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초(花草)


이파리가 축 늘어진
천리향이 울음을
터뜨릴 것만 같다

부엌 개수대에
수돗물을 틀어놓고
타박을 한다
목이 마르면
말을 해야지

게발선인장은
사랑초와 동거 중이다
사랑초가 비틀어질
무렵에 물을 준다
행복한 동거

10년 동안 50센티
자란 비파나무는
언제 꽃을 피울지
화분이 작다는 건
알지만 모른 척한다

너희들을 한 번도
내 새끼들이라
생각해 본 적이 없어
만약 그랬다면
아프고 그리웠겠지
 
겨우 목을 축인
천리향 기어코
달구어진 한낮
베란다에 들이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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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봄


서너 살, 어린 것들은
돌을 던지며 놀이터
비둘기를 내어 쫓는다
혼이 빠져버린 것들
아파트 4층 부엌 창문
아래 앉아 그제야 참았던
숨을 내쉰다, 후우

그 건너편 두목(頭木)이
잘린 나무, 어영부영
봄의 가지가 느릿느릿
완보동물(緩步動物)처럼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악다구니를 쓰는
계집애들, 키 작은 에미와
한데 엉키어 모래바람을
일으키며 너무 즐거워

소나무, 바람의 숨결을
붙잡고 드잡이질하며
토해내는 누런 비로도
실밥 같은 가루들

시시하고 어리석고
설익은 모든 것들
가거라, 늦봄
눅눅하게 데워진
밤공기 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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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귀


부드럽고 하얀 손
그렇게 따귀를
때릴 줄 예전엔
미처 알지 못했지

부어터진 얼굴로
가만히 거울을
들여다 보며
울지 말아야지

아이같은 뽀얀
미소로 웃어보일
때에 날카로운
면도날이 볼 안에서
우물거리며 그래,
그랬었구나

다시 일어나 걷는다
너가 있는 곳과는
반대의 방향으로
뒤를 돌아보고
싶은 마음을
꾹꾹 참으며
안녕히,
잘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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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文才)


자신의 불행을
한탄하는 누군가의
글을 읽는다 잠이
덜 깬 아침 7시,
안구건조증으로
말라비틀어진 눈이
번쩍 떠지고 연민은
기묘한 시기심으로
변한다 그랬다
그에게는 문재(文才)가
있었다 사람들은 그의
불운을 위로하면서
뛰어난 글솜씨를 칭찬
했다 한두 사람이
아니었다 그림을
그린다는 그에게
글쓰기가 인생의
출구가 되어줄 것처럼
보였다 글재주가
있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글로써 사람을
즐겁게 질질 끌고
가는 재주인가 그것은
타고나는 것인가
오래전 아버지가 남긴
족보를 들여다보다
몰락한 문인 집안의
역사를 읽어내었다
한양에서 변방 시골로
낙향한 조상 선비님은
그저 농사짓고
시를 쓰고 서당에서
아이들을 가르쳤던
모양이다 평생 아버지는
당신의 소설을 쓰고
싶어했으나 글 한 자
남기지 못했다 가끔
내가 물려받은 문재를
생각한다 동생들은
글자가 아닌 물건을
팔고 있다 팔지 못할
글을 참으로 질기게도
붙잡고 이후로도
오랫동안 그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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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은 비


내일은 비 예보가 있다
아침 햇살은 넉넉하니
서둘러 빨래를 한다
엄마가 오래전 수술
자국이 아프다고 말하면
다음날 꼭 비가 왔다
내 오른쪽 귀가 따끔,
거리면 비가 온다
다음날, 아니 그
다음날에도 비가
몇 방울이라도 온다
오후 늦게 이불 빨래를
걷는다 다가오는
비의 기운이 찔끔
거리며 돋는 노랑
차렵이불에는 조금
있으면 누런 송화
가루가 묻어날 것이며
누리끼리한 장마의
손거스러미가 떨어질
것이다 빨래 건조기에는
이러한 노글노글한
낭만이 없다 따끔,
다시 한번 오른쪽 귀의
신경이 신호를 보낸다
그렇게 아팠던 모든
것들은 자신의 눌렸던
슬픔을 토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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