빼앗긴 성지 Black Hills, 인디언 전쟁의 끝

6편 Fight No More Forever(1874-1877)          1시간 25분
     

  대륙 횡단 철도 개통된 1896년부터 1874년까지 수백만 명의 이주민들이 서부로 몰려왔다. 그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땅이었다. 미국 정부는 인디언들의 거주지를 계속해서 뺏어나갔다. 표면적으로는 돈을 주고 인디언들의 땅을 사들이는 것이었지만, 헐값에 넘기기를 강요하는 '강탈'에 가까운 것이었다. 아마도 '좋은 말로 할 때 내놓으시지. 살려는 드릴게' 같은 협박이 아니었을까? 많은 원주민 부족들이 살던 곳을 떠나 낯설고 황폐한 보호구역으로 향했다. 그러나 Oregon의 Wallowa 지역에 사는 Nez Perce족 추장은 미국 정부가 내미는 계약서에 서명을 하지 않고 버텼다.

  라코타족도 살던 곳을 결코 포기할 수가 없었다. 다코타에 위치한 'Black Hills'는 수족 인디언(라코타족은 수족의 한 분파)들에게는 성지와 같은 곳이었다. 1868년에 체결된 포트 라라미 조약(Treaty of Fort Laramie)에 따라 블랙 힐스에 대한 수족 소유권이 인정되었다. 그러나 그곳에서 발견된 금이 문제였다. 15000명의 광부들이 블랙 힐스로 몰려들었고, 그것은 곧 분쟁의 씨앗이 되었다. 미국 정부는 그들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조약을 깨고 군대를 주둔시켰다. 6백만 달러에 블랙 힐스를 넘기라는 미 정부의 제안을 추장 시팅 불(Sitting Bull)은 거부했다.

  이제 결전은 불가피해졌다. 1876년, 라코타와 아라파호, 샤이엔족 인디언 연합군과 커스터가 이끄는 부대가 맞붙었다. 시팅 불은 전투가 시작되기 전에 예지적 환영을 본다. 하늘을 까맣게 메운 메뚜기떼 같은 미군들이 모두 죽어 땅에 떨어지는 꿈이었다. 그렇게 리틀 빅혼 강(Little Bighorn River)에서의 싸움이 시작되었다. 미 기병대를 이끄는 커스터는 남북 전쟁에서 많은 전공을 올린 지휘관이었다. 젊고 야심만만한 그는 자신만을 위해 특별히 제작된 화려한 군복을 입었고 신문사 기자들을 위해 특별 브리핑을 하는, 당시로서는 미디어 친화적인 유명인사였다. 커스터는 인디언들과의 싸움을 그다지 심각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는 인디언 부족의 여자와 아이들을 포로로 잡고 인디언들을 회유해서 내쫓을 셈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오판이었다. Crazy Horse와 Black Kettle 같은 인디언 전사들은 그날이 오기를 기다렸다. 6000명의 인디언들 가운데 1800명이 전사였다.

  당시 군인들의 처우는 매우 열악했다. 잡다한 무리로 구성된 오합지졸과도 같았다. 군인들은 알콜 중독에 시달렸고, 자살자 수는 그 2배에 달했다. 가장 큰 사망 원인은 질병이었다. 군인들 대부분은 인디언을 본 적도 없었다. 그런 군인 700명을 이끌고 커스터는 리틀 빅혼 전투를 치루어야만 했다. 그리고 그 전투는 커스터에게 패배와 함께 죽음을 안겨주었다. 인디언들에게는 최초이자 마지막 승리로 기록된 전투였다. 1864년 샌드 크리크에서 동족의 참혹한 죽음을 목도한 블랙 케틀은 비로소 원한을 갚을 수 있었다.

  인디언들에게 그 승리는 잠깐 동안의 영광이었다. 미국 정부는 곧 반격에 나섰다. 필립 셰리든 장군을 앞세운 후속 토벌대가 커스터의 복수에 나섰다. 인디언들은 결국 블랙 힐스를 떠날 수 밖에 없었다. 시팅 불은 자신의 부족들을 이끌로 유랑의 길을 떠났다. 캐나다 국경 인근의 인디언들은 시팅 불과 부족민들을 환대했다. 그러나 그곳에서는 사냥할 버팔로도 적었고, 어떻게든 먹고 살 방도를 찾지 않으면 안되었다. 1877년부터 1881년까지 그렇게 떠돌이 생활이 이어졌다.

