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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과 자유를 위한 정치 - MB를 넘어, 김대중과 노무현을 넘어
손호철 지음 / 해피스토리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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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렬한 비판 마저도 힘 빠지는 일처럼 느껴지는 게 바로 우리 정부의 모습이다. 곁다리로 걸쳐 힘을 쓰는 건지 마는 건지 우습기만 한 야당도 똑같다. MB가 정권을 잡고부터 매시간, 하루하루 사건 사고 없었던 날이 있었던가. 사건이 터지면, 지저분한 스캔들을 대서특필하여 자신들의 잘못을 덮어버리기 위해 애를 써왔던 게 바로 정부 아닌가. 

'민주주의'와 '진보'에 대한 깨달음을 얻기 까지 달려야할 시간들은 아직도 멀고 험한 듯 보인다. 이미 다 지나간 일 같지만, 지나간 일들은 없다. 표면적으로 기억에서 조금씩 물러났을 뿐. 아직도 누군가의 가슴에는 방금 일어난 일처럼 처절한 사건들이 많았다. 

쌍용차 사태를 비롯, 용산 참사, 두 대통령의 죽음, 미친소 촛불 시위 등 얼마 되지 않은 시간 동안 우리가 겪어야 했던 일들은 상상초월이었다. 그 사건 뒤의 발언, 대처들은 더 당황스럽고 울분을 토하게 했다. 인간을 인간처럼 대우하지 않았고, 생명을 하찮게 여기는 정부를 보며 참담한 심정이었다. 한 명의 사생활이나 인권은 존중은 무슨, 딱 알맞게 무시했다. 

그 고집과 아집 사이에서 국민들은 기겁을 했다. 논리적으로 다가가도 무식하게 처리하는 그들의 모습에 이것이 과연 21세기의 모습인가 당황스럽기 짝이 없었다. 포퓰리즘은 그렇다 치고 파시즘은 무엇인가? 자기가 대한민국의 히틀러라도 된 것처럼 더럽기 짝이 없는 웃음. 그 아래 파리처럼 들러붙어 살겠다고 손바닥을 비벼대는 하수인들. 이제 말만해도 입 아프다. 

'빵과 자유를 위한 정치'에 담긴 손호철 교수식 비판을 속을 다 후련하게 해준다. '민주당'을 향한 촌철살인이나, 대중을 향한 외침 또한 가슴에 콱콱 박힌다. 국민들이 움츠리고 있다고 하여, 그들은 당연히 내뜻이 국민들의 뜻이라고 말한다. 스물스물 내부에서 울리는 진동 따위는 관심도 없는 것 같다. 손호철 교수는 경고한다. 사실 반복되는 이야기도 많고, 한 이야기를 또 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 반복이 전혀 과하지 않음을 느낄 수 있다. 그만큼 이 사회는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는 것이다. 

자신의 위치에서 제 할 일을 하지 못하는 정치인들 때문에 국민들이 얼마나 고통받고 있는가. 눈치나 살살보며 하는 듯 마는 듯 하는 민주당의 투쟁은 어디 쓸 데도 없다. 뭐 말 뒤집기야 정치 하는 인간들이 최고겠지만, 자신들이 뿌려놓은 잘못도 수습하지 못하면서, 비판과 비난을 일삼는다고 국민들이 모르고 지나칠까?  

믿었지만, 믿음을 배신당했기에 등을 돌려 만들어낸 결과가 더 끔찍하다는 걸 국민들이 더 잘 안다. 자기들끼리 싸우고 떠들지 않아도 가장 잘 아는 건 국민들이다. 그것을 제대로 깨닫지 못하는 게 정부고, 국회의원들이다. 해도해도 너무들 하는 것이다. 개딜정책이라고 자랑스럽게 내세우며 많은 사람을 고통받게 하고, 강 정비 한답시고 빈곤층과 복지비를 하루아침에 깎아드시고, 그 마누라님께서는 한식의 세계화를 한답시고 급식비를 왕창 삭감하시고. 결국 아무것도 막지 못한 채 시간은 흘러흘러 오고. 우리는 무엇을 위해 살고 있단 말인가.  

우리가 그들에게 표를 던져야 할 이유는 무엇이고, 응원할 이유는 무엇이란 말인가. 이책을 읽으며, 지난간 혹시 때늦은 이야기가 아닐까 하고 우려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결국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은 이야기가 가득이다. 그가 말하는 2년 여가 넘는 시간동안 일어난 이야기들 중, 제대로 해결된 것이 도대체 뭐가 있을까? 그게 더 가슴 아프다. 그게 더 뼈저리다. 우리는 좀 더 좋은 사회를 위해서 달렸고, 노력했지만 결국 더 나쁜 사회가 되어가고 있다. 그것은 누구의 잘못일까?  

이제 웃기는 굿판은 그만 보고 싶다. 좀 더 신명나는 굿판, 모두가 즐거운 굿판이면 얼마나 좋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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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공간>를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역사의 공간 - 소수성, 타자성, 외부성의 사건적 사유
이진경 지음 / 휴머니스트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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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엔 그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건지 갈팡질팡 깨닫지 못했다. 그가 전하고 싶은 메시지는 도처에 널려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난 텍스트를 따라가기에만 급급했다. 그의 텍스트는 한줄기를 따르며 흐르고 있었다. 반성과 성찰의 시간을 가져야 한다고 외치고 있었다. 그 반성과 성찰은 우리가 겪어낸 역사를 망각하고 외면하고, 잊으면서부터 시작되었다. 하지만, 아직도 나는 이진경이 한 이야기를 제대로 이해한 것인지 이진경이 하고 싶었던 말이 내가 이해하고 있는 게 맞는 것인지 의문이 든다. 아마도, 꾸역꾸역 먹은 밥을 소화하려면 고통의 시간을 건너야 하는 것처럼, 나도 그 과정을 건너고 있는 게 아닌가 싶다. 하지만, 어쨌든 그는 올바른 이야기를 하고 있고, 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것은 보람되고 즐거웠다. 

