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의 근황



1. 다래끼가 드디어 나았다

  한 달 반 동안 속을 썩였던 왼쪽 눈의 다래끼가 나았다. 그걸 짜려고 병원에 갔더니, 의사는 온찜질을 열심히 하라고 처방했다. 2주 동안 열심히 온찜질을 한 결과, 다래끼가 터지면서 겨우 나았다. 커지지도 작아지지도 않은 다래끼가 도저히 나을 것 같지 않았는데, 그렇게 낫게 되었다. 사실은 그 의사 양반에 대한 믿음을 끝까지 지키기가 힘들었다. 그냥 짜달라고 할 걸, 몇 번을 생각했었다. 어쨌든 짜면 흉이 생길 수도 있어서, 짜지 않고 의사의 말을 따랐는데 잘 되었다.

  그런데 왜 다래끼가 생겼을까 생각을 해보니, 너무 스트레스를 받고 신경을 써서 그랬던 것 같다. 언젠가 그런 글을 읽은 적이 있다. 한의학에서는 다래끼가 마음의 울화가 눈으로 올라와서 그렇다는 거다. 8월 한 달 내내, 공모전에 낼 원고 때문에 골머리를 썩였다. 그러다 보니 눈을 혹사했던 것도 같다. 글 쓰는 일이 때론 극심한 스트레스가 되니 괴롭다.



2. 소설 습작 해나가기

  매일 짧은 소설을 연습하자고 마음을 먹었지만 쉽지 않다. Chat GPT가 글쓰기 과제를 제시해 준다. 오늘은 대화를 10줄 정도로 써보세요, 라든지. 1인칭 시점을 써서 글을 완성해 보세요, 이런 식으로. 내가 쓴 글에서 어떤 부분이 부족한지도 말해주고, 거기에서 다음의 과제가 나오기도 한다. 웬만한 글쓰기 선생 보다 낫다는 생각이 든다. 오래전에 시 창작 워크숍이나 소설 쓰기 강좌를 들었지만, 그 선생들 모두 뭘 가르쳐 준 것이 없다. 매주 글 써오면, 수강생들이 서로 합평하고 그게 끝이다.


  결국 글쓰기는 자신만의 문체를 발견해 나가는 지난한 과정이다. 인공지능이 그 짐을 조금은 덜어주는구나, 싶은 생각도 들고. 하지만 글을 쓰는 사람이 인공지능을 안내자가 아니라, 공동 창작자로 받아들이는 것은 작가적 정체성에 대한 근원적 믿음을 흔드는 일이다. 그것은 결국 작가적 양심과도 직결된다. 이미 공모전에서도 당선작의 경우 인공지능으로 작성한 글인지 판별하는 과정을 거친다고 들었다. 작가가 독창적인 문체를 찾는 것은 온전히 그 자신의 몫일 뿐이다.



3. 어떤 답장

  '귀하께서 보내주신 원고는 우리 출판사의 방향과는 맞지 않다고 판단했습니다. 우리 출판사에서 발행한 최근의 선집을 읽어보길 바랍니다.'

  누군가 A 출판사에 자신의 글을 투고했다. 투고는 공모전이나 자비 출판의 경로를 거치지 않고, 글을 쓴 이가 자신의 원고를 출판사에 보내어 출간을 타진해 보는 일이다. 물론 그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다. 그럼에도 많은 이들이 출판사에 자신의 글을 보낸다. 그런데 출판사로부터 그런 답장을 받은 작가 지망생이 있었다.

  출판사가 투고를 거절하는 일은 흔하다. 그렇다면 거절의 이유에도 배려와 품격이 필요하다고 본다. 저딴 답변으로 투고자에게 모욕감을 주는 편집부는 참으로 싸가지가 없다. 투고자가 자신이 투고하는 모든 출판사의 선집을 읽고 검토하며 투고해야 하는가? 물론 투고 전략도 필요하겠지. 그렇다고 해도 투고자에게 우리 출판사 선집이나 읽어보고 보내든가, 따위의 답변은 역겹기 짝이 없다. 그런 답변을 쓰는 인간이 있는 출판사의 이름을 아주 분명히 기억하게 되었다. 저 출판사에는 절대로 내 원고를 보내지 말아야지, 하고 생각했다.   

