어요. 그런 의미에서 저에겐 정말 은혜로운 책이예요. 하지만 제임스 조이스의 다른 책은 엄두가 안나고, 독서내공이 좀 더 쌓이면 도전해보려고요. 10년쯤 뒤?ㅋ

잠자냥 2017-11-09 10:51   좋아요 0 | URL
하하하. 저도 그렇게는 도저히 느껴지지 않는걸요? ㅎㅎ 비판과 각성이라. ㅋㅋㅋㅋ 오히려 무기력한 그 사람들에 대해 연민이 있다면 모를까요. ㅎㅎ 같은 책을 읽어도 느끼는 건 그렇게 다르기도 하군요. ㅎㅎ 전 <율리시스>까지는 장담할 수 없지만 <젊은 예술가의 초상>은 읽을 것 같아요. ㅎㅎ

카알벨루치 2018-08-06 03: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학때 조이스의 더블리너는 “ paralysis”로 범벅되어있다고 배웠어요 <율리시스>한국판은 저희집에 백과사전보다 더 큰 책이 먼지만 가득...읽고싶네요 햐 언제쯤ㅋㅋㅋ

잠자냥 2018-08-06 09:30   좋아요 1 | URL
그러게요. 저도 <율리시스>는 죽기 전에 읽기는 읽어봐야 할 텐데.... 언제쯤? ㅎㅎㅎㅎ
 
곤충 극장 열린책들 세계문학 204
카렐 차페크 지음, 김선형 옮김 / 열린책들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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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을수록 좋아지는 작가가 있다. 카렐 차페크는 분명히 그런 작가에 속한다. 희곡 선집인 <곤충 극장>까지 읽음으로써 지금까지 읽은 차페크 작품은 <오른쪽 주머니에서 나온 이야기>, <도롱뇽과의 전쟁>, <로봇>, <호르두발>, <별똥별> 총 일곱 권이 된다. 앞으로 <왼쪽 주머니에서 나온 이야기>까지 읽은 뒤 차페크 평전을 읽을 계획이다.

그의 철학 소설 3부작으로 꼽히는 <호르두발>(1933), <별똥별>(1934), <평범한 인생>(1934)가운데 <평범한 인생>만 못 읽었는데, 이 책은 절판된 상태이고 중고로도 비싸게 팔리고 있어서 새로 출간되지 않는 한 한동안 읽지는 못할 것 같다. 우리 동네 도서관에는 이 작품이 없다. 사실 <호르두발>과 <별똥별>도 내가 신청해서 도서관에 비치했다. 지만지 시리즈에서 <평범한 인생>까지 출간한다면 또 도서관에 신청해서 읽을 예정인데, 나올지 안 나올지 모르겠다.

차페크의 모든 작품들이 대단한데, <곤충 극장> 또한 예외는 아니다. 이 책에는 희곡 3편이 실려 있다, 세 편 모두 100쪽 남짓으로 짧지만 강렬하다. 첫 희곡인 ‘곤충 극장’은 한 편의 우화에 가깝다. 인간인 여행자가 곤충들의 세계를 엿보게 되는데, 그 곤충들의 삶이란 보면 볼수록 인간의 삶과 다름없다. 나비들은 암컷수컷 할 것 없이 짝짓기에 몰두한다. 몇 시간도 지나지 않아 다른 짝한테 추파를 던지는 꼴불견을 서슴없이 저지른다. 쇠똥구리는 또 어떠한가? 똥 덩어리에 지나지 않는 것을 끌고 다니면서 그것이 마치 이 세상에 더 없을 숭고한 보물이라도 되는 듯이 광적으로 집착한다. 쇠똥구리가 똥 덩어리를 대단하게 여기면서 종일 굴리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인간이 집착하는 모든 것들 그러니까 돈, 성공, 명예, 권력 같은 것들이 어쩌면 저렇게 하나의 똥 덩어리에 불과한 것은 아닌가 싶어져서 씁쓸한 웃음을 짓게 된다.