   
 

 시간이란 시계로 표상되는, 이미 주어져있고 무얼 하든 동일하게 '흘러가는' 자연적 사실이 아니다. 그것은 공동의 리듬을 통해서, 혹은 동조된 리듬을 통해서 구성되는 것이다. 공동성이란 서로의 신체적인 움직임을 맞추어가는 리듬의 구성을, 그것을 통해 만들어지는 시간적 동조를 포함한다. 그렇기에 구성되는 리듬의 차이마다 다른  시간들이 존재한다.   

맑스에 따르면 자본의 착취는 무엇보다 이런 시간의 차이를 착취하는 것이다. 화폐자본에서 상품자본, 생산자본을 거쳐 다시 화폐자본으로 돌아가는 자본의 순환은 자본의 생존의 리듬을 갖는다. 이 순환의 리듬을 맞추지 못하면 자본은 흑자 상태에서도 파산하는 경우가 있다. 이런 자본의 순환에 부분적으로 맞물려 있지만 이와 전혀 다른 노동력의 재생산의 리듬이 있다. 노동력을 제공하고 임금을 받아 그것으로 생활수단을 구매하여 소비하며 다시 이에 필요한 돈을 벌기 위해 노동력을 팔러 자본가에게 가야 하는 노동력의 순환이. 이 순환의 리듬을 맞추지 못하면 노동력은 재생산되지 못하고, 노동자는 죽는다. 자본의 시간과 노동력의 시간, 이 상이한 시간의 차이를 자본은 착취한다. 노동시간의 최대치의 차이를 맑스는 잉여가치라는 개념으로 정의한 바 있다. 역으로 잉여가치란 이러한 시간의 차이를 착취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  15p

 
   

 그는 '이주노동자의 노동력'을 착취하는 우리 사회. 그들의 노동력으로 자본 생존의 리듬을 갖는 우리. 하지만, 착취의 초과는 또 얼마나 큰 위험을 가져올지 모른다는 경고를 내포하고 있었다. 우리는 '민족'으로 얽힌 '국민'이라는 이름으로 '한국'이라는 나라에 묶여 있다. 하지만, 그 '민족'이라는 개념이 얼마나 큰 배타성과 이기적인 생각으로 뭉쳐있는지 깨닫지 못하고 있다. 과거 식민지 시대에서 우리는 일본에게 '착취 받아도 좋은 타자'였다. 그 때문에 우리의 노동력뿐만 아니라 많은 것들을 착취당했다. 그 착취로 인해 우리는 고통 받았고, 그 역사의 시간을 잊지 못한다. 하지만, 그 악순환은 우리 안에서도 일어나고 있다.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 역사 안에 들어오지 못하는 '타자', '외부인'들은 우리와 같은 공간에서 같은 시간을 보내면서도 '역사'로 인정받지 못한다. '역사'는 '민족'과 '국민' 외에 타자를 참여시켜주지 않는다. 그들과 함께 쌓아오는 이 시간에 그들의 존재란 없다. 그들을 보이지 않는 존재로 만드는 것이 우리인 것이다. 심지어, 그들에게 많은 도움을 받아 자본을 축적하고 있지만, 그들은 우리에게 착취되어야 하는 대상으로밖에 보지 않는다. 그것이 우리가 '역사'라고 부르는 시간에 감추어져 있음을 우리는 망각하며 살고 있다. 

   
 

개체란 항상-이미 집합체인 것이다. 이 집합체를 하나의 개체로 존재하고 작동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 바로 '리듬'이다. 시간이란 복수의 요소를 하나의 개체로서 공동으로 움직일 수 있게 해주는 이 리듬이 어떤 비평형적 항상성을 갖게 되었을 때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다. 흔히 '주체'라고 부르는 것은 이러한 복수의 요소들의 이러한 시간적 종합에 의해, 신체적 공조에 의해 탄생한다.  

요컨대 세상에는 하나의 시간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아주 많은 복수의 시간들이 존재한다. 나와 다른 리듬을 갖는 사람이나 생물들의 신체, 나와 다른 리듬으로 일하는 사람들의 신체는 다른 시간을 갖고 다른 속도로 움직인다. 동시에 의식하지 못한 채 동일한 리듬으로 움직이는, 동일한 시간을 공유하는 신체들의 집한 역시 존재한다. 그런데 시간은 신체들의 상호적인 동조에 따르지만, 일방적이고 강제적인 동조 또한 그에 못지않게하나의 시간을 구성한다. 가령 기계의 움직임은 노동자의 신체의 리듬과 아주 다른 리듬을 갖고 있지만, 노동자가 기계의 움직임에 따르는 한 양자는 함께 하나의 신체를 구성하는 것이고, 그런 의미에서 그들을 관통하며 하나의 시간이 흐른다고 말할 수 있다. 

..... (중략) 산업혁명은 새로운 종류의 기계를 통해 노동의 흐름을 장악하려고 한 시도였고, 이로써 노동의 리듬을 부르주아가 장악하려는 계급투쟁이었다. 이는 이후 더욱 집요하고 강박적인 방식으로 진행된다. 노동자의 미시적인 동작 하나하나까지 자본가가 장악하고자 했던 테일러주의가 그것이다. ....(중략).... 

