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입] 스크리아빈 : 피아노 작품집
스크리아빈 (Alexander Scriabin) 작곡, 오그돈 (John Ogdon) 연주 / EMI(수입)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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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인적으로 스크리아빈은 라디오를 통해 어쩌다 듣기는 했어도 굳이 음반을 구매할 필요까지 느끼지 못했던 작곡가였다. 그런데도 이 음반을 구매한 이유는 순전히 존 오그던 때문이다. 그가 몽퇴와 함께한 차이코프스키 피아노협주곡 1번을 한번 들어보고는 그야말로 반해버렸다. 그것은 뭐랄까, 땅에 내려꽂히는 강렬한 번개와도 같았다.  

  역시, 오그던이 들려준 스크리아빈은 정말 훌륭했다. 이 음반은 오그던이 어떤 피아니스트인지 매우 분명하게 보여준다. 명징하고 힘있는 타건, 극단의 열정과 과감한 개성, 물결치듯 흘러내리는 음악적 감수성이 곳곳에서 감지된다. 이 음반을 들을 수 있게 된 것이 행운이라는 말 밖에는 달리 할 말이 없다. 특히 첫번째 CD에 실린 피아노 소나타 연주는 한번 들으면 잊을 수 없는 강렬한 인상과 깊은 여운을 남긴다.  

  불행하게도, 오그던의 넘치는 재능은 그 자신의 삶과 조화를 이루지 못했다. 그는 정신분열증과 조울증으로 상당한 고통을 겪었다. 증상이 심해져서 한동안 정신병원에서 지내야만 했던 때도 있었다. 그러나 그의 피아노에 대한 열정은 정신적인 고통마저도 뛰어넘는 것이었다. 오그던은 병원의 스타인웨이 피아노로 하루에 세시간씩 매일 연습을 했다고 후에 고백했다. 그렇게 힘든 상황에서도 자신을 쉬게하지 못한 것을 보면, 아마도 그는 자신에게 관대한 사람은 아니었던듯 하다. 

  이 음반을 듣고 있으면, 극도의 신경쇠약으로 쓰러지는 위기 속에서도 피아노를 쳤던 그가 어떤 사람인지 조금은 알 수 있을 것 같다. 나는 아직 그가 연주한 라흐마니노프를 들어보지 못했다. 스크리아빈만큼이나 오그던의 라흐마니노프도 뛰어날 것이다. 피아노에 대한 극단의 열정에 휘감긴 이의 흔적이 그 음반에도 고스란히 남아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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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입] 바흐 : 무반주 바이올린 소나타와 파르티타
VoxBox / 200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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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래전 집에 있던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5번의 LP 커버 해설이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다. 거기에는 연주자 빌헬름 박하우스를 "비르투오조"라고 소개해놓았더랬다. 아주 어릴적이라 그 "비르투오조"란 말이 무엇인지 궁금해하면서도 그 단어가 주는 압도적인 느낌에 아마도, 대단하다는 뜻일 거라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요즘의 소소한 즐거움 가운데 하나는 낙소스 온라인에 접속해서 새로운 연주자들을 발굴(!)해내는 것이다. 훌륭한 연주자들의 음반을 하나씩 발견해가면서 느끼는 것은, 예전의 대가들의 연주에 대한 무한한 경외심 같은 것이라고 할까. 재능이 넘치는 연주자들은 널리고 널렸지만, 인생의 깊이를 느끼게 해주는 진정한 비르투오조를 발견하기란 참으로 쉽지가 않다.  

  바이올린에 있어서 나의 베스트 음반들은 오이스트라흐와 그뤼미요가 차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최근에 들은 아론 로잔드의 연주는 새로움을 넘어 충격으로 다가왔다. 아, 이런 연주자가 있었구나하는 탄식을 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물흐르는듯한 보잉과 넘치는 감성으로 빚어낸 로잔드의 바이올린 연주는 진정한 아름다움이 무엇인지 느끼게 해준다.   

  한때, 그뤼미요의 바흐 무반주 바이올린 소나타와 파르티타를 듣고는 더이상 이 곡의 다른 음반을 살 일이 없을 거라 믿었던 적이 있었다. 하지만 로잔드의 연주를 듣고나서 생각이 달라졌다. 로잔드는 자신의 연주로 진정한 비르투오조란 무엇인지 듣는이로 하여금 절절히 느끼게 만든다.  