    쇠똥구리 부인: 진즉에 결혼을 했는데 아직 공도 없는 거요?
    귀뚜라미 부인: 공을 어디다 써요?
    쇠똥구리 부인: 제대로 된 똥 공은 가족을 하나로 묶어 준다오. 진정한 삶- 즉 안정을 주지.
    귀뚜라미 부인: 아니, 아니에요. 삶이란 우리만의 가정이에요. 둥지를 짓고, 가게를 사고, 커튼도 달고요. 아이들도 있지요. 꼭 맞는 귀뚜라미 씨를 만나는 거예요. 우리의 작은 가정, 우리의 세계.
    쇠똥구리 부인: 그렇지만 똥 공 없이 살림을 어떻게 꾸려가려고? 어디를 가나 굴리고 다녀야지. 새댁, 잘 들어요. 자기만의 똥 공이 있어야 남편을 꽉 붙들어 매놓고 살 수 있다니까!
    귀뚜라미 부인: 좋은 집이면 충분할 것 같은데요!
    쇠똥구리 부인: 똥 공이라니까! (60쪽)


이미 많은 것을 갖고 있으므로 거기에 만족하고 살아가도 되는 맵시벌이 욕심 때문에 다른 곤충의 목숨까지 아무렇지 않게 짓밟는 모습은 이기적 욕망에 충실한 인간의 모습을 고스란히 재현한다. 때문에 이 이야기는 그저 모두 곤충, 눈살 찌푸려지는 벌레들의 추잡한 이야기라고 치부하면서 웃어넘길 수만은 없게 된다. 이런 맵시벌을 비판하는 ‘기생충’의 역할이 흥미롭다. 흔히 기생충은 그 이름부터가 혐오감을 갖게 하는데, ‘곤충 극장’에서는 이 기생충이 차라리 가장 순수하다.



    여행자: 당신은 누구요?
    기생충: 나? 사실 별거 아니야. 빈털터리고 ? 고아, 기생충, 뭐 그렇게들 부르더군.
    여행자: 옳은 일이 아니잖아요. 저렇게 죽이다니!
    기생충: 아, 내 말이 그 말이라니까, 친구. 그럴 필요가 없었거든. 나처럼 배를 곯은 것도 아니잖아. 저 친구는 그저 바리바리 쌓아 놓으려는 거라고. 충격적이지! 세상이 어떻게 되려고 이러는지. 아무것도 없는 사람도 있는데, 저놈은 먹이 창고를 저렇게 꽉꽉 채워 놓고 말이야. 안 그래? 비수가 있다 이거지. 나는 맨손밖에 없는데! 무슨 말인지 알겠어? (61~62쪽)

    여행자: 다 고기 한 덩어리 얻어먹자고 하는 짓이군!
    기생충: 그게 바로 내 말이야. 죄다 고기 한 덩어리 얻자고 하는 짓이라니까. 다른 딱한 새끼가 배를 곯더라도 말이야! 죄다 자기 배를 불려야 하는 거지! 안 그래? (64쪽)


이렇게 우화와도 같은 ‘곤충 극장’이 끝난 다음에는 스릴러와도 같은 ‘마크로풀로스의 비밀’과 한 편의 그로테스크한 SF를 보는 듯한 ‘하얀 역병’이 이어진다. <곤충 극장>에 실린 희곡 모두 좋았지만 나는 뒤로 갈수록 더 좋았다. ‘마크로풀로스의 비밀’은 웬만한 독자라면 ‘그 비밀’을 눈치 챌 수 있다. 혹시 그런 게 아닐까? 그럴 거야 하는 의심이 심증으로 굳혀질 때쯤 독자의 예상대로 비밀은 밝혀진다. 하지만 그 비밀은 이 작품에서 크게 중요하지는 않다. 그 비밀을 통해서 차페크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의미가 있다. 그 메시지는 ‘곤충 극장’의 마지막 장면과도 일맥상통한다. ‘곤충 극장’의 에필로그 부분에서는 하루살이들이 자신들의 생명을, 삶을 예찬한다. 오직 단 하루 밖에 살지 못하는데도 말이다. 그런데 그 하루살이들은 알고 있었다. 단 하루 밖에 살수 없기 때문에 그 하루가, 그 삶이 아름답다는 사실을.

‘마크로풀로스의 비밀’에는 이 하루살이와는 정반대되는 인물이 등장한다. 그는 영원히 살기 때문에 모든 것에 의미를 잃었다. 사랑을 느끼지도 못할 뿐만 아니라 슬픔이나 연민, 즐거움이나 행복 같은 감정과도 거리가 멀다. 사람의 목숨이 ‘1백 년, 130년까지는 괜찮을지’ 모르지만 그런 삶이 끝없이 이어지면 깨닫게 된다. ‘영혼이 속에서 죽어 버’리는 것이다. 결승점이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전력질주를 해야 할 어떤 의무도 느끼지 못한다. 그런 그에게는 어쩌면 단 하루뿐일지라도 끝이 있는 삶을 사는 ‘곤충 극장’ 하루살이들의 삶이 더 의미 있으리라.

