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에 유리 조각과 같은 이물질이 들어가면 완전히 제거할 수 있을까? 빠른 시간 안에 안과에 가서 진료를 받으면 제거는 가능하다. 하지만 유리 조각의 경우는 투명해서 더러는 완전히 제거하는 것이 어려울 수도 있다. 내가 만난 2명의 안과 의사가 그렇게 말했다. 올 봄의 일이다. 책상 스탠드의 전구를 갈다가 그것이 깨지면서 유리 파편이 튀어서 눈으로 들어갔다. 다음날, 다니던 안과에 가서 진료를 받고 유리 조각을 빼내었다. 그런데도 눈에는 이물감과 통증이 지속되었다. 아무래도 미처 제거되지 않은 유리 조각이 남은 것 같았다. 거기에다 눈 안쪽 가장자리에는 작은 수포 같은 것도 생겼다. 다시 안과에 갔다.

  "일단 현미경 상으로는 유리 조각은 더는 보이지 않습니다. 남아있는 유리 조각이 있을 수도 있겠죠. 염증만 일으키지 않는다면 그렇게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눈 안쪽에 생긴 건 나도 잘 모르겠네요. 난 망막 전문이라 외안부 질환은 안봅니다. 진료 의뢰서를 써줄 테니 대학병원에 가보시죠."

  이 의사는 대학 병원 안과 교수로 10년을 넘게 있었던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눈에 생긴 작은 뾰루지 같은 것이 뭔지 모른다는 말이 나는 당최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내 입장에서는 무슨 중대한 질환도 아니고 진료 의뢰서를 들고 대학 병원에 가야한다는 사실이 쉽게 납득이 가질 않았다. 나는 그 의사가 웬만하면 외래에서 치료할 수 있는 것을 귀찮아서 안해준다는 생각이 들었다.

  "선생님, 이렇게 병원 한번 왔다 가는 일도 환자인 내 입장에서는 힘이 들어요. 저는 선생님이 볼 수 있는 거면 그냥 치료받았으면 하는데요. 이걸 가지고 또 대학 병원에 가보라니 내 입장에서는 좀 무책임하게 들리네요."
  "뭐가 무책임하다는 겁니까? 내가 모르는 걸 모른다고 이야기하잖아요. 결막에 난 게 진짜 뭔지 모른다니까요. 난 망막만 본다구요. 우리 병원은 망막 전문 병원입니다. 지금 환자들 기다리고 있어서, 환자분하고 더이상 이야기 할 시간 없습니다."

  의사는 모니터에 눈을 고정하고 진료 의뢰서를 작성하고 있었다. 내 뒤로는 환자들이 열 명도 넘게 밀려있었다. 이 의사는 환자가 말을 길게 하는 것을 무척 싫어한다. 전부터 나는 이 의사의 진료에 대해 불편한 감정이 있기는 했다. 내가 눈에 대해 뭔가 물어보려고 하면 귀찮은 기색이 역력했다. 어떻게든 진료실에서 빨리 내보내고 싶은 눈치였다. 나이든 노인 환자가 눈 영양제에 대해 말하니까 큰소리로 면박을 주는 것도 들었다. 이 병원의 진료실 문은 열려져 있어서 의사와 환자의 대화 소리가 다 들린다. 뭔가 환자에 대한 응대가 썩 좋지 않은 의사구나 생각은 했다. 하지만 실력이 뛰어난 의사여서 병원은 환자들로 언제나 미어터졌다. 나도 그런 환자들 가운데 하나였다.

  '아이구, 3분 커트 진료 열심히 해서 돈 많이 버시구려.'

  나는 그렇게 속으로 화를 삭이면서 병원을 나왔다. 그 의사가 써준 진료 의뢰서를 가지고 대학 병원 안과까지 갈 생각은 없었다. 그래서 다른 안과 전문 병원을 알아보고 가기로 했다. 이번에는 예약하기 전에 그 병원에서 결막 질환을 보는지 물어보았다. 문의한 병원의 안내 데스크에서 의사에게 물어보고 진료를 본다는 답을 주었다. 그 병원에는 세 명의 안과 전문의가 있었다. 나는 어떤 의사에게 진료를 볼 것인지 결정해야 했다. 나는 병원의 홈페이지를 둘러 보았다. 내가 주의깊게 본 것은 의사의 경력이 아니라 사진이었다. 그렇다. 그런 경우에 나는 의사의 관상을 본다... 병원 홈페이지에 올라온 사진들 가운데 한 의사가 환자를 보는 사진이 참 인상적이었다. 젊은 의사가 진중하고 차분한 표정으로 환자를 진료하는 사진이었다. 나는 그 의사한테 진료를 보기로 예약했다. 

