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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영화 '만국(晩菊)'의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여자는 빌려준 돈을 받아내려고 지인이 일하는 여관으로 찾아간다. 그러나 결근했다는 소리를 듣는다. 여자가 나가자, 여관에서 일하는 청소부는 여자가 걸어가는 방향 쪽으로 냅다 물을 뿌린다. 마치 '재수없는 여편네, 얼른 꺼져라' 하는 것 같다. 여자의 이름은 킨, 일숫돈 받아내느라 여념이 없는 그 여자는 어딜 가나 환영받지 못하는 신세다. 또 다른 채무자의 가게에 가서는 정문이 아니라 뒷문으로 들어간다. 전번에 자신을 보고 도망쳤기 때문에, 미리 퇴로를 차단하는 것이다. 늘 집에 돈을 둔 여자는 대낮에도 도둑이 들까봐, 하녀가 잠깐 두부 사러 나간 새에도 문단속을 철저히 한다.   

  나루세 미키오의 '만국(晩菊, Late Chrysanthemums, 1954)'은 '흐르다(流れる, 1956)'의 스핀오프(spin-off)처럼 느껴진다. '흐르다'에서 궁기 흐르는 늙은 게이샤 소메카로 나왔던 스기무라 하루코가 '만국'에서는 있는 것이라고는 돈 뿐인 은퇴 게이샤 킨으로 나온다. 영화는 킨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세 명의 은퇴 게이샤들의 사연이 어우러진다. '흐르다'에서 쇠락해가는 게이샤 집안의 이야기를 다룬 나루세 미키오는 은퇴 게이샤들의 삶을 들여다 본다. 역시 '돈' 문제는 나루세 미키오의 주요한 관심사이다. '만국'의 주인공들은 어떤 형태로든 돈에 얽매여 일그러진 삶을 살아가고 있다.

  영화의 첫 장면, 아이들이 뛰노는 주택가 골목을 비추던 카메라는 킨의 안방으로 들어간다. 마치 경건한 의식이라도 치루는 것처럼 킨은 돈 세는 일에 집중하고 있다. 킨의 관심사는 하루가 다르게 오르는 땅을 사들이는 것과 일숫돈을 받아내는 일이다. 괜찮은 집에서 청각 장애인 하녀를 두고 윤택한 중년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킨과는 달리 동료 게이샤들은 그저 하루하루를 살아갈 따름이다. 타마에와 토미는 여관 청소일을 하며 생계를 유지한다. 타마에는 번 돈을 파친코와 경마에 쓰느라 늘 돈에 쪼들린다. 킨에게 꾼 돈은 갚지도 못하고, 하나 뿐인 딸에게도 늘 돈 달라는 이야기만 한다. 건강이 좋지 않은 토미는 아들 키요시가 번듯한 직장이라도 얻어 자신을 부양할 수 있기를 바라지만, 아들은 첩살이 하는 여자의 돈에 기대어 산다. 늦은 나이에 결혼한 게이샤 노부는 남편과 작은 주점을 운영하지만, 겨우 입에 풀칠하는 수준이다.

  은퇴한 게이샤들은 무엇으로 살아가는가? '만국'은 나이든 게이샤들의 맨 얼굴을 응시한다. 그러나 영화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과연 중년 여자의 삶에 무엇이 남아있는가로 바꾸어도 무방하다. 킨은 타마에와 토미가 자식 문제로 골머리를 썩는 것을 보며, 자신에게 아이가 없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고 말한다. 킨에게는 남자도 없다. 타마에는 토미와 킨의 뒷담화를 하면서 킨에게는 '돈'이 곧 '남자'라며 비웃는다. 킨에게 과거의 남자들은 하나같이 무용지물이다. 함께 죽자며 킨에게 매달렸던 세키도, 킨이 유일하게 사랑을 느꼈던 멋진 외모의 타베도 모두 킨의 돈을 바라고 찾아온다. 킨에게 돈이란 남은 여생의 동반자이다. 그 돈이 없는 타마에와 토미에게는 대신 자식이 있다. 그러나 타마에의 딸은 결혼으로, 토미의 아들은 일자리를 구했다며 어머니 곁을 떠난다. 그나마 의지가지가 되던 자식도 날아간다. 빈 둥지 증후군(Empty nest syndrome), 장성한 자식을 떠나 보낸 중년의 부모가 느끼는 상실과 외로움의 감정. 특히 그 감정은 아이의 양육과 살림을 도맡아 했던 여성에게 일반적으로 나타난다. 비록 게이샤로 먹고 사느라 엄마 노릇도 제대로 못했지만, 타마에와 토미는 떠나버린 자식들을 보며 회한에 젖는다.  

