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에 이어서 시집 2부를 올립니다.
탐구생활(探究生活) 1부 링크
https://blog.aladin.co.kr/sirius7/17025932
2부 명랑(明朗)
명랑(明朗)
사다새
희망(希望)
빗방울
상괭이
오늘의 날씨
거짓말
월매(月梅) 정육점
눈물길
그렇게
건너가다
싸구려에 대한 명상
빨강
숙이 아줌마
면도날
납골당(納骨堂)
다시마
명랑(明朗)
이리 오너라
명랑을 가만히 불러낸다
명랑은 거친 맨발에 민머리를 하고 있었다
배움은 짧았으나 성품은 유순하였다
눈은 매우 가늘어서 늘 세상이 잘 보이지 않았다
명랑은 타고나는 것입니다
명랑에게 명랑하게 살아가는 방법을 물으니
명랑은 나에게 그렇게 답하였다
명랑이 사는 집의 대문은
녹이 슬어서 마치 피를 흘리는 것 같았다
명랑은 늘 쪼들렸다
그래도 조그만 입으로 웃음을 떨어뜨리면서
칠칠맞지 못하게 돌아다녔다
한번은 명랑이 울고 있는 것을 보았는데
왜 울고 있느냐 물으니
갖고 있는 명랑이 다 바닥이 나서
더는 먹을 것이 없다고 말하였다
나는 명랑에게 딱히 줄 만한 것이 없어서
피(粥)죽을 한 그릇 쑤어 주었다
명랑은 피죽이 붉은 색이 아니라며 신기해 하였다
명랑은 피(粥)를 한번도 본 적이 없으므로
어리석게도 그리 말하였던 것이다
까끌까끌한 알갱이가 가난한 손톱 같아요
마침내 명랑은 죽그릇을 비우고 어디론가 가버렸다
사다새
죽은 고등어를 먹으며 언제까지 살아야 할까
물음표는 꼬리를 질질 끌면서 창살을 빠져나간다
일부러 울지 않은 것이 몇 해인지 잊어버렸다
이 동물원의 지하에는 하늘다람쥐가 산다
비막(飛膜)이 찢어져 너덜너덜해진 다람쥐가 물었다
다시, 날아갈 수 있을까?
나는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사육사의 손을 심심해서 쪼아버렸더니
부리를 망치로 부숴버렸다
마시는 물이 피가 되어 흐른다
그 사막에는 피를 마시고
피어나는 들꽃들이 있다
다리가 부러진 친구들이 모두 떠난 곳
조각난 부리를 그러모은다
죽은 표범의 뼈바늘로 정성스럽게 꿰맨다
하늘다람쥐의 갈라진 옆구리도 이어 붙인다
새벽의 모래가 스르륵 움직이는 소리를 들었다
희망(希望)
흐린 표정을 지으며 너는 서 있다
너의 머리 위로는 작은 구름이 떠다닌다
언제든 자그마한 빗방울이 내릴 수 있는
너를 간절히, 여러 번 부른다
너의 얼굴에 흘러내리는 빗물을 보았는데
어쩌면 울고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나는 너에게 솔기가 닳은 행주를 건넨다
몇 번 쓰다 버릴 행주였지만
정성스럽게 감침질을 한 행주
죽어서 버려야만 하는 것들 앞에서
한참을 서성이는 습관이 생겼다
너는 아픈 허리를 조심스럽게 펴고
허우적거리며 머리의 구름을 밀쳐낸다
단단한 초록색의 구름
비가 다시 내리기 시작했다
꼬리가 잘린 도마뱀이 춤을 춘다
빗방울
세탁실에서는 비가 샌다
빗방울이 구불구불 기어다닌다
나는 빗방울을 틀어막으려 했지만
빗방울이 내 손목을 꺾어버렸다
빗방울에 얻어맞은 세탁기가 소리를 질렀다
꺼억꺼억, 다 죽어갈 것처럼
세탁기는 사실 죽을 때가 되었다
이십 년을 살아온 세탁기는
요새 쇳조각을 뱉어내고 있다
빗방울이 삐딱하게 웃으며
죽어보라 말한다
오늘도 뜨개질을 한다
빗방울의 기대가 어긋난다
상괭이
어린 상괭이는 부둣가에 드러누워 있었다
허여멀건한 배를 드러내고는
아기 손톱같은 이빨에는 피가 흥건했다
이런 게 진짜야
사진 선생은 연달아 셔터를 눌러대었다
학생들은 진저리를 치며 자리를 떴다
그 부둣가에는 도무지 사랑할 만한 것이 없었다
어부들은 아침부터 사진 찍는다고 욕설을 퍼부었고
선착장의 인부는 바다를 향해 오줌을 내갈겼다
사각의 프레임 밖에서 버려지고 잊혀진 것들
상괭이가 나의 프레임 안으로 들어왔다
하지만 나는 차마 셔터를 누르지 못했다
오늘 아침, 상괭이가 웃으며 걸어나왔다
스무 번의 여름이 지나갔다
오늘의 날씨
어제의 일기장을 펴고
오늘의 날씨를 적는다