마지막 희곡인 ‘하얀 역병’에서는 놀라운 장면이 있다. 나는 이 작품이 가장 좋았는데, 어떤 부분을 읽다가, 거의 100년 전 이야기가 마치 오늘날 우리나라 이야긴가 싶어져서 차페크의 혜안에 무릎을 쳤다. 한 도시에 나병과 증상이 비슷하지만 나병은 아닌, ‘하얀 역병’이 창궐한다. 치료법은 없다. 그런데 이 백색 바이러스 즉 ‘쳉 바이러스’는 신기하게도(?) 50세 이상만 발병하고 그들을 죽음으로 몰아간다. 쉰 살 이상이면 어김없이 모두 이 바이러스를 피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이 도시에서도 그 세대는 많은 것을 가진 기득권층이다. 인생의 절정기를 살고 있다. 반면 젊은이들은 그 세대들이 모두 하나씩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그들에게 빌붙어 살아가거나 그렇지 않으면 도무지 사회에서 자기 자리를 차지할 기회가 없다. 때문에 젊은이들은 이 하얀 역병의 창궐을 어떤 면에서는 반기기까지 한다. 이 바이러스 관련 기사가 실린 신문을 보던 어느 가정의 대화가 의미심장하다.



    딸: 그렇게 개인적으로 받아들이지 마세요, 아빠! 우리가 사회에서 일을 시작하기 어렵다는 얘기일 뿐이에요. 일자리도 없고 말이죠. 우리도 인생을 살고 가정을 꾸리려면 뭔가 희생이 필요하다는 거죠…….
    어머니: 일리 있는 얘기에요, 여보.
    아버지: 그러니까 당신도 얘 편이다 이거군- 그 말대로라면 우리는 모두 인생의 전성기에 꼴깍 죽어 넘어가야 한다는 거네.
    아들: 아빤 또 왜 저렇게 흥분하고 계세요?
    어머니: 아무 일도 아니다. 얘야, 그저 그 질병에 대한 기사를 읽으셨는데-
    딸: 더 많은 사람들에게 자리를 만들어 주려면 어떤 식이든 희생이 필요하다고 내가 말했어.
    아들: 그건 사람들이 다 하는 소리에요, 아빠! 역병이 없었다면 우리가 어떻게 살았을까 싶다니까요! 누나는 결혼도 못 할 거고, 나 역시 끝도 없이 시험만 치면서 악전고투하고 살았겠죠…….
    아버지: 때마침 잘됐다 이거냐, 이 녀석아?
    아들: 어쨌든 요새는 학위도 아무 소용이 없잖아요. 나이 든 사람들이 죽고 나면 상황이 달라질 수도 있죠. 뭐, 농담입니다! (253~254쪽)


그런데 이 아버지 또한 나중에 회사에서 동료들이 죽어나감으로서 한 자리를 차지하게 되니 참 아이러니하다. 아버지는 자식세대들이 자신들이 죽어나가기를 바라는 것이 못마땅했지만, 자신 또한 회사 동료들의 죽음으로써 기대하지도 않았던 자리를 차지하게 되니, 그 ‘하얀 역병’이 반갑지 않은 것만은 아닌 게 된다. 아니 오히려 자신은 그 병에 걸리지 않을 것이라 자부하면서 그 병을 반긴다.

이런 설정도 놀랍지만 이 작품은 뒤로 갈수록 전율하게 된다. 이 바이러스를 치료법을 알아낸 의사 갈렌이 역병 치료법을 나라에 알려주는 조건으로 ‘평화’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들을 고칠 수 있도록 해주는 대신 전쟁을 멈출 것. 병 때문에 죽어가는 목숨과 전쟁으로 죽어가는 수많은 목숨을 나란히 놓고 생각해보게끔 하는 설정에서 또 한 번 감탄하게 된다. 그런데 인간은 참으로 어리석게도 평화보다는 전쟁을 선택한다. 자기 목숨이 꺼져가고 있음에도 전쟁을 놓지 못한다. 이 얼마나 어리석은가!

차페크의 작품은 이렇듯 한없이 탐욕적이고 이기적이며 어리석은 인간의 모습을 풍자한다. 그 풍자는 위트가 넘쳐서 읽고 있노라면 피식 웃음이 나오기도 한다. 그런데 이 풍자와 해학은 그다지 기분 나쁘지는 않다. 인간은 어리석고 이토록 못났지만 그래도 불쌍한 존재라는, 이렇게 자기의 행복과 삶의 기쁨을 놓쳐버리는 안타까운 존재라는 연민어린 시선이 기본적으로 깔려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뒤늦게라도 어리석은 자신들의 존재를 돌아볼 줄 알고 ‘수정’할 줄 알거나 그렇게 하려는 의지를 보이기 때문에 그런 인간에 대한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다. 차페크의 작품들을 읽노라면 어리석고 못난 인간들 때문에(물론 나를 포함해서) 늘 한숨짓다가도 그래도 인간은, 완전히 희망을 버릴 수 없는 존재라는 1%의 가능성이라도 확인하기에 그저 ‘절망’하면서 책장을 덮지는 않게 된다. 차페크의 문학이 갖는 힘이 바로 거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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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1-06-14 16: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읽고싶어요 누르니 바로 피드 뜨는 잠자냥님 리뷰네요 ^^