  한편, 몰몬교도들에게도 어려운 시절이 다가오고 있었다. 이제 미국 정부는 유타주에 대한 전면적 통제권을 얻으려고 나설 참이었다. 브리검 영에 의해 다스려지는 은둔의 왕국은 더이상 존재할 수 없었다. 미 정부는 1857년에 몰몬교도들에 의해 이주민 여행자들이 학살당한 메도우산 사건을 들고 나왔다. 브리검 영을 잡아넣기 위한 방책이었다. 그러나 학살의 주모자로 지목된 John D. Lee는 끝까지 브리검 영의 이름을 입에 올리지 않았다. 결국 1877년, Lee의 처형이 이루어진다. 그리고 그해에 브리검 영이 숨을 거둔다. 30년 동안 사막의 도시 솔트 레이크를 세우고 몰몬교를 이끌었던 수장의 죽음이었다.

  1877년, 미국은 블랙 힐스를 점령했다. 라코타족에게 닥친 비운을 다른 인디언 부족들도 마주했다. 남은 인디언들은 셔먼의 군대를 피해 도망쳤다. 이제 인디언들은 기독교로 개종했고, 백인들의 옷을 입었다. 1804년, 루이스와 클라크 원정대의 탐험에 큰 도움을 준 것은 인디언들이었다. 원정대는 인디언들에게 미국이 진정한 친구가 될 것이라고 약속했다. 그러나 그 약속은 깨졌다. 백인들은 원주민들의 땅을 빼앗고 버팔로들을 학살했다. 그리하여 이제 아메리카 원주민들에게는 아무 것도 남지 않았다.     



*사진 출처: en.wikipedia.org    라코타족 추장 Sitting Bull


**사진 출처: en.wikipedia.org      조지 커스터(George Cus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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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코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2013년작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Like Father, Like Son)'에서 혈육의 진정한 의미에 대해서 묻는다. 평범한 회사원 남자는 어느 날, 자신의 친아들이 병원에서 뒤바뀌어 다른 집에서 자라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놀랍고 당황스러운 것은 남자의 아이를 키우고 있는 집도 마찬가지. 서로 뒤바뀐 아이들이 받을 충격을 생각해서 두 집안은 당분간 시간을 갖기로 한다. 남자는 정기적으로 먼 거리를 운전해서 아들을 만나고 온다. 그가 차로 지나는 고속도로 장면에서 유난히 눈에 띄는 것이 있었다. 길게 이어진 전선주의 선들이었다. 그것이 꽤 흥미롭게 보인다고 나는 생각했다. 그리고 감독의 인터뷰를 보고나서야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코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그렇게 연속적으로 이어지는 선들로 '혈연'의 의미를 부각시키고 싶었다고 했다. 그렇게 끊임없이 이어지는 것, 혈연으로 맺어진 부모와 자식의 관계, 가족의 의미는 어떤 것일까? 그런 질문에서 더 나아가 그는 2018년작 '어느 가족(万引き家族, Shoplifters)'에서 혈연이 아닌 가족의 모습을 담는다. 도쿄의 비좁고 낡은 어느 주택, 그곳에서 사는 쇼타에게는 할머니와 부모, 이모가 있다. 그런데 쇼타와 아버지가 동네 마트에서 보여주는 모습이 영 이상하다. 아버지 오사무는 아들에게 마트의 물건들을 훔쳐오게끔 수신호를 보내 지시한다. 자신이 직접 훔치는 것도 아니고, 아들에게 도둑질을 시키는 아버지라니 참으로 몹쓸 사람이다.

  훔치는 것은 쇼타의 엄마도 마찬가지. 세탁부 일을 하면서 세탁물에서 나오는 소소한 물건들을 죄다 챙긴다. 오사무는 어느 날, 쇼타와 집에 돌아오는 길에 베란다에서 추위에 떨고 있는 유리를 집으로 데려온다. 유리를 데리고 있으면 문제가 될 줄 알면서도, 아이를 학대하는 부모에게는 다시 돌려보낼 수 없어서 그렇게 유리는 '린'이라는 이름의 막내딸이 된다. 곧 집안의 막내 린은 쇼타와 짝을 이루어 동네 문방구에서 도둑질을 하는 일에 동참하게 된다. 영화의 일본어 제목 '万引き家族' 그대로 '도둑질 가족'이 되는 셈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이 기이한 집안의 가족들이 지닌 비밀들이 하나씩 밝혀진다. 쇼타는 부부의 친아들이 아니며, 오사무와 노부요도 진짜 부부가 아니다. 할머니 하츠에와 이모 아키도 서로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생판 남이다. 어쩌다 보니 그냥 모여서 살게된 이들의 모습은 남들이 보기에는 그냥 평범한 가족이나 다름없다. 학대당하는 동네 꼬마 유리를 거둔 것에서도 알 수 있듯, 그들은 따뜻한 마음을 가지고 서로를 보살핀다. 이 가족이 여름의 해변가에서 즐겁고 평화롭게 한 때를 보내는 장면에 이르면, 그들은 이 세상 누구보다도 가장 행복한 사람들처럼 보인다.

