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는 파리 샹젤리제 거리를 가득 메운 인파들을 보여주는 것에서 시작한다. 2018년, 프랑스는 월드컵에서 20년 만에 우승컵을 거머쥐었다. 영화의 주인공 소년 Issa도 프랑스 국기를 몸에 휘감고 친구들과 기쁨을 나눈다. 그러나 그 기쁨은 잠시, 이사에게는 지옥과도 같은 시련이 펼쳐친다. Ladj Ly의 2019년작 영화 'Les Misérables'은 러셀 크로의 견디기 힘든 노래가 나오는 2012년작 뮤지컬 영화와는 제목만 같다.

  감독 라지 리는 말리 태생의 프랑스 이민자 가정 출신으로 영화 속 배경인 파리 교외의 Montfermeil에서 자랐다. 이 감독은 논쟁적인 이력을 가지고 있는데, 2011년에 '납치'와 '불법 감금'으로 실형을 선고받은 적이 있다. 영화는 어떤 면에서는 그 자신이 가장 잘 아는 지역 공동체와 사람들에 대한 자전적 이야기처럼 보이기도 한다. 실제로 인터뷰에서 그는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사람들은 '우리'라는 이름을 내걸고 '우리의 이야기'를 하고 싶어하죠. 나 또한 내 이야기를 그런 방식으로 하고 싶었어요(cineuropa.org와의 인터뷰 가운데)"

  2005년, 파리 교외의 Clichy-sous-Bois에서 두 명의 무슬림 청소년들이 감전사로 죽었다. 경찰의 불시 검문검색을 피해 달아나려다 숨어든 곳이 변전소였다. 이 사건으로 약 3주간에 걸쳐 파리 근교의 여러 곳에서 동시다발적인 방화와 폭력사태가 촉발되었다. 당시 프랑스는 국가 비상 사태를 선포할 정도로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갔었다. 외형적으로는 무고한 청소년들의 죽음에 분노해서 일어난 폭동이었지만, 거기에는 프랑스 사회의 구조적인 이민자 문제가 내재되어 있다. 영화는 그 사건을 모티프로 취했다.  

  이사가 사는 동네는 전형적인 슬럼가로 매우 '거친 곳'이다. 아이들은 훔치고 뺏는 것이 일상이며, 그곳을 지배하는 것은 지역 갱단들이다. 영화에 등장하는 경찰들도 그런 곳에서 자신들의 존재감을 과시하기 위해 무법자처럼 행동한다. 상스러운 욕설은 기본이며, 검문검색을 이유로 여학생을 희롱한다. '내가 곧 법이다'라고 소리치며 주민들 위에 군림하려는 경찰 크리스, 그리고 그것을 방조하는 동료 그와다의 행태는 온건한 신참 스테판에게 견디기 힘든 것이다.

  그런 경찰들에게 서커스단의 사라진 새끼 사자를 찾아내라는 임무가 떨어진다. 그들은 곧 이사가 범인이라는 것을 알게 되고, 이사를 체포하려는데 같이 있던 아이들이 난리를 친다. 혼란스러운 와중에 그와다는 실수로 고무탄을 이사의 얼굴에 쏜다. 이사는 목숨을 건졌지만, 경찰들은 공중에 떠있는 드론이 자신들을 찍었음을 알고 패닉에 빠진다. 촬영자를 찾아나선 경비대장 크리스, 과연 그들은 드론의 주인을 찾아내어 자신들의 실수를 무마할 수 있을까...

  영화 속 이사가 사는 몽페르메일의 주민들은 대부분 이민자들, 서북부 아프리카 출신의 이슬람인들이다. 범죄와 폭력이 일상인 그곳에서 크리스를 비롯한 경찰들의 부조리하고 폭압적인 모습은 생존의 방식처럼 보이기도 한다. 비극은 그런 곳에서 사는 이들, 특히 어린 아이들이 보고 배우는 것이 희망과는 거리가 멀다는 데에 있다. 주인공인 이사는 그곳의 흔한 아이들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도둑질과 갈취, 마약과 폭력이 공기처럼 스며든 곳에서 자란 아이들에게 자신들을 적대시하는 경찰은 실체화된 악이며 반대자이다. 얼굴에 부상을 입은 자신을 내팽개치고, 오히려 입막음을 하려는 경찰에게 이사는 분노한다. 그 분노는 원초적인 형태의 복수로 나타난다. 이에는 이, 눈에는 눈, 세 명의 경찰들은 아이들의 근거지를 순찰하다가 건물에 갇혀 죽을 위기에 내몰린다.

  감독 라지 리는 이러한 구조화된 폭력과 복수의 악순환을 감각적인 영상으로 담아낸다.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드론을 이용한 항공 촬영 장면이다. 드높은 상공에 떠있던 드론은 점차 수직으로 하강하며, 거시적인 시점에서 미시적인 시점으로 이동한다. 드론은 일종의 움직이는 현미경인 셈이다. 관객들은 드론이 보여주는 화면을 통해 도시의 숨겨진 이면을 마주한다. 작은 점들이 촘촘히 박혀있는 것처럼 보이는 잘 정비된 풍광의 도시는 온갖 불평등과 가난, 범죄와 폭력으로 점철된 복마전(伏魔殿)과 같은 장소이다. 아마도 라지 리는 그런 실체적 진실을 드러내면서 이렇게 묻는 것일지도 모른다. '당신들이 방리유(Banlieue)가 뭔지나 알어?'

  사실 이 영화가 프랑스 사회의 고질적인 '방리유(Banlieue, '교외'라는 뜻의 프랑스어)' 문제를 다룬 첫 영화는 아니다. 이 영화에서 마티유 카소비츠의 영화 '증오(La Haine, 1995)'의 기시감을 느끼는 것은 당연하다. 역시 이민자 가정 출신이라는 배경을 가지고 있는 카소비츠도 '증오'에서 방리유의 문제를 다루었다. 파리 근교의 이민자와 하층민 주거지를 뜻하는 '방리유'가 사회 문제로 고착화된 것은 오랜 기원을 가지고 있다. 1980년대부터 방리유는 범죄의 근원지로 인식이 되었는데, 이미 1981년 여름에 이민자 청소년들이 무려 수백 대의 차량을 전소시키는 폭동이 일어나기도 했다. 연말에 차량에 불을 지르는 것은 그곳의 연례 행사처럼 여겨질 정도이며, 방리유의 일부 지역은 아예 마약 도시로 경찰의 진입이 불가능한 곳도 있다.       
 
