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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공간 - 소수성, 타자성, 외부성의 사건적 사유
이진경 지음 / 휴머니스트 / 2010년 1월
평점 :
처음엔 그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건지 갈팡질팡 깨닫지 못했다. 그가 전하고 싶은 메시지는 도처에 널려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난 텍스트를 따라가기에만 급급했다. 그의 텍스트는 한줄기를 따르며 흐르고 있었다. 반성과 성찰의 시간을 가져야 한다고 외치고 있었다. 그 반성과 성찰은 우리가 겪어낸 역사를 망각하고 외면하고, 잊으면서부터 시작되었다. 하지만, 아직도 나는 이진경이 한 이야기를 제대로 이해한 것인지 이진경이 하고 싶었던 말이 내가 이해하고 있는 게 맞는 것인지 의문이 든다. 아마도, 꾸역꾸역 먹은 밥을 소화하려면 고통의 시간을 건너야 하는 것처럼, 나도 그 과정을 건너고 있는 게 아닌가 싶다. 하지만, 어쨌든 그는 올바른 이야기를 하고 있고, 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것은 보람되고 즐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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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란 시계로 표상되는, 이미 주어져있고 무얼 하든 동일하게 '흘러가는' 자연적 사실이 아니다. 그것은 공동의 리듬을 통해서, 혹은 동조된 리듬을 통해서 구성되는 것이다. 공동성이란 서로의 신체적인 움직임을 맞추어가는 리듬의 구성을, 그것을 통해 만들어지는 시간적 동조를 포함한다. 그렇기에 구성되는 리듬의 차이마다 다른 시간들이 존재한다.
맑스에 따르면 자본의 착취는 무엇보다 이런 시간의 차이를 착취하는 것이다. 화폐자본에서 상품자본, 생산자본을 거쳐 다시 화폐자본으로 돌아가는 자본의 순환은 자본의 생존의 리듬을 갖는다. 이 순환의 리듬을 맞추지 못하면 자본은 흑자 상태에서도 파산하는 경우가 있다. 이런 자본의 순환에 부분적으로 맞물려 있지만 이와 전혀 다른 노동력의 재생산의 리듬이 있다. 노동력을 제공하고 임금을 받아 그것으로 생활수단을 구매하여 소비하며 다시 이에 필요한 돈을 벌기 위해 노동력을 팔러 자본가에게 가야 하는 노동력의 순환이. 이 순환의 리듬을 맞추지 못하면 노동력은 재생산되지 못하고, 노동자는 죽는다. 자본의 시간과 노동력의 시간, 이 상이한 시간의 차이를 자본은 착취한다. 노동시간의 최대치의 차이를 맑스는 잉여가치라는 개념으로 정의한 바 있다. 역으로 잉여가치란 이러한 시간의 차이를 착취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 15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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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이주노동자의 노동력'을 착취하는 우리 사회. 그들의 노동력으로 자본 생존의 리듬을 갖는 우리. 하지만, 착취의 초과는 또 얼마나 큰 위험을 가져올지 모른다는 경고를 내포하고 있었다. 우리는 '민족'으로 얽힌 '국민'이라는 이름으로 '한국'이라는 나라에 묶여 있다. 하지만, 그 '민족'이라는 개념이 얼마나 큰 배타성과 이기적인 생각으로 뭉쳐있는지 깨닫지 못하고 있다. 과거 식민지 시대에서 우리는 일본에게 '착취 받아도 좋은 타자'였다. 그 때문에 우리의 노동력뿐만 아니라 많은 것들을 착취당했다. 그 착취로 인해 우리는 고통 받았고, 그 역사의 시간을 잊지 못한다. 하지만, 그 악순환은 우리 안에서도 일어나고 있다.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 역사 안에 들어오지 못하는 '타자', '외부인'들은 우리와 같은 공간에서 같은 시간을 보내면서도 '역사'로 인정받지 못한다. '역사'는 '민족'과 '국민' 외에 타자를 참여시켜주지 않는다. 그들과 함께 쌓아오는 이 시간에 그들의 존재란 없다. 그들을 보이지 않는 존재로 만드는 것이 우리인 것이다. 심지어, 그들에게 많은 도움을 받아 자본을 축적하고 있지만, 그들은 우리에게 착취되어야 하는 대상으로밖에 보지 않는다. 그것이 우리가 '역사'라고 부르는 시간에 감추어져 있음을 우리는 망각하며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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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체란 항상-이미 집합체인 것이다. 이 집합체를 하나의 개체로 존재하고 작동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 바로 '리듬'이다. 시간이란 복수의 요소를 하나의 개체로서 공동으로 움직일 수 있게 해주는 이 리듬이 어떤 비평형적 항상성을 갖게 되었을 때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다. 흔히 '주체'라고 부르는 것은 이러한 복수의 요소들의 이러한 시간적 종합에 의해, 신체적 공조에 의해 탄생한다.
