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픈 사과(沙果)


가려운 어깨를 긁는다
나의 병은 참으로 오래되었다
1년째 오른쪽 발이 아프더니
이제는 왼쪽 발까지 아프다
걸을 수 없다고 죽을 수는 없는 법이지
하지만 욕이 나오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음식물 쓰레기를 버리러
나갔다가 쓰레기통 밑바닥에
굴러다니는 푸른 사과를 보았다
아무리 봐도 멀쩡해 보이는 사과
그 사과는 왜 버려졌을까
쓰레기의 내력을 헤아려 본다

저 사과는 아픈 사과다
아픈 것들은 죄다 멸시를 받고
눈물을 질질 흘리며
결국은 버려질 것이기에

앞집의 노인은 백 살을 앞두고 있다
몸이 아파서 바깥출입을 못한지가 꽤 되었다
봄과 가을에는 사망률이 치솟는다
나는 앞집 노인이 올가을을
넘길 수 있을지 생각해 본다

나에게 남은 생은 얼마나 되는지
그때까지 쓸 수 있는 글은 얼마나 되는지
그때까지 버려질 글을 또 얼마나 쓸지

가려운 어깨는 불길한 징조이다
붉은 반점도 우는 소리를 낸다
아픈 사과가 눈물을 흘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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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人事)


아파트의 청소 아줌마와 마주쳤다
인사를 하는 것이 어색해서
다른 출입구로 갔다 그런데 아줌마가
그쪽으로 걸어온다 그리고 나한테 인사한다

안녕하세요
네, 수고하시네요

아줌마가 그냥 모른 척해주었으면 했다
나는 인사하는 것이 너무 싫다
사람 사는 세상, 그래도 온기가 있어야지
하지만 나는 그 머나먼 온기가 싫다

만나면 먼저 인사합시다

아파트 단지에는 커다란 현수막이 붙어있다
나는 그걸 볼 때마다 비뚤어진다
제발 아는 척하지 좀 말고
인사도 하지 않았으면

늙으신 엄마와 엘리베이터를 탔다
젊은 여자와 여자의 어린 딸이
엄마에게 인사했다

어르신, 안녕하세요
할머니, 안녕하세요

엄마는 모르는 이들이었다
엄마가 활짝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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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모기


가을 모기에게 어깻죽지를 물렸다
최신의 과학 뉴스에 따르면
모기는 사람의 혈관을 흐르는
핏소리를 들을 수 있다고 한다

어설픈 가을밤에
어떻게든 살아보려는 모기도
그런 신박한 재주가 있거늘

그까짓 재능 따위
산속의 다람쥐는 괴롭지 않다
길가의 강아지풀도 슬프지 않다
그들에게는 상처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상처가 있어야 멀리 날아간다

어깻죽지를 피가 나도록 긁었다
상처는 낫지 않을 것이다
나을 생각이 없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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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고양이와 여자


지나가던 젊은 여자가 길고양이를 보고는
생수병의 물을 땅바닥에 흘려보낸다
고양이는 시큰둥한 표정으로 멀찍이서 가만히 앉아있다
여자는 쪼그려 앉아서 고양이가 오길 기다리지만,
웃기는군, 고작 물 따위로 고양이를,
하다못해 멸치 대가리라도 들이밀던가
여자가 생수병을 흔들자, 고양이가 성질이 났는지
생수병을 연신 할퀴려 든다 재밌어서 그러는 거 아냐
바보인가 보네 인생의 진리를 몰라 give and take
여자는 참을성 있게 앉아서 계속 쓸데없이 물을
흘려보내고, 고양이는 여전히 여자에게 다가가지 않는다
마침내, 나이든 부부가 그 옆을 지나가자
고양이는 놀라서 가버린다 여자는 잠시 동안
고양이가 오길 기다리다가 마침내 자리에서 일어난다
쓸데없이 그런 짓을, 그냥 가던 길이나 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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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멍


양말의 뒤꿈치에 구멍이 생겼다
아끼던 양말, 적당히 목이 늘어져
신으면 편했던 좋은 양말

구멍난 양말을 신고
자신의 방에서 기도하던 수도사(修道士)
구멍으로 흐르는 어떤 믿음의 시간
나는 구멍난 양말을 버릴 때면
언제나 그 수도사의 양말을 떠올렸다
어떤 구멍의 시간은 믿음으로도
메워지지 않았다 가끔은
구슬프게 우는 소리를 내었다
나는 그 소리가 싫어 구멍에 쾅쾅,
못질을 하곤 했다 그럴수록 구멍은
점점, 조금씩 더 커졌다

버리세요
반드시 신었던 양말이어야 합니다

젊은 아가씨 무당이
작은 액운(厄運)을 막을 비방(祕方)이라며
그렇게 알려주었다
나는 구멍난 양말을 깨끗하게 빨아서
의류 수거함에 퐁당, 넣었다
중년의 부부가 딸깍, 자물쇠를
열고는 무수한 구멍을 싣고 떠났다

칠레의 아타카마 사막에는
썩지 않은 옷들의 무덤이 있다
우주정거장의 우주인은
사막의 빛나는 구멍들에 대해 기록하였다
알록달록한 구멍들이 부르는 노래도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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