무엇인가를 완전히 장악한다는 것은 그것의 리듬을 장악하는 것이고, 자신의 시간 속에서 포섭하는 것을 뜻한다. 이처럼 다른 시간, 다른 리듬의 신체를 포섭하여 하나의 시간 속에 통합하려는 힘과 권력 또한 존재한다. 따라서 적대관계 속에서 작동하는 자본주의에서 자본가의 계급투쟁이 가장 먼저 시간을 겨냥하여 진행되었다는 것은 아주 시사적인 것이다. 계급투쟁은 주어진 주체의 이익을 다투는 투쟁이기 이전에, '주체성'을 구성하는 투쟁, 주체성을 생산하는 투쟁, 혹은 주체성을 장악하기 위한 투쟁이다. 이러한 투쟁이 리듬을 장악한 자들의 잉여가치를 위한 것이었음은 이미 맑스가 명확히 밝혀놓은 바 있다.  - 51~53p

 
   

이러한 시간적인 장악은 노동을 넘어 역사 속 곳곳에서도 일어난다. 서구의 제국주의적 침략은 대표적이며, 큰 것들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시간과 리듬의 장악은 우리 곳곳에 일어나고 있다. 그것은 과거의 문제고, 역사 속의 문제가 아니라 바로 '지금'의 문제이다. 이 문제를 이야기하고 싶었던 이진경은 우리의 역사를 짚어나가기 시작한다. 나는 이 역사적인 증거와 그 증거를 따라가며 집요하게 밝혀내는 이야기들을 잠시 지루해하기도 했었다. 그것은 그가 말하고 싶어하는 것을 재깍 깨닫지 못하고,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 집요하게 역사를 다시 되새김질하는가에 대한 의문으로 다다르기 시작했다.  

우리는 역사의 '주체'가 되기 위해서 많은 시간을 건너왔다. 그 '주체'라는 것도 완전하고 완벽한 '주체'인가 의문이 드는 나날도 있다. 누군가에게 휘둘려 역사가 써진다는 것은 유쾌한 일이 아니다. 그 '누군가'는 자신들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 '시간'과 '공간'을 침범하며 약자를 괄시하고 무시하며 이용한다.  

   
 

우리가 아는 역사란 대개 주변 지역들을 자신의 지배 아래 통합하려는 고대적 제국이나, 신이 유일하기에 신이 지배하는 세계 또한 유일해야 한다고 믿는 기독교, 혹은 실제로 정치 경제적 권력이 국지적인 영역들을 하나의 영역으로 통합하고 지배하는 근대 국민국가에 의해 쓰인 것이다. 자신의 모습에 따라 세계를 하나로 통합하려는 욕망이 역사 안에 존재한다. 보편주의는 이러한 욕망의 표현이다. 이 욕망은 실제 세계를 하나로 통합하는 것만큼이나 다양한 역사들을 하나로 통합하려 한다. 역사의 주체들이 역사를 통해 보여주려는 것은, 언제나 그것을 통해 가리고 은폐되고 보이지 않는 것을 수반한다. 이런 점에서 역사란 보이지 않는 것을 계속 보이지 않게 한다. 보이는 것, 보여주고 싶은 것만 보이게 한다. 랑시에르 식으로 말하면, 우리가 아는 대문자의 역사란 '국민'들에게 주어진 자리를 확인하게 하고 그 자리에 걸맞는 것을 요구하고 그에 부합하여 행동하게 하는 '치안(police)'의 장인 것이다.  

대신할 수 없는 것을 대신하고 대표할 수 없는 것을 대표하겠다는 이런 시도들을 통해 세계사적 '보편성'이나 국민적 '보편성'을 갖지 못한 소수자들의 역사는, 그리고 그들의 삶은 잊히고 지워진다. (...중략...) 

따라서 단수의 역사를 구성한다는 것은 소수적인 역사들을 지우는 것이고, 단수의 보편적 역사를 구성한다는 것은 소수자들의 삶을 망각의 어둠 속에 밀어넣는 것이다. 그러나 소수자들 역시 자신의 목소리를 갖고 있으며 자신의 이야기/역사를 쓸 수 있다. 

- 60~61p

 
   

역사의 무시무시함을 깨닫게 된다. 역사가 말하는 것들은 많은 소리가 묻히고, 많은 소수가 제외된 채 표면으로 나타난 것들이다. 우리는 그 표면을 보는 것도 중요하지만, 표면 뒤에 감추어진 이면을 들여다 보는 것도 게을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역사의 표면만 중시하는 시간이 계속될 때, 우리의 역사는 뒤틀린 방향으로 흘러가는 것이다. 또한, '다수'를 중시한 채 소수자들의 역사를 무시하거나 묻히게 방치한다면, 그 또한 또 다른 재앙을 불러오는 결과가 될 것이다.  

권력과 자본은 많은 이의 입과 귀를 막고 손을 묶었다. 또한, 소수자들의 삶을 빼앗고, 그들의 역사마저 시간 속에서 사라지기를 바라거나 방치해 두고 있다. 그들이 내는 목소리가 두려운 게 현실이다. 권력과 자본 때문에 죽음으로 내몰린 소수자들은 그들에게 '외부인'이며, '타자'이다. 그들의 시간을 빼앗는 악행을 저지르고도, 자본의 역사 속에서 유유히 살아가기도 한다. 아마존의 원주민들이나, 아메리카의 '인디언'들이 가장 큰 피해자가 아닐까? 지배의 역사 속에서 그들은 죽어갔고 그들의 역사는 강탈당했다. 기억은 점점 쇠해졌고, 다들 잊기 시작했다. 그들은 역사 속에 묻혔고, 역사라는 이름으로 남지도 못했다. 그들이 살아있다는 것, 그들이 고통을 호소하는 목소리, 그들의 존재 자체가 자본과 권력은 불편할 뿐이다. 그것은 신자유주의, 자본에 신봉한 모든 나라와 국가, 개인들의 책임이다. 꼭 누구 때문이라고 한정 지을 수는 없는 것이 아닐까?  

