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복


  "당신 주식은 좀 올랐어?"
  "조금. 그냥 용돈벌이 수준이지."
  "옛날에 반도체 주식이나 사놓지 그랬어. 그게 그렇게 올랐다며?"
  "그러게. 사람이 앞일을 알 수 있어? 그거 한 주에 15만 원 할 때, 그냥 팔아치웠거든. 그게 지금 220만 원이야."

  남편은 그렇게 말하면서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연수는 침울한 남편의 표정을 보니, 자신이 괜히 말을 건넨 것 같았다. 만약에 남편이 그 주식을 지금까지 계속 들고 있었으면 어땠을까? 17평 2층 빌라에서 이사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무당의 유튜브를 보는데 그러더라. 돈복 있는 사람은 따로 있다고. 그러니 어쩔 수 없는 거 아닌가 싶어."
  "돈복 없는 사람은 평생 거지처럼 살아야 한다는 말처럼 들리네."

  빨간색의 화살표가 가득한 주식 앱의 창을 닫으면서 남편이 그렇게 말했다. 연수는 자신이 위로를 한다고 말한 것이 오히려 남편의 속을 긁었나 싶어졌다. 마지막 오거리, 목적지까지 5분 남았습니다. 렌터카의 네비게이션이 집 근처 오거리에 도착했음을 알려주었다.

  "아버님은 전보다 더 나빠지신 것 같지?"
  "그래 보여. 이렇게 병원 가는 일도 올해까지가 아닐까 싶고."

  연수는 남편과 함께 2주에 한 번, 시아버지가 입원한 요양 병원을 방문했다. 1년이 좀 지났나? 아직 봄이 오지 않았으니 1년을 채우지는 못했네. 그러니까 작년 3월의 일이었다. 시아버지는 요양원 화장실에서 미끄러지는 사고를 당했다. MRI를 찍어보니, 미세한 뇌출혈이 있었다. 골절에다 뇌출혈 후유증까지, 시아버지는 병원 침대에서 거의 누워있다시피 하면서 지냈다.

  "주식 투자자들 사이에 엄신이라고 불리는 사람이 있거든. 이름이 엄석구. 오래전에 투자한 주식이 대박이 나서 무려 300억 수익을 거둔 거지. 그게 20년 전이야. 그 양반은 그거 종잣돈으로 계속 굴리면서 잘 먹고 잘 살더라고."
  "그러겠지. 돈이 돈을 버는 시대잖아."
  "수도꼭지 하나에 삼백만 원짜리가 있다면, 당신은 믿겠어?"
  "그게 무슨 소리야?"

  남편은 차에서 내리면서 뜬금없이 수도꼭지 이야기를 꺼냈다. 연수는 삼백만 원짜리 수도꼭지가 있다면 어떻게 생겼을지 가만히 상상해 보았다. 진짜 금으로 도금이라도 한 모양인가 보네.

  "고급 부동산을 탐방하는 유튜버가 있어. 그 유튜브 방송을 보니까, 엄신이 사는 로터스(Lotus) 타워가 나오는 거야. 엄신이 리모델링한 자기 집을 보여주는 거지. 글쎄, 그 집의 욕실 수전의 수도꼭지가 삼백만 원이라는군."
  "그건 좀 낭비 같은데. 어차피 물을 트는 것뿐이잖아."
  "그래. 나도 그렇게 생각해. 근데 말이야, 나 원 참 웃겨서."

  남편은 갑자기 뭐가 생각이 났는지 연신 웃음을 터뜨렸다.

  "그 집 인테리어 소품에 수프 캔 바구니가 있는 거야. 당신도 알지? 앤디 워홀의 팝 아트, 그거 있잖아. 캠벨 수프 같은 깡통 쌓아놓은 거. 커다란 대바구니에 외국 수프 캔이 여러 개 담아져 있는 거지. 그게 천만 원짜리래. 크리스티 경매장에서 낙찰받은 현대 예술 작품이라나 뭐라나. 하하..."
  "부자들의 취향이란 게 참 독특하네. 당신이나 나나 그런 건 거저 줘도 안 가질 것 같은데."
  "맞아. 돈복 있는 사람들은 뭔가 다르긴 다른 모양이지."