잠자냥 2021-06-14 16:45   좋아요 2 | URL
제가 어쩌다 보니 카렐 차페크 마니아 1위인데요... 쿨럭쿨럭... 이 책 정말 재미나요. <곤충극장> 희곡이긴 하지만 읽으시고 괜찮다 싶으면 다음엔 차페크의 <도룡뇽과의 전쟁>도 추천합니다. 참, <도룡뇽>은 희곡 아닙니다~~ ㅎㅎ

coolcat329 2021-06-17 12: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잠자냥님 저 어제 알라딘 우주에서 딱 한 권 있는 이 책 구해서 샀습니다. 2만원 맞추느라 또 끙끙거리면서요~😅😅

잠자냥 2021-06-17 12:50   좋아요 1 | URL
ㅎㅎㅎ 애쓰셨네요! 우주점에 있었군요. 2만원 맞출 게 있었다니 다행이에요. ㅎㅎ 애쓰신 만큼 재미나야 할 텐데요!
 
가면 뒤에서 인문 서가에 꽂힌 작가들
루이자 메이 올콧 지음, 서정은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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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엄청나게 재미있다. 책을 손에서 놓을 수가 없어서 정말 단숨에 읽었다. 루이자 메이 올콧의 작품을 다시 읽는 날이 올 줄이야. 게다가 이렇게 완전히 반하게 될 줄이야. <작은 아씨들>의 루이자 메이 올콧- 어릴 때 읽은 <작은 아씨들>은 크게 인상 깊지는 않았다. 내가 워낙 ‘소녀’들의 이야기를 좋아하지 않아서 그랬는지도 모른다. 그보다는 <왕자와 거지>나 <보물섬> 또는 <15소년 표류기>같은 소년들의 모험담을 좋아했다. 내 또래 여자 아이들이라면 으레 좋아하는 <빨강 머리 앤>도 <소공녀>도 <작은 아씨들>도 나는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그 세계가 집 안에 ‘갇힌’ 소녀들의 이야기가 매력적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작은 아씨들>에서 인상 깊은 인물은 있었다. 바로 둘째 조. 조는 <작은 아씨들>의 딸 넷 가운데 가장 소년스럽고 활달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다른 자매들에 비해 주체적이고 독립적이어서 나는 조를 좋아했다. 그런 조가 어른이 되어 작가가 되었을 때도 그 설정이 꽤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고백하자면 나는 그런 조에게 심하게 감정이입을 했었다. 나 또한 딸 넷 가운데 둘째이며, ‘조’에 어울리는 특성들을 내가 갖추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런지 작가가 된 조의 모습도 왠지 뿌듯했다.

 <작은 아씨들>의 ‘조’ 이야기를 이렇게 길게 하는 까닭은 루이자 메이 올콧이 바로 그 ‘조’의 모델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올콧을 연구한 이들은 다분히 ‘조’가 그녀의 분신이며 그렇기에 <작은 아씨들>에서 ‘조’가 선정소설(Sensation Novel) 원고를 팔아 돈을 벌어들이는 장면에 주목했다. 심지어 ‘조’는 나중에 그 선정소설들을 불태우고 어린이와 청소년을 위한 소설을 써서 작가로서 크게 성공하기도 한다. 올콧 연구가들은 이 소설이 바로 올콧의 <작은 아씨들>에 해당하며 그렇다면 조가 썼다는 선정소설처럼 올콧도 실제로 그런 소설들을 여기저기에 투고하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을 갖고 그녀의 ‘선정소설’들을 찾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마침내 빙고! 알고 보니 올콧은 ‘A.M. 버나드’라는 가명 또는 익명으로 다수의 선정소설을 발표했던 것이다. 올콧 연구가들은 이 사실에 고무되어 그녀의 숨겨진 작품들을 발굴하는데 몰두하고 그렇게 해서 1970년대에 나온 선집이 <가면 뒤에서: 루이자 메이 올콧의 숨겨진 스릴러들>이었다. 이 책이 출간되자마자 여성주의 문학연구가들은 열광했다고 한다. 그 까닭은 <가면 뒤에서> 이 책에 실린 네 편의 작품들을 보면 직접 알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은 문학동네 ‘인문 서가에 꽂힌 작가들’ 시리즈 가운데 하나이다. 처음에는 올콧의 작품이 이 시리즈에 있는 게 조금 의아했다. 이 시리즈 가운데 조르주 페렉이나 안토니오 타부키, 제발트 등의 책은 여러 권 갖고 있고 또 좋아하기도 한다. 그밖에 다른 작가들 책도 더 읽어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 가운데 올콧의 작품은 관심 밖이었다. 앞서 말했듯이 이 시리즈에 그녀의 작품이 왜 있을까 좀 의문이 들기도 했다. 그런데 이 책을 읽고 나니, 왜 그런지 고개를 끄덕끄덕 하게 된다.