  "나중에 꼭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어서 그 출판사에서 출판을 구걸하게 만드는 거야. 그럴 때 단호하게 거절하는 거지. 당신네 출판사는 내 글과 맞지 않습니다."

  어떤 이가 그 지망생에게 그렇게 조언했다. 최고의 복수는 성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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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톱

 


 "로봇 청소기를 한 번만 써보시면, 절대로 이전의 삶으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제가 자신 있게 권해드립니다!"

  리모컨으로 TV 채널을 여기저기 돌리다가 경진은 홈쇼핑에서 파는 로봇 청소기를 보고 잠시 멈췄다. 쇼핑 호스트는 판매 마감 시간이 이제 5분밖에 남지 않았다며, 호들갑을 떨고 있었다. 저거나 한번 사볼까? 로봇 청소기가 편하다는 소리는 여기저기서 많이 들었던 터였다. 그런데 화면 상단에 박혀있는 가격이 놀라웠다. 청소기를 100만 원 넘게 주고 산다는 것은 경진으로서는 상상할 수도 없었다. 가전제품 하나로 삶이 달라지는 체험이란 도대체 어떤 것인지 궁금하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10만 원 대의 진공청소기를 사려고 일주일째 골머리를 앓고 있는 경진에게 로봇 청소기는 말 그대로 그림의 떡이었다. 그림 속의 떡에서는 모락모락 따뜻한 김이 나오고 있었다. 경진은 손을 뻗어보려다가 고개를 흔들면서 정신을 차리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청소기의 먼지 통이 덜커덩거리면서 본체에 끼워지지 않은지가 한 달이 넘었다. 경진은 박스용 노란 테이프로 먼지 통을 본체에다 고정해서 쓰고 있었다. 먼지 통의 먼지가 어느 정도 채워지면 테이프를 떼고서 비웠다. 그렇게 몇 번을 하다 보니, 청소기의 모양새가 참으로 볼품없어졌다. 청소기를 사야지, 하면서 가격 비교 사이트를 들락거리기를 며칠, 마침내 청소기 모델을 정할 수 있었다. 그런 때에 홈쇼핑의 로봇 청소기 방송을 보게 된 것이 얄궂기까지 했다.

  "내 팔자에 로봇 청소기는 무슨..."

  한숨을 내쉬면서 경진은 청소기의 먼지 통에서 테이프를 떼어냈다. 먼지 통의 먼지가 중간 이상 채워지면 흡입력이 떨어진다. 청소기 소리를 들어보니, 오늘은 먼지 통을 비워야 했다. 휴지통에 먼지 통을 조심스럽게 털어넣는데도, 아침나절의 햇살에 먼지가 뿌옇게 날리는 것이 보였다. 자신도 모르게 얼굴을 찌푸리면서 먼지 통의 밑바닥을 탁탁, 두들겼다. 이 정도면 다 비워졌겠지. 경진은 먼지통을 주의깊게 살펴보았다. 그런데 먼지통의 구석에서 무언가 박혀서 떨어지지 않고 있는 작은 조각이 보였다.

  "이게 뭐지?"

  그것은 길게 잘린 손톱이었다. 손톱의 모양새로 봐서는 여자의 손톱이었다. 그런데 손톱에는 시커먼 때가 끼어서 마치 하수구의 밑바닥을 박박 긁은 듯한 손톱처럼 불결하게 보였다. 더러운 것도 더러운 것이지만 그것을 넘어서는 감정은 혐오와 약간의 공포였다. 이 손톱이 어떻게 이 먼지통에 들어가게 된 것일까? 집안 식구라고 해봐야 남편과 대학생 아들밖에 없었다. 그나마 아들은 기숙사에서 살아서 한 달에 한 번, 그마저도 어쩌다 올 뿐이었다. 이 더러운 손톱은 신발에 묻어온 것일 수도 있고, 택배 상자나 뭐 그런 것에서 나온 것일 수도 있었다. 어쨌든 경진은 그 손톱을 바라보는 일이 끔찍하게 느껴졌다. 