  돈도 자식도 없는 노부는 아이를 가지려고 노력 중이다. 돈 받으러 온 킨은 노부에게 나이를 생각하라며 되지도 않는 일이라 말한다. 무골호인 같은 남편은 노부가 데리고 살기는 편하지만, 힘이 되어줄만한 사람은 아니다. 더 늦기 전에 자신의 혈육 한 점 세상에 남기고 싶은 노부는 생당근을 열심히 먹으면서 아이를 바란다. 결국은 떠나버릴 자식, 그래도 있는 것이 나은 걸까? 자식들 빈자리로 허전한 타마에와 토미의 마음을 달래주는 것은 술 뿐이다. 타마에는 자신에게 딸을 준 신에게 고맙다며 혀꼬부랑 소리로 주정한다.

  흐르는 강물은 돌아오지 않는다. 타마에는 토미의 아들을 배웅하는 역전 다방에서 젊은 게이샤들을 본다. 그 게이샤들의 모습은 자신의 과거였다. 젊음도 남자도 인생도 그렇게 흘러갔다.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모래처럼 사라졌다. 그래도 삶은 계속 된다. 타마에는 파친코 경품을 그러모을 것이며, 토미는 아들의 편지를 기다릴 것이다. 킨은 늘 그랬듯 자신에게서 달아나려는 돈을 필사적으로 붙잡으려고 한다. 영화의 마지막, 킨은 거간꾼과 함께 시골 땅을 둘러보러 떠난다. 역의 계단을 내려가는 킨의 발걸음은 왠지 활기차 보인다. 나루세 미키오는 명멸하는 불빛과 같은 중년 여인의 삶에 그렇게 마침표가 아닌 쉼표를 찍는다. 여자로서의 삶은 이미 빛이 바랬지만, 아직 살아가야할 날들은 남아있다. 



*사진 출처: criterionchanne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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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영화 'Java Head(1934)'의 결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LA의 가난한 중국 이민자 가정에서 태어난 소녀는 영화를 보면서 배우에 대한 꿈을 키운다. 영화 촬영의 중심지였던 도시에서 14살이 되던 해, 처음으로 엑스트라를 맡는다. 독특한 마스크와 연기력으로 주목을 받았고, 17살에 드디어 첫 주연을 따낸다. 오페라 나비 부인의 각색된 영화 버전인 'Toll of Sea(1922)'에서 였다. 안나 메이 웡(Anna May Wong)은 헐리우드 최초의 중국계 여배우로 미국을 비롯해 유럽에서 자신의 영화 경력을 쌓았다. 헐리우드 경력 초창기, 안나는 동양에 대한 이국적이고 차별적인 선입견에 기반한 역할들이 주어지는 것을 견디기 힘들어 했다. 이 여배우는 주로 사악한 악녀로 주인공을 괴롭히거나 파멸에 이르게 만드는 역할을 맡았다. 다양한 연기 경력에 대한 열망은 안나를 유럽으로 향하게 했다. 영국을 비롯해 독일에 머물면서 영화를 찍었다. 영화 'Java Head(1934)'는 안나가 영국에서 찍은 5편의 영화 가운데 한 편으로 배우 자신이 가장 사랑한 영화이기도 했다.

