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의 탱고


여가수는
이제 눈을 감았다

자신의 전성기가
시작되려는 순간
불운과 병마가
강철의 거미줄로
침착하게 여가수를
돌돌돌 감쌌다

언제고 다시
노래를 부르겠노라
17년을 견디며
도돌이표처럼

2월 마지막 날
라디오에서는
피아졸라의 탱고가
내 머릿속 턴테이블에는
여가수의 서울 탱고가
눅눅한 바늘을
긁으며 가만히 운다


*가수 방실이(1959-2024)의 히트곡 '서울 탱고' 유튜브 링크
https://www.youtube.com/watch?v=TMkJrL5W8a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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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철을 줍는 노인


아파트 분리수거장을
순례하는 영감
매일 같은 시간
지팡이 하나 들고
나선다

이 시대의 연금술사는
허비적허비적
지팡이로 연신
들쑤시며
커다란 고철 덩어리
하나 건져낸다

손주 녀석의 과자
영감의 막걸리와 파스
비닐 망태기에서
달그락달그락

그 뒷모습에
슬그머니 조소(嘲笑)를
늘어뜨리며
집으로 돌아와서는
배송된 버섯 상자를
열어 본다

갓이 피고
거뭇거뭇하게 변한
파치(破치)
상 중 하 그 어디에도
끼지 못한 떨거지들

high-end와 low-end
천국과 지옥보다도
더 먼 삶의 간극
파치만 사다 먹다
죽을지도

생각보다 괜찮네
파치 버섯 한 상자
주문 버튼을 날렵하게 클릭
고철 더미의 지박령(地縛霊)
눈앞에 어른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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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일 같은 일상입니다. 그는 TV 속의 사람들과 많은 시간을 보내죠. 식사 시간이 되면 찬장에 있는 냉동식품을 꺼내어서 전자레인지에 넣습니다. 푹신한 소파에 앉아서 그 음식을 먹구요. 문득 외로움이 몰려옵니다. 그는 자기 아파트 건너편 집을 바라봅니다. 그와 다른 점이 있다면, 거기에는 두 사람이 있습니다. 네, 그들은 연인입니다. 행복한 표정을 지으며 소파에 앉아있지요. 그는 외로움을 떨치기 위해서 얼른 리모컨을 집어서 TV를 켭니다. 이리저리 돌리다가, 신기한 물건에 눈길이 갑니다. 로봇이네요. 말하고 미소를 짓는 로봇 말입니다. 그는 주저하지 않고 로봇 조립 세트를 주문합니다.

  Pablo Berger 감독의 애니메이션 영화 'Robot Dreams(2023)'의 시작은 그러합니다. 이 애니메이션은 대사가 없어요. 감탄사와 효과음은 있지요. 아, 음악이 정말 좋습니다. 영화 내내 미국의 팝 그룹 Earth, Wind & Fire의 명곡 'September'가 흐릅니다. 정말이지 잊을 수 없는 곡이에요. 영화를 보는 우리에게도, 무엇보다 영화 속 주인공인 Dog와 로봇에게도 말입니다. 주인공이 정말로 Dog가 맞냐고요? 맞아요. 주인공은 'Dog', 달리 이름이 없어요. 로봇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제 애니메이션은 개와 로봇의 이야기로 돌아갑니다.

  개는 집으로 배달된 로봇 조립 세트를 완성합니다. 로봇은 눈을 뜨고 움직이기 시작하지요. 개와 로봇은 이제 일상을 함께 하는 둘도 없는 친구이자 동반자가 됩니다. 개가 가장 좋아하는 노래 Setember를 로봇이 좋아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아요. 함께 길을 걷고,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죠. 여름이 오자, 개는 로봇을 해변으로 데려갑니다. 수영도 하고 즐거운 시간을 보냅니다. 이제 집에 가야 할 시간, 그런데 로봇이 좀 이상합니다. 움직이질 않아요. 그래요, 금속으로 만들어진 로봇의 몸에 물이 들어가서 녹이 슬어버린 겁니다. 어쩔 수 없이 개는 로봇을 해변가에 두고 집으로 돌아옵니다. 내일이라는 시간이 있잖아요.

  다음날, 눈을 뜨자마자 개는 해변으로 달려갑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요? 여름에만 잠시 개방되는 그 해변은 그날부터 폐쇄되었습니다. 내년 여름에 문을 연다는군요. 개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모래밭에 파묻혀있는 로봇을 구하려고 합니다. 시청에 민원도 내지만 소용이 없어요. 로봇을 만나려면 1년이란 시간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어요.

  이 애니메이션 영화의 제목 'Robot Dreams'는 로봇이 꾸는 꿈을 의미합니다. 말하고 생각하는 로봇인데, 꿈이라고 해서 못 꾸겠어요? 계절이 바뀌는 동안에 잠깐씩 눈을 뜨던 로봇은 꿈을 꿉니다. 다시 개를 만나게 되는 꿈이요. 로봇의 꿈속에서 개는 로봇을 잊고 잘 사는 것처럼 보여요. 로봇은 슬픔과 불안함을 느끼죠. 그런데 그건 사실이 아니에요. 로봇의 꿈과는 달리 개는 잘 지내지 못해요. 새로운 친구를 만나기도 하고, 여행도 하지만 개의 머릿속에는 늘 로봇이 있어요.