  그러나 견고해 보이는 이 가족의 유대감이 얼마나 얄팍하고 위선적인가는 할머니 하츠에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드러난다. 빠듯한 살림살이에 그나마 보탬이 되었던 하츠에의 연금 때문에 가족은 그 죽음을 숨기기로 한다. 마당에 암매장을 한 후 계속 연금을 타내며, 쇼타와 린의 도둑질도 계속 된다. 쇼타는 시간이 갈수록 어른들의 위선과 좀도둑인 자신의 모습에 자괴감을 느낀다. 과연 이 가족의 일상은 계속 이어질 수 있을까?

  코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어느 가족'에서 '혈연'의 의미, 가족이라는 공동체를 옥죄는 '경제적 궁핍'에 대해 진지하게 탐구한다. 남남으로 맺어진 쇼타의 가족은 나름대로 충분히 행복하고 평화로웠다. 그러나 그 가족의 존립을 위협하는 것은 '혈연'으로 맺어졌느냐가 아니라, '돈'이다. 막노동을 하는 오사무가 다리를 다쳐 일을 쉬게 되자 집안의 경제는 타격을 받는다. 거기에다 아내 노부요까지 해고당하면서 이 가족의 경제적 어려움은 가중된다. 어린 쇼타와 린이 도둑질을 해야하는 이유는 거기에 있다. 성인 전용 클럽에서 공연을 하며 돈을 버는 아키의 경우도 딱하기는 마찬가지. 과연 '가난하지만 행복한 가족'의 이상은 얼마만큼의 현실성을 갖고 있는가? 코레에다 히로카즈가 보여주는 자본주의 사회의 '가족'이란 대명제는 '핏줄'이라는 불가침의 전제 보다 더 엄혹한 '돈'의 지배를 받는다.

  삶의 괴로움을 아이에 대한 학대로 드러내는 유리의 친부모에게서 볼 수 있듯, 혈연은 가족의 절대적 성립 요건이 아니다. 뜻하지 않은 사건으로 쇼타의 '가짜 가족'이 해체되면서 '린'으로 지내던 유리도 친부모의 집으로 돌아간다. 그러나 무관심과 학대로 추운 겨울에 베란다에서 떨고 있었던 유리의 삶은 별반 달라진 게 없다.

  유리는 베란다에서 무슨 소리가 나자 얼른 나와 본다. 그리고 밖을 바라보는 유리의 눈빛에는 그리움이 담겨져 있다. 유리는 오사무와 쇼타가 그 베란다에서 자신을 데려가 주었던 것처럼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일까? 코레에다 히로카즈는 그 어떤 것도 명확한 결론을 내리지 않은 채 '어느 가족'의 이야기를 닫는다. 영화는 사람들이 가족에 대해 갖는 고정관념에 의문을 던진다. '혈연으로 맺어진 가족만이 진짜 가족'이라든지, '가족이 행복하기 위한 필요충분 조건은 돈이 아니다'라든지 하는 것들. 그에 대한 답은 정해진 것이 아니며, 관객의 마음 속에 그 답에 대한 생각의 파문을 던지는 것이 영화를 만든 감독의 뜻일지도 모른다.         
 


*사진 출처: theguard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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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문명, 대륙 횡단 철도의 개통

5편 The Grandest Enterprise Under God (1868–1874)   1시간 24분


 
  전쟁터의 총성과 화염은 이제 사라졌다. 남북 전쟁이 끝나고, 미국은 본격적인 재건에 돌입한다. 'The Great Pacific Railway', 광대한 미대륙의 동과 서를 잇는 대장정이 시작되었다. 1862년, 링컨은 'Pacific Railroad Act'를 승인한다. 엄청난 공사비와 인력이 투입될 이 사업의 주체로는 두 개의 회사가 선정되었다. 센트럴 퍼시픽 철도(Central Pacific Railroad)와 유니언 퍼시픽 철도(Union Pacific Rail Road)가 그 주역들이었다. 캘리포니아의 새크라멘토에서 시작되는 센트럴 퍼시픽 철도와 동부의 유니언 퍼시픽 철도를 잇는 공사였다. 그렇게 동과 서에서 두 회사는 철로를 놓기 시작했다. 양쪽의 선로가 만나는 때가 미국의 동서 횡단 철도가 개통되는 날이 될 터였다.

  철도의 필요성은 이전부터 존재했다. 뉴멕시코의 보스케 레돈도 보호구역(Bosque Redondo Indian Reservation)에 미 정부는 정기적으로 식량을 조달해야 했다. 거칠고 황량한 보호구역의 인디언들은 외부의 식량 조달에 의존해야했다. 텍사스의 소떼들을 이동시키는 'Goodnight-Loving Trail'은 그 대표적인 통로였다. 전쟁이 끝난 후 북부의 쇠고기 수요가 증대했고, 보다 빠르고 효율적인 운송 수단이 필요했다. 연방 정부는 두 철도 회사에 막대한 자금을 대출해서 공사를 하도록 했다. 