  영화의 원작은 미국 작가 조셉 헤르게스하이머(Joseph Hergesheimer)가 쓴 단편 소설을 바탕으로 한다. 'Java Head'는 1923년에 헐리우드에서 무성 영화로 제작되었지만, 유실되었다. 1934년에 영국의 소롤드 디킨슨 감독은 같은 제목의 유성 영화를 찍었고, 안나는 백인 남편과 결혼한 만주족 공주 역을 맡았다. 매사추세츠가 배경인 원작은 시나리오로 각색되면서 항구 도시 브리스톨로 바뀌었다. 영화의 제목 'Java Head'는 부유한 선주 제레미 아미돈이 자신의 저택에 붙인 이름이다. 인도양의 험한 해협 지형 자바 헤드는 제레미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그에게는 두 아들이 있는데 둘째 게릿은 집안의 앙숙인 던삭 가문의 딸 네티를 사랑하고 있다. 네티의 할아버지는 게릿과의 교제를 반대하고, 게릿은 실망하며 1년 동안 바다를 떠돈다. 마침내 게릿이 고향에 돌아왔을 때, 게릿의 옆에는 중국인 아내 타오 위옌이 있다. 낯설고 기이하게 보이는 만주족 공주의 출현은 브리스톨에 동요를 일으킨다.

  이방인 타오 위옌에게 브리스톨 사람들이 보이는 반응은 전형적인 인종주의에 다름 아니다. 'Yellow face'라는 말로 노골적인 편견을 드러내는 그들 앞에서 타오 위옌이 보여주는 태도는 매우 품격이 있다. 화려한 옷차림과 머리 장식은 백인 사회에서 더 두드러지게 보인다. 남편 게릿은 적극적으로 아내를 엄호하며, 고향 사람들이 타오 위옌의 존재를 받아들이게끔 노력한다. 그러나 이 부부는 곧 국제 결혼한 부부가 겪는 어려움에 직면한다. 갑작스런 아버지의 죽음으로 상심한 게릿은 아내가 불상 앞에서 시아버지의 죽음을 애도하며 불경을 읊는 것을 못마땅하게 바라본다. 덜 야만적(barbaric)인 방식으로 할 수 없냐고 아내를 질타한다. 그는 아내의 방에 있는 불상을 비롯해 서화, 중국의 장식품들에 혐오스런 눈길을 보낸다. 그런 그의 마음은 예전의 연인 네티에게로 향한다.

  영화는 서구인들이 동양에 대해 갖고 있는 잘못된 환상과 편견의 진열장 같다. 영화 초반부 묘사된 게릿의 항해에는 동양의 항구 도시에 기항하는 선원들의 모습이 나온다. 이국적이고 아름다운 외모의 동양 여성들은 선원들을 유혹하며, 그들은 기꺼이 여인들의 환대를 즐긴다. 손쉽게 얻을 수 있는 쾌락이 투사된 동양의 이미지는 부패와 탐욕, 악의 근원과 이어진다. 게릿의 형 윌리엄은 바다를 싫어하는 인물로 그 때문에 아버지 제레미의 인정을 받지 못한다. 그에게 배와 바다는 그저 돈벌이의 수단일 뿐이다. 제레미는 윌리엄이 돈 때문에 자신 몰래 아편 밀수를 해왔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고 심장마비로 죽음에 이른다. 그 아편은 타오 위옌의 나라에서 온 것이다. 네티의 삼촌 에드워드는 아편 중독자로 나오는데, 그는 타오 위옌에게 매혹되어 게릿과 갈라놓으려 한다. 타오 위옌은 비로소 남편에게 다른 여자가 있다는 것을 알아챈다. 이 만주족 공주는 맹렬한 질투심에 불탄다. 그리하여 네티를 찾아가 죽이려 든다...

  그러나 '노란 얼굴'의 동양인이 가하는 위협은 제거되어야만 한다. 타오 위옌은 네티를 없애더라도 남편을 온전히 가질 수 없다는 사실을 곧 깨닫는다. 만주족 공주는 생 아편을 먹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이어지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너무나도 행복한 표정으로 항해하는 게릿과 네티의 모습이다. 'Java Head'의 이러한 결말은 당시 서양이 타자인 동양을 바라보는 제국주의적 관점을 반영한다. 아편 중독자인 에드워드는 중국 문화에 경도된 인물로 나오는데, 그 캐릭터는 악마화된 타자로서의 동양이 끼치는 폐해를 상징한다. 그런 곳에서 온 타오 위옌이 'Java Head' 저택의 일원이 될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하다. 제레미는 며느리와의 첫 대면에서 뭐라고 불러야 하는거냐며 '타오 위옌 아미돈'은 결코 어울리는 이름이 아니라고 말한다. 게릿을 매혹시켰던 타오 위옌의 미모와 아내 나라의 문물은 견디기 힘든 야만과 혐오의 대상이 된다.