우리도 한때는 약탈당했고, 국가라는 개념을 빼앗겼으며, 이름도 민족도 빼앗겼다. 우리는 소수자였고 빼앗은 사람의 노예처럼 역사를 가질 수 없었다. '존엄(dignity)'을 빼앗겼고 목소리를 내지 못했다. 침묵을 강요당하던 시간, 분노하며 싸웠고 누군가가 독립을 위해 피와 땀을 흘렸다. 우리는 소수자의 역사를 뼛속까지 느끼며 살아왔다. 그 응어리는 아직도 남아 '외교'라는 말로 포장되지도 않고, 중요한 사건이나 순간에 울분과 서러움이 터져 나온다. 그것은 잊지 말아야 할 중요한 역사적 의미이다. 

   
 

진보란 기존에 획득한 것에 머물지 않고 거기서 벗어나는 이탈의 벡터에 의해 정의되며, 기존의 것을 유지 보존하는 게 아니라 그것을 전복하거나 변형시키는 벡터에 의해 정의된다. 빠를 때는 느림으로, 직선으로 나갈 때는 슬며시 비틀며 도는 각운동으로, 빙빙 도는 원운동에서는 접선을 그리며 곧게 빠져나가는 직선운동으로 탈주선을 그리는 클리나멘(clinamen)들, 그것이 미시적인 진보의 벡터를 정의한다. - 126p 

요컨대 진보의 이념을 갖는다는 것은 활동과 사유의 벡터가 언제나 외부를 향해 있음을 뜻한다. 지배적인 것의 외부, 익숙한 것의 외부, 모두가 쉽게 수긍할 수 있는 것의 외부,상식 내지 양식이란 이름의 통념들 외부, 의당 그렇게들 생각하는 것의 외부, 주류적인 것의 외부, 정규적이고 정상적이라고 간주되는 것의 외부, 한 사회의 성원으로 쉽게 인정되는 영역의 외부, 자본주의와 가치법칙에서 벗어난 자본주의의 외부, 근대적 삶의 방식에서 벗어난 근대의 외부. 그리하여 그 외부를 자신이 익숙하게 사는 지배적 삶의 방식 내부로, 지배적인 세계의 내부로 끌어들이는 것이고, 그것을 통해 자신이 사는 세계 자체를 변환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내부 안에 자리 잡고 내부가 된다면, 내부가 된 것에 안주하지 않고 다시 그 외부를 보고 다시 그 외부를 내부로 끌어들이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어떤 세계로 하여금 내부에 안주할 수 없도록 그 내부를 끊임없이 동요시키고 변환의 벡터를 작동시키는 것이다. 진보의 이념을 갖는 자들이 쉽사리 변혁으로 혁명으로 나아가는 것은, 어떤 주어진 혁명의 '이념'을 구현하려는 생각에서라기보다는, 정확하게 이런 이유에서일 것이다.    -  131p

 
   

 진보는 '타자'를 향한 고민이다. 또한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자'들, '권력을 갖지 못한 자'들, '외부'로 비껴진 사람들을 내부로 안기 위한 고민이다. 권력과 자본을 중심에 두지 않고, 그 외부에서 힘을 낼 수 없는 사람들을 위한 고민이다. 그 고민 속에서 우리는 진일보하며 발전한다. 하지만, 진보가 지속적으로 꾸준하게 만족할 만큼 되기란 쉽지 않다. 진보는 '거부'를 동반한 활동이기 때문이다.  

그가 1부에서 펼쳐놓는 많은 이야기는 본격적으로 펼쳐질 2부를 향한 설득이며, 설명이고, 암시였다. 2부는 꽤 구체적이며, 사실적이고 역사적이며 실증적으로 다가온다. 시간적인 세계와 비시간적인 세계, <독립신문>을 분석하여 본 '선험적인 시간', 영토의 개념이 탄생하며 어떻게 쓰여지고 있는지. '역사'라는 개념이 시작된 시점, 그 개념이 포함하는 것들에 대해 집요하게 찾아내고 분석하고 있다. '민족'과 '국민'의 개념, '역사'의 개념이 점차 정립되면서 우리의 영역은 변화하고 사회적인 약속이나 생각도 그에 따라 변화하기 시작한다. 근대 초기 침략에 맞선 고민과 진보의 개념을 확인할 수 있다. 3부에서는 정말 하고 싶었던 이야기가 펼쳐진다. 우리의 식민지적 역사, 그 역사 안에서 목소리를 내는 형태나 모습. 가족주의를 변화시켰던 가족계획의 정치적인 전략, 외부에 대한 목소리를 내는 우리, 저무는 제국의 역사를 부여잡고 있는 우리의 현 모습, '경제대통령'이라는 사슬에 걸려 헤어나오지 못하는 우리의 모습, 권리를 찾기 위한 비폭력 투쟁, 그리고 한쪽에 펼쳐지는 소수자들의 개 같은 시간들. 

우리는 언제나 권력과 자본에 목소리를 내왔다. 그 목소리는 조금씩 진보하여, 다른 형태로 바뀌어 왔다. 비폭력투쟁으로, 혹은 외부를 고민하는 사람들의 모임으로, 네트워크가 발달하면서 직접 만나는 시간을 넘어, 사이버 공간에서도 말이다. 우리는 지배의 역사를 몸소 경험한 사람들이다. 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우리를 고통스럽게 했는지도 잘 안다. 역사는 말하고 있지만, 우리는 깨닫지 못한다. 우리가 당해왔던 것처럼 '소수자'를 몰아세우고, 우리를 고통의 역사로 몰았던 '제국'을 신봉한다. '경제력'을 이유 삼아 말이다. 그리고, 또 하나의 괴물 경제대통령을 탄생시켰다.  그리고, 우리의 진보는 멈춰있다. 아니, 퇴보했는지도 모른다.  

