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타게 슬리퍼를 찾아


1년째 낫지 않는 내 오른발은
매일 혼자 울었다 열을 냈다
눈을 흘겼다 코를 힝, 하고 풀었다

아픈 발이 아프지 않을 수 있는
그런 슬리퍼를 찾는다
기기묘묘한 슬리퍼의 세계
넌 슬리퍼 한 켤레에 6만 원짜리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니?
기껏해야 석유에서 뽑아낸
가짜 고무 쪼가리가 선사할
6만 원어치의 편함은 어떤 것일까,
가만히, 혼자, 머릿속으로

아마도 내가 모르는
슬리퍼의 과학이 있을 거야
어쨌든 발을 편하게 해주는
미지(未知)와 필연(必然)의 과학이

그렇게 장사꾼의 과학을 믿다가
세 켤레의 슬리퍼가 신발장에서
지금은 꽃분홍색 욕실화를 신고
집안을 걸어 다닌다
2천 원짜리, 두툼한 밑창,
아가 신발처럼 뽁뽁거리는 소리
그제야 칭얼거리는 발이
울음을 멈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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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선생


슬픔, 이라는 단어를 쓰다니
시에는 감정어(感情語)를 쓰는 법이
아니라 했거늘
도대체 이 애송이는 어쩌자고
슬픔, 따위를 늘어놓고는

쉽게 읽히는 시는 가치가 없어
이딴 백일장 시 따위
난해함은 시의 목숨이고
본질이며 눈물이야
그걸 버린다면 그 순간부터
시가 아닌 거야

독자를 네가 알지 못하는
멀고 먼 곳에 데려가야지
발바닥이 녹아내리는 사막
뜨거운 맛을 보여주는 거야
얕잡아 보이면 안 된다고
무슨 말인지 알아들어?

미쳤다는 소리를 들어도 괜찮아
미친 단어를 끌고 갈 데까지 가봐
그 정도 각오 없이 시를 쓰는 거야?
아무도 알아먹지 못할 시를 쓰고
만족스럽게 웃을 수 있어야지

유행(流行)은 중요해
남들이 짹짹거리는 소리 정도
읽을 줄은 알아야겠지

그리고 마지막,
시를 좋아하는 마음은 접도록 해
좋아하면 외로워지니까
반쯤의 증오를 품고
삐딱하게 바라보는 거야 나처럼

난해한 슬픔의 거리에서
시 선생이 그렇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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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슬픔


아침부터 커피를 엎질렀어
삶은 계란의 껍질은
죽어도 까지지 않아
집 앞의 커다란 개는
우라지게 짖어
굉음의 폭주족은
비린내 나는 불안을 매달고
하루 종일 줄줄 울고 있어

꺼끌거리는 눈을 겨우 뜨고는
메일 박스를 연다
사진으로 보는 오늘의 세계
폭격으로 죽은 아이를 안은
남자는 울부짖고 있다

아!
먼 어딘가에는 내가 알지 못하는
거대한 슬픔이 흐르는데
손톱에 박힌 가시를 가만히 꾸욱,
조금, 아프다 하지만
충분히, 견딜 수 있다
견딜 수 있을 것이다

다시 한번
겁쟁이 커다란 개가 짖는다
너도 살아 보겠다고
그런 것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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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성(慣性)


아파트의 경비는 아침 6시에
화단의 흙을 고른다
기다란 삼각 괭이로 흙바닥을
헤집고 다시 다지고
9월 늦더위, 땀을 훔치며 열심히
저 경비의 머릿속에는 어린 시절,
들판의 논과 밭이 펼쳐져 있을지도

푸석거리는 머리를
나일론 리본 모자로 감춘
늙은 여자는 아침 산책을 나선다
유모차에는 작은 푸들 한 마리
어찌나 앙칼지게 짖는지
여자는 강아지가 어디가 불편한지
조심스럽게 살펴본다
성질 더러운 애새끼 달래듯
그런 자식이라도 없는 것보다는 나을지

청소부 아줌마는 1년 내내
빨강색 티셔츠만 입고 다닌다
왜 하필 빨강색일까?
기운이 나는 색이라서?
때가 덜 타서?
차마, 물어볼 수가 없으므로
그냥 행운의 색, 이라고 생각하자

유통기한이 임박한 과일 맛 젤리를 질겅거리며
과일 맛에는 과일이 없어
사과 맛 포도 맛 딸기 맛
다 거짓부렁이지
그래도 어쩔 수 없이 속아주는 기분
싸게 판다면 또 사줄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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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작기(習作期)


왜 날로 먹으려 드는 거야?
너, 시를 잘 쓰고 싶다면서
그럼 돈 좀 들여서 시 창작 강의라도 들어야지
네가 잘 모르나 본데, 시를 쓰는 것도 기술이 있어
그걸 배우지 않고서 어떻게 쓴다는 거야 말하자면
시인들은 언어를 조련하는 조련사인 셈이지 그런데
넌, 그걸 무시하잖아 시를 그냥 계속 쓰면 된다고
생각하는 거지? 그런 거지? 와, 어떻게 그런 무식한
생각을 하면서 시를 쓰고 있어? 그렇게 백날 써봐라
문단에 네가 들어올 수 있을 거 같아? 여긴 그러니까
프로페셔널의 무대인데, 너 같은 초짜를 끼워주겠냔 말이지

뭐, 방법이 없는 건 아니야
네가 말재주가 있다면 영업을 뛰는 거야 문학판 인맥을 쌓는 거지
어떤 면에서 그것도 재능이지 별거 아닌 너의 습작 쪼가리 들고서
아양도 떨고 읍소도 하면서 그렇게 친분을 쌓아가다 보면
가늘고 기다란 연줄이 될 수도 있지 아는 사람 더 잘 봐주고 그런 거
그걸 불공평하다고 생각하는 거야? 좀 나이브하게 굴지 마

말재주도 없다면 마지막으로 남은 게 뭘까?
아, 얼굴이 좀 되면 그걸로 어떻게 밀어붙일 수도 있겠군
시가 이미지라는 말은 이제 웃기는 소리가 되어버렸어
시인이 이미지여야 해 팔아먹을 이미지 말이지
매일 인스타로 독자와 소통하고 번지르르한 일상을
인터넷 땔감으로 집어처넣는 우리 시대의 시인, 어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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