  푸치니의 오페라 '나비 부인'의 초초상이 자신을 버리고 백인 여성과 결혼한 남편에게 아이를 보내고 자결하는 결말과 'Java Head'의 타오 위옌의 죽음은 기묘하게 닮아 있다. 스스로 목숨을 버린 본부인으로 인해 네티는 게릿의 아내가 되어 행복을 누린다. 타오 위옌을 연기한 안나가 자신의 배역을 어떻게 생각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이 여배우는 영화에 만족했던 것 같다. 1934년의 'Hays code'로 본격화된 미국 영화의 검열은 타 인종간의 애정 묘사를 금지했다. 그 때문에 안나는 그 어떤 키스신도 찍을 수 없었다. 그러나 영국 영화 'Java Head'에서는 백인 남성의 정식 부인 역으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키스신을 남길 수 있었다. 그것이 안나 메이 웡이 이 영화를 가장 좋아하는 영화로 꼽은 이유였다. 일그러진 제국주의와 오리엔탈리즘의 기이한 결합인 'Java Head'는 그렇게 선구자적 길을 걸어간 동양인 여배우에게 잊을 수 없는 작품이 되었다.      



*사진 출처: tvtropse.org

  
**사진 출처: en.wikipedia.org



*주말 잘 보내고 월요일에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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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축구는 속임수(feinting)의 기술이죠."

  1986년 멕시코 월드컵 8강전, 영국과 아르헨티나 전에서 그가 넣은 두 개의 골 가운데 하나는 바로 그 유명한 '신의 손'에 의한 것이었다. 마라도나는 한 손과 머리를 사용해서 골을 넣었는데, 그 순간을 놓친 주심은 골로 인정했다. 이기기 위해서라면 비열한 속임수도 마다하지 않는 그에게 오명과도 같은 별명이 붙게 된 이유였다. 아시프 카파디아는 '세나(Senna, 2010)', '에이미(Amy, 2015)'에 이어 '디에고 마라도나(Diego Maradona, 2019)'를 내놓으면서 그의 유명인 3부작에 마침표를 찍었다. 다큐는 현대 축구사의 상징적인 아이콘인 마라도나의 축구인생을 돌아본다. 카파디아는 수백 시간의 자료 화면을 추리고 추려서 마라도나의 흥망성쇠를 극적으로 재구성해서 보여준다. 이 다큐를 가능하게 했던 것은 마라도나의 첫 에이전트의 놀라운 안목 덕분이었다. 그는 두 명의 카메라맨을 고용해서 마라도나를 따라다니며 찍게 했다. 그렇게 남은 필름들과 마라도나의 아내 클라우디아의 개인 비디오 소장 자료가 더해지면서 다큐의 사실성은 세밀하고 풍성해졌다.

  다큐의 첫 도입부는 강렬한 비트의 음악과 함께 정신없이 내달리는 스포츠카의 내부 장면에서부터이다. 마라도나가 타고 있는 차는 이제 막 어딘가에 도착한다. 나폴리, 그가 FC 바르셀로나에서 아무런 성과를 얻지 못하고 빈 손으로 오게 된 도시였다. 1984년 7월, 마라도나가 왔을 당시 SSC 나폴리는 리그 순위 밑바닥을 전전하는 약체 팀이었다. 거기에다 지역적으로도 낙후된 나폴리는 이탈리아에서 마치 불가촉천민과도 같은 취급을 받았다. 다른 도시 사람들은 나폴리를 이탈리아의 하수구, 시궁쥐로 부르며 조롱하고 모욕했다. 그런 그곳에 마라도나는 세리에 A리그 우승을 2번이나 안겨준다. 그는 나폴리에서 신과 같은 존재였다. 나폴리에서의 활약과 함께 1986년 조국 아르헨티나의 멕시코 월드컵 우승은 마라도나 인생의 정점을 이룬다.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빈민가 출신의 가난한 소년은 오직 축구공 하나만으로 세상을 평정했다.

