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관이 집에서 도보로 5분도 채 되지 않는 거리에 있다. 6년 전에 이곳으로 이사 올 때 작정하고 도서관 옆으로 왔다. 그땐 호기롭게 퇴근하고 나면 도서관 열람실 가서 글을 써야지, 책도 더는 사지 말고 빌려 읽어야지! 두 가지 결심을 크게 하고 왔는데.... 둘 다 지키지 못한 것 같다. 몇 달 후 이사 예정이라 요즘 책을 덜 사고 있기는 한데, 6년 전 이사 때보다 책은 훨씬 늘어났다. 나만큼이나 책이 많으면서 곧 이사를 앞두고 있는 내 친구는 이삿짐 견적 내러 온 사람이 책이 너무 많다면서 구시렁대는 소리를 듣고는 결국 사람 하나 더 쓰시라고 했다고 한다.... 무섭다;;;
그래서 오늘도 왕창 책 지르고 싶은 마음을 꾹 누르고 딱 2권만 샀다. 그리고 사려고 했던 책 중 두 권은 도서관 희망도서로 신청했다. 우리 도서관은 한 사람이 한 달에 2권 신청할 수 있는데, 그것도 그해 책정된 예산이 다 떨어지면 더는 받아주지 않는다. 대부분의 도서관이 11월쯤이면 예산을 다 썼다면서 희망도서 신청을 더는 받지 않는 것 같다.
오늘 내가 신청한 책 두 권 중 하나는 크림 중의 크림(<진 브로디 선생의 전성기>), 뮤리얼 스파크의 <메멘토 모리>이다. 뮤리얼 스파크의 신작이라 궁금하기도 한데, 시인 김수영이 마지막으로 번역한 작품이라는 문구도 자못 궁금(의아하다.... 복간본인가?)증을 불러일으킨다. 출판사 소개 글에서는 ‘시인이 타계한 후 1968년 우리나라에 처음 소개되었’다고 한다. 아무튼 원작이 궁금해서 사보고 싶었는데, 솔직히 이 출판사의 이 시리즈는 굳이 사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아서(예전에 케이트 쇼팽 <셀레스틴 부인의 이혼>을 사 읽고 되판 적이 있다) 몇 달 전에도 케이트 쇼팽 <그녀의 편지>를 희망도서로 신청한 적이 있다(근데 읽지 못하고 다시 반납;).
또 다른 한 권은 <삶을 바꾼 페미니즘 강의실>이다. 사실 이 책은 정희진의 신간 알림을 신청해 놓았더니, 메일이 날아와서 알게 되었는데, 공저자 중 한 사람으로 정희진의 이름이 보인 것도 반갑지만, ‘춘천의 한 대학에서, 교양과목도 아닌 전공수업으로, 그것도 남성 교수자에 의해, 무려 20년간 <여성주의철학> 수업이 이어져왔다’는 소개 문구에 궁금증이 팍 일었다. 2021년, 강의를 이끌었던 장춘익 교수가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서 그 강의는 이제 더 이뤄지지 못하고 있다는데, 그간 그 강의실에서는 어떤 담론들이 오갔을지 궁금하기 짝이 없다. 다른 때 같았으면 분명 사서 읽었을 텐데, 이사를 앞두고 책 줄이기.......; 그나저나 요즘 어떤 공공도서관에서는 ‘페미니즘’ 단어만 들어가도 희망도서 신청을 받아주지 않는다는 말도 있던데, 설마 퇴짜 맞는 건 아니겠지?
이렇게 신청해 놓고 내가 희망도서로 신청한 책 목록을 들여다 보니, 아 나 이 책 참 잘 신청했어, 내가 아니면 이 책을 누가 도서관에 들였을까! 싶은 책도 있고 아니, 이런 책도 신청했단 말이야??? 동공지진한 책도 있고, 희망도서로 신청해서 읽었지만 왠지 소장용으로 다시 사고 싶어지는 책도 있다. 내가 그간 신청한 목록들은 아래와 같다(안물 안궁? 그럼 패스하시라~). 2016년 11월에 처음 신청한 책이 비치된 걸 보니, 이사하고 나서 정신 좀 챙기고 10월부터 희망 도서를 신청한 모양이다.