키보드에 커피를 쏟았다
킬리만자로의 농부가 하늘을 본다
커피나무에서 흉년을 수확한다
아직은 불모(不毛)의 계절
오지 않은 즐거운 일기를 기다린다
거짓말
거짓말을 잘하는 비결은
거짓말을 거짓말처럼 하는 것이다
버마비단뱀을 목에 칭칭 두르면
멋진 목도리가 된다
숨이 막히지 않을 정도로만 두르고
평온한 목소리로 말한다
나는 매끄럽게 속아넘어갔다
진짜겠지
어제는 아침 일찍 커튼을 열자
버마비단뱀의 웃는 얼굴이 보였다
월매(月梅) 정육점
아주머니는 왼손에 검은색 목장갑을 끼고 있었다
고기 자르는 기계에 손가락 하나를 잃었기 때문이다
아주머니의 정육점은 엄마의 단골 가게였다
월매(月梅) 정육점
작달막한 체구에 늘 웃는 얼굴이었던 아주머니의 가게는 잘 되었다
아주머니의 남편도 정육점에서 같이 일했지만
내 기억 속에 늘 고기를 썰어서 내어주던 사람은 아주머니였다
가끔은 아주머니의 이름이 월매라고 생각했다
정육점은 아주머니의 살림집과 이어져 있었다
한번은 엄마가 아주머니와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나는 작은 방 문턱에 조용히 앉아있었다
일고여덟 살 된 아이 하나는 TV 만화를 보고 있었고,
내 또래일지 아니면, 좀 어리게 보이는 형은
방바닥에 엎드려 공책에 무언가를 끄적거렸다
어느 날, 아주머니가 암에 걸렸다는 소식을 들었다
정육점을 홀로 꾸려가던 아저씨는 몇 년 지나지 않아 문을 닫았다
내가 중학생 때의 일이다
오늘 아침, 식탁에 가만히 앉아있는데
월매 아주머니가 건너편에 와서 앉았다
아주머니의 잃어버린 손가락에
분홍색 손톱이 잘 자라고 있었다
눈물길
다운 증후군을 앓는 늙은 아가씨가
뽀로로 음료수를 마시고는
커다란 콘칩 봉지를 웃으며 뜯는다
너무나 새까맣게 염색을 한 엄마는
딸이 건넨 음료수병을 버리러 일어선다
불행의 얼굴은 판박이처럼 비슷하다
나는 아픈 왼쪽 얼굴을 쓰다듬으며 걷는다
집으로 오는 늦은 엘리베이터에서
9층의 여자와 마주친다
여자에게는 자폐증을 앓는 아들이 있다
여자는 나즈막하게 노래를 부른다
오 솔레 미오(O Sole Mio)
나폴리의 태양은 울고 싶지만
그 눈물길은 막혀있다
여자는 막힌 눈물길을 우회하여
가끔 컹컹 짖는 흰색의 강아지와
행복한 저녁 산책길에서 돌아온다
그렇게
엄마는 그릇을 옷장에 넣어둔다
엄마는 자식이 넷이라고 말하는데
나는 그 가운데 하나가 어디 사는지 모른다
네가 고생이 많구나
엄마가 그렇게 되어서
그렇게는 참으로 기이한 말이다
그렇게 인생이 흘러가지 않는 것이 좋다
아주머니의 딸은 그렇게 납골당에 있다
그의 우울증은 오래되었다
나는 그가 잘 버텨내길 바란다
평범하지 않게 그렇게
건너가다
그곳을 건너가지 못했다
발만 동동 구르면서
붉은 눈의 항구가 묻는다
건너갈 마음이 없었던 것은 아니냐고
늙어버린 배는 삐걱삐걱 소리를 낸다
끝이 갈라진 노를 힘겹게 저으며 떠난다
밤은 병든 푸른색이다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민머리 독수리가 굽은 등을 쪼아댄다
먼저 죽은 이의 퉁퉁 부은 얼굴이
뱃머리를 붙잡고 울고 있다
후회하는 돛이 세 갈래로 찢어지며
왼쪽 팔에 기다란 흉터를 새긴다
울음이 얼어붙고 말문이 닫힌다
멀었던 귀가 들리기 시작한다
물이 노래한다
물을 건너간다
싸구려에 대한 명상
싸구려 복숭아를 샀다
조막만 한 게 단맛이라고는 조금도 없어
괜찮아, 설탕을 좀 얹어서 먹으면
올해는 복숭아 풍년이라는데
또 싸구려를 사고 말았어
싸구려 카페에서 커피를 마신다
왜 이렇게 신맛이 많이 날까
신맛의 커피를 혐오한다
커피는 쓴맛, 기름진 쓴맛이 나야 하거늘
싸구려 남방을 입고 나간다
4천 원짜리, 메이드 인 방글라데시
남방을 입을 때마다
무너진 봉제 공장에 깔려 죽은
먼 나라의 재봉사들이 생각나
언젠가 내가 입을 수의(壽衣)를 입듯
경건한 마음으로
오래전, 싸구려 비디오 가게에서
희귀 영화를 찾아다녔어
중년의 주인 남자는
친구들과 포커를 치고 있었지
타르코프스키(Tarkovsky)의 '희생'이 있나요?
