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 제목:  탐구생활(探究生活) 




1부     파동(波動)  



파동(波動)


출근(出勤)


39층


교차로


교양(敎養)


연습생(練習生) 


모서리


마두금(馬頭琴)


여름, 오후 4시


노란콩


가려운 어깨


여학생(女學生) 


참기름


곰 인형


꿈의 자객(刺客)













파동(波動) 



윗집의 노인은 초능력이 있어요

파동을 만들어서 공격하는 능력이죠

내가 움직일 때마다 파동이 날 때려요

나는 집에서 다리를 절며 걸었고

입술이 제멋대로 실룩거리며

왼쪽 어깨가 가렵기 시작했어요


병원에 가보라는 말은 하지 마세요

그 사람들은 나에게 구속복(拘束服)을 입히고

실험실에 보내어 나의 뇌를 가르겠지요


노인의 A 파동이 천장에서

노인의 B 파동이 하수구에서

두 개의 파동이 새로운 중첩을 만들어 내는데

나는 이곳 아니면 저곳에

잃어버린 몸뚱이를 찾아서

하루 종일 집안을 헤매고 있죠


당신은 파동이 떠도는 소문이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당신의 삶도 소문일 뿐이죠

보잘것없고 위대한 소문

당신은 실험해 본 적이 없죠

그러니 증명할 수도 없는 거에요

























출근(出勤) 



발목이 어디론가 사라지는 날이 있다

한 며칠 절름거리면 뼈가 조금씩 자란다


컴퓨터를 켜고 녹음기의 붉은 버튼을 누른다

새빨간 눈의 여자가 녹음기를 들고 덤벼든다

어떻게든 자신을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


아무렇게나 마침표를 찍는 인간들

마침표는 쉼표가 아닌데도

그걸 찍는 것을 멋이라고 생각하는 머저리들

도대체 어떻게 이 회사에 들어왔을까

의문이 뭉게뭉게

먹구름이 곧 쏟아지는 소나기로


팀장님은 좀 싸가지가 없네요


점심을 먹다가 체했다

속이 더 쓰릴 줄 알면서도

커피를 들이킨다

















39층


39층의 방화문은 열리지 않는다
39층 이하의 사람들은 옥상으로 갈 수 없다

며칠 전에는 아파트의 정기 소독이 있었다
허름한 옷차림의 노란 염색 머리 여자가 물었다

소독하시겠어요?

나는 고개를 내저었다
소독이 필요한 것은 집이 아니라 사람들이다
온몸에 문신을 한 개가 쉴 새 없이 짖는다
복도에 떨어진 커다란 바퀴벌레의 얼굴
여자는 개 목줄을 길게 늘어뜨리며 지나간다

나는 싸구려 커피를 마시며 천천히 비상계단을 오른다
39층의 방화문 앞에서 녹음기를 켜고 소리를 채집한다
81층의 옥상에 이르는 길고 구불구불한 시간
방화문의 영구 폐쇄를 건의하는 남자의 웃음소리
차별의 몸가짐을 알량한 생애에 걸쳐 학습한 목소리

그들을 올라오게 해서는 안 됩니다
그들은 좋은 교육을 받지 못했어요

나를 가르친 선생들은 최고의 대학을 나왔고
유명한 상을 받았으며 길고 지루한 책을 써냈다
그러므로 이제 39층의 계단에 쪼그려 앉아
좋은 교육의 시를 쓴다

81층의 시멘트 하늘과
방화문의 부서진 손잡이에 대하여


















교차로  



노인이 교차로를 모조리 들고 간다

힘에 부친듯 오른쪽 팔에서 왼쪽 팔로

노인이 떨구고 간 오늘의 교차로 하나


직원을 구합니다

가족 같은 분위기, 늘 즐겁게 일해요


가족이 무서워진다

가족이 그의 왼쪽 신경을 끊었고

왼쪽 팔뚝에 우는 아이를 심었다

아이는 화를 꾹꾹 참고

교차로의 신호등이 바뀌길 기다린다

초록불은 너무 짧다

길을 건너다 치일 뻔 했다

































교양(敎養) 