  카파디아의 전작 다큐의 주인공들이 영광의 순간을 지나 비극적 죽음으로 생을 마감한 것과는 달리, 마라도나에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다큐 초반부에 나온 펠레의 청년 마라도나에 대한 짧은 언급은 예언이 된다. 펠레는 마라도나의 정서적 불안정성을 지적한다. 축구장에 서있으면 인생도, 골칫거리도, 그 모든 것도 잊게 된다고 말한 마라도나는 축구 이외의 것들에 대해서는 약점 투성이의 인간이었다. 자신의 친자를 30년 동안 인정하지 않고 모른 척 했으며, 복잡하고 문란한 사생활은 황색언론의 먹잇감이었다. 결국 마약으로 점철된 선수 경력 후반기를 지나며 마라도나는 몰락한다. 마라도나의 마약 공급책인 나폴리의 토착 마피아 Camorra의 줄리아노 일가는 그런 마라도나의 추락에 일조한다. 도시의 성인에서 마약 사범으로의 급전직하, 거기에 더해진 자격 정지 징계는 마라도나의 인생을 돌이킬 수 없는 방향으로 몰아간다. 그는 나폴리에서 도망치듯 떠나야 했고, 망가진 경력은 복구되지 못했다.

  다큐는 마라도나의 인생 전부를 보여주지는 않는다. 화려한 전성기에 이어진 몰락을 대비시켜 마라도나라는 인물의 인생을 영화처럼 편집한다. 카파디아는 다큐 어디에서도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지 않는다. 비디오와 필름으로 찍은 마라도나의 개인 자료 화면과 과거 경기 장면을 설명하는 이는 마라도나 본인과 그의 누나, 아내, 개인 트레이너와 축구 해설가들이다. 이 다큐에서 그나마 주목할만 것은 음악이다. 빠른 비트의 전자 사운드로 작곡된 음악들이 다큐의 긴장감을 팽팽하게 유지시킨다. 그런 음악과 함께 다채롭게 편집된 경기 장면들에 축구 팬들이라면 '넘나 재밌는 것'이라며 열광하리라. 그러나 비평적 차원에서 나는 그런 열광을 보낼 수는 없다. 카파디아는 좋은 이야기꾼(storyteller)은 될 수 있겠지만, 작가로서의 독자적인 관점은 보이지 않는다. 도대체 이 다큐에서 그가 직접 찍은 장면이 하나라도 있는지 모르겠다. 굳이 좋게 평가하자면, 카파디아가 가진 감독으로서의 역량은 이야기가 될 만한 것에 집중적으로 투자하고 그것을 부각시키는 것이다. 나폴리를 떠난 마라도나는 갑자기 13년 후인 2004년의 아르헨티나 토크쇼로 순간이동한다. 그 후의 인생 하반기에 대해서는 단편적인 자료 화면으로 제시될 뿐이다. 쿠바의 카스트로를 비롯해 남미의 여러 정치인들과 친했던 마라도나의 정치적 면모에 대해서는 그 어떤 언급도 없다.

  아마도 언젠가 관객들은 마라도나에 대한 또 다른 다큐를 만나게 될지도 모른다. 이 인물이 보여준 인생역정은 너무나도 극적이고 흥미진진해서 이야기로서의 매력이 있다. 그는 언더도그였던 소속팀을 정상에 올리고, 포클랜드 전쟁에서 영국에 무참하게 패배한 조국의 자존심을 회복시켰다. 마라도나 인생의 대부분은 분명 축구장 안에서 이루어진 것이지만, 그것은 보다 복잡한 현실의 정치적 외연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그가 마약 문제로 자격 정지를 당한 처분조차도 축구계 내부의 정치 역학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말할 수 없다. 마라도나의 인생은 스포츠와 정치, 스타와 파파라치 언론의 공생과 같은 측면을 돌아보게 만든다. 카파디아는 그런 마라도나의 인생 한 부분을 절묘하게 편집해서 보여준다. 독창성은 없지만, 그가 만든 이 다큐에는 떨치기 힘든 매혹적인 이야기가 담겨져 있다.   



*사진 출처: parsi-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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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가 나를 어묵으로 죽이려 드는구나!"