  그 날 저녁을 준비할 때까지도 경진의 머릿속에서 손톱은 좀처럼 떨어지지 않았다. 마치 순간접착제로 단단하게 붙여놓은 것 같았다. 잠을 자려고 누웠을 때에도 손톱에 대해 생각했다. 그냥 밖에서 들어온 거야. 아무것도 아니라구. 정말이지 그런 것이었으면 좋겠다고 경진은 간절한 마음으로 바랐다.

  다음날, 경진은 청소기를 돌리고 나서 먼지통을 찬찬히 들여다보았다. 먼지라고 해봐야 작은 소독솜 같은 덩어리가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그 솜 사이로 손톱이 삐죽, 날카롭게 나와 있었다. 때가 낀, 어제 본 손톱과 똑같은 모양이었다. 경진은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았다. 오늘은 일부러 현관을 청소기로 돌리지 않았다. 오직 방과 거실만을 돌렸을 뿐이었다. 그런데도 그 이상하고 더러운 손톱이 그 안에 있었다. 자신이 헛것을 본 것은 아닐까? 경진은 다급하게 먼지 통에 붙여놓은 테이프를 뜯어내기 시작했다. 자신의 눈은 멀쩡했다. 때가 낀, 길게 잘린 손톱 하나가 먼지 통에 분명히 있었다.

  만약에 그 손톱이 매니큐어를 칠한 것이거나, 아니면 단정하게 잘린 여자의 손톱이라면 경진은 남편을 의심했을 것이다. 하지만 시커멓게 때가 낀 그 손톱은 남편의 소지품 어디에서 묻어올만한 것이 아니었다. 이제까지 남편은 돈 문제라면 모를까, 여자 문제로 경진의 속을 썩인 적은 없었다. 남편은 먹고 자는 것이 편안하면 만족해하는 단순한 사람이었다. 자신은 마음이 늘 복잡한 사람이었으므로, 경진은 그런 남편의 단순함을 늘 미덕으로 생각하며 살았다. 이 손톱은 남편과는 아무 상관도 없다고 확신했다.

  뒤숭숭해진 경진의 마음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내일도 이 손톱이 먼지 통에서 나온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어쩌면 이것은 초자연적인 뭔가가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경진의 상상력이 뒤엉키며 뻗어나갔다. 밤새 잠을 이루지 못하고 뒤척이다가 경진은 새벽녘에야 조금 눈을 붙일 수 있었다. 아침에 일어나서 시계를 보니 9시 40분이었다. 경진은 세수도 하지 않고 청소기를 돌리기 시작했다. 잠이 덜 깬 상태에서도 무슨 힘이 나오는지 31평 아파트를 청소기로 돌리는 데에는 10분 정도밖에 걸리지 않았다. 그리고 먼지 통을 들여다 보았을 때, 다시 그 손톱을 발견했다. 놀랍게도 손톱은 하나가 아니라 세 개나 나왔다. 그 모양도 틀에 찍어낸 듯 똑같았다. 

  경진은 숨이 멎을 듯 놀랐다. 이것은 보통 일이 아니다. 귀신의 농간이거나 그런 것이다. 이 집에 악령이 스며들었다거나 하는. 상갓집에 갔다가 귀신이 붙어오는 일이 있다고 하지 않는가? 그런데 경진이나 남편이 최근에 상갓집에 간 적은 없었다. 이 손톱은 대체 어디에서 온 것일까, 도무지 풀 수 없는 의문이 경진의 마음을 무겁게 내리눌렀다.

  그날 내내 머리가 아파서, 경진은 타이레놀을 먹고 소파에 드러누웠다. 안 되겠다 싶어서 묵주를 꺼내어서 묵주기도를 시작했다. 한 시간도 넘게 집안을 왔다 갔다 하면서 성모님께서 자신과 가족, 이 집을 악령으로부터 지켜주시길 기도했다. 그렇게 그 하루가 지나갔다. 성모님은 반드시 그 이상한 손톱의 악귀로부터 당신의 자녀를 지켜주시리라, 경진은 그렇게 믿었다.