  프랑스의 식민지 역사와 이민사는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다. 1850년대 제정 프랑스 시절부터 외국의 값싼 노동력 도입이 정책적으로 이루어졌다. 제국주의 시대를 거치면서 식민지였던 서북부 아프리카 지역으로부터 많은 이민자들이 들어왔다. 다른 튀니지와 모로코와 같은 식민지와는 다르게 '프랑스령 알제리'는 본토로 인정되는 곳으로 알제리로부터의 상당수 이민자들이 프랑스에 정착했다. 2차 대전 이후에는 재건과 산업 인력의 수요로 인해 1950년대부터 정책적으로 이민이 장려되었다. 프랑스 정부는 이민자들의 주거지 문제를 방리유의 대규모 주택단지 건설로 해결했다. 그러나 방리유가 눈에 보이지 않는 거대한 분리 구역으로 자리잡는 데에는 그다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곳은 곧 계층과 직업, 종교, 인종에 있어서 차별을 감수해야 하는 열악한 주거지로 전락했다.

  라지 리가 '레 미제라블'에서 보여주는 방리유의 문제는 어쩌면 최신판의 모습일 것이다. 관객들은 이 영화에서 목도하는 폭력과 함께 몽페르메일 이민자 사회 내부의 모습에도 문화적 충격을 받는다. 그들의 독특한 이국적 복식을 비롯해 토착 풍습인 '계'를 하고 있는 여성들이 나오는 장면은 과연 저곳이 프랑스가 맞나, 하는 질문을 던지게 만든다. 이제 방리유의 다양한 인종적, 문화적 특징들은 파편화된 게토(ghetto)로 자리잡았고, 그것이 프랑스가 직면한 사회 갈등 문제 해결을 더 어렵게 하고 있는 요인이기도 하다. 자유, 평등, 우애, 라는 공화국의 이상을 기치로 내걸고, 그 어떤 종교적 예외나 배려를 인정하지 않는 세속주의(laïcité)는 이슬람 이민자들을 더 분파적이고 방어적으로 만들었다. 2015년에 발생한 '샤를리 에브도(Charlie Hebdo)' 테러 사건은 그 극단의 예를 보여준다.

  “세상에는 그 어떤 잡초도, 무가치한 사람은 없습니다. 오직 나쁜 농부만 존재할 뿐입니다(There are no weeds, and no worthless men. There are only bad farmers).”

  영화는 빅토르 위고의 '레 미제라블'의 한 귀절을 인용하면서 끝난다. 결국 라지 리는 영화 속에서 펼쳐 보여준 모든 악덕과 폭력의 원흉으로 프랑스, 그것을 통치하는 지배 계층, 더 나아가 공화국의 이상을 지목한다. 모두가 자유롭고, 평등하고, 우애로 연대하는 그런 나라는 이제 존재하지 않는다, 고 그는 외친다. 그의 '레 미제라블'은 공화국의 이상에 더이상 기대를 갖고 있지 않은 이민자들과 하층민들인 셈이다. 자신의 이야기로 '우리의 문제와 이야기'를 하고 싶어했던 감독의 바램은 그렇게 실현되었다.


이 영화와 함께 보면 좋은 영화

1. 증오(La Haine, 1995), 마티유 카소비츠
2. 똑바로 살아라(Do the Right Thing, 1989), 스파이크 리
3. 알제리 전투(The Battle Of Algiers, 1966), 질로 폰테코르보


*사진 출처: readthespirit.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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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대 영화: 
글렌 밀러 스토리(The Glenn Miller Story, 1954),

너무 늦은 블루스(Too Late Blues, 1961)


  여러분은 음악 영화에서 무엇을 기대하는가? 귀에 착착 감기는 음악, 천부적 재능을 지녔지만 시련과 고통을 겪는 주인공, 결국 실패를 딛고 멋지게 재기하는 결말... 오늘 다룰 영화들은 바로 그 음악이 중심이 되는 영화이다. 여기 서로 다른 색깔을 지닌 두 편의 음악 영화가 있다. 독특한 서부극들을 만든 앤소니 만(Anthony Mann) 감독은 1954년에 '글렌 밀러 스토리'를 내놓았다. 영화는 스윙 재즈 시대(The Swing Era, 1930-1945)를 대표하는 인물들 가운데 한 명인 글렌 밀러(Glenn MIller)의 일대기를 담았다. 주연은 제임스 스튜어트, 그는 앤소니 만 감독과 여러 편의 작품을 함께 했다. 재즈 음악인을 다룬 존 카사베츠(John Cassavetes) 감독의 영화도 있다. '너무 늦은 블루스(Too Late Blues, 1961)'는 카사베츠가 메이저 스튜디오와 처음으로 작업한 영화이다. 재능을 가졌지만 상처받고 부서지는 젊은 재즈 음악가의 초상을 그렸다.

  '글렌 밀러 스토리'는 관객들이 음악 영화에 기대하는 모든 것들을 충실히 담아낸다. 영화의 도입부, 풋내기 재즈 트롬본 연주자인 글렌 밀러는 전당포에 악기를 맡겼다 찾는 일상을 반복한다. 악단 생활로 겨우 생계를 이어가고 있기는 하지만, 밀러에게는 자신만의 음악을 만들겠다는 꿈이 있다. 영화의 전반부는 밀러의 러브 스토리로 채워진다. 아내 헬렌 버거는 직업 음악가로서의 밀러를 이해하고 지원한다. 그런 아내 덕분에 밀러는 독립 악단을 꾸리고, 새로운 스타일의 재즈 음악을 만들어 나간다. 물론 많은 위인전이 그러하듯 밀러도 단번에 성공의 정점에 오르지 않는다. 밀러의 신생 악단은 어려움 속에 연주 여행을 이어가지만 결국은 파산 위기에 처하고 만다.
 