요컨대 세상에는 하나의 시간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아주 많은 복수의 시간들이 존재한다. 나와 다른 리듬을 갖는 사람이나 생물들의 신체, 나와 다른 리듬으로 일하는 사람들의 신체는 다른 시간을 갖고 다른 속도로 움직인다. 동시에 의식하지 못한 채 동일한 리듬으로 움직이는, 동일한 시간을 공유하는 신체들의 집한 역시 존재한다. 그런데 시간은 신체들의 상호적인 동조에 따르지만, 일방적이고 강제적인 동조 또한 그에 못지않게하나의 시간을 구성한다. 가령 기계의 움직임은 노동자의 신체의 리듬과 아주 다른 리듬을 갖고 있지만, 노동자가 기계의 움직임에 따르는 한 양자는 함께 하나의 신체를 구성하는 것이고, 그런 의미에서 그들을 관통하며 하나의 시간이 흐른다고 말할 수 있다.
..... (중략) 산업혁명은 새로운 종류의 기계를 통해 노동의 흐름을 장악하려고 한 시도였고, 이로써 노동의 리듬을 부르주아가 장악하려는 계급투쟁이었다. 이는 이후 더욱 집요하고 강박적인 방식으로 진행된다. 노동자의 미시적인 동작 하나하나까지 자본가가 장악하고자 했던 테일러주의가 그것이다. ....(중략)....
무엇인가를 완전히 장악한다는 것은 그것의 리듬을 장악하는 것이고, 자신의 시간 속에서 포섭하는 것을 뜻한다. 이처럼 다른 시간, 다른 리듬의 신체를 포섭하여 하나의 시간 속에 통합하려는 힘과 권력 또한 존재한다. 따라서 적대관계 속에서 작동하는 자본주의에서 자본가의 계급투쟁이 가장 먼저 시간을 겨냥하여 진행되었다는 것은 아주 시사적인 것이다. 계급투쟁은 주어진 주체의 이익을 다투는 투쟁이기 이전에, '주체성'을 구성하는 투쟁, 주체성을 생산하는 투쟁, 혹은 주체성을 장악하기 위한 투쟁이다. 이러한 투쟁이 리듬을 장악한 자들의 잉여가치를 위한 것이었음은 이미 맑스가 명확히 밝혀놓은 바 있다. - 51~53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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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시간적인 장악은 노동을 넘어 역사 속 곳곳에서도 일어난다. 서구의 제국주의적 침략은 대표적이며, 큰 것들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시간과 리듬의 장악은 우리 곳곳에 일어나고 있다. 그것은 과거의 문제고, 역사 속의 문제가 아니라 바로 '지금'의 문제이다. 이 문제를 이야기하고 싶었던 이진경은 우리의 역사를 짚어나가기 시작한다. 나는 이 역사적인 증거와 그 증거를 따라가며 집요하게 밝혀내는 이야기들을 잠시 지루해하기도 했었다. 그것은 그가 말하고 싶어하는 것을 재깍 깨닫지 못하고,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 집요하게 역사를 다시 되새김질하는가에 대한 의문으로 다다르기 시작했다.