아침 6시, 여자는 놀이터에 개를 풀어놓는다

종잇장 같은 하얀 강아지가 드러눕고

여자가 우라지게도 짖는다


위에서 음식물 쓰레기가 떨어지므로

나는 늘 투구를 쓰고 다닌다

가끔 아파트의 하수구가 막히는 일이 있는데

그것은 교양 없는 까마귀가 죽었기 때문이다


찻물을 끓이려고 수돗물을 받다가

상어의 이빨 하나를 발견한다

아파트의 저수조에는 30년째 상어가 살고 있는데

오늘 아침 그 상어는 교양을 씹어먹다가

이빨을 부러뜨린 것이다

이곳의 인간들은 이빨이 듬성듬성 빠져있어서

상어의 이빨을 주워다가 대충 끼워 넣는다


싸구려 홍차를 마시면서

푸른 벽돌의 시집을 펼친다

이런 벽돌로 된 집을 지어야지

교양을 꽉꽉 채워 넣은 반듯한 나의 집



























연습생(練習生) 



굴러떨어질 준비는 언제나 되어있다

한번도 죽어본 적이 없으므로

죽어야 끝이 날 것인지 알 수 없다


내일 공연은 없습니다


어기적거리며 집으로 돌아왔다

진심으로 태연해야 한다

라면 따위를 끓여 먹어서는 안 된다

불어터진 얼굴로는 불가능한 스탠바이(standby)


무대의 한 귀퉁이에 선다는 건

발뒤꿈치에 박히는 가시를 견디는 것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숙이며


고맙습니다


회전하는 무대 장치가 내 발목을 꺾고는

편히 쉬어요

내일은 당신의 허리를 부러뜨릴 테니


살아남은 뼛조각을 맞추며

휘청휘청 내려가는 지하의 계단

축축한 이끼에 진심으로 미끄러진다
























모서리 



냉장고 문을 열다가 왼쪽 발을 부딪쳤다

절름절름 다친 이리처럼 걷는다

먹잇감을 가진 이리를 따라가다가

인정사정없이 뜯겼다

등에서는 피가 철철 흐르고

하늘은 짙푸르다

돌아갈 집 따위는 언제나 없었다


부러진 발톱을 내려다 본다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건

떨어져 나간 모서리 때문이다

회색의 압력을 견디는 모서리


모서리를 살릴 방법은 그 어디에도 없다

하지만 모서리에 낀 푸른 이끼가

숨을 쉬는 소리를 들었다


이끼가 가느다란 팔을 내밀어

자그마한 집을 짓는다

모서리가 조금씩 자란다




























마두금(馬頭琴) 



나는 이따금 앓아눕곤 하였다

손가락이 제멋대로 움직였고

혓바닥이 굳어서 말이 나오질 않았다


누군가가 나에게 말하길

마두금(馬頭琴)을 배우면 나을 거야


이지러진 지붕의 2층에

79살의 마두금 연주자가 살고 있었다


마두금을 배우기에는 너무 젊군 


비가 내리고 있었다

나는 우산을 펼쳤다

내 앞으로 낙타가 천천히 지나갔다

낙타는 왼쪽 눈이 없었는데

그 눈으로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나는 낙타에게 우산을 씌워주고는

어긋난 마두금 소리를 흉내내었다

허연 머리카락이 후두둑 떨어졌다




























여름, 오후 4시  



머리가 하얗게 센 할머니 혼자

놀이터 옆 벤치에 앉아있다

가만가만 숨을 내쉬며 천천히 부채질한다

사람들을 기다리는 것이다


누런 염색 머리의 늙은 여자는

비척거리며 걷는 아픈 개를 풀어놓고

말 많은 영감은 젊은 날을 늘어놓는다

누군가 쪄온 옥수수를 나누어 먹으며

그들만의 정겨운 오후 4시


하지만, 오늘은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

검은색 스카프를 두른 외로움이

할머니의 어깨 위에 앉아서

재잘거리는 소리를 낸다


어디를 가시오?