  '너무 늦은 블루스'의 주인공도 재즈 음악을 한다. 영화의 주인공은 'Ghost'란 별명을 가진 재즈 밴드 리더 웨이크필드(바비 다린 분)이다. 그의 악단은 변두리 마을 회관과 클럽을 전전하며 공연을 이어간다. 어느 날, 고스트는 파티에서 가수 지망생 제스가 노래 부르는 것을 보게 된다. 제스는 고스트의 제안으로 밴드에 합류하고, 둘은 연인이 된다. 그러나 제스를 갈망하는 에이전트 베니는 그 모든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는 겉으로는 고스트에게 음반 녹음의 기회를 주면서 성공의 길을 함께 하려는 것처럼 보인다. 한편 제스의 등장은 밴드 부원들 사이에 긴장과 질투를 일으키고, 그것은 음반 취입 축하 파티의 예기치 못한 난투극과 얽힌다.

  앤소니 만 감독은 짜임새 있는 대본을 바탕으로 신화가 되어버린 재즈 음악인의 삶을 직조해 나간다. 자신만의 음색을 찾기 위해 고군분투하던 밀러는 독자적인 악기 배치와 구성, 편안한 스윙의 음률로 작곡한 곡들로 마침내 정상의 자리에 오른다. 미국 전역에서 밀러의 재즈곡들이 음반과 주크 박스로 쉴 새 없이 흐르게 된다. 그렇게 밀러는 최고의 전성기에 들어선다. 영화의 음악을 담당한 헨리 맨시니는 유려한 편곡으로 밀러의 음악에 빛을 더한다. 무엇보다 이 영화에서 가장 즐거운 부분은 루이 암스트롱을 비롯해 당대 재즈 음악인들의 합동 공연 장면이라고 할 수 있다. 독보적인 루이 암스트롱의 노래와 연주를 들을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이 영화는 재즈 음악 팬들에게 최고의 선물이 된다.     
 
  '글렌 밀러 스토리'의 주인공이 그렇게 성공 신화를 써나가는 것과는 달리, 카사베츠는 자신이 만들어낸 '고스트'에게 그런 장밋빛 미래를 선물해줄 생각이 전혀 없다. 'Shadows(1959)'로 당시 미국 영화계에 이단아처럼 등장한 카사베츠는 관객이 음악 영화에서 기대하는 그 모든 것들을 깨부수기로 마음먹은 것처럼 보인다. 실제 가수이기도 했던 Bobby Darin은 너무나도 유약하고 예민한 음악가 고스트를 연기한다. 제스는 축하 파티에서 자신에게 추근거리는 남자와의 싸움을 피한 고스트에게 배신감을 느끼고 그 곁을 떠난다. 밴드는 해체되고, 고스트는 돈 많은 중년 여성의 애인이 되어 시시한 클럽 연주자의 삶을 이어간다. 베니는 그런 고스트를 조롱한다.

  카사베츠의 영화에서 '약함(weakness)'는 반복적으로 변주되는 테마가 된다. 'Husbands(1970)'의 중년 남자들이 처한 중년의 위기, 'A Woman Under the Influence(1974)'에서 알콜 중독과 우울증으로 무너지는 가정 주부, 늙음과 사그라드는 재능으로 고통스러워하는 여배우가 주인공인 'Opening Night(1977)'. 그 영화들 속의 인물들은 그렇게 내면에 자리한 약함과 지리한 싸움을 이어간다. 그들이 가진 '약함'은 '결함(fault)'과는 결을 달리한다. 부족함과 손실의 의미로서의 '결함'은 때로 잘못과 악덕에 가깝지만, '약함'은 그러한 것과는 거리가 있다. 카사베츠는 인간의 내면에 자리한 그 약함이 가져오는 상처와 고통스러운 일면을 부각시킨다. '너무 늦은 블루스'의 고스트는 현실과 타협하지 못하는 결벽증적이고 유약한 성정(性情) 때문에 자신의 재능을 펼치기도 전에 꺾인다. 그런 고스트와 대척점에 있는 베니는 착취적이고 비열한 유형의 인간으로 세상은 그런 이들에게 더 많이 열려있다.

  '너무 늦은 블루스'의 고스트가 자신의 약함으로 몰락의 길을 걷는 것과는 달리, '글렌 밀러 스토리'의 주인공은 엄청난 부와 명예를 '애국'이라는 대의명분 앞에 스스로 내던진다. 2차 대전이 한창이던 1942년, 그는 38세의 나이로 공군에 입대한다. 당시 많은 재즈 음악인들은 자발적으로 군에 입대해서 군악대 활동으로 시민의 의무를 다했다. 당시 재즈가 미국인의 음악에서 전세계인의 음악이 된 데에는 그렇게 군부대 밴드의 열정적인 활동이 큰 역할을 했다. 밀러는 군에 입대해서 자신의 재즈 음악으로 자유와 평화에 기여하고 싶어했다. 영화는 독일군의 폭격을 받으면서도 군병원에서 위문 공연을 이어가는 밀러와 군악대의 영웅적 행위를 부각시킨다. 밀러의 그러한 애국적 면모는 비행기 사고로 인한 비극적인 죽음과 함께 극의 대미를 이룬다.

  시련과 실패를 딛고 일어서 성공의 길을 가던 재즈 음악인의 장렬한 최후, 그렇게 앤소니 만 감독의 '글렌 밀러 스토리'는 당시 미국 관객들의 기대에 부응하며 큰 흥행 성적을 거두었다. 글렌 밀러의 곡들이 담긴 영화 음악 음반도 불티나게 팔렸다. 카사베츠의 음악 영화는 일반 대중들의 취향과는 거리가 있었다. 스튜디오의 제한된 예산과 '한 달'이라는 급박한 촬영일정에 쫓겨서 거의 급조하듯 만든 이 영화를 감독은 평생 증오했다. 파라마운트는 신인 감독에게 새로운 것을 기대했으나 전적인 권한을 주지는 않았다. 제작 과정 내내 파열음을 일으킨 카사베츠는 스튜디오의 상업주의를 경멸했다.