  선로 공사를 위해서는 어마어마한 노동력이 필요했다. 아일랜드, 멕시코, 독일, 영국, 전직 군인과 해방 노예까지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공사 구간 곳곳에서 그들이 받는 임금을 노린 매춘부, 포주, 도박장 운영자, 총잡이, 술집이 흥청거렸다. 그렇게 갑자기 많은 인구가 유입되자 남부 대평원(Great Plains)의 인디언들은 철도를 원망하기 시작했다. 백인들의 버팔로 사냥으로 버팔로들이 씨가 말라가는 판국에 인디언들의 생존이 더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그들은 철도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유니언 철도 회사는 인디언들의 습격으로 골머리를 앓았다.

  서부의 센트럴 철도 회사의 공사도 순탄치 않았다. 자연이 인간의 도전을 허락하지 않았다. 거대한 산과 절벽, 거친 강이 공사의 장애물이었다. 특히 돌산을 폭파하는 것이 가장 까다롭고 어려운 작업이었다. 그 일을 위해 고용된 이들은 중국인 노동자였다. 비록 다른 노동자들에 비해 체구는 작았지만, 중국인들은 성실함과 끈기로 그 작업을 해냈다. 바구니에 다이너마이트를 싣고 밧줄로 연결된 절벽을 오르내리며 돌산을 부수어 나갔다. 그 과정에서 약 600명의 중국인들이 죽었다. 초기 중국인 이민자들은 그런 희생을 감수하며 정착했다. 1869년 5월, 드디어 동과 서에서 시작된 철로가 하나로 만났다. 대륙 횡단 철도가 완성된 것이다.

  인디언들에게 철도가 악귀처럼 여겨졌던 것처럼, 몰몬교도들에게도 그것은 재앙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들에게는 안온한 사막의 성전 도시 솔트 레이크 시티에 이민자들이 철도를 타고 쏟아져 들어왔다. 이민자들은 몰몬교의 일부다처제를 악습으로 보고 개탄했다. 1870년, 몰몬교도들은 자신들의 교리 수호를 위한 '분노 집회(Indignation Meeting)'를 개최한다. 몰몬교도들은 여성이 남성보다 열등하며, 그러므로 일부다처제는 당연한 것이라고 외쳤다. 그런 가운데 여성 몰몬교도들 사이에서는 투표권 쟁취 운동이 일어났다. 그해에 브리검 영은 미국에서는 최초로 유타주의 여성들에게 투표권을 허용했다. 어떻게 그곳에서 일부다처제와 여성 인권 운동이 양립할 수 있었을까? 미국의 여성 투표권 운동가(Suffragette)들은 여성 몰몬교도들의 투표권 쟁취에도 불구하고, 몰몬교 여성을 자신들의 테두리에 받아들이고 싶어하지 않았다.  

  철도의 개통으로 새롭게 부상한 도시는 캔자스 Dodge City였다. 그곳은 버팔로 사냥의 중심지였다. 50만 명의 이주민들이 캔자스에 정착하기 위해 몰려들었다. 버팔로는 '걸어다니는 황금'으로 여겨졌다. 거대한 열풍이 불었다. 모두들 총을 들고 평원의 버팔로를 닥치는 대로 잡았다. 버팔로는 버릴 것이 없었다. 쇠고기는 식량으로, 뼈는 비료 회사가 가져갔다. 3백만 마리의 버팔로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철도가 개통된지 2년만의 일이었다. 1874년, 미 의회는 버팔로 사냥 금지 법안을 통과시켰으나 그랜트 대통령은 거부했다. 남부에서는 여전히 버팔로 사냥이 이어진다.

  버팔로와 함께 등장한 새로운 직업은 '카우보이(Cowboy)'였다. 소떼의 목축과 이동의 모든 과정을 담당하는 카우보이들은 서부의 아이콘으로 자리잡았다. 전직 남군 기병대, 이민자, 멕시칸, 인디언, 그리고 흑인들도 있었다. 이 새로운 직종에서는 차별이 적었고 관대함과 활력이 넘쳤다. 그러나 목축 사업에 점차 큰돈이 몰리면서 분위기는 험악해진다. 서로의 이익을 두고 일어나는 폭력으로 총잡이와 보안관이 등장했다. 서부 영화의 주인공 '와이어트 어프(Wyatt Earp)'도 보안관으로 그렇게 이름을 알렸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서부 영화의 주요한 상징들은 이 시기의 산물인 셈이다.