  올해 나이가 여든둘, 그를 가리켜 사라져가는 마지막 대가라고 하는 것은 매우 정당한 평가일 것이다. 이런 바이올리니스트를 언젠가 또 만나게 될 수 있을까. 그의 연주를 들으면서 어릴적에 각인되었던 "비르투오조"란 단어를 떠올린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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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널치료 - 자아를 찾아가는 나만의 저널쓰기
Kathleen Adams 지음, 이봉희.강은주 옮김 / 학지사 / 200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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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젠가 어떤 아이가 글쓰기에 대해 하는 이야기를 듣고 놀란 적이 있다. "나는 글쓰기 숙제가 제일 싫어요. 글을 써야한다는 생각만 해도 머리가 아프고 밥도 제대로 못먹겠어요. 정말 너무 싫다고요. 글쓰기 말고 다른 거 하라고 하면 얼마든지 하겠다니까요." 그 이야기를 듣고서야 누군가에게는 글쓰기가 엄청난 공포와 두려움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던 것 같다. 

  이 책을 읽으면서 문득 그 아이가 생각이 났다. 그 아이에게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 볼 수 있는 도구로 글쓰기를 제시한다면 분명 외면할 것이다. 그러나 글쓰기를 좋아하고, 또 서툴지만 그것을 시도해보려는 이들에게 글쓰기는 치료의 한 방법론으로 유용하다. 저널치료는 그러한 이들에게 유용한 도구상자일 수도 있다. 

  "치료"라는 딱딱한 용어를 내려놓고 본다면, 이 책은 글쓰기에 대한 흥미로운 탐색처럼 보이기도 한다. 제시된 여러가지 기법들은 결코 어렵지 않다. 자신이 관심을 갖고 있고 시도해볼만한 것부터 해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작년 가을에 다친 다리가 내내 낫질 않아서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다. 책에 제시된 "대화"의 기법에는 아픈 자신의 몸과 대화하는 것도 포함되어 있다. 아픈 "다리"와 대화하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생각하면서도 그 대화를 써내려가면서 나름대로 얻은 수확이 있다. 통증을 이해하게 되면서 그것을 견디는 것이 조금은 수월하게 된 것이다. 

  치료를 위한 준비물은 다음과 같다. 노트와 펜,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려는 호기심과 열의, 그리고 시간이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시간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준비가 될 것이다. 저널쓰기에 들인 시간만큼, 스스로의 마음을 보는 눈도 깊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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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을 수 없는 글쓰기의 유혹
브렌다 유랜드 지음, 이경숙 옮김 / 다른생각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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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처음 창작 수업에 들어갔을 때, 아무렇지 않게 오가던 그 엄청난 독설들에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던 기억이 난다. "다들 돌아가면서 느낀 점을 한마디씩 하지."라는 선생님의 그 편안한 제의에 얼마나 혹독한 무거움이 들어있는가를 느끼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내게 합평 시간은 눈에 보이지 않는 창과 방패의 싸움처럼 보였다. 

  더러 보이는 근거없는 힐난과 객관을 가장한 지독히 주관적인 평들은 나에게도, 또 수업을 듣는 누군가에게도 결코 편한 것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말의 독기에는 좀 무뎌진 듯했지만, 스스로는 내 글에 대한 의구심과 진정성에 대한 회의가 갈수록 커지는 것처럼 보였다. 한학기 내내 글쓰는 동안 이리저리 흔들리다가 결국 그 학기가 끝날때쯤에서야 깨달은 것이 있었다. 중요한 것은 타인의 평이 아니라, 자신의 글에 대한 애정과 믿음이라는 점이었다. 

  "참을 수 없는 글쓰기의 유혹"은 나에게 그때의 수업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분별력있는 이 책의 저자는 글쓰기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가치가 무엇인지 일깨워준다. 저자는 그것이 문체나 어휘 같은 외적인 요소에 있는 것이 아니라, 글을 쓰는 이의 인격과 글을 쓰는 목적의 진정성에 있다고 말한다.  

  저자가 좋은 글쓰기를 위해 제시한 가장 강력한 제안을 즉각적으로 실행에 옮겼는데, 그것은 바로 "일기쓰기"이다. 이 제안이 얼마나 매혹적이며 효과적인지, 오래전 그만 둔 일기쓰기를 시작한 뒤 하루도 거르지 않으려 노력한다. 

  투박한 편집이나, 몇몇 오자와 어색한 번역상의 문제가 있기는 해도 책에 담긴 빛나는 성찰들을 가릴 정도는 아니다. 최근 관심을 갖고 읽어본 얄팍한 글쓰기 책들에 정나미가 떨어진 나에게 이 책은 큰 위로가 되어주었다. 좋은 글을 쓰고 싶어하는 이들에게 일독을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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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불교의 선문답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祖師)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고, 아라한을 만나면 아라한을 죽여야 비로소 해탈을 얻어서 참사람이 된다."  영화의 제목 "포도나무를 베어라"는 바로 그 선문답이 가리키는 지점과 맞닿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신약성서에 나오는 많은 비유들 가운데 하나인 포도나무는 바로 예수와 그를 믿고 따르는 이들의 관계를 가리킵니다. 포도나무와 가지, 그 둘은 서로 떨어져 살 수가 없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포도나무를 베라니요, 거기엔 무언가 다른 뜻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요. 