  '너무 늦은 블루스'의 주인공 별명이 '고스트(ghost)'인 것처럼, 이 영화를 만든 카사베츠도 메이저 스튜디오의 합작 과정에서 '유령'과 같은 존재가 되어버렸다. 엉성한 내러티브, 대부분 실내 세트 촬영으로 한정된 단조로운 장면들, 영화의 우울한 결말까지 겹쳐서 영화는 겨우 수지타산을 맞추었다. 처참한 흥행 실패를 기록한 United Artists 제작의 'A Child Is Waiting(1963)'을 끝으로, 카사베츠는 독립 영화 제작자의 길을 걷는다.

  나에게 두 영화 가운데 어느 것이 더 나은가를 묻는다면 대답하기가 쉽지 않다. 두 영화 모두 각각 장점과 단점을 가지고 있다. '글렌 밀러 스토리'는 비교적 사실에 충실한 전기 영화로서 재즈 팬들에게는 필수 감상 목록이 되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멋진 음악과 루이 암스트롱의 존재감에도 불구하고 제임스 스튜어트의 뻣뻣하고 매너리즘적인 연기는 실망스럽다. '너무 늦은 블루스'는 세련되고 잘 만들어진 음악 영화와는 거리가 멀다. 재능을 가진 약한 인간, 그는 끊임없이 상처받고 결국에는 그저 주변부를 맴도는 인생을 살아간다. 어쩌면 그것이 우리가 아는 진짜 현실의 이야기와 더 가까울 것이다. 그렇게 카사베츠가 선사하는 이 씁쓸한 음악 영화는 가슴 아픈 여운을 남긴다.   



*사진 출처: tcm.com


**사진 출처: thenewbev.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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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리 소설 팬들에게 기차를 배경으로 하는 가장 잘 알려진 작품은 아마도 '오리엔트 특급 살인(1934)'일 것이다. 애거서 크리스티의 이 소설을 원작으로 한 시드니 루멧 감독의 1974년작 영화도 있다. 크리스티는 또 다른 작품 '패딩턴발 4시 50분(1957)'에서도 '기차'의 공간성을 치밀하게 이용한다. 일본의 추리 소설 작가 마츠모토 세이초도 '점과 선(1957)'에서 기차를 전면에 내세워 사건을 전개시킨다.

  1950년대에 제작한 일련의 서부극으로 유명한 앤소니 만(Anthony Mann) 감독이 1951년에 'The Tall Target'을 내놓았을 때, 관객들은 물론이고 평론가들도 낯설게 느꼈던 모양이다. 영화는 흥행에 실패했고, 앤소니 만 감독의 필모그래피에서도 그다지 주목받는 작품이 되지는 못했다. 그러나 1861년의 어느 기차를 배경으로 하는 이 흥미진진한 영화는 좀 더 나은 대접을 받을 필요가 있다.

  1861년 2월, 뉴욕 경찰 존 케네디는 대통령 후보로 출마한 링컨에 대한 암살 첩보를 입수한다. 그는 링컨이 볼티모어에서 워싱턴 D.C.로 이동할 때 타게 될 기차가 암살범들의 표적이 될 것이라고 직감한다. 그러나 케네디의 보고는 묵살되고, 분개한 그는 혼자서 암살 시도를 저지하기로 마음먹는다. 기차에서 자신의 동료와 만나기로 한 케네디는 차디찬 주검이 되어버린 형사를 발견한다. 분명히 기차 안에서는 어떤 음모가 진행되고 있다. 그러나 어떻게 그 많은 승객들 가운데 암살범을 찾아낼 것인가? 케네디는 과연 링컨을 구할 수 있을까...  

  정치적 논쟁의 중심에 서있었던 링컨은 늘 암살 위협에 노출되어 있었다. 영화 'The Tall Target'은 링컨을 둘러싼 그런 음모들 가운데 한 가지를 주요한 플롯으로 취한다. 선거 운동을 위해 이동하는 그를 노리는 이들이 있다. 그리고 그것을 막으려는 형사는 오직 혼자의 힘으로만 싸워야 한다. '기차'는 형사 케네디의 외로운 전장이나 마찬가지이다. 암살범은 철저히 자신의 존재를 감추고 있으며, 그곳에는 너무나 다양한 이들이 있다. 민병대 장교, 작가, 남군에 입대 예정인 웨스트포인트 졸업 생도와 여동생, 그들의 흑인 노예 소녀, 장난꾸러기 꼬마와 엄마... 기차 안은 마치 사회의 축소판처럼 보인다.

  당시 미국 사회를 뜨겁게 달구었던 노예제를 둘러싼 논쟁은 승객들 사이의 대화를 통해서 드러난다. 노예제에 반대하는 작가 알솝 부인은 남부 출신의 보퍼트 남매와 대척점에 서있다. 알솝 부인이 남매가 데리고 있는 노예 소녀 레이첼에게 자유에 대한 질문을 던지자 지니 보퍼트는 민감하게 반응한다. 지니는 레이첼이 자신과 같이 자유로우며, 그것이 레이첼에게 따로 자유를 줄 필요가 없는 이유라고 강변한다.

  "자유는 아가씨가 나에게 주어야만 하는 게 아닙니다. 그건 태어날 때부터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이에요(Freedom isn't a thing you should be able to give me, Miss Ginny. Freedom is something I should have been born with)."

  노예 소녀 레이첼은 부드럽고 단호한 어조로 자신의 뜻을 밝힌다. 알솝 부인이 대변하는 것처럼 노예제는 인본주의적 관점에서 단순한 신념의 문제만은 아니었다. 그것은 첨예한 경제 논리와 연관되어 있기도 했다. 케네디를 돕는 것처럼 보였던 민병대 장교 재퍼스는 암살 음모에 연루된 것으로 밝혀진다. 그는 노예제가 폐지되면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북부 면화 공장의 수익이 줄어들 것을 염려한다. 실제로 남부가 연방에서 탈퇴한 가장 큰 이유는 경제적인 면과 관련된 것이었다. 노예들에 의존하고 있는 남부의 면화 농장주들은 링컨의 반대 입장에 설 수 밖에 없었다. 