'역사'라는 말로 뻔뻔하게 자행되는 많은 것들 사이에 감춰진 것들, 그것들을 보지 못하면 우리는 더 진보한 '역사'로 나아갈 수 없다. 그 '역사'를 말해주고 싶었기 때문에, 이진경은 집요하게 분석했고 이야기했다. 우리는 '역사'에 휘둘리는 삶을 살아왔음에도 깨닫지 못하고 또 '역사'에 이끌려 다니고 있다. 망각의 시간, 그 시간을 건너왔기 때문일까? 그래도 다행인 것은 잊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제대로 된 역사'를 만들기 위해, 우리의 시간의 리듬 속에 소수자와 타자를 함께 포함하는 '역사'를 만들기 위해 뛰는 사람들 말이다. '진보'는 잠시 주춤한다. 하지만, 그 주춤하는 시간을 파고드는 세력들은 기운이 세고, 뻔뻔하다. 그 세력들을 제대로 보지 않고, 눈 감으려 한다면 우리는 역사의 '주체'가 되지 못하고, '존재자'만 될 뿐이다. 여수의 '외국인 보호소'의 참사가, 미국 어디에선가 '한국인 보호소'의 참사로 탈바꿈할 수도 있는 노릇이다.  

우리는 많은 시간을 건너왔고, 많은 고통을 이겨냈다. 그리고, 우리를 만들었다. 그 시간이 헛되지 않도록, 지금 반성하고 제대로 된 '진보'를 이끌어내야 할 것이다. 그 반성 뒤에 '진보의 역사'를 염원하며 쓰여진 이 책이, 그래서 반갑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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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일깨우는 글쓰기>를 읽고 리뷰해주세요.
나를 일깨우는 글쓰기
로제마리 마이어 델 올리보 지음, 박여명 옮김 / 시아출판사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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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일깨우는 글쓰기>는 글쓰기를 두려워하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기본서이다. 글쓰기에 가닥을 잡았거나, 글쓰는 일을 즐거워 하는 사람이라면, 굳이 이 책을 읽을 필요는 없다. 하지만, 글쓰기를 망설이고 있거나, 도대체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모른다면, 이 책을 읽으며 도움을 구해도 좋다. 

이 책은 어떻게 글을 써야 잘 쓸 수 있다는 이야기는 하지 않는다. 방법론적인 것에 치중해 있다. 노트를 사는 것부터, 글을 쓰는 시간, 장소, 도구 등 아주 기본적인 것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가족과 함께 글을 쓰면서 재미를 느낄 수도 있고, 배우자와 함께 글을 쓰면서 행복을 느낄 수 있다고 충고한다.  

처음부터 많이 쓰려고 하지 않아도 되며, 삼행시를 짓거나 몇 줄로 자기의 기분을 포기하는 것도 글쓰기의 시작이라고 말한다. 생각나는 대로 써보는 것이나, 생각의 고리를 이어가며 소재를 찾는 것, 새로운 시도나 기발한 아이디어로 자기만의 글쓰기를 해보라는 것이다. 

기록은 중요한 것이다. 기록을 하기 위해서는 글쓰기는 중요하다. 자신이 살아온 삶의 흔적들을 짤게, 길게, 간결하게, 장황하게 털어놓을 수 있다. 그런 것들이 모이면 인생의 시간들을 되돌아 볼 수도 있다. 또한, 글쓰기를 통해 일상의 나를 들여다 볼 수도 있으며, 사람들과의 관계, 순간적인 감정, 나도 느끼지 못했던 나의 내면 세계까지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도 해보고, 저렇게도 해보면 언젠가는 나에게 알맞는 방법이 나타날 것이며, 그 훈련이 헛되지는 않을 것이라는 것을 저자는 말한다. 경험과 생각들을 기록으로 남기지 않은 채 흘려보내기엔 너무 아까운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 저자의 생각이 전해진다. 

차근차근 방법론을 잘 받아들인 사람이라면, 글쓰기에 대한 두려움은 버릴 수 있을 것 같다. 두려움을 벗어던진 자만이 한 문장의 공포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자! 글쓰기를 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은 낡은 노트를 마련하고, 펜을 들자. 무엇이라도 좋으니 써보자. 쓰기 전에 깊이 생각하느라 주저하지 말고, 쓰고 나서 수정하고 다듬자. 어떤 글 속에도 문득 튀어나온 생각들이 정제되지 않고 숨어있을 지도 모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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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만합창단>을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불만합창단 - 세상을 바꾸는 불만쟁이들의 유쾌한 반란
김이혜연, 곽현지 지음 / 시대의창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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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긍정의 힘이 세상을 바꾼다’, ‘긍정적인 사고가 성공을 좌우한다’, ‘긍정적인 생각이 삶을 바꾼다’라는 말은 수도 없이 들었다. 긍정적인 생각은 무엇이든 할 수 있게 하며, 긍정적인 태도는 나는 물론 모든 사람을 행복하게 해줄 수 있다는. ‘긍정’이 판치는 세상이야말로 ‘불만’이 가득한 세상일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있기 위해 짐짓 모른 척 태연하게 굴고, 아닌 척 즐겁게 살지도 모른다.

