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文才)


자신의 불행을
한탄하는 누군가의
글을 읽는다 잠이
덜 깬 아침 7시,
안구건조증으로
말라비틀어진 눈이
번쩍 떠지고 연민은
기묘한 시기심으로
변한다 그랬다
그에게는 문재(文才)가
있었다 사람들은 그의
불운을 위로하면서
뛰어난 글솜씨를 칭찬
했다 한두 사람이
아니었다 그림을
그린다는 그에게
글쓰기가 인생의
출구가 되어줄 것처럼
보였다 글재주가
있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글로써 사람을
즐겁게 질질 끌고
가는 재주인가 그것은
타고나는 것인가
오래전 아버지가 남긴
족보를 들여다보다
몰락한 문인 집안의
역사를 읽어내었다
한양에서 변방 시골로
낙향한 조상 선비님은
그저 농사짓고
시를 쓰고 서당에서
아이들을 가르쳤던
모양이다 평생 아버지는
당신의 소설을 쓰고
싶어했으나 글 한 자
남기지 못했다 가끔
내가 물려받은 문재를
생각한다 동생들은
글자가 아닌 물건을
팔고 있다 팔지 못할
글을 참으로 질기게도
붙잡고 이후로도
오랫동안 그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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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집


말년의 아버지는
늘 아팠다 병고에
시달리느라 볼은
홀쭉 들어갔고
다리는 뼈 가죽이
드러날 정도였다
새벽, 허물어질 듯
낡은 집 흙바닥에
아버지는 거적때기를
깔고 누우셨다 노여운
기색이 역력하셨다
왜 그러냐 물어니
아무 말 없이 돌아
누우셨다 엄마는
슬피 울었고 나는
그 집을 서둘러 빠져
나왔다 아버지의 상(喪)을
치른 지 8년이 지났다
이제는 엄마가 아프다
엄마의 머리에서는
날마다 delete 키가
쉴새없이 눌러지고
자식인 내 생일을
기억하지 못한다
오늘도 엄마의 집으로
출근한다 어디선가
큰 개가 짖는 소리가
들리고 작은 개가
뒤이어 짖는다
베란다 앞쪽 어린이집
애들의 노는 소리는
몽글몽글한 4월의
노란 송화 가루가
되어 흩뿌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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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은 비


내일은 비 예보가 있다
아침 햇살은 넉넉하니
서둘러 빨래를 한다
엄마가 오래전 수술
자국이 아프다고 말하면
다음날 꼭 비가 왔다
내 오른쪽 귀가 따끔,
거리면 비가 온다
다음날, 아니 그
다음날에도 비가
몇 방울이라도 온다
오후 늦게 이불 빨래를
걷는다 다가오는
비의 기운이 찔끔
거리며 돋는 노랑
차렵이불에는 조금
있으면 누런 송화
가루가 묻어날 것이며
누리끼리한 장마의
손거스러미가 떨어질
것이다 빨래 건조기에는
이러한 노글노글한
낭만이 없다 따끔,
다시 한번 오른쪽 귀의
신경이 신호를 보낸다
그렇게 아팠던 모든
것들은 자신의 눌렸던
슬픔을 토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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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동 사라다


엄마는 사라다를
정말 잘 만드셨어
요리를 좀 하시는
편이었지 하지만
난 엄마처럼 그런
재주는 없어 가만
생각해 보니 이유가
있더군 아주 간단한
이유 그건,

절대로 레시피를
따라서 하지
않기 때문이야

무슨 요리의 대가도
아니면서 계량컵과
스푼은 철저히
무시하며 요리의
순서도 바꾸어버려
뭐 내가 잘났다고
생각해서 그런 건
아니고 그냥,

귀찮아서 그래

최근에는 나만의
새로운 요리를
개발했어
냉장고에는 이런
저런 식재료들이
굴러다니기 마련이지
그런 자투리들을,

죄다 그러모으는 거야

견과류 조금
파프리카 몇 조각
살짝 물크러지려는
양상추 한 움큼
조각난 햄
옥수수 통조림
그리고 뭐가 있더라
그래, 귀리가 있었지

마요네즈에 버무리고
밀폐용기에 나누어
넣고 냉동실로
보내버려

그게 무슨
맛이냐고?

미니멀리스트의
삶은 생각보다
고달파 맛에
집착하는 삶에서
자유로워지는
거야 천천히
읽으면 어차피
똑같은 걸
사라다 사라다
사라다 냉동
사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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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시간


일주일에 한 번 하는
화장실 청소는
이상하게 하루 이틀씩
미뤄져 일요일에
하던 것이 월요일
수요일 목요일
그렇게 미뤄지다
한 달 만에 일요일
악보의 도돌이표

무대공포증에 걸린
피아니스트는
다시는 무대에서
연주를 못할 것
같은 심정이 되어
갖고 있는 모든
악보를 내어다
버릴 궁리를 하지

매일 음계 연습을
하지만 암만 궁리해
봐도 이걸로 먹고
살 방편은 참으로
요원하며 눈물나게
궁핍하며 짠하게
소름이 돋고
소금물을 들이킨
심정이 되어 버려

하기 싶지 않은 때에
하기 싫은 이야기를
쓸 수 있어야 한다,
고 누군가 주제넘게
충고하더군 참으로
오랫동안 너는
하고 싶은 때
하고 싶은 이야기만
써내려고 했어

화장실 청소같은
불편한 인생의
모서리 가만히
고개를 수그려
쓰고 싶지 않은
이 시간에
쓰고 싶지 않은
이 시를 쓰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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