  앤소니 만은 '기차'라는 닫힌 공간을 그렇게 정치적 공론의 장으로 변모시킨다. 외형적으로는 느와르의 틀을 취하고 있지만, 이 영화의 내재적인 메시지는 매우 정치적이다. 영화는 '링컨'이 대변하는 위대한 연방의 가치, 그리고 흑인 민권의 옹호자로서의 상징성을 신화화한다. 암살범들에게 키가 큰 링컨의 존재를 뜻하는 'The Tall Target'은 그러므로 어떻게든 지켜야할 존재가 된다. 기이한 일치로 영화 속에서 그 링컨을 암살의 위협에서 구하는 것은 '케네디'란 이름의 형사다. 그리고 영화가 개봉되고 9년 후, 우리가 알고 있듯 정치인 케네디는 미국의 대통령으로서 자유와 인권을 상징하는 인물이 된다.

  '매카시즘'이라는 사상 검증의 광풍이 휘몰아닥친 그 시기의 미국인들에게 링컨은 분열을 통합하는 상징적 아이콘이기도 했다. 공산주의자 색출은 단지 정치권에서만 문제가 된 것은 아니었다. 미국 사회 전체를 강타했으며, 그로 인해 직장에서 쫓겨나거나 투옥당하는 이들이 상당수에 이르렀다. 상원의원 매카시가 그 광풍에 편승한 기회주의자였다면, 노회한 정치인 닉슨이야말로 실질적인 주동자였다. 그는 이 시기에 공화당 내에서 자신의 정치적 기반을 확고히 한다.

  생존을 위해 서로가 서로를 고발하는 시대, 그 누구도 믿을 수 없다. 영화 속 형사 케네디는 적과 친구를 구분할 수 없는 모호한 안개 속과 같은 기차 안을 끊임없이 탐색하며 돌아다닌다. 마침내 그의 분투로 링컨은 암살자의 손길에서 벗어난다. 용기있는 개인의 결단은 그렇게 한 사람의 대통령과 미국을 구한다. 가상의 역사물로서 'The Tall Target'은 기차라는 숨막힐 듯한 폐쇄적 공간 속에 당시 미국 사회의 분열과 정치적 독선을 은유적으로 담는다.


*사진 출처: tc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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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들 집으로, Tutti a casa(Everybody Go Home, 1960), 120분
과학적인 카드 도박꾼, Lo Scopone Scientifico(The Scientific Cardplayer, 1972), 116분



이 글에는 두 영화의 결말 부분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1. 폭압적 파시즘과 전쟁의 기억, Tutti a casa

  제 2차 세계 대전이 한창이던 1943년 7월, 시칠리아에 진입한 연합군으로 인해 무솔리니의 파시스트 정권이 무너진다. 무솔리니는 체포되고, 국왕의 명령에 따라 새로 수립된 정부는 연합군과의 휴전을 모색한다. 그러나 당시 이탈리아에 주둔하고 있던 독일군은 그 틈을 타서 이탈리아 군대를 무장해제시키고 이탈리아 본토 수복에 나선다. 루이지 코멘치니 감독의 1960년작 영화 'Tutti a casa(Everybody Go Home)는 바로 그 시기를 배경으로 한다. 코멘치니 감독은 전후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감독임에도 비토리오 데 시카나 로베르토 로셀리니와 같은 세계적 명성을 얻지는 못했다. 이탈리아 내에서의 그의 유명세에도 불구하고, 아마도 그가 찍은 너무 많은 영화들에서 코멘치니의 분명한 색깔을 찾기가 어렵다는 점도 한몫할 것이다. 하지만 코멘치니 감독의 필모그래피는 그가 치열한 현실인식을 바탕으로 수준높은 영화를 제작했음을 보여준다. 그런 면에서 'Tutti a casa'는 그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다.  

  베네치아 해변가에 주둔 중인 이탈리아 부대의 하급 부사관 알베르토(알베르토 소르디 분)는 라디오에서 정부가 발표한 휴전 성명을 듣는다. 끝이 보이지 않는 지겨운 전쟁에 지친 부대원들은 모두들 집에 돌아갈 수 있다는 기쁨에 휩싸인다. 소집 해제 명령을 기다리는 부대원들과는 달리 군 수뇌부는 뜻밖의 상황에서 우왕좌왕하며 어쩔 줄을 모른다. 그렇게 혼란스러운 가운데 그들이 부대를 떠나자마자 어디선가 총탄이 빗발치듯 날아온다. 연합군에 맞서 이탈리아 장악에 나선 독일군들의 반격이 시작된 것이다. 과연 그들은 꿈에 그리던 집에 무사히 도착할 수 있을까...

  주인공 알베르토와 부대원들이 남쪽에 있는 집으로 향하는 여정에서 목도하게 되는 것은 전쟁의 참상이다. 철로를 따라 걷던 그들은 체포된 유태인들을 실은 기차와 마주한다. 물 좀 달라는 소리와 함께 자신들을 기다리는 것은 죽음이라는 절규를 듣는다. 참혹한 광경이지만, 부대원들은 남 생각을 할 여유가 없다. 곳곳에서 밀고 내려오는 독일군들을 피하는 것만이 살 길이기 때문이다. 코멘치니가 펼쳐서 보여주는 부대원들의 여정은 전후 이탈리아 영화의 사실주의적 사조인 '네오리얼리즘(neorealism)'과 맞닿아 있다. 나치를 피해 달아난 유태인 여성이 결국 신분이 발각되어 총에 맞아 죽고, 굶주린 시민들은 밀가루 포대가 실린 트럭을 강탈해서 서로 가져가느라 정신이 없다. 폭격을 당해 처참하게 부서지고 무너진 도시의 잔해 속에서 어린 꼬마는 배고픔과 공포에 질려 울부짖는다.