  마침내 부부는 비좁은 빌라 주차장에 겨우 차를 대놓고 집에 들어왔다. 남편은 1시간 넘게 운전하느라 피곤했는지 소파에 털썩, 소리를 내며 앉았다. 그리고는 늘 하던 대로 주식 분석 유튜브 방송을 틀었다. 연수는 전자레인지에 뎁히기 위해 냉동해 놓은 밥과 즉석 국을 식탁에 올려놓았다. 언제부터더라, 요리를 하지 않게 된 것이... 문득, 돈복이 있는 사람들의 식탁은 자신들과 얼마나 다를지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자, 오늘 방송 시작하겠습니다. 여러분은 이런 말을 들어보신 적이 있습니까? 여러분이 먹는 음식이 여러분을 만든다고요. 저는 이 말을 이렇게 바꾸겠습니다. 여러분이 오늘 사는 주식이 여러분의 일생을 놀랍게 바꾸어놓을 수 있다고 말입니다."

  냉동 밥과 즉석 미역국, 공장에서 만든 김치를 먹는 자신과 남편의 인생이 과연 앞으로 얼마나 달라지겠는가? 돈복이라는 것이 이미 정해져 있는 것이라면, 백날 주식을 사봤자 소용이 없는 일이 아닌가. 땡땡땡. 조리가 끝났음을 알리는 전자렌지의 알림음이 경쾌하게 울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거울


  나는 너무나도 오래 살았다. 정말로 오래 살아서 그런 것으로 느끼는지는 알 수 없다. 어쨌든 오래 살았다고 느낀다. 나의 주인은 얼마 전에 죽었다. '얼마 전'이라고 쓴 것은 나도 주인이 정확히 언제 죽었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아파서 죽었을 것이다. 요양병원에서 죽었는지, 아니면 다른 곳일 수도 있겠지. 주인의 딸은 나와 함께 침대 매트리스도 함께 버렸다. 주인, 그러니까 영감이 쓰던 매트리스. 영감은 중풍을 오래 앓았다. 매트리스에서는 지독한 소변 냄새가 진동했다. 이 추운 겨울에도 그 지린내가 내 몸에 옮겨붙은 것 같다.

  중년의 여자가 선풍기를 버리고 간다. 이상하게도 선풍기 날개가 보이지 않는다. 날개는 어디로 간 것일까? 여자가 선풍기를 버리면서 중얼거린다. 아까워, 아까워, 너무 아까워. 나는 여자가 가버린 뒤로 선풍기에게 넌지시 말을 걸어보았다.

  "넌 어쩌다가 여기 온 거야?"
  "저 여자가 청소하다가 나를 넘어뜨렸어. 그런데 그만 날개가 부러지고 말았지. 사실 내 모터는 멀쩡하거든. 날개가 부러지니까 쓸 수 없다고 버린 거지. 여자는 날개를 접착제로 붙이려다가 실패했어. 말도 안 되는 짓이지. 선풍기 날개를 본드로 붙이려고 하다니."
 
  모터가 멀쩡한 그 선풍기는 고물 가전을 수거하는 업자가 오더니, 냉큼 집어서 들고 가버렸다. 안녕, 잘 가렴. 어떻게든 너는 다른 날개를 달고서 살아갈 수 있을 거야. 나는 냄새나는 매트리스 바로 옆에서 코를 틀어막으며 숨을 겨우 내쉬었다.

  "왜 이건 스티커를 붙이지 않은 거야?"