이유 있는 한풀이는 사람에게 카타르시스를 준다. 그 카타르시스라는 것은 감정의 독소를 배출한다고 말해도 되지 않을까? 어떻게 좋은 일만 있을 수 있겠는가? 나쁜 일이 생기는 날도 있고, 화가 나는 날도 있고, 미운 사람도 있고, 짜증나는 상황에 맞닥뜨릴 수도 있다. 그런 갖가지 상황에서 모두가 웃으며 살 수는 없지 않은가? 하지만, 한풀이도 청승맞지 않고 재미있게 한다면 또 다른 즐거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을 잘 이루어낸 것이 ‘불만합창단’이 아닐까? 불만을 노래한다라는 발상은 신선하며, 재미있고 파격적이다. 언제나 우리는 불만을 피 튀기며, 감정적으로 우울하게 말한다. 하지만 이들은 그 불만을 노래하라고 한다. 여기서부터 즐거워지는 것이다.

불만합창단의 창시자는 ‘텔레르보와 올리버 부부’. 우연히 생각해낸 프로젝트가 세계로 퍼져나갔다. 내가 이 책을 읽으며 깜짝 놀란 것은, 아무리 행복지수가 높은 국가라도 투덜대는 불만은 우리와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핀란드는 행복지수도 높을 뿐더러 아이들이 행복한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곳이라고 알아왔다. 그들의 문화가 부럽기도 했고, 혹시 우리 삶에 적용할 수는 없는 것인가 고민도 했었다. 하지만, 그들의 행복 속에도 우리와 비슷한 불만이 숨어있었다. 아하! 불만은 우리 모두의 이야기이고, 우리 모두의 것이구나.

이 프로젝트를 진행한 연구원들의 고민과 고충이 엿보인다. 그리고, 그들의 열정도 보인다. 우연히 발견한 프로젝트를 의심하지 않고 진행하라고 부추긴 박원순 씨의 용기와 결단 또한. 막막했을 그들 앞에 나타난 불만합창단. 불가능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일들이 가능성으로 드러나면서 불만합창단은 한 발씩 나아가기 시작한다.

   
  우리는 불만합창단을 시민이 더 많은 민주주의를 경험하는 장으로 만들고 싶었다. 우리보다 민주주의의 역사가 긴 서구사회는 다양한 차원에서 크고 작은 방법론이 많이 시도되고 있다. 그곳에서 불만합창단은 아주 평범한 시민활동의 일환으로 이해되고 있었지만, 우리사회에선 낯설고 독특한 이슈가 아니었을까 싶다. 불만합창에 대한 호평만큼이나 우려와 거부감이 많았던 것은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 176p  
   

 어떤 일이든 우려가 따른다. 안 될 것이라는 포기론부터 수면 위로 떠올라 프로젝트를 추진하는 사람들의 기운을 빼기도 한다. 하지만, 굳건한 신념과 믿음은 그리고 포기하지 않는 마음은 어떤 것이든 가능하게 할 수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물론 이질감을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이질감 속에서 발견하는 즐거움과 재미도 있을 것이다. 또한, 아무리 황당한 생각도 이 깨알 같은 사람들 중 누군가가 동의할 수 있다. 그것을 미리 속단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꺠달을 수 있었다. 

   
  흔히 참여과정에서 간과하기 쉽지만 방법론만큼 중요한 것이 조력자(facilitator)의 역할이다. 조력자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상호작용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게 하여 창조적인 성과를 끌어내는 것을 돕는다. 참여자들이 가진 다양한 의견을 모으고, 갈등을 중재하고, 한 방향으로 논의를 끌어내도록 도와주는 일을 한다고 생각하면 된다. 사람들을 모아놓고 무턱대고 ‘자, 이제 말해보세요’ ‘이제부터 참여하세요’라고 말한다고 해서 효과적인 참여가 이루어지겠는가. 조력자는 전체적인 진행을 조망하면서도 그때그때 참여자들과 함께 호흡하고 원활하게 소통할 수 있도록 유도해야 한다. 단순하게 진행을 이끄는 사회자와도 다르고, 과정을 지켜보고 나서 최종 결정을 내리는 지도자와도 다른 역할을 하는 사람이 바로 조력자다.  -  97p  
   

 불만합창단에 참여하는 모두 ‘처음’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다.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연구원도 참여하는 사람들도 모두 ‘처음’이다. ‘처음’은 어렵지만, 아무것도 결정되지 않았고 아무것도 모르기에 ‘창의적’이 될 수도 있다. 그들에게 힘을 주는 것은 연구원들의 몫이었다. 쉽지 않았고 뭐가 제대로 되는 건지도 의문이 들 때도 있었지만, 난 연구원들의 도전과 용기에 박수를 보낸다. 우리에게 없었던 것을 이루어내기 위해 시도 했다는 것, 그 안으로 사람들을 모여들게 했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그들은 훌륭한 조력자가 아니었을까? 

   
  “불만합창단은 ‘함께 함’ 그리고 ‘열정’을 빼놓고 설명할 수 없어요. 불만합창단은 ‘다른 사람들이 모여 다른 의견들이 어느새 서로 연결되는 것을 발견하는 것’이고, 참여자 모두의 자발적인 열정을 동력으로 하기 때문이지요.”
- 불만합창단 창시자 텔레르보의 말 – 65p
 
   

불만을 이야기하며 친해지고, 불만을 이야기하며 세상을 이야기한다. 언제나 함께, 그리고 힘있게. 그게 쉬울 수 있을까? 불만을 이야기하다가 화가 나진 않을까? 답답해지진 않을까? 많은 우려와 의심은 사실 아무것도 아닐 것이다. ‘모임’과 ‘대화’, 그리고 ‘발견’. 그들이 즐거웠을 시간들이 그려졌다. 세계 곳곳에서 불만을 소리 높여 노래하는 사람들은 한국에서 탄생한 불만합창단과 이미 연결되어 있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그들 모두 누가 억지로 시켜서가 아니라 자발적으로 참여했다는 것이다. 그랬기 때문에 더욱 즐거웠을 것이고, 더욱 신났을 것이다. 