  남부 평원의 인디언들은 철도가 싣고 온 이주민들과 경쟁해야 했다. 인디언들의 저항은 군대의 토벌로 이어졌다. 1854년부터 1890년까지 수족과 샤이엔족 인디언들은 싸움에 나섰다. 그러나 실질적인 대치는 1874년에 끝난다. 필립 셰리든(Philip Sheridan) 장군은 지속적인 작전으로 인디언들을 굴복시켰다. 이어지는 'The West'의 6편에서는 인디언들의 최후의 결전이 펼쳐진다. 인디언들에게 이어진 피와 공포, 슬픔과 고통의 시간이 끝나가고 있었다. 대평원에서 사라진 버팔로들과 함께 인디언들도 벼랑 끝으로 내몰렸다. 그 끝에서 인디언들이 만난 것은 어둡고 축축하고 황량한 보호구역(Reservation)의 삶이었다.  



*사진 출처: pbs.org  대륙 횡단 철도의 개통식(1869년 5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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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비린내와 포연(砲煙) 속에서;

4편 Death Runs Riot (1856–1868), 1시간 24분


  다큐 'The West'의 특징은 미시사(微視史)적인 관점을 취했다는 점이다. 지난 3편에서 골드 러시에 동참한 농부 윌리엄 스웨인의 편지글을 주요한 얼개로 삼은 것에서도 드러난다. 4편에서는 1850년대에 캔자스에 살았던 찰스 러브조이(Charles Lovejoy)목사의 부인 줄리아의 편지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노예제를 둘러싼 미국 내의 극심한 갈등은 마침내 내전으로 이어진다. 러브조이 부인은 지인들에게 보낸 편지를 통해 그 시기의 혼란과 고통을 증언한다. 개인의 서간, 일기와 같은 사적인 자료를 바탕으로 조망하는 역사적 사건들은 관객들에게 생생한 목소리로 되살아난다.

  '노예제'는 미국의 오랜 근심거리였다. 우리는 미국이란 나라의 근원이 '종교'에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미국에는 당시에 4백만 명에 이르는 이들이 노예를 소유하고 있었다. 어떻게 기독교가 국가적 이념이나 다름없는 이 나라에서 노예제가 존립할 수 있었을까?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거기에 반대하는 이들이 생겨났다. 노예 폐지론자(abolitionist)들이었다. 찰스 러브조이 목사도 그런 신념을 가진 사람들 가운데 한 명이었다. 1855년, 러브조이 목사는 가족과 함께 캔자스로 이주한다. 그가 원한 것은 금이나 땅, 모험이 아니었다. 단 한 가지, 노예제를 폐지하고 그 땅에 자유를 가져오는 것이었다. 그가 선택한 캔자스는 노예제의 격전지였다. 1854년에서 1859년에 이르는 시기에 찬성론자와 폐지론자들이 맞붙어 싸움을 벌였다. 당시 미국인들은 그것을 'Bleeding Kansas'로 불렀다. 많은 이들이 죽거나 다쳤다.

  왜 캔자스는 노예제 폐지를 둘러싼 논쟁의 진앙지가 되었을까? 북부는 이제 노예제를 더이상 지지하지 않았으나, 남부의 입장은 달랐다. 남부인들에게 노예는 중요한 재산이었다. 그 재산을 강제로 빼앗긴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의회는 찬반 양론으로 팽팽하게 나뉘었다. 새로운 준주 캔자스와 네브래스카는 아직 입장을 정하지 않았다. 그곳 주민들의 뜻에 따라 자유주(노예 폐지주) 합류를 결정하는 것으로 의회 합의가 이루어졌다. 그렇게 캔자스에서는 찬성론자와 폐지론자들의 세불리기 싸움이 시작되었다.

  선거 부정에 이어 캔자스에는 두 개의 정부가 양립했다. 인접한 노예제 찬성주 미주리주의 'Border Luffian'이라고 불리는 싸움꾼들이 캔자스로 몰려와서 난동을 피웠다. 방화, 약탈, 살인이 난무했다. 1856년에 양측이 맞붙은 싸움은 전쟁과 같았다. 무려 200명에 달하는 사람이 죽었다. 폐지론자의 선봉은 '존 브라운(John Brown)'이었다. 그는 극렬한 무력 투쟁으로 맞섰다. 1859년, 노예 반란을 일으킨 브라운의 처형과 함께 이 피의 전투는 끝난다. 캔자스는 자유주가 되는 것을 선택했다. 캔자스에서 일어난 일들은 남북 전쟁의 예고편과도 같았다. 결전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한편, 몰몬교도의 집산지 유타의 솔트 레이크 시티에서는 긴장감이 고조되고 있었다. 일부다처제(Polygamy) 교리가 문제였다. 브리검 영은 무려 27명의 아내를 두었다. 의회에서는 몰몬교의 그런 교리를 맹비난하는 목소리가 커졌다. 몰몬교도들은 교리를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1857년, 마침내 뷰캐넌 대통령이 반란을 진압한다는 명분으로 유타주에 2500명의 연방군을 파병한다. 솔트 레이크 시티는 충격과 두려움에 휩싸였다. 그런 가운데 벌어진 일이 '메도우산 대학살(Mountain Meadows massacre)'이었다. 서부로 향하는 이주민 무리를 습격해 잔혹하게 죽인 이들은 몰몬교도들이었다. 120명의 여행자들이 아무 이유없이 죽임을 당했다. 몰몬교도들은 자신들이 아니라 인디언의 소행이라고 발뺌을 했으나 사실이 아니었다. 그들의 수장 브리검 영이 공격을 지시했다.