  'Tutti a casa'에 펼쳐진 그러한 지옥도는 그럼에도 지나치게 무겁고 비장한 느낌을 주지 않는다. 코멘치니는 중간중간 가벼운 유머를 섞는다. 이탈리아의 국민 배우 알베르토 소르디가 표현하는 소박하고 인간적인 병사 알베르토의 모습은 영화의 긴장감과 공포를 상당부분 누그러뜨린다. 완급이 잘 조절된 코멘치니의 전쟁 서사는 의외의 흡인력을 보여준다. 두 시간의 러닝타임을 결코 지루하지 않게 만드는 감독의 역량은 전쟁의 참상과 함께 휴머니즘을 강조하는 데에서 잘 드러난다.

  마침내 온갖 우여곡절을 겪으며 집에 도착한 알베르토는 부친과 상봉한다. 하지만 재회의 기쁨도 잠시, 알베르토는 자신이 생각한 것과는 다른 현실과 마주한다. 궁핍함에 찌든 아버지는 아들이 다시 파시스트 군대에 입대해서 급료를 받아오길 기대한다. 경제적인 곤궁은 자식마저도 사지로 내몬다. 실망한 알베르토는 집을 떠나지만 곧 부대원 체카렐리와 함께 독일군에 끌려간다. 결국 도망을 치다가 총알이 쏟아지는 길바닥 한복판에서 죽어가는 체카렐리를 알베르토는 결코 외면할 수가 없다. 목숨을 걸고 달려나가 체카렐리의 마지막을 함께 하는 알베르토의 모습은 전쟁이 훼손할 수 없는 고귀한 인간성을 보여준다.

  모두가 집을 향해 나섰지만, 그 누구도 집에 머물 수 없었던 비극의 여정. 영화의 마지막에 레지스탕스에 합류하는 알베르토를 통해 애국주의를 부각시키면서도 코멘치니는 영화 전체를 통해 냉철한 균형 감각을 유지한다. '1943년 9월 8일'이라는 날짜가 선명한 화면과 함께 영화는 끝난다. 그 날은 이탈리아가 연합군에 항복을 선언한 날이었다. 그러나 이탈리아 본토를 장악한 독일군은 무솔리니의 괴뢰 정부를 앞세워 전쟁을 이어간다. 이탈리아에서 포성이 멈추려면 그로부터 2년이란 시간이 더 지나야 했다. 코멘치니는 'Tutti a casa'를 통해 폭압적 파시즘과 전쟁의 기억을 옴스라니 복원한다.    


2. 코미디에 숨겨진 계급 갈등과 빈부 격차의 문제, Lo Scopone Scientifico

  빌리 와일더 감독의 '선셋 대로(Sunset Boulevard, 1950)'에는 기묘한 커플이 등장한다. 부유한 노부인과 젊고 잘 생긴 남자. 윌리엄 홀든이 연기한 가난한 극작가 조는 은퇴한 무성 영화 시대의 스타 노마의 재력에 포섭된다. 결국 조의 죽음으로 끝난 영화 속 이 커플이 만약 그대로 나이를 먹었다면 어떠했을까? 아마도 코멘치니의 1972년작 영화 'Lo Scopone Scientifico'에 나오는 베티 데이비스와 조셉 코튼의 모습일 것이다. 이 영화는 제목부터가 특이한데, 직역하면 '과학적인 스코폰 게임'이란 뜻이다. '스코폰(scopone)'은 독특한 그림의 카드로 하는 이탈리아식 카드 게임이다. 백만장자 노부인은 스코폰의 광팬으로 그 게임을 위해 이탈리아를 방문한다. 헐리우드의 고전기를 대표했던 배우 조셉 코튼이 베티 데이비스와 짝을 이뤄 나온다. 그 두 배우와 함께 나오는 이탈리아 배우는 'Tutti a casa'의 알베르토 소르디, 그리고 이 영화의 제작자 디노 드 로렌티스의 아내이며 명배우인 실바나 망가노(Silvana Mangano)이다.

  영화는 미국인 백만장자 노부인이 공항에 도착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빈민가에서 살고 있는 페피노와 안토니아 부부는 스코폰 게임의 고수로 노부인의 게임 테이블에 초대받는다. 부부에게는 그 무엇보다 돈이 절실히 필요하다. 다리가 불편한 딸의 다리도 고쳐주고, 장의사 일을 돕는 어린 꼬마들의 미래를 위해서 노부인과의 게임에서 이겨야만 한다. 가난한 마을 사람들은 모두 한마음으로 페피노 부부가 이기기를 기원한다. 부부에게 첫 판돈 백만 리라를 호기롭게 빌려주며 시작하는 노부인, 페피노와 안토니아는 차분하게 게임에 집중하며 연전연승을 이어간다. 마침내 7백만 리라를 부부가 따냈을 때, 페피노는 그만 두고 싶어하지만 안토니아는 기세를 올려 더 많은 돈을 따려 한다. 지는 것을 죽기 보다 싫어하는 노부인도 의사까지 대기시켜 가며 게임을 이어간다. 과연 부부는 스코폰으로 일확천금의 꿈을 이룰 수 있을까...

  얼핏 보기에 이 영화는 한 편의 즐거운 코미디 같다. 카드 게임을 위해 이탈리아로 날아온 백만장자, 그 게임에 참여하는 가난한 부부, 그리고 부부의 승리를 기원하며 판돈을 거는 빈민가 사람들. 코멘치니는 무언가 어울리지 않는 이 기묘한 조합의 이야기에 당시 이탈리아의 현실을 담아냈다. 1968년, 프랑스에서 일어난 68혁명은 전 유럽을 휩쓸었다. 이탈리아도 예외는 아니었다. 전후 축적된 사회적 모순과 불만은 1960년대 후반부터 이탈리아를 흔들기 시작했다. 그 결과, 1970년대에 이탈리아 국민들은 혼돈과 파괴의 시대를 보내야만 했다. 극좌파와 극우파가 극렬히 대립하며 무차별적인 테러를 자행했다. 거기에 1970년대의 세계적 석유 파동까지 겹쳐 경제난과 빈부격차가 가중되었다. 이른바 '납의 시대(Years of Lead)'라고 불리는 이탈리아 사회의 혼란기는 196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 중반까지 이어진다.