  마침내 개가 간절히 기다리는 그날이 왔습니다. 해변이 다시 문을 여는 날이지요. 개는 바람처럼 빠르게 그곳으로 달려가지만, 거기엔 로봇이 없어요. 로봇은 대체 어디로 간 걸까요? 로봇에게도 나름의 사정이 있어요. 어떻게 하다 고물상에 팔려 간 로봇은 Rascal이란 이름의 너구리와 만나게 됩니다. 직업이 수리공인 너구리는 로봇을 정성스럽게 다시 조립합니다. 로봇은 다시 살아납니다. 로봇은 너구리와 친구가 되어 함께 지내지요.

  개에게도 새로운 로봇 친구가 생깁니다. 그렇게 개와 로봇은 각자의 삶을 잘 살아가요. 그런데 우연히, 로봇은 개를 보게 됩니다. 개는 새 친구 로봇과 길을 걷고 있었죠. 자, 로봇은 이제 어떻게 할까요? 개에게로 달려갈까요? 그런데 개의 옆에는 다른 로봇이 있잖아요. 개와 로봇, 둘은 어떻게 될까요?  

  'Robot Dreams'는 대사가 없지만, 아주 간결하게 정서를 전달합니다. 이 영화의 관객은 주인공 개와 로봇의 마음 속 깊이 빨려들어가게 되지요. 그들이 관계를 맺는 방식은 우리 인간과 다를 것이 없어요. 서로를 알아가고, 친밀해지는 관계. 인간인 우리가 그것을 우정이나 사랑이든, 그 무엇으로 부르든지 간에 말이지요. 나는 이 애니메이션을 보면서 아주 오래전 영화 '추억(The Way We Were, 1973)'이 떠오르더군요. 바브라 스트라이샌드와 로버트 레드포드 주연의 그 영화요. 서로 이질적인 배경의 두 사람이 서로 사랑하게 되지만, 결국 둘은 헤어집니다. 그래도 그들에게는 함께 했던 시간의 추억이 남아있겠지요. 영화의 우리말 제목 '추억'은 정말 잘 지었어요.

  개와 로봇이 서로 의지할 수 있었던 시간, 그 추억은 'September'라는 노래에 담겨있어요. 둘은 언제까지나 그 노래를 기억할 겁니다. 'Robot Dreams'는 보는 이에게 관계의 본질에 대해 질문을 던집니다. 함께 한다는 것, 그리고 기억한다는 것. 과거의 추억에 현재의 시간이 겹겹이 층을 쌓아가며 우리의 삶을 만들어 갑니다. 꼭 그 추억의 누군가와 이어지지 못해도 괜찮아요. 지금, 여기, 내 곁에 있는 이들의 얼굴을 바라보는 것이야말로 우리를 행복하게 만드는 것일 테니까요.


*사진 출처: themoviedb.org



**Earth, Wind & Fire의 히트곡 'September' 공식 뮤직 비디오 링크
https://www.youtube.com/watch?v=Gs069dndIY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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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매한 재능


손을 꼽아 헤아려 보니
예술학교 졸업한 지
어느덧 열여섯 해

영화 공부 계속하면
성공할 수 있나요
타로 점집에서
키득거리던
1학년 애송이들

바람결에 실려 오는
이름을 들어보려 해도
흐린 날 아픈 귀에는
이명이 흐르고

누구는
밥벌이에 뼈를 깎고
또 누구는
몇 명이나 보았는지 모를
영화 한 편 찍고
그리고
일찍 세상을 뜬
멀고 먼 너도 있다

애매한 재능으로
경계를 기웃거리며
시간의 톱밥을
꾸역꾸역 삼키는
이른 봄날의 저녁

오랜 가려움증이 도진
왼쪽 목덜미를
긁으며 생각한다

그래도
미치지 않고
살아있다는 게
어디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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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가 올 때


그러니까 말이죠
이야기가
당신을
찾아갈 겁니다
그 언젠가

주술사의 말을
들었다

정해진 그때를
알지 못한다면
미당첨 복권 같은
신세겠지 작가란

실버 유모차를 몰고
등 굽은 노파 둘이
1등 당첨자 배출점
로또 복권방으로
들어간다

저 나이에 당첨이 되면
뭐하게 비뚤게 웃지만
새카만 선팅지의
유리창은
물욕의 혓바닥을
낼름거리며
그러는 넌
이야기를 만난 적이 있니

애달피 좇았으나
사라지는 연인의 그림자
결코 가질 수 없는

문드러진 발가락
주름에 파묻힌 눈
이제 이야기가 온다 한들
환대할 수 없으리
부서진 손톱으로
꾹꾹 눌러서
그 얼굴이라도 만져보고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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