  대머리 경비가 와서는 나를 쳐다보고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어. 영감의 딸은 돈을 아끼려고 나한테는 폐기물 스티커를 붙이지 않았거든. 나는 어쨌든 멀쩡해 보이니까, 누군가는 가져가지 않을까 싶어서였겠지. 그런데 사람들은 나한테 아무런 관심을 보이지 않았어. 태권도복을 입은 조그만 아이가 나한테 와서는 누렇게 말라비틀어진 코딱지를 붙여놓고 가더군. 내가 팔이 있었다면, 그 녀석 머리를 쥐어박아 주었을 거야. 추접스럽게 이게 뭐람. 요새 젊은 것들이 애들 가정 교육을 도무지 안시키기 때문에 그래. 아이들은 아무 데나 쓰레기를 버리고, 침을 뱉고, 욕하고, 악다구니를 쓰지. 세상이 말세야, 말세.

  "어디로 끌려갈지 모르니까 무서워."

  오줌 자국이 선명한 매트리스가 오그라든 입으로 중얼거렸어. 그럴 거야. 넌 아무래도 갈가리 다 찢겨서 버려지지 않겠니. 널 누가 데려가겠어. 난 그래도 어디 흠이 생기거나 그런 건 아니니까, 누군가 필요한 사람이 있으면 가져가겠지.

  "그래서, 그만 끝내겠다는 거야?"

  중학생으로 보이는 계집애 하나가 내 앞에 서서 그렇게 말했다. 여중생은 통화중이었다. 머리에 피도 마르지 않은 것이 연애질을 하는 모양이군. 나는 혀를 끌끌 차면서 무어라 더 말을 하는지 귀를 기울였어.

  "야, 너 같은 건 널리고 널렸어. 웃기고 있네."

  끝났나 보군. 잘 된 거야. 잘 된 거지. 나는 전화기 너머의 알지 못하는 어떤 녀석, 아니 계집애일 수도 있잖아. 세상이 변했으니까. 아무튼 여중생의 파트너랄지, 연애 상대에게 박수를 보냈어. 틴트 하나도 제대로 바르지 못하는 저런 칠칠하지 못한 애하고는 사귀지 않는 게 나아.

  "뭐야, 병신같은 게."

  계집애는 발에 걸리는 작은 돌멩이를 세게 찼어. 젠장. 그게 내 머리에 정통으로 맞은 거지. 정말로 나는 병신이 되어버린 것 같았어. 같은 것이 아니라 그렇게 되고 말았지. 조금 전까지는 멀쩡한 거울이었는데, 깨어진 거울이 되고 만 거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엄나무


  처음에는 그것이 그냥 막대기인 줄 알았다. 아주 기다란 막대기. 그런데 다가가서 보니 아니었다. 무지막지하게 큰 가시가 덕지덕지 붙은 엄나무였다. 아파트 출입문 뒤편, 응달진 곳에 1미터 높이의 엄나무를 누가 심어놓았다. 희주는 그 막대기, 아니 엄나무가 눈에 거슬렸다.

  "왜 저런 곳에다 심어놓은 거지?"

  아마도 가시가 있어서 위험하기도 하고, 어떻게든 엄나무는 심어보고 싶고 그래서였을 것이다. 이 동네에는 도무지 상식과 교양이 없는 인간들이 메뚜기처럼 출몰한다. 창문 밖으로 담배꽁초를 계속 내던지고, 물티슈를 비롯해 음식물 쓰레기도 내던진다. 화단에 온갖 화분이며 돌멩이를 모아다가 쌓아두는 사람이 있다. 그 사람일 것이다. 희주는 관리사무소에다 그것들을 치워달라고 민원을 넣은 적이 있다. 하지만, 그렇게 치워져서 다시 시간이 지나면 화분과 돌들, 항아리까지 화수분처럼 생겨났다. 아마도 그 사람에게 아파트 화단은 자신이 지분을 가지고 있는 정원인 듯싶었다.