   
 

 “참여란 시민과 접점을 모색하는 단체에겐 늘 화두일 수밖에 없다. 시민의 자발적 참여를 이끌어낸다는 것은 얼마나 힘든 일인가. 올해 희망 제작소의 목표는 ‘1만 명 시민의 힘으로 움직이는 싱크탱크’였다. 순수한 시민의 후원에 의해서만 우리가 진정한 의미의 독립적이고 대안적인 활동을 할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의 목표가 단기간 내에는 달성하기 힘든 과제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아직 우리의 역량이나 시민사회가 이를 감당할 수 있는 여건이 안 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175p

 
   

 ‘참여’. 이것은 무엇일까? 귀찮은 일과 직접적으로 나와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일은 외면하기 일쑤다. 사람을 끌어 모아 ‘참여’하게 하는 일은 보통 일이 아니다. 우리는 ‘참여’에 큰 부담을 갖고 살아간다. 그것은 교실에서부터 시작되고, 사회로 나가도 마찬가지다. 어떤 화두에 사람들을 끌어 모은다는 것은 쉬운 일이다. ‘공감’을 불러일으켜야 하지만, 누군가가 이끌어 나가야 하고, 지속적으로 자극을 주어야 한다. 힘이 빠지고, 진이 빠지고, 서로 지쳐갈 수 있는 일이었으면 어쩌나 내심 걱정도 되었다. 하지만, 그들은 스스로 잘 ‘참여’하고 있었다. 가사를 쓰고, 노래를 부르고, 즐거워하며 ‘희망제작소’라는 프로젝트에 잘 어울리는 모습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모든 순서가 끝나고 축제의 막을 내렸다. 불만으로 하나 되어 신나고 즐거웠다. 불만이 가득한 자리가 그렇게 재밌고 신나는 자리가 되었다는 것이 어쩌면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른다. 기대를 품고 간 나에게도 굉장히 이상한 체험이었으니까. 하지만 ‘불만이 가득한 재미있는 자리’에 내가 있었다. 대통령을 앉혀놓고 불렀대도 이해했을 거라고 믿을 만큼, 우리는 불만을 노래하는 것이 얼마나 훌륭한 일인지 알게 되었다.
“우리가 만든 도구를 한국에서 훌륭하게 진화시켰다. 이제 불만합창은 훌륭한 소통의 장이 되었다”고 얘기하던 올리버의 말처럼, 불만을 노래한다는 것은 훌륭한 소통의 도구였다. 무엇보다 불만합창과 이 페스티벌의 진정한 장점은 ‘미치도록 재미있다’는 것이 아닐까.   -   144p

 
   

 책을 보면 들리진 않는다. 그들의 불만 노래가. 하지만, 느낄 수는 있다. 그들의 불만 노래를. 그냥 모두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거다. 노래로 수다를 떨고 싶었던 거다. 전혀 위험하지 않았고, 누군가에게 불쾌감을 주지도 않았다. 모두 유쾌했고, 모두 즐거웠다. 세상에 그런 반란이 있을까? 불만을 합창하는데 관객도 박수를 치고 즐거워한다. 불만 노래에 담긴 유쾌함과 즐거움이 서로에게 전이되는 것이다. 그렇게 서로 즐거운 한풀이에 응원을 보낸다.

아이들, 어른, 장애인, 여자, 남자. 한마음으로 어울리는 모습. 내부에 숨겨진 이야기를 털어놓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들의 용기가 부럽다. 그리고 마음껏 박수를 보낸다. 용기 있는 움직임이 있기에 세상은 더욱 즐겁고 재미있는 게 아닐까? 아~ 나도 ‘참여’라는 울타리에 적극적으로 동참해야겠다는 반성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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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정무역, 세상을 바꾸는 아름다운 거래>를 읽고 리뷰해 주세요.
공정무역, 세상을 바꾸는 아름다운 거래 - 공정무역 따라 돌아본 13개 나라 공정한 사람들과의 4년간의 기록
박창순 외 지음 / 시대의창 / 2010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공정한 임금이란 무엇인지를 이해하는 게 중요하죠. 공정무역은 사업이지 자선이 아닙니다. 열심히 일한 농민들의 생산품을 공정한 금액을 주고 사는 것입니다. 공정무역은 좋은 품질의 물건이 필요한 소비자와 생산자 간의 거리를 좁혀줍니다. 돈을 어떻게 값어치 있게 쓰느냐 생각하게 되고 이러한 가치 있는 시장을 통해 농민들에게 좀더 직접적인 혜택이 돌아갑니다. 좋은 품질의 상품에 대해 소비자들이 정당한 가격을 지불하면 그것이 농민들에게 더 나은 임금으로 돌아갑니다. 자꾸만 가격을 낮추면 농민들에게는 적은 수익금, 소비자들에게는 질 나쁜 상품이 돌아갑니다. 모두 다 실패하는 거죠. 

가장 역동적인 공정무역 시장 영국 - 163p

 
   

 조금 더 싸게, 조금 더 저렴하게, 조금 더, 조금 더.  이런 말들 덕분에 죽도록 일하고도 제대로 된 임금을 받지 못하는 사람이 부지기다. 물론, 좋은 제품을 저렴하게 공급받는 것은 소비자가 바라는 욕구이며 욕망이지만, 그 뒤에 감추어진 피나는 노동과 노력들은 눈물이며 고통이라는 것을 인지해야 한다. 보이지 않는 생산자와 소비자와의 관계가 재정립 되기 위해서는 모두의 의식이 조금씩 바뀌어야 한다는 생각을 표면적으로 드러내 준 <공정무역, 세상을 바꾸는 아름다운 거래>.  

