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끼리


도무지 알아먹을 수 없는 말들뿐이다
나는 장님이 코끼리를 만지는 것처럼 심사평을 읽는다
언어라는 것은 얼마나 우습고 복잡한가
지금 막 써넣은 '장님'이란 단어가
자기검열에 걸린다 요즘 세상에
'장님'이란 말을 써도 되는지 잠깐, 생각해 본다
아니, 심사평에 대한 시를 쓰려는데
초장부터 '장님'이란 단어에서 걸려 넘어진다
자, 그럼 '장님' 대신에 '시각장애인'을 쓰면 어떨까
이건 좀 뭔가 밋밋한 느낌이 난다 어쩔 수 없다
그냥 '장님'으로 밀고 나가자

언어를 단련하는 기본도 안 되어 있는 응모작들이 많았다,
고 어느 심사위원은 한탄했다
언어를 단련하라고? 언어가 칼이니?
불에다 달구어서 두들기고 단련하게?
결국은 당신들 입맛에 맞는 거, 그런 거 뽑은 거겠지
그러니까, 당신들이 휘두르는 권력의 언어를 탐하라는 거지

코끼리를 읽는다
코끼리를 만진다
코끼리 다리를 살짝 꼬집어 본다
싸구려 커피 한 잔에도 감사하며 이렇게 코끼리를 써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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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면증


언니, 나 요새 잠을 잘 못 자 잠을 자다 깨다 그래
잠을 못 자니까 몸도 피곤하고 기억력도 엉망이야
주말에 집에서 반찬을 만드는데, 반찬 만들어 놓고
뚜껑을 닫는다며 접시를 덮어놓았지 뭐야
회사에서도 회의하다가 졸기도 하고
뭐랄까, 정신이 멍해 머리에 안개가 낀 것처럼
작년에 정리해고로 사람들 많이 내보냈잖아
이제 정년(停年)까지 일하는 건 불가능해
나이든 사람은 알아서 나가줘야 하는 분위기지
나도 언제 나가라는 말 들을지 몰라
눈칫밥 먹는 뒷방 늙은이 같은 기분

얼마 전에는 꿈을 꿨어
엄마와 횡단보도를 건너는데 건너편 건물이 보였어
거긴 너무나도 칙칙한 회색의 건물이었는데
엄마와 내가 거기에 가야만 하는 거야
건물 안에 들어가니까 계단이 다 허물어지고
물이 뚝뚝 새는 그런 곳이었어
엄마는 붙잡고 있는 내 손을 뿌리치려 하고
언니, 졸음이 쏟아져 이렇게 자도 한두 시간 있다
깨겠지만 그래도 자둬야지 내일 일해야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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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단지(傳單紙)를 돌리는 남자


이상한 날이다
오늘은 아파트에서 전단지 돌리는
남자를 두 명이나 보았다 
그들의 걸음걸이는 매우 가볍고 조용하며
습기와 열기가 절묘한 배합을 이루는 장마철에
그들은 모두 긴소매 옷을 입고 있었다

이 아파트에 전단지를 다 붙이려면
120번 스카치테이프를 잘라야 한다
초짜는 3센티, 프로는 0.5센티면 충분하다

오늘 내 집에 전단지를 붙인 이들은
0.7센티의 스카치테이프로 마감했다
그들은 프로다 그들이 붙여놓은 전단지는
새로 분양하는 대기업 건설사의 아파트

내가 가질 수 없는 꿈의 집
검은 웃음이 똑바로 떨어진다
발등에 박힌 전단지는 피를 흘리며
그렇게 쓸쓸하게 죽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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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압(水壓)


아파트의 수도관 공사가 끝나고
수압이 전보다 세졌다
부엌 수도꼭지는 콸콸
샤워기에서는 팡팡
세탁기는 쏴아쏴아
양변기는 쒸익쒸익
귀에서는 삐이삐이
머리는 지잉지잉 

족저근막염에 걸린 나의 오른발은
쓸데없이 칭얼거리는 못난 계집애
수도관에는 그 계집애가 살고 있어서
물을 틀 때마다 우는 소리를 낸다

시끄러워!
조용히 하란 말이다!

돌아가신 아버지가 꿈에 보였다
아버지, 말 좀 하세요
화장실로 들어간 아버지는 나오지 않았다
하수구에서 차오르는 물과 함께 어디론가

미친 수압과 싸워야지
더러운 늙음을 견뎌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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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발자전거


날아가 버린 인생의 물기
말하자면 젊은 날, 자전거 타는 법을 배우는 일
난 자전거를 탈 줄 몰라
그러므로 달리는 자전거에서 바라보는
풍경 따위는 상상할 수가 없어

머리 허연 늙은 여자가
세발자전거를 타고 가더군
신나게 달릴 수는 없겠지
좀 느리게 가면 어때
무릎이 깨져서 흉터가 생기진 않을 거야
모험을 하기에는 좀 많이 늦었어
그래도 출발은 할 수 있어
지익직, 아스팔트를 긁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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