목록에서는 출판사가 드러나지 않아서 잘 알 수 없지만, 사실 나는 지만지 책, 그 사악한 가격의 책 가운데 읽고 싶은 책이 있을 땐 대부분 도서관 희망도서를 이용한다. 아니면 도서관에서 검색부터 한다. 그중 재미난 일화가 하나 있는데, 2018년, 세르게이 도블라토프의 <외국 여자>가 출간된 사실을 뒤늦게 알고는 도서관에 희망도서 신청을 했다. 얼마 후 도서관에서 이메일로 답신이 왔는데, 그 내용인즉 다음과 같았다. ‘귀하께서 신청하신 도블라토프의 <외국 여자>는 2012년에 출간된 책으로 출판연도가 오래되어(5년 이상) 희망도서 신청대상에서 어긋납니다. 그러나 문학적 가치가 뛰어나다고 판단하여 비치하도록 결정했습니다.’ ㅋㅋㅋㅋㅋㅋㅋ 이 책을 구입한다고 하니 기뻤는데, 사서가 보기에도 ‘문학적 가치가 뛰어나다’고 한 부분이 너무 뿌듯했달까. 어느 사서(우리 동네 도서관 사서 얼굴 난 거의 안다.....)가 어떤 기준으로 그런 판단을 내렸을지 이야기라도 나눠보고 싶은 심정이었다. 아무튼 지만지 책(희곡 포함) 사서 읽기 너무 비싸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은 도서관 희망도서 신청을 적극 이용해 보시라-
아, 내가 이 책은 정말 잘 신청했어! 이 책은 정말 명작이야! 공공을 위해 꼭 필요한 책이야! 나도 왠지 소장용으로 다시 사고 싶다! 하는 생각이 드는 책은 단연 <새로운 단어를 찾습니다>와 <육식의 성정치>이다. 이 책 두 권은 내가 신청해서 읽던 시기보다 나중에 사람들의 눈길을 끈 것 같은데, 알고 보니 <새로운 단어를 찾습니다>는 김영하 북클럽에 선정되어서 많이 알려진 듯하다. 아무튼 재미나고 좋은 책이다. <육식의 성정치>는 워낙 명저이기도 한데 알라딘에서는 다부장님이 여성주의 책읽기 대상 도서로 선정하면서 많은 사랑을 받은 전력이 있다.
희망도서 신청했다가 유일하게 거절당한 책도 있는데, <바이닐. 앨범. 커버. 아트>가 바로 문제의 책이다. 거절 사유는? 정가 38,000원 비싸다는 것이다!!! 아니, 비싸니까 신청했는데 비싸다고 거절하다니 젠장. 한때 음반 덕후였던 나는 음반 커버에도 관심이 많다. 이 책 정말 흥미진진할 거 같은데, 아직 못 읽었..... 올해는 걍 내 돈 주고 살까봐....
호기롭게 신청해놓고 책 받아와서는 여태 아직 못 읽고 반납하고, 빌렸다가 다시 반납하고를 반복하는 책들도 있다. <모험적 독일인 짐플리치시무스>, <신사 배리 린든의 회고록>, <아산>, <갈라테아 2.2>, <선택받은 사람>, <저항의 멜랑콜리>, <켑투케 중단편집>이 대표적이다. 그중 <신사 배리 린든>, <아산>, <갈라테아>, <저항의 멜랑콜리> 같은 책은 2회 이상 대출 반납 반복 중.... -_- 대산 세계문학 총서 내가 참 사랑하는데, 압도적 두께가 가끔 좀 질릴 때가 있다. 대부분 도서관 이용자들은 최대 대출 권수(우리 동네는 1회 5권)를 꽉꽉 채워서 나올 텐데, 나도 다섯 권 다 채워서 빌려오면 이런 두꺼운 대작들은 결국 못 읽고 반납하게 되더라..... <모험적 독일인>은 읽어보니 내 취향이 아니라서(문체 및 내용 등) 다시 읽을 것 같지는 않은데 나머지는 기필코!!! 꼭 완독할 테닷!