  페피노와 안토니아 부부가 살고 있는 빈민가의 판잣집들은 노부인의 거대하고 호화로운 흰색 대저택과 명백히 대비된다. 노부인(영화 속에서는 이름이 없다)이 게임을 하다 잠시 쉬는 시간에 뉴스를 봐야겠다면서 TV를 켜는데, 거기에서 독일 재무상이 달러 매입을 중단한다는 소식이 흘러나온다. 저런 뉴스는 자신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페피노가 말하는데, 비서 조지는 노부인의 막대한 자산 증식은 그런 환 거래를 통해 이루어지는 점을 알려준다. 그저 카드 게임에서 딴 돈으로 고물 창고를 매입하는 것이 꿈인 페피노에게 그런 노부인의 재정 상황은 도무지 알아먹지 못할 일이다.

  이 영화에 내재된 계급적 갈등은 단지 노부인과 페피노 부부로만 대변되지 않는다. 부부를 응원하는 사람들은 빈민가의 사람들을 비롯해 노부인의 시중을 드는 이들도 포함된다. 마치 귀족의 집에 기거하는 하인들의 단정한 복장을 갖춘 그들은 그 누구보다도 부부가 노부인을 이기기를 응원한다. 그들은 심지어 부부가 판돈을 잃었을 때에 자신들이 가진 돈을 기꺼이 내어주기까지 한다. 그러나 그런 가난한 자들의 연대와 맹목적인 희망은 노부인의 승부사적 기질에 산산조각이 난다. 고리대금업자에게 꾼 엄청난 돈까지 날려버린 부부에게 남은 것은 절망뿐이다.            

  부부는 가족에게 남은 유일한 재산인 판잣집을 판 돈으로 미국행 비행기를 기다리고 있는 공항의 노부인에게 달려간다. 그것으로 마지막 카드 게임을 하지만 그마저도 날린다. 털털거리는 낡은 트럭에 살림살이를 싣고 어디론가 떠나는 이 가족이 살아야할 삶은 어떤 것일까? 영화가 보여주는 이 비극의 해법은 매우 과격하며 통렬하다. 부부에게 게임에서 이길 수 있는 '과학적 방법'에 대해 설교하는 자칭 '교수'는 노부인을 이길 방법은 한 가지 밖에 없다고 말한다. '그 육신이 완전히 사라질 때'라고 선언하는 교수의 말을 부부의 어린 딸 클레오파트라는 허투루 듣지 않는다. 쥐약을 넣어 만든 쿠키를 공항에서 노부인에게 선물한 딸은 절망한 부모의 복수를 그렇게 대신한다.

  우리에게는 그다지 잘 알려져 있지 않은 루이지 코멘치니 감독의 이 두 편의 영화들은 영화가 시대와 호흡하는 텍스트임을 알려준다. 그는 이탈리아의 역사와 사회에 대한 자신만의 성찰을 영화를 통해 보여준다. 대중 예술로서 영화는 결코 사회와 동떨어진 진공의 텍스트로 존재할 수 없다. 영화 감독은 영화라는 매체적 틀 안에 동시대의 문제의식을 담을 수 있어야 한다. 코멘치니는 'Tutti a casa'에서는 전쟁과 파시즘을, 'Lo Scopone Scientifico'로 계층 갈등과 구조적 빈부격차에 대해 이야기 한다. 관객들은 그의 영화에서 감독이 그려낸 당대 이탈리아의 조밀한 초상과 마주한다.    



*사진 출처: it.wikipedia.org


**사진 출처: filmaffinit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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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자는 긴장증(緊張症, catatonia)을 앓고 있다. 어느 순간 몸이 돌처럼 굳어버리고, 주위의 아무 것도 들리지 않는 증상. 전쟁 중 군인으로 복무했던 여자는 부상을 입어 머리를 다쳤다. 여자를 괴롭히는 그 증상은 그때부터 생긴 것이다. 여자에게는 세 살짜리 어린 아들이 있다. 어느 날 저녁, 아들과 놀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던 여자에게 긴장증이 도진다. 마침 아이는 마루 바닥에 누워있었다. 커다란 돌덩이가 되어버린 엄마의 몸에 아이가 깔린다. 영화 'Beanpole(2019)'의 초반부에 나오는 그 장면은 매우 짧지만, 관객에게는 극도의 공포와 고통을 유발한다. 러시아의 신예 감독 칸테미르 발라고프(Kantemir Balagov)는 이 영화에서 전쟁이 여성에게 남긴 깊은 상흔에 대해 탐구한다.

  키가 무척 큰 일랴는 사람들에게 '키다리(beanpole)'라는 별칭으로 불린다. 그 비극적인 사고로 아들을 잃은 직후, 일랴는 전선에서 돌아온 친구의 방문을 받는다. 마샤는 일랴를 따뜻하게 위로한다. 그런데 마샤와 일랴가 나누는 대화에서 관객은 뜻밖의 사실을 알게 된다. 죽은 아이는 일랴가 아닌 마샤의 아들이었다. 군 복무 중이었던 마샤는 아이를 키울 수 없어서 먼저 제대한 일랴에게 보냈다. 일랴는 그렇게 마샤의 아이를 잃었다. 이후 일랴와 마샤 사이에는 우정과 죄의식이 범벅이 된 애증의 관계가 이어진다. 일랴는 마샤가 사귀는 남자를 질투하고 적대시한다. 그런 일랴에게 마샤는 아이를 더이상 낳을 수 없는 자신을 대신해 아이를 낳아달라고 요구하는데...

  벨라루스의 구술문학가이며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스베틀라나 알렉세예비치(Svetlana Alexievich)는 1985년, 한 권의 구술사 책을 펴냈다.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고 있지 않았다(The Unwomanly Face of War)'라는 제목의 책은 소련의 '대조국 전쟁(The Great Patriotic War, 1941-1945)'에 참전한 여성 200여 명의 이야기를 담았다. 칸테미르 발라고프 감독은 그 책에서 영화 'Beanpole'의 단초를 떠올렸다. 영화는 시종일관 암울하고 고통스럽다. 도입부에서 일어나는 아이의 비극적인 죽음을 비롯해 사지가 마비된 상이군인의 안락사 장면, 아이의 죽음을 빌미로 일랴에게 다른 남자와의 관계를 강제하는 마샤의 폭압적 행태까지 영화는 마치 관객에게 심리적 고문을 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Beanpole'은 결코 대중적 취향에 부합하는 영화는 아니다. 