  희주는 엄나무의 밑동을 발로 툭툭 쳐보았다. 자신이 쓰러뜨릴 수 있으면 그렇게 해볼 생각이었다. 그러나 어찌나 단단하게 심어놓았는지 막대기 같은 그 나무는 움직여지지 않았다. 그것은 마치 쇠막대기 같았다. 그런데 그 쇠막대기의 맨 꼭대기에 보라색 순이 올라오고 있었다. 이 추운 겨울에 나무는 치열하게 사는 중이었다.

  "6호 라인 출입구 뒤쪽에 1미터 정도 되는 엄나무가 있어요. 아파트 공유지를 개인이 무단으로 사용하고 있으니, 처리해 주면 좋겠습니다. 제거하든지, 다른 곳에 옮겨 심든지요."

  집으로 돌아온 희주는 관리사무소에 전화를 걸어서 그렇게 말했다. 그런데 전화를 끊고 나서, 무언가 마음이 편치가 않았다. 아마도 그 보라색 새순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 나무는 살아있었다. 관리사무소에서 어떤 식으로 처리할지 궁금해졌다. 그 나무를 그냥 거기에서 자라게 내버려두는 편이 나았을까?

  "당신은 해야 할 전화를 했을 뿐이야. 오히려 자신의 자리가 아닌 곳에서 자라면, 나중에 거칠게 뿌리뽑힐 뿐이지."

  앞집의 노인은 죽어가고 있다. 거동하지 못한 지가 꽤 되었다. 오늘 낮에는 전동 침대 대여회사의 설치 기사들이 다녀가는 것을 보았다. 노인의 나이는 구십을 훌쩍 넘겨서 백 살에 가까웠다. 자식들이 돌아가면서 병간호를 한다. 늙은 딸이 데려온 개가 희주와 남편이 드나들 때마다 짖어댔다. 희주는 저 노인이 올봄을 넘길 것인지 잠시 생각해 보았다.

  "봄과 가을에 노인들은 많이 죽습니다. 그래서 그 시기에 사망률이 치솟지요."

  언젠가 TV에 나온 의사가 하는 말을 들었다. 사람은 죽지만, 엄나무는 베어져도 뿌리가 있는 한 살아남을 것이다. 새순이 마치 붉은 피처럼 너무나 선명해서 희주는 그것을 차마 베어버리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그걸 심은 인간은 엄나무 순을 잘라서 먹고, 그 가시가 있는 가지를 삶아서 몸보신이나 하려고 했을 것이다. 사람의 삶은 무엇에 쓸모가 있을까? 엄나무는 쓸모가 있으니, 이 지구가 멸망할 때까지 살아남을 거라고 희주는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봄동


  허리가 직각으로 굽은 할머니가 장바구니 카트를 힘겹게 끌고 가는 것이 보였다. 엄마를 집에 데려다주는 길이었다. 노인은 엘리베이터 앞의 의자에 한참을 앉아있었다.

  "시장에 봄동이 나와서..."

  노인은 우리와 함께 엘리베이터에 탔다. 

  "몇 층 사세요?"

  나는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러주려고 노인에게 물었다. 하지만 노인은 대답 대신에 장애인 전용 버튼의 숫자를 얼른 눌렀다. 8층이었다.

  "말할 기운도 없어."

  노인의 카트에는 봄동과 함께 여러 가지 채소가 들어있었다. 그 무거운 것을 끌고 어떻게 온 것일까? 기운이 너무 없는지, 노인의 말소리는 물크러지고 곰팡이가 핀 귤 같았다.

  "조심해서 가세요."

  지팡이가 없으면 걷지를 못하는 엄마와 함께 내리면서 나는 인사했다. 집에 들어온 나는 TV를 켰다. 케이블 채널을 빠르게 돌린다. 엄마가 좋아하는 '현장르포 특종세상'이 나온다.

  "이거 좀 보고 계세요."

  "너는 어디로 가는 거냐? 넷째는 언제 온다니?"