우리는 역사의 '주체'가 되기 위해서 많은 시간을 건너왔다. 그 '주체'라는 것도 완전하고 완벽한 '주체'인가 의문이 드는 나날도 있다. 누군가에게 휘둘려 역사가 써진다는 것은 유쾌한 일이 아니다. 그 '누군가'는 자신들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 '시간'과 '공간'을 침범하며 약자를 괄시하고 무시하며 이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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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아는 역사란 대개 주변 지역들을 자신의 지배 아래 통합하려는 고대적 제국이나, 신이 유일하기에 신이 지배하는 세계 또한 유일해야 한다고 믿는 기독교, 혹은 실제로 정치 경제적 권력이 국지적인 영역들을 하나의 영역으로 통합하고 지배하는 근대 국민국가에 의해 쓰인 것이다. 자신의 모습에 따라 세계를 하나로 통합하려는 욕망이 역사 안에 존재한다. 보편주의는 이러한 욕망의 표현이다. 이 욕망은 실제 세계를 하나로 통합하는 것만큼이나 다양한 역사들을 하나로 통합하려 한다. 역사의 주체들이 역사를 통해 보여주려는 것은, 언제나 그것을 통해 가리고 은폐되고 보이지 않는 것을 수반한다. 이런 점에서 역사란 보이지 않는 것을 계속 보이지 않게 한다. 보이는 것, 보여주고 싶은 것만 보이게 한다. 랑시에르 식으로 말하면, 우리가 아는 대문자의 역사란 '국민'들에게 주어진 자리를 확인하게 하고 그 자리에 걸맞는 것을 요구하고 그에 부합하여 행동하게 하는 '치안(police)'의 장인 것이다.
대신할 수 없는 것을 대신하고 대표할 수 없는 것을 대표하겠다는 이런 시도들을 통해 세계사적 '보편성'이나 국민적 '보편성'을 갖지 못한 소수자들의 역사는, 그리고 그들의 삶은 잊히고 지워진다. (...중략...)
따라서 단수의 역사를 구성한다는 것은 소수적인 역사들을 지우는 것이고, 단수의 보편적 역사를 구성한다는 것은 소수자들의 삶을 망각의 어둠 속에 밀어넣는 것이다. 그러나 소수자들 역시 자신의 목소리를 갖고 있으며 자신의 이야기/역사를 쓸 수 있다.
- 60~61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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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무시무시함을 깨닫게 된다. 역사가 말하는 것들은 많은 소리가 묻히고, 많은 소수가 제외된 채 표면으로 나타난 것들이다. 우리는 그 표면을 보는 것도 중요하지만, 표면 뒤에 감추어진 이면을 들여다 보는 것도 게을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역사의 표면만 중시하는 시간이 계속될 때, 우리의 역사는 뒤틀린 방향으로 흘러가는 것이다. 또한, '다수'를 중시한 채 소수자들의 역사를 무시하거나 묻히게 방치한다면, 그 또한 또 다른 재앙을 불러오는 결과가 될 것이다.
권력과 자본은 많은 이의 입과 귀를 막고 손을 묶었다. 또한, 소수자들의 삶을 빼앗고, 그들의 역사마저 시간 속에서 사라지기를 바라거나 방치해 두고 있다. 그들이 내는 목소리가 두려운 게 현실이다. 권력과 자본 때문에 죽음으로 내몰린 소수자들은 그들에게 '외부인'이며, '타자'이다. 그들의 시간을 빼앗는 악행을 저지르고도, 자본의 역사 속에서 유유히 살아가기도 한다. 아마존의 원주민들이나, 아메리카의 '인디언'들이 가장 큰 피해자가 아닐까? 지배의 역사 속에서 그들은 죽어갔고 그들의 역사는 강탈당했다. 기억은 점점 쇠해졌고, 다들 잊기 시작했다. 그들은 역사 속에 묻혔고, 역사라는 이름으로 남지도 못했다. 그들이 살아있다는 것, 그들이 고통을 호소하는 목소리, 그들의 존재 자체가 자본과 권력은 불편할 뿐이다. 그것은 신자유주의, 자본에 신봉한 모든 나라와 국가, 개인들의 책임이다. 꼭 누구 때문이라고 한정 지을 수는 없는 것이 아닐까?