  왜 몰몬교도들은 그런 학살극을 벌였을까? 아직도 그 이유는 분명하게 밝혀지지 않고 있다. 연방군의 진입과 관련한 몰몬교 내부의 극심한 긴장과 불안은 그렇게 예기치 않은 파국을 만들었다. 이른바 '몰몬 전쟁(Mormon War)'이라고 불리는 이 일련의 상황은 1859년, 유타주가 정식주로 승격되고 몰몬교도들에 대한 대통령의 사면으로 봉합된다. 그러나 일부다처제 문제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채 남아있었다.

  1860년, 공화당의 링컨이 대통령에 당선된다. 그의 노예제 폐지 공약에 반발해 이듬해 남부가 연방을 탈퇴한다. 그리고 내전, 미국인들이 'Civil War'라고 부르는 전쟁이 시작되었다. 캔자스에서는 이제 진짜 전쟁이 벌어진다. 러브조이 부인이 편지에 쓴 캔자스와 미주리의 싸움은 지독한 살상극이었다. 노예제 폐지를 주장하는 짐 레인의 근거지에 미주리의 게릴라 콴트릴(William Quantrill)은 무지막지한 복수를 선사한다. 183명이 사망했고 185채의 집이 불탔다. 남은 것은 80명의 과부와 250명의 고아였다.

   남북 전쟁의 불길 속에서 인디언들 또한 고통을 받았다. 감리교 목사 출신의 쉬빙턴(John Chivington)은 '미친 설교자(Crazy Preacher)'로 불렸다. 그는 목사일에는 흥미가 없었다. 군대에서 자신의 길을 찾은 그는 정치적 야심에 불탔다. 북부군에 들어가서 전공을 쌓는 데에 몰두한 그에게 인디언들은 출세를 위한 제물로 보였다. 그에 의해 이루어진 '샌드 크리크 대학살(Sand Creek Massacre, 1864)'은 말로는 표현하기 어려운 무참한 살육극이었다.


  미 정부와 평화 조약을 맺길 원했던 남부 샤이엔 부족들은 배신당했다. 쉬빙턴의 군대는 여자와 아이, 임산부까지 잔혹하게 죽였다. 난자당한 시신은 군인들의 자랑거리로 능욕을 당했다. 의회는 미군의 명예와 품위에 어울리지 않는 범죄라며 조사를 지시했지만, 아무도 처벌받지 않았다. 이 사건을 설명하는 인디언 작가는 샌드 크리크에서 자신이 겪은 경험담을 들려준다. 자신이 그곳을 방문했을 때, 새벽에 아이의 울음소리를 들었노라고 했다. 그리고 동행한 이들도 같은 울음소리를 들었다는 말을 덧붙인다. 샤이엔 원주민들의 억울한 죽음은 그렇게 그 땅에 묻혔다. 

  1865년, 전쟁이 끝났다. 이제 군대는 해산되었고, 군인들은 집과 땅을 찾아 서부로 몰려든다. 이주민들에게 거저 주어지는 땅들은 인디언들의 것이었다. 그들에게는 더이상 물러설 곳이 없었다. 수, 아라파호, 샤이엔 인디언들이 연합했으나 셔먼의 군대를 당해낼 수는 없었다. 1868년에서 1869년에 이르는 기간 동안 남부 평원의 인디언들이 그렇게 쓸려나갔다.


  러브조이 목사 부인은 캔자스를 떠나며 마지막 편지글을 남긴다. 캔자스에 온 뒤로 온갖 고통과 공포, 두려움 속에 지냈지만, 결코 후회하지 않는다고 적었다. 피 튀기는 유혈극은 끝나고, 노예들은 해방되었다. 몰몬 전쟁을 치룬 몰몬교도들은 미 연방의 진정한 구성원이 되기 위한 길목에 서있었다. 남북 전쟁과 함께 수행된 인디언 말살극은 남부 인디언들을 죽음으로 내몰았다. 피 냄새가 사방에서 진동했다. 그러나 전쟁의 포연(砲煙)은 사라지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 미국은 새로운 도약을 준비한다. 광대한 대륙의 동과 서를 잇는 철도 건설의 꿈이었다. 