 ‘인문 서가에 꽂힌 작가들’ 시리즈라고 해서 재미가 없을 것이라고, 골치 아픈 이야기라고 짐작다면 큰 오산이다. <가면 뒤에서>는 정말 여러 의미로 대단하다. 재미와 흥미에서는 단연코 압도적이다. 나는 올해 여러 권의 재미난 책을 읽었지만 이토록 흥미진진한 책은 없었다. 스티븐 킹의 <그것>도 대프니 듀 모리에의 <나의 사촌 레이첼>도 이 책만큼 흥미롭고 쫄깃쫄깃하지는 않다. 일단 그 두 작품들은 꽤 긴 분량을 자랑하기에 어떤 부분에서는 좀 늘어진다는 느낌도 없잖아 있다. 그런데 올콧의 <가면 뒤에서>에 실린 이야기들은 중편 ‘가면 뒤에서, 또는 여자의 능력’을 비롯하여 나머지 단편 ‘어둠 속의 속삭임’, ‘수수께끼’, ‘위험한 놀이’ 4편 모두 짧고 굵직하다. 지루할 틈이 없다. 늘어지기는커녕 숨 막힐 정도로 흥미진진하다. 책을 읽다가 심장이 두근거리기는 오랜만이다. 독서에 대한 흥미를 잃은 사람이 있다면 이 책으로 다시 불을 당겨보는 건 어떨까? 분명히, 다음 쪽이 궁금해서 다른 일을 할 수 없을 것이다.

 올콧, 이 여자 정말 이야기꾼일세. 이런 생각들을 마음속에 숨겨두고 어린이와 청소년을 위한 건전한 작품들만을 쓰고 죽었다면 정말 억울했을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올콧의 이 책 제목이 <가면 뒤에서>인 것은 의미심장하다. 그녀는 어쩌면 착한 딸의 가면을 쓰고(올콧의 아버지는 저명한 초월주의 사상가이자 사회 개혁자로서 올콧에게 인내와 절제를 최고의 가치로 삼는 교육을 삼아왔다고 한다. 이런 아버지 아래서 얼마나 절제하고 스스로를 엄격하게 통제하면서 금욕적으로 자랐을지는 쉽사리 상상이 가능하다) <작은 아씨들>과 같은 작품을 썼겠지만 사실 그 내면에서는 불타오르는 열정과 투지(!)가 들끓었고, 그리하여 이런 작품들을 써낸 것이다.

 어떻게 보면 다음과 같은 사실 또한 흥미로운데 올콧의 어머니는 대단한 여성주의자로 평생 숙원이 여성의 참정권 획득이었다고 한다. 올콧은 어머니의 이런 영향으로 각종 정치활동에 활발히 참여했고 여성운동과 노예해방 운동에 적극적이었다고 한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이런저런 영향 속에서 <작은 아씨들>과 같은 교훈적인 작품과 <가면 뒤에서>와 같은 ‘펄프픽션’이지만 알고 보면 매우 급진적인 여성주의 관점의 작품들이 탄생한 것이다.

 줄거리를 소개하면 읽는 재미가 크게 반감될 터이기에 세세하게 소개하지는 않겠다. 다만 이 책에 실린 작품 속 여성들은 19세기 당시로서는 드물게 매우 능동적이다. 자기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 온갖 계략을 짜고 그것을 행동으로 옮긴다. 역경에 부딪히기도 하지만 그런 위기도 자기 힘으로 극복하고자 애쓴다(‘가면 뒤에서’). 마음에 드는 이성의 애정 또한 스스로 쟁취하려고 한다. 돈이나 재산으로 쉽게 그 상대를 얻을 수 있는데도 자기를 진심으로 사랑하게 ‘만들겠다’고 마음먹는다(‘어둠 속의 속삭임’). 더더군다나 놀라운 점은 ‘남자’보다 완벽한 ‘남장여자’가 등장해 자기 앞에 주어진 난관들을 스스로 극복하고자 한다(‘수수께끼’).