이쪽 집에서 저쪽 집으로요


행인이 상냥하게 대답했다


























노란콩 



밥 지을 때 넣을 콩을 씻는다

이 노란콩은 콩물을 좋아하는 아버지를 위해

어머니가 시골에서 사 온 것이다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콩은 페트병에서 잠을 잤다

10년 동안 노란콩은 썩지도 않았다


이 콩을 농사지어서 팔았던 여자는

살기가 힘들었는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나는 콩을 씻다 말고 콩 하나를 집어서

죽음의 냄새가 나는지 맡아본다

어디서 들으니 오래된 죽음은

지독한 소똥 냄새가 난다고 했다


말간 얼굴의 노란콩은

시치미를 뚝 떼고 눈만 껌뻑거린다


왜 그랬을까?


왜 그랬는지 나도 몰라요




























가려운 어깨 



불길하게 늙어버린 여자가

조화(造花) 상자를 들고 지나간다


여자를 피해서 걷는다

2년째 어깨가 가렵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사부작사부작

불운이 어깨를 파먹는 소리를 듣는다 










































여학생(女學生) 



여학생은 답답하면 5층의 화장실에 갔다

화장실의 높은 창가에 의자를 두고 공부했다

아무도 오지 않는 고장난 화장실


학원의 지하에는 이상한 미로가 있었다

가느다란 뱀이 가끔 지나가는 것을 보았다

연애를 하는 것들은 그곳에서 시시덕거렸다

초록의 썩은 물이 웃음소리와 뒤섞였다


4월, 화장실에서 사고가 있었다

5층 화장실은 폐쇄되었고, 여학생도 학원을 떠났다

미로의 지하와 뱀이 사라진 곳에는 아파트가 들어섰다


여학생은 몸이 아프면 화장실 꿈을 꾸었다


은빛의 화장실에는 출구가 없었다

머리를 빡빡 밀어버린 스무 살 여자애가

회색의 수의(囚衣)에 수갑을 찬 채 걸었다

고개를 숙이고 아주 오랫동안 





























참기름 



이 참기름이 마지막이야


옥이 아주머니가 참기름 2병을 짜오면서 말했다

아주머니는 단골 방앗간에 들러서 기름을 짜오셨다


언젠가 방앗간 집 여자가 고개를 숙일 때, 정수리가 보이더라

그런데 기름에 찌들어 머리의 살갗이 노랗더군

30년을 참기름만 짜고 살면 그런가 보다 했다


나는 참기름을 찬장 깊숙이 넣어두었다

5년 만에 이사를 하게 되면서 그 참기름 2병이 나왔다

참기름의 색은 시커맸다

나는 참기름의 뚜껑을 따고 그릇에 떨어뜨려 보았다

기름에 한 개의 눈과 입, 세 개의 발이 생겨났다

그것은 퍼런색의 줄무늬 벌레로 변했다


벌레는 어기적어기적 걷다가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 인간이 나 몰래 딴살림을 차리고 아이를 두었지

더는 살고 싶지가 않더군

내가 죽고 딸도 날 따라왔어


벌레의 입에서는 쉴 새 없이 누런 물이 흘러나왔다

나는 벌레가 잠들기를 기다렸다가

벌레를 하수구에 흘려보냈다

검은 기름이 부엌에 천천히 스며들었다






















곰 인형 



커다란 곰 인형이 이 더운 대낮에

누런 배때기를 드러내고 누워있다

물크러진 코에서는 회색 콧물이 줄줄

튿어진 입에서는 부러진 바늘이 한 움큼

찢어진 분홍 리본을 목에 칭칭 두르고


지나가는 사람들이 비웃자

바늘이 사람들의 눈을 찔러대어서

비명소리가 아파트를 뒤흔들었다

누군가 구급차를 불렀지만

구급차는 아무도 싣지 않고 떠났다


인형이 불쌍하다며 만진 아이

갑자기 기침이 쏟아지면서

천식 환자의 삶이 시작되었다



































꿈의 자객(刺客)



뱀눈의 남자는 암만 봐도 무서워

온종일 꾸물거리는 날 꿈으로

죽은 포도주 냄새가 올라와 


이 집으로 이사 오고 그 이듬해

윗층의 젊은 아가씨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지 

어떤 죽음은 기억의 둥지에서 잠을 자


할머니는 나쁜 꿈을 꾸면

마당에 녹슨 칼을 세게 내려치곤 했지

나에게는 끝이 살짝 부러진 칼이 있어


뱀눈의 남자와 싸워야지 

사박사박 숫돌에 칼을 갈고

꿈으로 길을 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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