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랫동안 머릿속에만 둥둥 떠다니는 시나리오 소재가 하나 있었다. 장르는 로맨틱 코미디, 주연 배우도 나름 생각해 두었다. 만약 시나리오가 완성되어서 영화화될 수 있다면 유해진과 송중기를 캐스팅해야지. 여배우는 떠오르는 얼굴이 없어서 아직까지 정해놓지 못했다. 물론 나는 아직 그 시나리오의 첫 문장도 쓰지 않았다. 대충 시놉만 짜두었을 뿐이다. 그런데 그 시나리오의 마지막 장면은 아주 상세하게 구상해놓고 있다. 마지막 장면에서 남자 주인공은 스페인을 배낭 여행 중이고, 여자 주인공은 멀리 떠난 그 남자를 그리워한다. 여자 주인공은 자신의 마음을 달래기 위해 라디오에 음악 신청을 한다. 그렇게 라디오 디제이에게 선곡이 되어 흘러나오는 노래는 박정운의 '오늘 같은 밤이면'이다.


  1992년에 발표된 이 노래는 내가 아끼고 좋아하는 가요들 가운데 하나이다. 가수 박정운은 남자 가수로는 흔하지 않은 매우 청아한 음색을 가지고 있었다. 그가 직접 작사 작곡한 이 노래는 가사도 매우 아름답고 서정적이다. 언젠가 박정운을 인터뷰한 기사를 읽었는데, 인터뷰에서 박정운은 이 노래의 작곡 배경을 들려주었다. 그는 자신과 떨어져 외국에서 지내던 아내에 대한 간절한 그리움을 노래에 담았다고 했다. 내가 알기로는 '오늘 같은 밤이면'은 그해에 국어학자와 평론가들이 뽑은 '가사가 아름다운 노래'에 선정되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유튜브에서 내가 이 노래를 들을 때 선택하는 영상은 올림픽 공원에서 그가 라이브로 부른 버전이다. '토요 대행진'이라는 가요 프로그램인데, 박정운은 어스름이 깔린 여름 저녁 무렵 탁 트인 잔디밭에서 노래를 부른다. 의외로 관객들은 그리 많지가 않다. 이 영상에서 박정운은 그야말로 가수의 절창(絕唱)이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그만의 절절한 감성에 뛰어난 가창력이 어우러진 노래는 여름 저녁 하늘을 아름답게 물들인다. 야외 무대의 그리 좋지 않은 음향 상태 따위는 이 가수에게 아무런 장애가 되지 않는다. 박정운은 오로지 자신이 부르는 노래만으로 진정한 가수 그 자체임을 입증한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1990년대는 우리나라 가요계의 제자 백가 시대와도 같았다. 새로운 세대의 가수들이 다채로운 장르의 음악들을 들고 나왔다. 어떤 면에서 당시의 젊은이들은 참으로 행복하게 대중가요를 향유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댄스 음악의 열풍 속에서도 발라드의 아성은 참으로 견고했다. 박정운은 그 시기를 대표하는 발라드 가수들 가운데 하나였다. 그의 노래에는 다른 발라드 가수와는 차별되는 그만의 감성과 애절함이 있었다. 대표곡 '오늘 같은 밤이면'과 '먼 훗날에'를 들어보면 이 가수가 지닌 강점이 무엇인지 잘 알 수 있다.   

  가끔 케이블 채널을 돌리다 보면 1980년대와 90년대에 활약했던 발라드 가수들이 트로트를 부르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인생은 미완성'이라는 히트곡을 가진 이진관, '젊음의 노트'를 부른 유미리도 트로트 가수로 진로를 바꾸었다. 나는 내 기억 속의 발라드적 감성을 지닌 그 가수들의 모습과 TV 화면 속 트로트 가수로 변한 모습이 서로 이질적으로 충돌하고 겹쳐지는 것을 목도한다. 가수도 직업인이며, 먹고 사는 일이 어디 쉽겠는가? 발라드를 들어주던 팬들은 다른 새로운 음악을 찾아 떠나가 버렸다. 1990년대의 가수들은 2000년대에 쏟아져 나오는 아이돌 그룹의 파고 속에서 몸부림쳐야만 했다. 박정운은 그 속에서 서서히 잊혀진 가수가 되었다.

  몇 년 전인가? 나는 박정운의 근황이 궁금해져서 인터넷에 검색을 해본 적이 있었다. 그를 아는 누군가가 박정운이 기획사를 차려서 아이돌 그룹을 양성하고 있다는 소식을 써놓았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그는 매우 열정적으로 새로운 음악 인생에 승부를 걸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이제 가수로서의 박정운의 모습을 보기는 어렵겠지만, 그가 어떻게든 잘 풀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아마도 그는 가수로서, 음악인으로서 자신의 경력을 이어가기 위해 부단히 애를 썼을 것이다. 그러나 삶의 고달픔은 그를 결국 돌아올 수 없는 먼 곳으로 데려가 버렸다. 작년 가을, 나는 인터넷 뉴스로 그가 병고로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향년 56세, 참으로 안타까운 나이였다.    

  가끔, 나는 그가 올림픽 공원에서 라이브로 부른 '오늘 같은 밤에는'을 듣는다. 이제 그 아름다운 노래를 들려주던 가수는 세상을 떠났다. 하지만 나의 머릿속에는 그가 부른 그 노래가 들어있다. 언젠가 나는 나의 그 머리를 땅속에 누이게 될 날을 맞이할 것이다. 그렇게 한 사람의 생에서 가수의 노래는 사라지겠지만, 그 노래를 듣는 누군가에게서 노래는 새로운 생명력을 얻을 것이다. 가수에게 있어 영생(永生)이란 그런 것이 아닐까? 뛰어난 음악적 재능을 지녔음에도 불운했던 가수 박정운, 그가 지금 있는 그곳에서 평안히 쉬길 기도한다.  


*가수 박정운이 1992년 5월, 올림픽 공원에서 라이브로 부른 '오늘 같은 밤이면' 유튜브 링크

https://www.youtube.com/watch?v=1fiGVZAHJX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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