  발라고프가 영화 전체를 통해 보여주는 정서는 불안과 고통이다. 그것은 영화 속 등장 인물들의 '몸'을 통해 가시적으로 구현된다. 전쟁터에서 머리를 다친 일랴에게 긴장증이 찾아오는 순간은 '삐이-'하는 소리와 주변의 멈춰진 풍경으로 묘사된다. 분명히 살아있으나 좀비와도 같은 삶, 일랴의 고통은 마샤의 아이를 잃은 후 더욱 심해진다. 마샤는 그런 일랴에게 버팀목이 되어주는 것처럼 보이지만, 일랴의 죄책감을 부추기며 교묘하게 일랴를 지배하려고 든다. 그리고 그것은 불임인 자신을 대신해 일랴에게 아이를 낳아주기를 강요하는 것에서 명백해진다. 일랴의 긴장증과 마샤의 불임, 전쟁을 거치면서 여성의 몸은 그렇게 망가졌다. 영화 초반부에 목욕탕에서 씻는 나신의 여자들이 나오는 장면이 있다. 그 장면에서 보이는 여성들의 몸은 그 어떤 성적인 긴장감을 불러일으키지 않는다. 전쟁이라는 극단의 폭력적 상황에 무방비로 노출된, 그리하여 상처를 입고 견뎌낸 헐벗은 몸이다.

  일랴와 마샤가 일하는 병원에 입원한 부상병들의 몸 또한 그러하다. 일랴가 일하는 동안 맡긴 아이와 놀아주는 병사들은 온갖 동물들의 흉내를 낸다. 한 쪽 팔이 절단된 병사가 흉내내는 새의 모습은 그 자체로 의미심장하다. '날개가 부러진 새'가 날 수 없듯, 사지가 마비된 군인은 집으로 돌아가는 것을 포기하고 의사에게 안락사를 요청한다. 신체적 상해는 전쟁이 인간의 몸에 남긴 가장 분명한 흔적이다. 마샤의 복부에 생긴 흉터도 그러하다. 영화는 상처입은 몸들을 보여줌으로써 관객이 알지 못하는 전쟁의 참혹함을 상기시킨다.

  전쟁은 끝났지만, 그래도 삶은 이어진다. 그러나 광포했던 전쟁의 기억과 싸우며 삶을 살아내는 것, 견디는 일은 결코 쉽지가 않다. 일랴와 마샤도 살아 남으려 애를 쓴다. 다시 아이를 갖고자 하는 마샤의 집착은 필사적인 몸부림이기도 하다. 새로운 생명을 통해 희망을 찾는 것, 문제는 마샤 자신이 더이상 아이를 가질 수 없는 데에 있다. 마샤의 재생을 향한 여정은 일랴를 지배하고 조종하려는 뒤틀린 욕망으로 채워진다. 일랴라고 당하고 있을 수만은 없다. 원하지 않는 관계를 가져서라도 필사적으로 임신하려는 일랴는 자신의 아이로 마샤의 주인이 될 심산이다.

  발라고프는 전쟁의 상흔을 미세하게 흔들리는 핸드 헬드 화면 속에 정교하게 배열된 이미지들로 보여준다. 'Beanpole'의 두 여주인공 일랴와 마샤가 번갈아 입는 초록색과 붉은색의 의상, 그들의 방 벽에 천천히 흘러내리는 초록색 페인트, 마샤가 때때로 흘리는 코피, 그 두 색조는 '재생'과 연결되어 있다. 아마도 그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은 이웃이 가봉한 초록색 원피스를 입고 미친듯이 빙빙 도는 마샤의 모습일 것이다. 나에게 이 장면은 매우 흥미롭게 비춰졌는데, 마치 한국의 샤머니즘(shamanism)에서 무당이 제단 앞에서 도는 장면을 연상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무당이 굿을 할 때 회전하는 방향은 반시계 방향으로, 그것은 세속의 시간에서 '신의 시간'으로 진입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와는 달리 영화 속에서 '시계 방향'으로 회전하는 마샤는 인간의 세계에 속해 있으며, 자신만의 방식으로 부활과 재생을 기원하는 의식을 치루는 것처럼 보인다.  

  마샤는 그렇게 간절한 마음을 담은 초록색의 새 옷을 입고 남자친구 샤샤의 부모를 만나러 간다. 샤샤는 마샤를 결혼할 여자로 소개하지만, 샤샤의 부모는 마샤를 냉대하고 조소한다. 아이를 갖고자 하는 일랴의 시도는 실패로 돌아간다. 절망한 일랴는 마샤에게 자신의 내면이 텅비어 있다고 말한다. 과연 이 두 여자의 삶에 한 조각 희망의 빛은 비춰질 수 있을까...

  'Beanpole'은 칸테미르 발라고프 감독의 두 번째 장편 영화이다. 그가 이 영화를 찍었을 때의 나이는 스물 여덟, 나는 영화를 보고나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대체 이 감독은 어떤 삶을 살아온 것일까... 이십 대의 젊은 감독이 관객을 심리적 심연으로 깊숙이 끌고 가면서, 거기에는 그 어떤 망설임이나 오차도 없다. 위키피디아에 올라온 짧은 이력에는 평범한 집안에서 태어난 그가 어린 시절부터 영화를 좋아했고, 영화를 전공했다는 사실만 적혀 있다. 삶의 특별한 경험이나 나이에서 오는 연륜이 아니라면, 이 감독이 이런 독특하고 놀라운 영화를 만드는 건 '순전한 재능'이라고 밖에는 달리 생각할 도리가 없다. 'Beanpole'은 관객을 유사(流砂)처럼 고통스러운 감정의 밑바닥으로 천천히 밀어넣는다. 그럼에도 감독이 착안하고 설계한 영화적 세계는 나름의 설득력을 가지며, 관객은 그의 영화를 통해 전쟁이 여성에게 남긴 지울 수 없는 흉터를 정면으로 응시하게 된다.   



*사진 출처: movieinsid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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