  나는 엄마가 말하는 넷째가 어디에 사는지 알지 못한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동네 마트에 들렀다가 봄동을 보았다. 한 봉지에 3천 원이었다. 비싸지 않은 것 같아서 샀다. 그런데 나는 봄동을 어떻게 요리하는지 모른다. 엄마는 나에게 요리라는 것을 가르쳐준 적이 없었다. 봄동은 보통 겉절이를 해서 먹지. 나의 부엌에는 고춧가루도 없다. 언제부터인가 매운 것을 조금만 먹어도 속이 쓰렸다. 어쨌든 봄동의 잎을 톡, 톡 뜯어내었다.

  다음날, 엄마에게 점심을 차려줄 때 그 봄동을 식탁에 내놓았다.

  "달구나. 달아."

  나는 8층의 노인이 앞으로 봄동을 먹을 수 있는 날들에 대해 문득 생각해 보았다. 노인은 팔순을 쉬이 넘긴 것처럼 보였다. 굽은 허리로 장을 힘겹게 봐올 정도면, 분명히 혼자서 살고 있을 것이다. 16평의 이 낡은 복도식 아파트에는 독거노인들이 많이 산다. 나는 그래서 이 아파트를 노인동이라고 부른다.

  엄마의 집을 나올 때, 아파트 앞에는 익숙한 녹색의 목욕 차량이 보였다. '효녀 심청이 목욕 서비스'라고 커다란 글씨가 박힌 차. 차에서는 희뿌연 오수가 줄줄 흘러나오고 있었다. 언젠가 엄마는 그 차를 보고는, 자신의 부모를 남한테 목욕시키게 하는 자식들이 불효막심하다면서 분개했다. 나의 오른팔은 테니스 엘보에 시달려서 고무팔이나 다름없다. 나는 그 목욕 차량을 지나오면서 아픈 오른팔을 계속해서 쓰다듬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지난 주에 이어서 시집 2부를 올립니다. 



탐구생활(探究生活) 1부 링크

https://blog.aladin.co.kr/sirius7/17025932

 

 


2부     명랑(明朗)  



명랑(明朗)


사다새


희망(希望)


빗방울


상괭이


오늘의 날씨


거짓말


월매(月梅) 정육점


눈물길


그렇게


건너가다


싸구려에 대한 명상


빨강


숙이 아줌마


면도날


납골당(納骨堂)


다시마












명랑(明朗) 



이리 오너라


명랑을 가만히 불러낸다

명랑은 거친 맨발에 민머리를 하고 있었다

배움은 짧았으나 성품은 유순하였다

눈은 매우 가늘어서 늘 세상이 잘 보이지 않았다


명랑은 타고나는 것입니다


명랑에게 명랑하게 살아가는 방법을 물으니

명랑은 나에게 그렇게 답하였다


명랑이 사는 집의 대문은

녹이 슬어서 마치 피를 흘리는 것 같았다

명랑은 늘 쪼들렸다

그래도 조그만 입으로 웃음을 떨어뜨리면서

칠칠맞지 못하게 돌아다녔다


한번은 명랑이 울고 있는 것을 보았는데

왜 울고 있느냐 물으니

갖고 있는 명랑이 다 바닥이 나서

더는 먹을 것이 없다고 말하였다


나는 명랑에게 딱히 줄 만한 것이 없어서

피(粥)죽을 한 그릇 쑤어 주었다

명랑은 피죽이 붉은 색이 아니라며 신기해 하였다

명랑은 피(粥)를 한번도 본 적이 없으므로

어리석게도 그리 말하였던 것이다


까끌까끌한 알갱이가 가난한 손톱 같아요


마침내 명랑은 죽그릇을 비우고 어디론가 가버렸다

















사다새 



죽은 고등어를 먹으며 언제까지 살아야 할까

물음표는 꼬리를 질질 끌면서 창살을 빠져나간다

일부러 울지 않은 것이 몇 해인지 잊어버렸다


이 동물원의 지하에는 하늘다람쥐가 산다

비막(飛膜)이 찢어져 너덜너덜해진 다람쥐가 물었다


다시, 날아갈 수 있을까?