 ‘가면 뒤에서’의 ‘진 뮤어’를 악녀라고 하지만 정말 ‘그들’의 평가대로 악녀일까? 가정교사라는 낮은 신분의 여자를 가차 없이 경멸하는, 그런 경멸이 마땅한 대상이라고 여기는 그 잘나신 귀족 집안 자제들에게 자기로서는 최대한 스스로의 자존심을 지킬 마지막 발악은 아니었을까? 진 뮤어가 세상의 잣대로는 ‘악녀’라고 할지언정 그녀가 펼치는 게임에서 부디, 제발 이기기를, 최후의 승자가 되기를 나도 모르게 응원하게 된다. 그녀의 복수는 19세기 견고한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이 능동적으로 자기 삶을 이끌어가고자 하는 하나의 몸부림이기 때문이다. 어떤 면에서는 남성이 지배하는 사회에 순종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을, 그 세계를 쥐락펴락하는 모습에서 카타르시스가 느껴지기도 한다.


 <가면 뒤에서>를 통해 그저 <작은 아씨들>의 저자로만 알고 있던 루이자 메이 올콧을 다시 발견하게 되어 무척 즐겁다. 이 시리즈에서 나온 올콧 선집 2권도 얼른 읽어봐야겠다. 이미 알고 있던 작가의 새로운 면모, 어쩌면 착한 사회적 ‘가면’ 뒤에 숨겨졌던 진짜 ‘얼굴’을 알게 된 것이 가장 기쁘다. 작품 자체로도 무척 흥미진진했던 <가면 뒤에서>는 독서의 즐거움을 여러 가지로 느끼게 해준 ‘대단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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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intamani 2017-10-30 13: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처음 듣는 소식이군요

잠자냥 2017-10-30 14:09   좋아요 0 | URL
재미난 책이니 언제 한 번 읽어보시길 바랍니다. ㅎㅎ

cyrus 2017-10-30 14:1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올콧의 작품들을 페미니즘 관점으로 읽어보면 재미있겠어요. ^^

잠자냥 2017-10-30 14:27   좋아요 0 | URL
네! 정말 흥미롭고 재밌습니다. 구구절절 분석해보고도 싶었지만.... 다른 독자들의 읽는 재미를 위해 여기까지만! ㅎㅎ

케이 2017-10-31 12: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요즘 책읽는 재미가 없어서 통 안읽히는데, 이 책 읽어봐야겠어요!

잠자냥 2017-10-31 12:49   좋아요 1 | URL
ㅎㅎ 이 책은 집나간 며느리도 돌아오게 한다는 가을 전어처럼 잃어버린 독서에 대한 흥미를 꼭 되찾게 해줄 거예요. ㅋㅋㅋ 아니, 다른 책은 몰라도 이 책 만큼은 정말 재미있습니다!!!
 
더 저널리스트 : 어니스트 헤밍웨이 더 저널리스트 1
어니스트 헤밍웨이 지음, 김영진 엮고 옮김 / 한빛비즈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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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밍웨이 작품을 좋아해도 헤밍웨이 그를 좋아한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아니 없었다. 오히려 그는 작품만 알았을 때 더 좋은 작가에 속했다. 물론 이제 와서 인간 헤밍웨이를 안다고 말하기에는 어쩌면 무리가 있을 수도 있다. 그를 직접 만나 이야기를 나눠본 것도 아니며 오랜 세월 그를 지켜본 것은 더더욱 아니기 때문이다. 가까운 사람을 곁에 두고 오래 보더라도 때로는 그 사람의 전혀 다른 면을 발견하기도 하는데, 하물며 글로 멀찍이서 만난 사람은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더욱이 그는 동시대인도 아니지 않은가.


그럼에도 나는 최근에 헤밍웨이를 조금은 다시 보게 되었다. 그를 인간적으로 전보다는 좋아하게 되었다. 그래, 이런 면이 있었으니까 그가 그런 소설들, 그러니까 <노인과 바다>라든지 <깨끗하고 불빛 환한 곳> 같은 그런 작품을 쓸 수 있었을 거야. 고개를 끄덕였다. 순전히 <더 저널리스트: 어니스트 헤밍웨이> 이 책 한 권 때문이었다. 헤밍웨이는 잘 알다시피 기자로 글을 쓰기 시작했다. 이 책은 저널리스트로서 헤밍웨이를 만날 수 있다.