그런 거는 우리 가게에 없어
비웃는 푸른 돛 문신의 팔뚝
불타는 희생의 나무
빨강
빨강의 바다로 간다
손이 비대하게 커진 인간들이
타자기를 두들기며 끊임없이 구토하는
더러운 빨강
살아남을 수 있을까
아픈 빨강의 반점이 웃으며 물었다
칼라민을 아무렇게나 발라주고는
빨강의 입을 조심스럽게 틀어막았다
숙이 아줌마
숙이 아줌마는 엄마의 고등학교 동창이었다
아줌마는 교육자 집안에서 그리 어렵지 않게 자랐는데,
가난한 남자와 결혼하는 바람에 늘 쪼들리며 살았다
아줌마는 남편을 돕기 위해 이런저런 부업을 하곤 했다
내가 어렸을 적에 엄마를 따라 아줌마의 문구점에 갔던 기억이 난다
나중에 아줌마는 돈을 좀 벌어보겠다고 명리학(命理學)을 배우러 다녔다
내가 재수생(再修生) 때의 일이다
아줌마는 이제 막 학력고사를 치룬 내 사주를 봐주었다
나는 무언가 좋은 말을 듣기를 희망했다
그리고 나의 기대에 걸맞게 아줌마는 이렇게 말했다
아, 너는 정말로 돈을 많이 벌 거야 엄청난 산처럼,
그렇게 넌 돈에 둘러 쌓여있을 거야
숙이 아줌마는 뇌출혈로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다
아줌마는 고혈압이었는데도 혈압약을 먹지 않았다
사이비 도사가 그런 약을 먹으면
일찍 죽는다고 한 말을 믿었기 때문이다
내가 서른 살이 되던 해의 일이었다
버터를 사야지,
내 얼굴에는 기름기가 부족하기 때문에
면도날
면도날이 팔랑거리면서 내려온다
면도날 위의 삶
불운은 불공평하게 기울어져 있고
뒤뚱거리며 걷다가 결국 쏟아진다
색색의 조각난 면도날은
아스팔트 바닥에 짓이겨져
불그죽죽한 염료를 내뿜고
더러는 누군가의 머리에 내려앉아
휘파람을 불며 집으로 돌아간다
휘청거리면서 면도날 위를 걷는다
저린 왼쪽 손으로 면도날을 쥐었다
면도날이 조용히 웃었다
납골당(納骨堂)
네 아빠는 명이 짧았지
엄마는 납골당에 올 때마다 그 말을 한다
비쩍 마른 몸으로 흔들흔들 그네를 타던 아빠를 기억한다
쓰여지지 않은 이야기들
옷장 속에서 해골이 비소를 들이키며
어떤 인생의 이야기를 조용히 들려준다
나는 옷장의 문을 열었다가 가만히 도로 닫았다
다시마
엄마의 집 찬장에서 다시마를 발견했다
몇 년을 묵은 것 같은, 아주 잘 마른 다시마
나는 다시마를 물에 불린다
푸른 바다는 보이지 않는다
요새는 왜 그렇게 흰색 차들이 많으냐?
모두들 흰색의 세계로 도망치고 싶은 것이겠죠
나는 같은 대답을 매일 엄마에게 들려준다
다시마의 세계는 갈색이고 눈물이며 그래서 짠맛이 난다
엄마의 잃어버린 바다와 다시마가 끈적거리는 시간을 천천히 걸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