  심통 가득한 시어머니는 며느리가 점심에 내놓은 어묵 반찬을 타박한다. 속이 불편한 자신에게 소화가 어려운 어묵을 내놓았다는 것이다. 정작 아침에 이 시어머니는 자식들 먹이느라 좋은 어묵은 못먹어봤다는 과거를 늘어놓았다. 이 시어머니와 며느리 사이는 사실 좀 많이 이상하다. 시어머니는 자신이 낸 신문대며, 두부 사온 것을 가지고 칼같이 며느리에게 돈을 받아낸다. 심지어 시어머니는 방에 따로 자신이 먹을 것을 쟁여둔다. 며느리 유리코는 어린 아들이 달걀말이를 먹고 싶다고 말하자 계란이 없다고 하는데, 아들은 할머니방에 있다고 말한다. 그러자 시어머니 찬장에서 계란 하나를 꺼내오면서 계란값을 넣어둔다. 키노시타 케이스케 감독의 1957년작 '위험은 가까이에(風前の灯, Danger Stalks Near, 1957)'는 코미디와 스릴러가 결합된 독특한 서민극이다. 영화는 두 명의 불량배와 그들의 협박에 못이겨 따라나선 가난한 고학생이 교외 주택에 강도짓을 모의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알부자로 소문난 시어머니 테츠를 모시고 사는 며느리 유리코(타카미네 히데코 분). 유리코의 시어머니는 남편의 계모로 그 고약한 성질과 인색함 때문에 유리코도 남편도 무척 싫어한다. 그러나 구두 상점에서 일하면서 빠듯한 월급으로 겨우 살아가는 그들 부부에게 시어머니와의 동거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다. 그들이 사는 집은 시어머니 소유이다. 강도들은 카네시게가 출근한 뒤에 고부와 아이가 있는 틈을 타 강도짓을 하려고 한다. 그러나 그 계획은 시작부터 틀어진다. 집에는 세입자 아가씨가 태워먹은 다다미 짜맞추느라 점원들이 드나들고, 우편배달부, 유리코의 여동생들, 남편의 조카를 비롯해 새로운 세입자의 방문으로 북적인다. 강도들의 시도는 번번이 좌절된다. 이 어설픈 강도단은 멀리 보이는 언덕배기에서 시간만 죽이고 있을 뿐이다. 한편, 그들이 노리는 집 안에서는 사람들이 끊임없이 돈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렇다. 이 영화 속 등장인물들은 모두 돈에 찌들려 있으며, 그래서 그 무엇보다 돈을 열렬히 원한다.

  유리코의 여동생 사쿠라는 놀고 먹는 연하 남편과 사느라 지쳐있다. 언니네 내외가 카메라 경품에 당첨되었다는 신문 기사를 읽고 찾아와 5만엔 짜리 카메라 팔면 1만엔은 자길 달라고 애원한다. 남편의 쥐꼬리만한 월급으로 살고 있는 유리코에게는 어림도 없는 소리다. 시어머니는 아들 내외가 자신의 집에 얹혀 사는 것을 이유로 온갖 위세를 부리며 며느리 유리코를 힘들게 한다. 투박한 안경을 끼고 나온 타카미네 히데코의 삶에 찌든 주부 연기는 남다르다. 이 여배우는 소시민의 정서가 체화된 연기를 보여준다. 며느리라고 어디 당하고만 있을까? 유리코는 자신이 선물받은 신발을 주며 성질부리는 시어머니 마음을 누그러뜨리려 하지만, 시어머니는 늙은이가 굽높은 신발 신고 넘어져 다치길 바라는 거냐며 소리지른다.

  "네, 어머니가 신발 신고 넘어져 죽어버렸으면 좋겠네요. 진심으로요."

  정말로 유리코 부부는 시어머니의 죽음을 기다리는 중이다. 그들 부부는 시어머니가 모은 돈과 집을 물려받을 것을 생각하며 견딘다. 돈에 찌들린 가족 구성원들이 사는 이 집에서 벌어지는 감정의 혈투는 결코 코미디라고 할 수 없다. 돈, 돈, 돈... 키노시타 케이스케 감독은 종전 후 재건의 시기를 거치면서 일본 사회가 얼마나 물질에 종속되었는지 이 영화를 통해 보여준다. 영화의 일본어 제목은 '풍전등화', 번역하면 '바람 앞의 촛불'이다. 이 가족에게 닥친 위험은 언제 침입할지 모르는 강도가 아니라, 돈에 마비된 사고방식에 있다. 교외에 자리한 가족의 집은 방에 걸린 밀레의 '만종' 그림처럼 평온하고 아늑해 보이지만, 그 그림은 진짜 강도인 조카의 총알에 박살이 난다. 그렇게 소시민적 삶의 이상에는 균열이 생기고 있었던 것이다.