나는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사육사의 손을 심심해서 쪼아버렸더니

부리를 망치로 부숴버렸다

마시는 물이 피가 되어 흐른다


그 사막에는 피를 마시고

피어나는 들꽃들이 있다

다리가 부러진 친구들이 모두 떠난 곳


조각난 부리를 그러모은다

죽은 표범의 뼈바늘로 정성스럽게 꿰맨다

하늘다람쥐의 갈라진 옆구리도 이어 붙인다

새벽의 모래가 스르륵 움직이는 소리를 들었다

























희망(希望) 



흐린 표정을 지으며 너는 서 있다

너의 머리 위로는 작은 구름이 떠다닌다

언제든 자그마한 빗방울이 내릴 수 있는


너를 간절히, 여러 번 부른다


너의 얼굴에 흘러내리는 빗물을 보았는데

어쩌면 울고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나는 너에게 솔기가 닳은 행주를 건넨다

몇 번 쓰다 버릴 행주였지만

정성스럽게 감침질을 한 행주

죽어서 버려야만 하는 것들 앞에서

한참을 서성이는 습관이 생겼다


너는 아픈 허리를 조심스럽게 펴고

허우적거리며 머리의 구름을 밀쳐낸다

단단한 초록색의 구름


비가 다시 내리기 시작했다

꼬리가 잘린 도마뱀이 춤을 춘다





























빗방울 



세탁실에서는 비가 샌다

빗방울이 구불구불 기어다닌다


나는 빗방울을 틀어막으려 했지만

빗방울이 내 손목을 꺾어버렸다


빗방울에 얻어맞은 세탁기가 소리를 질렀다

꺼억꺼억, 다 죽어갈 것처럼

세탁기는 사실 죽을 때가 되었다

이십 년을 살아온 세탁기는

요새 쇳조각을 뱉어내고 있다


빗방울이 삐딱하게 웃으며

죽어보라 말한다


오늘도 뜨개질을 한다

빗방울의 기대가 어긋난다






























상괭이 



어린 상괭이는 부둣가에 드러누워 있었다

허여멀건한 배를 드러내고는

아기 손톱같은 이빨에는 피가 흥건했다


이런 게 진짜야


사진 선생은 연달아 셔터를 눌러대었다

학생들은 진저리를 치며 자리를 떴다

그 부둣가에는 도무지 사랑할 만한 것이 없었다

어부들은 아침부터 사진 찍는다고 욕설을 퍼부었고

선착장의 인부는 바다를 향해 오줌을 내갈겼다


사각의 프레임 밖에서 버려지고 잊혀진 것들

상괭이가 나의 프레임 안으로 들어왔다

하지만 나는 차마 셔터를 누르지 못했다


오늘 아침, 상괭이가 웃으며 걸어나왔다

스무 번의 여름이 지나갔다





























오늘의 날씨 



어제의 일기장을 펴고

오늘의 날씨를 적는다

키보드에 커피를 쏟았다

킬리만자로의 농부가 하늘을 본다

커피나무에서 흉년을 수확한다

아직은 불모(不毛)의 계절

오지 않은 즐거운 일기를 기다린다 





































거짓말 



거짓말을 잘하는 비결은

거짓말을 거짓말처럼 하는 것이다


버마비단뱀을 목에 칭칭 두르면

멋진 목도리가 된다

숨이 막히지 않을 정도로만 두르고

평온한 목소리로 말한다


나는 매끄럽게 속아넘어갔다


진짜겠지


어제는 아침 일찍 커튼을 열자

버마비단뱀의 웃는 얼굴이 보였다

































월매(月梅) 정육점 



아주머니는 왼손에 검은색 목장갑을 끼고 있었다

고기 자르는 기계에 손가락 하나를 잃었기 때문이다

아주머니의 정육점은 엄마의 단골 가게였다


월매(月梅) 정육점


작달막한 체구에 늘 웃는 얼굴이었던 아주머니의 가게는 잘 되었다

아주머니의 남편도 정육점에서 같이 일했지만

내 기억 속에 늘 고기를 썰어서 내어주던 사람은 아주머니였다

가끔은 아주머니의 이름이 월매라고 생각했다


정육점은 아주머니의 살림집과 이어져 있었다

한번은 엄마가 아주머니와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나는 작은 방 문턱에 조용히 앉아있었다