아니 내가 이런 책도 신청했어??? 오늘 깜놀! 동공지진한 책도 있는데, <배송 추적 (이동하는 모든 것의 인문학, Door to Door)>과 <계절이 없는 거리> 이 두 권은 진심 새로워서 알라딘에서 정보까지 찾아봤다. 그러고 나서야 아아, 했더라는. 아마 궁금해서 신청해놓고는 몇 장 읽어보다가 내 취향이 아니거나, 기대보다 못해서 바로 반납한 책인 거 같다. 근데 또 지금은 <계절이 없는 거리>는 궁금하다. 다시 대출해서 읽어봐야겠다.
그러다보니 그간 대출 목록도 궁금해서 쭉 살펴봤는데, 거기서도 마찬가지로 아니, 내가 이런 책도 빌려 읽었어? 싶은 것들이 종종 눈에 띈다. 대출 목록은 하도 길어서 여기에 첨부하기는 무리데스네.... 그중 좀 웃긴 것만... 소개
작은 출판사 차리는 법 : 선수 편집자에서 초짜 대표로 이현화 지음 2021/03/21 2021/04/11 반납
일본 1인 출판사가 일하는 방식 니시야마 마사코 지음 ; 김연한 옮김 2017/09/21 2017/10/10 반납
우리 자냥이! 아직 꿈이 있구나! 너는 다 계획이 있구나!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태어나지 않는 것이 낫다 : 존재하게 되는 것의 해악 데이비드 베너타 지음 ; 이한 옮김 2019/08/09 2019/08/30 반납
악 이 염세주의자!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건강의 배신 : 무병장수의 꿈은 어떻게 우리의 발등을 찍는가 바버라 에런라이크 지음 ; 조영 옮김 2019/08/23 2019/09/16 반납
1日 1食 : 내 몸을 살리는 52일 공복 프로젝트 나구모 요시노리 지음 ; 양영철 옮김 2017/04/05 2017/04/22 반납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니 그러면서 무슨 이런 책을 읽었어! 이 모순된 인간아! ㅋㅋㅋㅋ
알려지지 않은 예술가의 눈물과 자이툰 파스타 박상영 지음 2018/11/11 2018/12/02 반납
이런 책도 시도해보았습니다.....만 한 편인가 읽고 반납한 기억 ㅋㅋㅋㅋㅋ 쟝쟝이가 좋아하는 작가 같던데....
연필 깎기의 정석 데이비드 리스 지음 ; 정은주 옮김 2017/08/11 2017/08/27 반납
잠자냥이 연필에 꽂혔을 때............
맨큐의 경제학 N. Gregory Mankiw 지음 ; 김경환, 김종석 옮김 2016/12/11 2017/01/03 반납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 오늘 젤 크게 웃었다. 나 이거 왜 빌렸었지?
아무튼 도서관은 이렇게 꼭 사보기는 그렇지만 이것저것 시도하기에 좋은, 우리 같은 책쟁이들에겐 없어서는 안 될 공간이지 않습뉘까!?
그나저나 도서관에서 5분 거리에 살아도 종종 연체할 때가 있다. 아침 출근길에 지하철 반납구에 넣으려고 책을 갖고 가다가 출근하는 우리 동네 도서관 사서를 마주칠 때도 있는데, 그때 나는 정말 진심으로 그 사서에게 반납하면 안 되겠느냐고 묻고 싶어지는 것을 몇 번이나 꾹 참았다. 사서님 면대면 반납 서비스는 안 되나요? 제 가방에 지금 도나 해러웨이 책 반납할 거 있거등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