이 책이 출간되었을 때 어찌나 기뻤던지, 나오자마자 주문했던 것 같다. 그만큼 나는 어떤 면에서는 헤밍웨이 글을 무척 좋아했다. 소설이 아닌 그가 언론인으로써 쓴 글들을 볼 수 있다는 데 어찌 서둘러 읽지 않았으랴. 그러고 보니 어쩌면 인간 헤밍웨이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나는 단지 그의 글을 좋아할 뿐이라고 말해왔으면서도 사실은 인간 헤밍웨이의 어떤 면은 좋아하고 있던 게 아닐까 하는 의심이 살짝 들기도 한다.


헤밍웨이의 글은 단문으로 깔끔하다. 그러면서도 할 말은 모두 한다. 그 군더더기 없는 문장은 그가 기자로 활동하면서 얻은 아주 좋은 글쓰기 습관임을 헤밍웨이의 작품을 읽어본 사람들은 모두 안다. 그러니 그가 쓴 기사들은 더더욱 깔끔하면서도 정확하다. 그런데 놀라운 점은 그런 글들이 아름답기까지 하다는 것이다. 문학 작품을 읽을 때와는 다른 아름다움이었다. 현학적이지 않으면서도 위트 넘치고, 소박한 문장에 풍자와 해학이 담겨있다. 어떤 대상에는 한없이 연민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그런데 그 문장은 절대로 질척거리지 않는다. 이런 글을 쓸 수 있는 사람이라니, 하, 대단하다.


모든 글이 그렇겠지만 겉보기에만 빼어나게 아름다운 글은 매력이 그리 크지 않다. 문장만 미문이라고 그 글이 정녕 아름다울까? 거기에 제대로 된 생각이 담겨 있을 때 글은 더욱 빛나기 마련이다. 기자 헤밍웨이가 쓴 글들이 바로 그랬다. 신변잡기나 당시 사회를 가볍게 다룬 기사 속에서도 사회의 부조리함을 꿰뚫어보는 그의 통찰력은 빛난다. 헤밍웨이가 신참 기자 시절에 쓴 ‘시장님은 왜 경기를 안 보고 유권자들만 챙기나’라는 글에서는 복싱 경기장에 굳이 찾아와서 유권자 관리에만 힘쓰고 경기에 집중하지 못하는 시장을 풍자한다. 그런데 이 풍자는 저속하지 않다. 유쾌하게 미소를 지으면서 글을 읽게 되는데, 그런 가운데 시장으로 대변되는 사람들(유력 정치가)의 판에 박힌, 진정성이 결여된 모습을 생생하게 만날 수 있다.


이렇게 헤밍웨이는 가식적인 정치인을 비꼬는 글을 시작으로 사회 비판적인 글을 쏟아내기 시작한다. 불평등과 부조리함에 분노했으며 무엇보다 파시즘과 크고 작은 모든 전쟁에 경종을 울리는 글을 많이 썼다. 아마도 그가 20대에 해외 특파원 자격으로 유럽의 전쟁과 사회상을 보도했기 때문일 것이다. 특히 제2차 세계대전과 스페인 내전, 그리스-터키전 등등 전쟁의 현장에 직접 머문 적이 많아서 그랬는지 그는 전쟁을 그 무엇보다 혐오했다. 이 책에는 헤밍웨이가 직접 찍은 전쟁 사진과 함께 짧은 글이 실려 있는데, 그 글과 사진은 몹시 충격적이면서도 이루 말할 수 없이 가슴 아프다. 전쟁미치광이들이 부디 이런 글과 사진을 보고 뭐라도 좀 느꼈으면 좋으련만, 그럴 일은 절대로 없을 것 같다. 하긴 그런 사진이나 글을 보고 뭔가를 느낄 줄 아는 이들이라면 전쟁을 벌일 생각조차 하지 않겠지만 말이다.


파시즘을 경고한 글들 가운데 인상 깊었던 것은 무솔리니에 대한 글이었다. 뒷날 독재 권력을 휘두르는 무솔리니가 일개 신문사의 편집장이었을 때, 헤밍웨이는 기자로서 그를 관찰할 기회가 있었다. 헤밍웨이는 그 탁월한 통찰력으로 눈앞의 인물이 갈등을 끝낼 인물이 아니라 또 다른 전생을 불러올 수 있는 인물임을 경고했다. 그러면서 무솔리니가 얼마나 한심하고 허풍쟁이인지를 글로서 낱낱이 까발린다.