  'The West'의 4편을 보는 일은 감정적으로 힘든 일이었다. 샌드 크리크 대학살에 대한 부분이 특히 그러했다. 다큐의 자료 화면과 내레이션만으로는 매우 한정적인 역사적 사실만을 알 수 있을 뿐이다. 생략된 나머지 부분들에 대한 자료를 찾아보고, 이야기를 맞추어 가면서 그 무지막지한 피의 시대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몸서리가 쳐졌다. '서부'라는 공간의 도전과 모험은 인종청소(ethnic cleansing)나 다름없는 국가적 범죄와 엮여 있었다. 그 어두운 그림자는 오늘날까지 이어진다. 보호구역에 거주하는 원주민들은 가난과 질병, 약물중독의 위험 속에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 정부는 그 고통스러운 유산에 대한 책임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사진 출처: pbs.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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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BS 8부작 미니 시리즈 'Ken Burns: The West(1996)' 2, 3편

2편 "Empire Upon the Trails" (1806–1848)     1시간 24분
3편 "Speck of the Future" (1848–1856)        1시간 25분

 


3. 새로운 제국의 탄생

  영국에서 독립한 신생국 미국은 점차 자신들의 힘을 축적해 나가고 있었다. 미국은 무엇보다 영토 확장에 열을 올렸다. 거대한 루이지애나주를 프랑스에게서 매입한 것을 시작으로 서남부 지역이 새롭게 눈에 띄었다. 그곳은 신생 독립국 멕시코의 땅이었다. 1821년, 멕시코가 스페인에게서 독립한 이후 푸에블로 인디언들은 멕시코의 영향력 아래 놓인다. 혼란기, 미약한 힘을 지닌 멕시코의 지배하에 그 땅의 실질적 주인은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 여러 부류의 다양한 이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가장 흥미로운 이들은 '마운틴맨(Mountain man)'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비버 가죽과 곰 모피를 거래하며 살았던 사냥꾼들로 인디언과 지리에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모피 무역의 전성기는 오래가지 않았다. 1830년대에 끝물에 접어들었고, 마운틴맨들은 새로운 활로를 모색해야만 했다. 그들은 독보적인 지식을 바탕으로 탐사대와 군인들 무리에 들어간다. 서부의 영웅 키트 카슨(Kit Carson)은 그 시기를 대표하는 마운틴맨이었다.

  푸에블로 인디언 부족들은 버팔로와 땅을 두고 서로 경쟁했다. 특히 그들이 성지로 여기는 'Black Hills'를 둘러싼 싸움은 매우 치열했다. 그러는 사이 텍사스에서는 새로운 주인 자리를 두고 싸움이 일어났다. 1836년, 샘 휴스턴이 이끄는 텍사스군이 산타 아나의 멕시코 정부군을 물리친다. 텍사스 공화국이 수립되고, 이제 미국은 그 지역 인디언들에게 지배력을 행사한다. 서부로, 서부로 새로운 땅을 향해 미국인들이 끊임없이 밀고 내려왔다. 인디언들은 계속 밀려나면서 자신들의 땅을 잃어가고 있었다.

  1847년, 박해받는 신생 종교 몰몬교의 신도들은 서부 솔트레이크에 도착했다. '미국의 모세'라고 일컫는 브리검 영은 몰몬교도들을 이끌고 사막 한가운데에서 자신들의 터전을 일구어 나갔다. 종교적 열정은 서부 개척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다. 이른바 오리건 트레일(Oregon Trail)을 따라 선교사들이 원주민들에게 기독교를 전파하고자 몰려들었다. 그들은 새로운 신과 함께 질병도 가져왔다. 백인들의 질병에 면역력이 없었던 인디언들은 죽어나갔고, 그들 사이에 생겨난 적대감이 파국을 불러온다. 1836년에서 1847년에 이르는 기간(Whitman Mission)에 오리건의 Cayouse 인디언들은 질병과 토벌로 거의 절멸 위기에 처하게 된다.

  루이스와 클라크 원정대 이후, 무려 30년 사이에 그 모든 것이 일어났다. 텍사스의 획득, 솔트 레이크의 건설, 오리건 지역의 평정, 그리고 1840년에는 캘리포니아가 정착민들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이제 그곳의 지배자가 누구인지 명확해졌다. 주인없는 땅 서부는 이제 미국의 것이었다. 그 땅에 곧 엄청난 광풍이 몰아닥칠 참이었다. '금'이 발견된 것이다. 그리고 '골드 러시(Gold Rush)'의 시대가 열린다.


4. 황금광 시대

  1848년, 서터 제재소의 현장 감독이었던 제임스 마샬이 인근 강가에서 금을 발견한다. 그것이 시작이었다. 사람들은 숟가락 하나 들고 금 캐기에 나섰다. 도처에서 금이 쏟아져 나왔다. 1849년에 캘리포니아에는 무려 5만 명의 사람들이 금을 찾아 몰려들었다. 골드 러시의 광풍이 미 전역에 휘몰아친다. 'The West'의 3편에서는 미국 서부사의 가장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다룬다. 이 편에서는 골드 러시에 동참했던 윌리엄 스웨인이라는 농부의 편지글을 통해 그 시절을 살펴본다.