일고여덟 살 된 아이 하나는 TV 만화를 보고 있었고,   

내 또래일지 아니면, 좀 어리게 보이는 형은

방바닥에 엎드려 공책에 무언가를 끄적거렸다


어느 날, 아주머니가 암에 걸렸다는 소식을 들었다

정육점을 홀로 꾸려가던 아저씨는 몇 년 지나지 않아 문을 닫았다

내가 중학생 때의 일이다


오늘 아침, 식탁에 가만히 앉아있는데

월매 아주머니가 건너편에 와서 앉았다

아주머니의 잃어버린 손가락에

분홍색 손톱이 잘 자라고 있었다






















눈물길 



다운 증후군을 앓는 늙은 아가씨가

뽀로로 음료수를 마시고는

커다란 콘칩 봉지를 웃으며 뜯는다

너무나 새까맣게 염색을 한 엄마는

딸이 건넨 음료수병을 버리러 일어선다


불행의 얼굴은 판박이처럼 비슷하다

나는 아픈 왼쪽 얼굴을 쓰다듬으며 걷는다


집으로 오는 늦은 엘리베이터에서

9층의 여자와 마주친다

여자에게는 자폐증을 앓는 아들이 있다

여자는 나즈막하게 노래를 부른다


오 솔레 미오(O Sole Mio)


나폴리의 태양은 울고 싶지만

그 눈물길은 막혀있다

여자는 막힌 눈물길을 우회하여

가끔 컹컹 짖는 흰색의 강아지와

행복한 저녁 산책길에서 돌아온다



























그렇게 



엄마는 그릇을 옷장에 넣어둔다

엄마는 자식이 넷이라고 말하는데

나는 그 가운데 하나가 어디 사는지 모른다


네가 고생이 많구나

엄마가 그렇게 되어서


그렇게는 참으로 기이한 말이다

그렇게 인생이 흘러가지 않는 것이 좋다

아주머니의 딸은 그렇게 납골당에 있다


그의 우울증은 오래되었다

나는 그가 잘 버텨내길 바란다

평범하지 않게 그렇게

































건너가다 



그곳을 건너가지 못했다

발만 동동 구르면서

붉은 눈의 항구가 묻는다

건너갈 마음이 없었던 것은 아니냐고


늙어버린 배는 삐걱삐걱 소리를 낸다

끝이 갈라진 노를 힘겹게 저으며 떠난다

밤은 병든 푸른색이다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민머리 독수리가 굽은 등을 쪼아댄다

먼저 죽은 이의 퉁퉁 부은 얼굴이

뱃머리를 붙잡고 울고 있다


후회하는 돛이 세 갈래로 찢어지며

왼쪽 팔에 기다란 흉터를 새긴다

울음이 얼어붙고 말문이 닫힌다

멀었던 귀가 들리기 시작한다


물이 노래한다

물을 건너간다


























싸구려에 대한 명상 



싸구려 복숭아를 샀다

조막만 한 게 단맛이라고는 조금도 없어

괜찮아, 설탕을 좀 얹어서 먹으면

올해는 복숭아 풍년이라는데

또 싸구려를 사고 말았어


싸구려 카페에서 커피를 마신다

왜 이렇게 신맛이 많이 날까

신맛의 커피를 혐오한다

커피는 쓴맛, 기름진 쓴맛이 나야 하거늘


싸구려 남방을 입고 나간다

4천 원짜리, 메이드 인 방글라데시

남방을 입을 때마다

무너진 봉제 공장에 깔려 죽은 

먼 나라의 재봉사들이 생각나

언젠가 내가 입을 수의(壽衣)를 입듯

경건한 마음으로


오래전, 싸구려 비디오 가게에서

희귀 영화를 찾아다녔어

중년의 주인 남자는

친구들과 포커를 치고 있었지


타르코프스키(Tarkovsky)의 '희생'이 있나요?