무솔리니는 유럽 최고의 허풍쟁이다. 무솔리니가 내일 아침에 당장 나를 끌어내 총살한다고 해도 나는 여전히 그를 허풍쟁이라고 부를 것이다. 총살하겠다는 것 자체가 허풍일 테니. (.....) 자신의 변변찮은 생각을 현학적인 단어로 치장하는 그의 천재적 재능을 연구해보자. 일대일 결투를 선호하는 그의 성향을 분석해보자. 진짜 용감한 남자라면 굳이 일대일 결투에 나설 이유가 없다. 겁쟁이들이나 끊임없이 일대일 결투를 벌이며 자신이 용감하다고 믿으려 드는 것뿐이다. 무솔리니의 검은 셔츠와 흰색 각반도 살펴보라. 아무리 눈에 보이는 이미지를 위해서라고 해도 검은 셔츠에다 흰색 각반을 받쳐 입는 사람이 제정신일 리 없다. (‘유럽 최대의 허풍쟁이, 무솔리니’, 112~113쪽)


무솔리니의 아들들은 공중에서 전투를 한다. 거기엔 머리 위에서 총을 겨누는 적군이 없다. 하지만 가난한 이탈리아의 아들들은 땅에서 싸우는 보병이다. 전 세계 가난한 이들의 아들은 언제나 보병인 것처럼 말이다. 이들에게 행운이 있기를. 그리고 언젠가 자신의 진짜 적이 누구인지, 왜 그러한지 깨닫게 되기를. (‘아프리카에는 독수리가 난다’, 207쪽)



헤밍웨이는 ‘인간이라는 존재에 관해 솔직하고도 사실적인 글을 쓰는 것이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글을 쓰려면 먼저 인간을 이해하고 이해한 것을 글로 풀어낼 줄 알아야 하는데 한평생을 바쳐도 둘 중 하나를 제대로 배울까 말까 하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그렇게 보자면 헤밍웨이는 인간을 이해하고 그것을 글로 풀어낸 드문 작가 중 한 사람이 아닐까 싶다. 헤밍웨이의 기사에서 곧잘 등장하는 주제는 ‘무엇이 공정한가’이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 의식이 없는 이들은 글을 쓸 생각을 하지 말라고 충고하기도 했다. 저널리스트로서 헤밍웨이는 적어도 무엇이 옳고 그른지 제대로 알고 있었고 그것을 글로 썼다. 그러므로 그가 쓴 글은 단순한 기사가 아니라 읽는 이들이 여러 번 곱씹게 하는 힘을 지녔다.


이렇게 헤밍웨이는 사회의 온갖 부조리에 맞서 진실을 고발하고자 했으며, 전쟁의 참상을  전함으로써 인간이 또다시 전쟁과 파시즘이라는 어리석기 짝이 없는 불구덩이 속으로 들어가지 않기를 바라는 간절한 글을 썼다. 또 가난하고 힘없는 이들의 편에서 그들의 삶이 조금은 나아지기를 바라기도 했다. 그가 소설 속에서 (또는 실제 삶에서) 매우 마초적이고 어떤 면에서는 찌질한 모습을 여과 없이 보여주었다 할지라도 그가 이러한 인간성을 지닌 사람임을 알게 되었을 때는 도저히 싫어할 수만은 없어진다.


마지막 장 ‘작가가 되고 싶다고 찾아온 청년에게’를 통해 헤밍웨이가 청년에게 해준 말들을 읽다 보면 인간적으로 따뜻하고 푸근한 선생님 같은 면모도 엿볼 수 있다. 어쩐지 늘그막의 수염이 덥수룩한 곰 같은 그의 모습이 떠오르면서 슬며시 웃음을 짓게 되기도 한다. 그가 그 청년에게 하는 말은 거의가 ‘진실’할 것이었다. ‘진실’- ‘자기 자신에게 진실한 글을 쓸 것’ 헤밍웨이는 아마도 그 ‘진실’에 가장 가까이 다가간 저널리스트이자 소설가가 아니었을까. 그렇기에 문학 작품은 물론 그의 이 짧은 저널들도 이토록 사람의 마음을 울리는 게 아닐까.


헤밍웨이 : 좋은 글이란 진실을 쓰는 거지. (......) 하지만 작가 자신이 이해하지 못하는 대상에 대해 계속 글을 쓰다 보면 결국 가짜 글을 지어낼 수밖에 없어. 가짜로 지어낸 글을 몇 번 쓰다 보면 더 이상 양심적으로 글을 쓸 수 없게 되지. (.....) 양심을 제외하고 작가가 갖춰야 할 덕목을 딱 하나만 더 꼽으라면 상상력이라고 할 수 있지. 경험으로 배우는 게 많아질수록 더 진실에 가깝게 상상할 수 있는 거야. (‘작가가 되고 싶다고 찾아온 청년에게’, 24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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