우리도 한때는 약탈당했고, 국가라는 개념을 빼앗겼으며, 이름도 민족도 빼앗겼다. 우리는 소수자였고 빼앗은 사람의 노예처럼 역사를 가질 수 없었다. '존엄(dignity)'을 빼앗겼고 목소리를 내지 못했다. 침묵을 강요당하던 시간, 분노하며 싸웠고 누군가가 독립을 위해 피와 땀을 흘렸다. 우리는 소수자의 역사를 뼛속까지 느끼며 살아왔다. 그 응어리는 아직도 남아 '외교'라는 말로 포장되지도 않고, 중요한 사건이나 순간에 울분과 서러움이 터져 나온다. 그것은 잊지 말아야 할 중요한 역사적 의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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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란 기존에 획득한 것에 머물지 않고 거기서 벗어나는 이탈의 벡터에 의해 정의되며, 기존의 것을 유지 보존하는 게 아니라 그것을 전복하거나 변형시키는 벡터에 의해 정의된다. 빠를 때는 느림으로, 직선으로 나갈 때는 슬며시 비틀며 도는 각운동으로, 빙빙 도는 원운동에서는 접선을 그리며 곧게 빠져나가는 직선운동으로 탈주선을 그리는 클리나멘(clinamen)들, 그것이 미시적인 진보의 벡터를 정의한다. - 126p
요컨대 진보의 이념을 갖는다는 것은 활동과 사유의 벡터가 언제나 외부를 향해 있음을 뜻한다. 지배적인 것의 외부, 익숙한 것의 외부, 모두가 쉽게 수긍할 수 있는 것의 외부,상식 내지 양식이란 이름의 통념들 외부, 의당 그렇게들 생각하는 것의 외부, 주류적인 것의 외부, 정규적이고 정상적이라고 간주되는 것의 외부, 한 사회의 성원으로 쉽게 인정되는 영역의 외부, 자본주의와 가치법칙에서 벗어난 자본주의의 외부, 근대적 삶의 방식에서 벗어난 근대의 외부. 그리하여 그 외부를 자신이 익숙하게 사는 지배적 삶의 방식 내부로, 지배적인 세계의 내부로 끌어들이는 것이고, 그것을 통해 자신이 사는 세계 자체를 변환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내부 안에 자리 잡고 내부가 된다면, 내부가 된 것에 안주하지 않고 다시 그 외부를 보고 다시 그 외부를 내부로 끌어들이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어떤 세계로 하여금 내부에 안주할 수 없도록 그 내부를 끊임없이 동요시키고 변환의 벡터를 작동시키는 것이다. 진보의 이념을 갖는 자들이 쉽사리 변혁으로 혁명으로 나아가는 것은, 어떤 주어진 혁명의 '이념'을 구현하려는 생각에서라기보다는, 정확하게 이런 이유에서일 것이다. - 131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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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는 '타자'를 향한 고민이다. 또한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자'들, '권력을 갖지 못한 자'들, '외부'로 비껴진 사람들을 내부로 안기 위한 고민이다. 권력과 자본을 중심에 두지 않고, 그 외부에서 힘을 낼 수 없는 사람들을 위한 고민이다. 그 고민 속에서 우리는 진일보하며 발전한다. 하지만, 진보가 지속적으로 꾸준하게 만족할 만큼 되기란 쉽지 않다. 진보는 '거부'를 동반한 활동이기 때문이다.