그런 거는 우리 가게에 없어

비웃는 푸른 돛 문신의 팔뚝

불타는 희생의 나무



















빨강 



빨강의 바다로 간다

손이 비대하게 커진 인간들이

타자기를 두들기며 끊임없이 구토하는

더러운 빨강


살아남을 수 있을까


아픈 빨강의 반점이 웃으며 물었다

칼라민을 아무렇게나 발라주고는

빨강의 입을 조심스럽게 틀어막았다





































숙이 아줌마 



숙이 아줌마는 엄마의 고등학교 동창이었다

아줌마는 교육자 집안에서 그리 어렵지 않게 자랐는데,

가난한 남자와 결혼하는 바람에 늘 쪼들리며 살았다 

아줌마는 남편을 돕기 위해 이런저런 부업을 하곤 했다

내가 어렸을 적에 엄마를 따라 아줌마의 문구점에 갔던 기억이 난다


나중에 아줌마는 돈을 좀 벌어보겠다고 명리학(命理學)을 배우러 다녔다 

내가 재수생(再修生) 때의 일이다

아줌마는 이제 막 학력고사를 치룬 내 사주를 봐주었다

나는 무언가 좋은 말을 듣기를 희망했다

그리고 나의 기대에 걸맞게 아줌마는 이렇게 말했다


아, 너는 정말로 돈을 많이 벌 거야 엄청난 산처럼,

그렇게 넌 돈에 둘러 쌓여있을 거야


숙이 아줌마는 뇌출혈로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다

아줌마는 고혈압이었는데도 혈압약을 먹지 않았다

사이비 도사가 그런 약을 먹으면

일찍 죽는다고 한 말을 믿었기 때문이다

내가 서른 살이 되던 해의 일이었다  


버터를 사야지,

내 얼굴에는 기름기가 부족하기 때문에



























면도날 



면도날이 팔랑거리면서 내려온다


면도날 위의 삶

불운은 불공평하게 기울어져 있고

뒤뚱거리며 걷다가 결국 쏟아진다


색색의 조각난 면도날은

아스팔트 바닥에 짓이겨져

불그죽죽한 염료를 내뿜고

더러는 누군가의 머리에 내려앉아

휘파람을 불며 집으로 돌아간다


휘청거리면서 면도날 위를 걷는다

저린 왼쪽 손으로 면도날을 쥐었다

면도날이 조용히 웃었다

































납골당(納骨堂)



네 아빠는 명이 짧았지 


엄마는 납골당에 올 때마다 그 말을 한다


비쩍 마른 몸으로 흔들흔들 그네를 타던 아빠를 기억한다


쓰여지지 않은 이야기들

옷장 속에서 해골이 비소를 들이키며

어떤 인생의 이야기를 조용히 들려준다

 

나는 옷장의 문을 열었다가 가만히 도로 닫았다





































다시마 



엄마의 집 찬장에서 다시마를 발견했다

몇 년을 묵은 것 같은, 아주 잘 마른 다시마

나는 다시마를 물에 불린다

푸른 바다는 보이지 않는다


요새는 왜 그렇게 흰색 차들이 많으냐?


모두들 흰색의 세계로 도망치고 싶은 것이겠죠

나는 같은 대답을 매일 엄마에게 들려준다


다시마의 세계는 갈색이고 눈물이며 그래서 짠맛이 난다

엄마의 잃어버린 바다와 다시마가 끈적거리는 시간을 천천히 걸어간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