  민병훈 감독의 이 영화는 외양상으로는 가톨릭의 색채를 띤 종교영화입니다. 신학생, 신부, 수녀, 이 영화에 나오는 등장인물들 뿐만 아니라 배경이 되는 공간도 신학교, 수도원, 성당이 주를 이루죠. 그렇다고 이 영화가 거룩한 종교적 깨달음에 대한 것이라고 선입견을 갖고 단정하는 일은 아직 이릅니다. 영화에 나오는 인물들의 고민이 매우 인간적이니까요. 신학생인 수현은 여자친구인 수아를 마음에서 밀어내지 못해 힘들어합니다. 그가 마음의 짐을 덜어내기 위해서 찾아간 수도원에서 만나는 인물들은 또 어떤가요? 수련 수사인 정수는 예쁜 외국인 노동자에게 마음을 뺏겨버린 상태이고, 무뚝뚝하고 엄격해 보이는 문 신부는 자신의 불안함을 없애기 위해 술에 의지하기도 합니다. 네, 그들은 모두 약함을 가진 인간들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복잡한 수현의 마음은 수아와 너무나 닮은 헬레나를 보고서 더 헝클어집니다. 그런 그에게 수아의 갑작스런 죽음은 충격으로 다가옵니다. 그제서야 그는 자신을 괴롭히는 문제의 본질과 마주하게 됩니다. 민병훈 감독은 이 영화가 "두려움"에 관한 이야기라고 말합니다. 수현에게 있어 그 두려움이란 신을 따르는 길, 사제가 된다는 것에 대한 근원적인 물음에서 파생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동기인 강우가 신학교를 그만 두는 모습을 보고 흔들리지요. 강우는 그에게 묻습니다. "너는 가라면 가고, 멈추라면 멈출 수 있어?" 강우는 멈추어야 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떠나지만, 주인공 수현은 아직 자신이 가야할지 멈추어야 할지 모릅니다. 

  영화에는 수현이 자신이 진정으로 두려워하는 것과 직면하게 만들기 위한 몇가지 우연적인 사건과 신비적인 요소들이 배치되어 있습니다. 여자친구와 닮은 외모의 수련 수녀라던가, 죽어가는 아이가 수현의 기도로 병이 낫는다던가 하는 것이 그것이지요. 물론 이것들은 명확히 설명되지도 않고, 그 때문에 관객들의 상상력은 더 풍성해질 수도 있습니다. 문제는 그러한 요소들로 인해 이야기의 설득력이 떨어진다는 것입니다. 타인을 통해 자신의 내면을 응시하고, 진정한 용서와 화해를 이야기하는 감독의 시도는 너무 도식적이에요. 영화는 단아하고 깔끔하지만 그 이상의 것을 이끌어내는 데에는 역부족인 것처럼 보여요. 

  영화의 제목은 말 그대로 포도나무를 베라는 뜻은 아닙니다.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라는 선문답도 마찬가지구요. 그 말의 뜻은 수행자가 자신이 진정으로 두려워하고 직면하기 어려워하는 것과 맞서야 깨달음의 길에 들어설 수 있다는 데에 있습니다. 그리고 많은 경우, 수행자가 두려워하는 대상은 결국 자기 자신입니다. 스스로의 내면을 직시하고, 자신의 약함과 두려움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되는 그 순간, 새로운 눈이 열리는 것이지요. 이것은 어떤 면에서 심리상담에서 내담자가 자신의 문제를 직면하고 그것을 인정하게 될 때 해결의 실마리를 찾게 되는 것과도 비슷해 보이는군요.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매우 의미심장합니다. 돌아가는 기차 안, 자신의 손목시계에 귀를 갖다댄 수현은 잠시동안 아무소리도 듣지 못하다가 어느 순간 크게 울리는 초침 소리를 듣습니다. 그때 그가 짓는 미소는 이제 막 여행을 떠나는 이의 설레임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는 이제 막, 신을 따라 떠나는 자신만의 여정을 시작했습니다. 그는 좋은 사제가 될 수 있을까요? 그 장면을 보면 그럴 것이라고 나는 진심으로 믿고 싶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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