그가 1부에서 펼쳐놓는 많은 이야기는 본격적으로 펼쳐질 2부를 향한 설득이며, 설명이고, 암시였다. 2부는 꽤 구체적이며, 사실적이고 역사적이며 실증적으로 다가온다. 시간적인 세계와 비시간적인 세계, <독립신문>을 분석하여 본 '선험적인 시간', 영토의 개념이 탄생하며 어떻게 쓰여지고 있는지. '역사'라는 개념이 시작된 시점, 그 개념이 포함하는 것들에 대해 집요하게 찾아내고 분석하고 있다. '민족'과 '국민'의 개념, '역사'의 개념이 점차 정립되면서 우리의 영역은 변화하고 사회적인 약속이나 생각도 그에 따라 변화하기 시작한다. 근대 초기 침략에 맞선 고민과 진보의 개념을 확인할 수 있다. 3부에서는 정말 하고 싶었던 이야기가 펼쳐진다. 우리의 식민지적 역사, 그 역사 안에서 목소리를 내는 형태나 모습. 가족주의를 변화시켰던 가족계획의 정치적인 전략, 외부에 대한 목소리를 내는 우리, 저무는 제국의 역사를 부여잡고 있는 우리의 현 모습, '경제대통령'이라는 사슬에 걸려 헤어나오지 못하는 우리의 모습, 권리를 찾기 위한 비폭력 투쟁, 그리고 한쪽에 펼쳐지는 소수자들의 개 같은 시간들.
우리는 언제나 권력과 자본에 목소리를 내왔다. 그 목소리는 조금씩 진보하여, 다른 형태로 바뀌어 왔다. 비폭력투쟁으로, 혹은 외부를 고민하는 사람들의 모임으로, 네트워크가 발달하면서 직접 만나는 시간을 넘어, 사이버 공간에서도 말이다. 우리는 지배의 역사를 몸소 경험한 사람들이다. 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우리를 고통스럽게 했는지도 잘 안다. 역사는 말하고 있지만, 우리는 깨닫지 못한다. 우리가 당해왔던 것처럼 '소수자'를 몰아세우고, 우리를 고통의 역사로 몰았던 '제국'을 신봉한다. '경제력'을 이유 삼아 말이다. 그리고, 또 하나의 괴물 경제대통령을 탄생시켰다. 그리고, 우리의 진보는 멈춰있다. 아니, 퇴보했는지도 모른다.
'역사'라는 말로 뻔뻔하게 자행되는 많은 것들 사이에 감춰진 것들, 그것들을 보지 못하면 우리는 더 진보한 '역사'로 나아갈 수 없다. 그 '역사'를 말해주고 싶었기 때문에, 이진경은 집요하게 분석했고 이야기했다. 우리는 '역사'에 휘둘리는 삶을 살아왔음에도 깨닫지 못하고 또 '역사'에 이끌려 다니고 있다. 망각의 시간, 그 시간을 건너왔기 때문일까? 그래도 다행인 것은 잊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제대로 된 역사'를 만들기 위해, 우리의 시간의 리듬 속에 소수자와 타자를 함께 포함하는 '역사'를 만들기 위해 뛰는 사람들 말이다. '진보'는 잠시 주춤한다. 하지만, 그 주춤하는 시간을 파고드는 세력들은 기운이 세고, 뻔뻔하다. 그 세력들을 제대로 보지 않고, 눈 감으려 한다면 우리는 역사의 '주체'가 되지 못하고, '존재자'만 될 뿐이다. 여수의 '외국인 보호소'의 참사가, 미국 어디에선가 '한국인 보호소'의 참사로 탈바꿈할 수도 있는 노릇이다.
우리는 많은 시간을 건너왔고, 많은 고통을 이겨냈다. 그리고, 우리를 만들었다. 그 시간이 헛되지 않도록, 지금 반성하고 제대로 된 '진보'를 이끌어내야 할 것이다. 그 반성 뒤에 '진보의 역사'를 염원하며 쓰여진 이 책이, 그래서 반갑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