  '위험은 가까이에'는 소소한 웃음과 약간의 긴장을 선사하는 소품과 같은 영화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키노시타 케이스케 감독이 만든 서민극에는 나름의 강렬한 풍자가 있다. 유리코의 남편 이름은 '카네시게(金重)'인데, 돈을 잘 벌어 부자가 되라는 뜻으로 지은 이름이다. 그러나 어려운 형편에 대학도 나오지 못했고, 그래서 좋은 직업도 얻을 수 없었다. 그는 말주변도 없어서 신발도 제대로 팔지도 못한다. '백합'을 뜻하는 유리코(百合子)를 비롯해 둘째 여동생 사쿠라(さくら, 벚꽃), 막내 아야메(あやめ, 붓꽃)의 이름도 역설적이다. 그들 자매의 삶은 아름다운 꽃이름과 어울리지 않는다. 막내 아야메는 돈이 많다는 이유로 어묵집 아들과 사귄다. 돈에 찌들린 일가족이 보여주는 이 좌충우돌 코미디를 보는 것은 결코 시간낭비는 아니다. 이 영화가 치열하고 처절하게 소시민의 내면을 그려냈기 때문이다.   



*사진 출처: criterionchanne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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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젠가 아주 흥미로운 뉴스를 본 적이 있다. 가출팸(가출 후 함께 생활하는 무리를 지칭)을 이끄는 한 남자에 관한 것이었다. 삼십 초반의 이 남자는 차량 절도의 달인이었다. 어떤 차라도 그의 손기술 앞에서는 무력했다. 그는 값비싼 차들을 절도해서 자신의 가출팸 구성원들을 먹여살렸다. 일반적으로 가출팸이 성매매와 연계된 다양한 범죄의 온상인 것과는 달리, 그는 자신이 데리고 있던 청소년 아이들을 그저 부양할 뿐이었다. 아이들은 경찰에게 그가 자신들에게 아무 것도 바라지 않았으며, 아빠처럼 항상 보살펴주었노라고 진술했다. 아마도 그에게는 어떤 의미에서 가족이 필요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에드워드 양(楊德昌) 감독의 1996년작 '마작(麻將, Mahjong)'에도 그런 가출팸이 등장한다. 그러나 이 가출팸에는 의리도 인정도 존재하지 않는다. 영화는 거짓말, 사기, 매춘, 폭력으로 점철된 4인조 가출팸의 절망적인 타이페이 생존기를 그린다.

  레드 피시(紅魚), 룬룬, 치약, 홍콩으로 이루어진 가출팸의 리더 레드 피시는 영국인 애인 마커스를 찾아 프랑스에서 온 마르트를 유인해 콜걸로 만들 계획을 갖고 있다. 룬룬은 그런 마르트에게 연민과 사랑의 감정을 느낀다. 레드 피시는 자신의 아버지에게 돈을 뜯어낸 꽃뱀 안젤라에게 복수하려고 한다. 여자 후리는 재주를 지닌 홍콩을 내세워 안젤라를 유혹하고, 치약은 영적 능력을 지닌 승려로 변장시켜 안젤라의 신뢰를 얻어내려고 한다. 레드 피시의 아버지는 거액의 부도를 내고 잠적했는데, 조폭은 돈을 받아내기 위해 레드 피시를 납치하려고 한다. 그러나 룬룬을 레드 피시로 오인한 조폭들은 룬룬과 마르트를 인질로 삼게 된다. 한편 자신과 어머니를 버린 아버지에 대한 극도의 증오에 사로잡힌 레드 피시는 아버지를 찾아내 분노를 터뜨린다. 이 가출팸은 계획한 사기극을 성공시켜서 그럴듯한 가족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