  일확천금에 대한 기대가 사람들을 서부로 불러모았다. 27살의 농부였던 스웨인도 그 소식을 듣는다. 그는 무식하고 가난한 농부가 아니었다. 중산층으로 학식있는 사람이었던 그는 아내가 선생님이었다. 그런 그조차 금을 찾아 떠났다. 스웨인은 자신이 보고 들은 여정의 모든 것을 아내에게 보내는 편지에 적었다. 황금을 찾아 떠나는 여정은 고되고 위험했다. 인디언의 습격은 위협이 되지 못했다. 오히려 그보다 무서운 것은 익사와 총기사고, 이질과 콜레라였다. 금을 찾기도 전에 사람들이 길에서 죽어나갔다.

  그렇게 도착한 이들이 본 것은 금이 아니었다. 어마어마한 사람들이 금을 캐고 있었고, 거기에는 가난과 질병이 창궐했다. 돈을 버는 이들은 그들을 상대로 물건을 파는 상인들이었다. 가장 유명했던 이는 몰몬교도로 캘리포니아에서 채굴 기구와 생필품을 팔았던 샘 브래넌이라는 사람이었다. 우리가 잘 아는 청바지의 아버지 리바이 스트라우스(Levi Strauss)는 질긴 텐트천으로 채굴용 바지를 만들어 팔았다. 그곳에는 거의 사기에 가까운 상술이 판을 쳤고, 금을 찾는 것은 너무나도 어려웠다. 범죄자를 비롯해 오만 부류의 인간들이 모이는 곳에서 사건 사고가 발생하는 것은 당연했다. 약속의 땅 서부에서 술집, 도박, 매춘이 성행했다.

  골드 러시의 광풍이 캘리포니아를 휩쓸 무렵, 인디언들에게는 어려운 시기가 이어지고 있었다. 샤이엔(Cheyenne) 부족은 콜레라로 황폐해졌고, 블랙 힐스의 소유권을 두고 라코타족과 샤이엔족은 대립했다. 그 와중에 미국 정부와 인디언들 사이에 첫 번째 포트 라라미 조약(The Treaty of Fort Laramie)이 맺어졌다. 미국은 서부에서 수(Sioux)족(라코타족은 수족의 한 분파이다)과의 경계선을 명확히 해두고, 그들을 이전보다 축소된 거주지로 내몰았다. 잠정적으로 찾아온 평화는 1854년, 몰몬교도의 마차를 인디언이 습격하면서 깨어진다. 미국은 그것을 기회로 인디언들의 대대적 토벌에 나섰다.

  황금광 시대에 고통을 받은 것은 인디언들 뿐만이 아니었다. 금을 찾기 위해 멕시칸들과 중국인들도 몰려들었는데, 그들 또한 박해와 핍박의 대상이었다. 특히 중국인들을 상대로 이루어진 차별은 가혹한 세금 부과, 구타와 채찍질, 방화에 이르기까지 참혹했다. 1852년에 중국 남부의 기근을 피해 미국 서부에 도착한 중국인들은 성실함으로 생존해 나갔다. 미국인들이 마다하는 세탁부와 밑바닥 일을 도맡아 했고, 후에 내륙 철도 건설에도 참여했다. 1882년, 그렇게 몰려오는 중국인들에게 캘리포니아 의회는 중국인 이민 금지법으로 대응했다.

  미국인들의 타자에 대한 적대감은 그 시기 인디언들에 대한 무참한 학살로 귀결되었다. 캘리포니아 주 정부는 인디언들에 대한 학살을 지원하기까지 했다. 인디언의 머리 하나에 매겨진 현상금은 5달러였다. 죽지 않고 살아남은 인디언들은 노예로 팔렸다. 1870년까지 3만 명에 이르는 인디언들이 죽임을 당했다. 그것은 절멸에 이르는 대학살극이나 마찬가지였다.

  금을 찾아 떠난 농부 스웨인은 아무 것도 발견하지 못했다. 그는 빈손이었지만, 돌아갈 고향과 가족이 있었다. 젊은 농부 스웨인은 집으로 돌아가서 평온하고 좋은 인생을 보냈다. 그렇게 황금광의 시대는 막을 내렸다. 그 시기를 통해 미국인들은 새로운 정체성을 형성해 나갔다. 모험과 도전, 성공에 대한 열망이 미국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서부를 차지하고 있던 인디언들은 제거되었고, 미국의 앞길을 막는 장애물은 서부에 더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사진 출처: pbs.org


**키트 카슨 전기 '피와 천둥의 시대' 리뷰

https://blog.aladin.co.kr/sirius7/126258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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