이 책은 방송위원회의 지원으로 찍었던 공정무역에 대한 다큐를 바탕으로 새롭게 정리해 공정무역에 관한 것들을 이야기하는 책이다. 공정무역을 활발히 진행하고 있는 나라들과 공정무역 덕분에 살아갈 힘을 얻는 나라들을 대비해 보여주며, 공정무역이 얼마나 가치 있는 것인가를 설명하고 있다. 공정무역은 자신이 소비하는 것들을 인지하며, 올바르게 만들어진 제품을 찾을 때 그것을 생산한 사람들이 조금 더 윤택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다는 것을 사실적인 취재로 보여주고 있다. 

실제로 영국은 공정무역에 대한 소비자의 인식도 뛰어나고, 공정무역에 대한 관심이 깊어 공정무역 대학까지 운영되고 있다. 공정무역이 더 가치 있다고 여겨지는 것은 제3세계의 굶주림과 빈곤에서 허덕이는 사람들이 가난을 탈출할 기회를 제공한다는 것이다.  

   
 

공정무역은 중요합니다. 이제 세상은 점점 글로벌화 되어 무역도 세계화 되어가고 있잖아요. 자유시장에서는 부유한 사람들은 더 부유해지고 빈곤한 사람들은 더 빈곤해집니다. 시장의 조건이 아주 중요한데요, 일자리를 못 찾거나 생필품을 구입할 수 없는 어려운 사람들이 공평한 대우를 받는 게 중요하겠죠. 공정무역은 개개인을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잘사는 일입니다. 

가장 역동적인 공정무역 시장 영국 - 199p  마이클 베리

 
   

이러한 의식의 변화는 꽤 중요한 것이다. 값싼 노동력을 착취해 강대국과 거대 기업들이 배를 불려왔다. 하지만, 그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인지하고 함께 살아야 함을 인식하며 공동체 의식으로 돌아선다는 것인 민족, 국가를 넘어 인류를 생각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필리핀에 있는 네그로스 섬은 1921~1934년까지 설탕산업이 번영을 이루었다. 미국이 필리핀 농작물에 대해 무관세를 허용해 설탕 공장은 호황을 누렸고, 사탕수수를 수확하기 위한 시스템으로 정신이 없을 정도였다. 대지주, 공장 소유자, 상인들이 많은 돈을 벌었던 반면, '아시엔다'라고 불리던 사탕수수 노동자들은 힘든 육체노동을 도맡아 하면서도 노예처럼 인간 이하의 대우를 받았다고 한다. 설탕 가격이 폭락하면서 돈을 벌었던 이들은 네그로스 섬을 떠났지만, 남겨진 노동자들은 빈곤과 자연재해의 피해자가 되어야 했다. 하지만, 공정무역이 시작되면서 네그로스 섬의 빈곤한 상황은 조금씩 개선되기 시작한다. 소규모 농민들에게 생산자금을 대출해주고 농업기술 교육을 지원했고, 함께 발전할 수 있다는 의식을 심어주며 생활의 질을 바꿀 수 있었다. 이런 작은 변화가 농부들이 의식주를 해결하는데 도움을 주었고, 자녀들을 공부시킬 수 있는 경제적 힘을 보태주었다. 정당한 배당금을 주고, 이익 중 일정 금액을 적립해 발전 기금으로 삼을 수 있었던 것은 공정무역 덕분이다. 그것은 한 공동체의 삶의 질을 바꿀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한 힘을 뿜어내고 있었다. 

   
 

네그로스 섬은 공정무역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하는 곳이다. 강대국이 약소국을 침략하여 지배하고 자국에 필요한 물품을 공급받기 위해 자연을 파괴하고 자원과 노동력을 착취하는 약육강식의 전형을 보여주는 곳이기 때문이다. 또 한편으로는 공정무역이 현지인들의 삶에 어떤 변화를 가져오는지 확일할 수 잇었다. 우물이 집 가까이 있고 하루 세 끼 걱정하지 않으며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는 것, 공정무역으로 이런 소박한 꿈이 이뤄지고 있었다. 네그로스 섬에서 우리가 본 것은 '희망'이었다.  

절망의 설탕에서 희망의 설탕으로 필리핀 - 259p

 
   

영국은 공정무역 제품이 활발하게 판매되면서,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공정무역 제품을 찾게 되고 아이들도 자연스럽게 교육을 받게 된다. 자신들이 사는 물건들이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공정무역을 더 홍보하기 위해 많은 캠페인도 벌이며 사람들은 자신들이 소비하는 돈이 정당하게 쓰이길 바란다. '공정한 몫'을 받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며 그 '공정한 몫'이 누군가에게 삶의 행복을 주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는 언제나 착취의 중심에 있었던 커피, 초콜릿, 축구공도 놓치지 않고 취재했다. 많은 프로그램에서 노동력을 착취당하는 어린 아이들과 사람들을 보아왔다. 그 결과, 공정무역의 움직임은 활발해지고 있고 원산지에서도 조금씩 변화하고 있다. 하지만, 세계의 변화와는 다르게 우리나라에서는 미미한 움직임만 발견될 뿐이다. 아직 공정무역에 대한 개념도 사람들에게 잘 전해지지 않았고, 활동에 앞장서는 단체도 소수이기 때문일 것이다. 홍보도 잘 이루어지지 않아 공정무역이라는 것은 걸음마를 떼기도 힘들다. 하지만, 누군가의 노력으로부터 모든 것은 시작된다. 그래서, 작가들의 노력이 새롭고 의미깊다.  

함께 행복할 수 있는 공정무역. 올바른 소비는 아름다움을 가져온다. 이것은 기부가 아니다. 불공정한 무역을 공정한 무역으로 바꾸어 나가는 것이다. 모두가 균등하게 이익을 보는 사회. 그것은 모두가 행복해질 수 있는 지름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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