  타이페이의 4인조 가출팸에게는 가족이 없다. 레드 피시의 아버지는 10년 넘게 잠적 중이다. 룬룬은 외국인들이 사는 허름한 게스트 하우스가 주거지이지만, 그곳은 집이 아니라 잠깐씩 들리는 장소이다. 이 무리 가운데 가장 입이 더럽고 천박한 치약은 전형적인 양아치다. 홍콩은 남창 노릇으로 돈 많은 여자들에게 기생한다. 이들은 서로 형제같은 존재임을 내세워 홍콩에게 반한 알리슨에게 동침을 요구한다. 레드 피시가 알리슨을 어르고 협박하는 모양새는 영락없는 포주의 모습이다. 이 레드 피시는 아버지의 사기치는 능력을 물려받았음에 나름의 자부심을 갖고 있다. 그가 그토록 증오하는 아버지가 어떤 면으로 레드 피시에게는 생존의 비법을 알려준 셈이다. 4인조는 자신들이 사람들을 조종하고 상황을 통제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세상은 그렇게 쉽고 만만하지 않다.

  마르트를 매춘 사업에 끌어들이려는 계획은 룬룬의 순정 때문에 좌절된다. 안젤라는 홍콩을 자신의 친구들과 함께 공유하면서 모욕감을 안겨준다. 에드워드 양은 안젤라와 동성 친구들이 홍콩에게 억지로 음식을 먹이며 홍콩을 지배하는 모습을 통해 레드 피시가 알리슨에게 보여주었던 착취적 성적 위계를 정확히 전복시킨다. 돈과 권력을 지닌 이들의 위력 앞에 이 4인조 가출팸이 가진 사기 능력은 그저 조잡스럽고 한심해 보일 뿐이다.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아마도 영국인 건축가 마커스와 외국인 포주 진저로 대변되는 타이페이의 외국인들은 자신들의 나라에서는 별 볼 일 없는 쩌리들이겠지만, 이 낯선 동양의 도시에서는 지배자처럼 거들먹거린다. 마커스는 마르트에게 19세기의 제국주의가 21세기에도 지속될 거라며, 타이페이는 곧 자신들의 무대가 될 거라 장담한다. 이 약육강식의 세계에서 레드 피시의 가출팸은 하부 구조에 자리한다.

  가출팸의 초짜이자 막내라고 할 수 있는 룬룬이 보여주는 마르트에 대한 순정은 마르트에게 비웃음을 산다. 홍콩의 애정을 갈구하는 알리슨이나 마커스의 애정을 확인하려는 마르트는 반복해서 '날 사랑해?'라고 묻지만, 그들이 원하는 사랑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 비정하고 거대한 도시에서 사랑을 비롯해 그 어떤 따뜻한 인간적 감정은 거추장스럽게 느껴질 뿐이다. 에드워드 양은 그런 도시의 삶에서 과연 애정과 상호간의 보살핌을 전제로 한 진정한 가족이 존재할 수 있는가 묻는다. 갑작스런 아버지의 죽음으로 레드 피시의 가족은 결정적으로 해체되며, 그 여파는 레드 피시의 가출팸으로 이어진다. 그들은 뿔뿔이 흩어진다. 가진 것 없는 밑바닥 청춘들의 유사 가족은 그렇게 붕괴된다.

  레드 피시의 4인조가 머물렀던 곳에 치약은 자신이 그러모은 새로운 구성원들을 데려온다. 그러나 사기 치는 재주도 머리도 없는 치약이 꾸려갈 가출팸의 미래는 불투명해 보인다. 그들은 결코 가족이 될 수 없으며, 머무는 공간 또한 집이라고 할 수 없다. 그저 먹고 자는 합숙소 같은 그 곳에는 그렇게 도시의 떠도는 청춘들이 무수히 들고 나게 될 것이다. '마작'에는 뿌리를 내리지 못하는 청춘들의 비애가 담겨있다. 관객들은 그 청춘들의 초상에서 쉽사리 출구를 발견할 수 없다. 그러므로 영화의 마지막에 룬룬과 마르트가 나누는 입맞춤은 희망의 한 조각이라기 보다는 곧 사라질 도시의 신기루처럼 보인다.  



*사진 출처: zh.wikipedi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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