  마침내 예약한 날에 병원에 가서 의사를 보았다. 삼십 대 중반의 젊은 의사는 마치 대학생처럼 보였다. 나는 진료 의뢰서를 보여주며 병원에 오게 된 이유를 짧게 요약해서 말했다. 이제는 의사를 만날 때 말을 간결하게 하는 습관까지 생겼다. 많은 의사들이 환자가 말을 길게 하는 걸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다. 대학 병원 진료가 괜히 3분 커트, 5분 커트라는 말이 나오는 게 아니다. 이것저것 묻는 환자는 곧 짜증이 뚝뚝 떨어지는 우거지상 얼굴의 의사를 보게 된다. 나에게 진료 의뢰서를 써준 안과 의사도 그랬다.

  "유리 조각이 눈에 들어간 거면 큰 사고를 겪으셨네요. 그럼 어디 한번 눈을 볼까요?"

  의사는 세극등 현미경으로 내 눈을 찬찬히 살펴 보았다. 혹시 남아있는 유리 조각이 결막에 남아있는지 면봉으로 쓸어내리면서 꼼꼼하게 확인했다. 의사는 결막 안쪽에 난 수포는 결막낭인데, 제거를 해도 재발한다고 알려주었다. 나는 그것 때문에 이물감이 느껴지는 것 같아서 제거를 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의사가 마취 안약을 내 눈에 점안하고 주사 바늘로 그걸 터뜨리는 데에는 몇 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일주일 뒤에 다시 안과에 가서 보니 다행히 결막낭이 재발하지 않고 깨끗이 나았다. 그럼에도 나는 계속적으로 눈의 이물감과 통증을 느꼈다. 그런 이야기를 내가 하자, 의사는 현재로서는 별 문제가 없어보이니 시간을 두고 지켜보자고 말했다. 나는 이 의사가 환자를 보고 대하는 태도가 참 마음에 들었다. 그 선생은 환자인 내 이야기를 주의깊게 경청했고, 진료 내용에 대해서 차분하게 설명도 잘해 주었다. 이 의사에게는 환자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뭔가가 있었다. 그것은 내가 눈 때문에 느끼는 불안과 걱정을 상당부분 덜어주었다. 적어도 이 의사한테 진료를 보면 아픈 눈이 다 잘 나을 것 같다는 믿음이 생겼다. 내심 속으로 이런 좋은 의사도 다 있네, 하고 감탄했다.

  나는 대학 병원에 가보라며 나를 진료실에서 떠밀어낸 3분 커트 의사를 더이상 미워하지 않기로 했다. 그 의사의 문전박대 때문에 좋은 의사 선생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 3분 커트 의사는 내 눈에 생긴 수포가 결막낭이라는 것을 정말로 몰랐던 것일까? 아니, 대학 병원에서 10년 넘게 교수로 구른 사람이 젊은 의사가 단번에 보고 아는 결막낭 질환을 모른다는 것이 말이 되나? 망막만 보는 의사는 그런 사소한 외안부 질환을 모르는 것이 당연한가? 아마도 그건 의사 본인만이 아는 일이겠지. 내가 분노하는 건 그 의사가 환자를 대하는 태도이다. 그는 환자를 존중하지도 않았고, 환자가 느끼는 어려움에 대해서 공감하는 능력도 없었다. 안과 의사로서 눈을 보는 실력이야 출중할지 몰라도, 나는 그 의사가 좋은 의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비교 체험 극과 극' 프로그램처럼 나는 눈 때문에 두 명의 안과의사를 만나보았다. 한 사람은 의사로서 참으로 별로였고, 다른 한 사람은 정말로 괜찮은 의사 선생이었다. 어쩌면 의사도 진정한 재능의 영역에 속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단지 공부 머리가 좋고, 환자 치료를 잘하는 재능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몸이 아픈 환자의 마음을 살피는 일. 심의(心醫), 의사로서의 최고 경지는 그렇게 환자의 불안한 마음까지 보듬는 것이다. 현실에서 이런 의사를 만나는 일은 결코 쉽지가 않다.

  진료실에서 편안함을 느끼는 환자가 과연 얼마나 되겠는가? 환자가 조금만 이야기를 길게 하거나 뭘 물어보면 의사의 불편한 심기가 그대로 느껴진다. 의사도 개인 사업자이니, 의사들이 입만 열면 성토하는 현행 의료 수가 체계에서는 의사가 어떻게든 환자를 많이 보아야 한다는 걸 모르지는 않는다. 하지만 의술이 돈과 효율로 환산되는 이런 현실은 매번 마주할 때마다 씁쓸함을 남긴다. 아마도 내가 알게 된 그 좋은 안과 의사도 언젠가 명의가 되어 3분 커트로 환자를 보게 될지도 모르겠다. 그렇다 하더라도 그 의사 선생이 심의(心醫)로서의 마음가짐만큼은 오래 지켜주었으면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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