  그다음 날, 경진이 먼지 통에서 발견한 것은 다섯 개의 그 검은 손톱이었다. 경진은 마룻바닥에 주저앉아서 가만히 숨만 내쉬고 있었다. 어쨌든 뭔가를 해야만 했다. 스마트폰을 열어 구글 검색창에 '악령을 퇴치하는 법'이라고 써넣었다. 유튜브 알고리즘을 따라 무당과 퇴마사, 도사들의 말도 안 되는 비방(祕方)을 듣고 있노라니, 웃음이 터져 나왔다. 저 사람들은 저걸 진심으로 믿고 있는 것일까? 굿을 해야 한다느니, 명산에 가서 치성을 드리라느니, 달마도를 방마다 걸어 놓아야 한다느니, 그 정도는 그나마 상식처럼 보였다. 무슨 동물의 뼛가루를 구해서 집안에 뿌려야 한다는 사술(邪術)도 있었다. 나는 천주교 신자다. 내 신앙에 어긋나는 일은 해서는 안 된다. 경진은 수십 개의 동영상을 보는 내내 그렇게 되뇌었다. 

  "냄새 나게 저게 뭐야? 당신의 새로운 인테리어야?"

  그날 저녁, 퇴근한 남편이 현관을 들어오며 경진에게 말했다.

  "그냥 모른 척 해줘. 다 우리집을 위해서 하는 일이니까."
  "아, 그러고 보니 똑같은 거 본 적 있다. 가끔 오래된 음식점에 들어가면 저런 거 있었어. 손님 많이 오라고 달아놓은 건가 했는데. 우리집에 사람들 오라고 그런 거야?"

  남편은 어이없는 표정을 지으며 현관 앞에 서 있었다. 현관문 위쪽에는 사람 팔뚝만 한 말린 통북어가 두터운 무명 실에 묶여서 대롱거리고 있었다. 내일을 그 더러운 손톱을 볼 수 없을 거야. 딱, 딱, 딱... 경진은 그렇게 혼잣말을 하며 당근을 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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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빛


  "그렇다면 여러분이 가장 피해야 할 관상은 어떤 사람일까요? 관상을 35년 연구한 제가 자신 있게 말씀드립니다. 그건 눈빛, 눈빛입니다. 여러분이 어떤 사람을 만났는데, 눈빛이 안 좋다, 그것도 아주 안좋다. 그러면 그건 끝난 겁니다. 그런 사람은 피해야 해요. 길 가다가 그런 사람과 시비가 붙었다. 그냥 아무 말 말고 뒤돌아 가십시오. 그게 여러분 자신을 위한 겁니다."

  주희는 유튜브의 신기한 알고리즘을 따라가다가 어느 관상가의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그 동영상의 섬네일(thumbnail)은 '살면서 절대로 피해야 할 관상'이었다. 눈빛이 중요하구나. 새삼 뉴스에서 가끔 보았던 흉악한 범죄자의 눈빛이 떠올랐다. 그들의 눈빛에서는 뭔가 기이하고도 음험한 기운이 느껴졌다. 그래, 직감이란 것도 무시할 수 없지. 이 문명화된 사회에서 직감이란 선사시대 때부터 인류에게 내재된 동물적인 감각인지도 모르겠군. 침을 튀기며 자신의 이론을 설파하는 관상가의 얼굴이 어느새 사라졌다.

  그날 오후에는 친구 아들의 결혼식이 있었다. 결혼식과 같은 행사에 입고 가는 옷은 딱 정해져 있었다. 나이가 들수록 뻣뻣하고 각이 진 옷들은 옷장에서 사라졌다. 낡고 늘어져서 입기 편안한 옷들이 늘어났다. 주희는 샤넬의 트위드 투피스를 카피한 정장을 꺼냈다. 신발장에서 구두를 찾는 일은 그보다는 번거로웠다. 족저근막염에 시달린 이후로 구두는 신지 않은 지가 오래되어서 제일 윗칸 안쪽에 처박아 두었기 때문이다. 로퍼는 광택을 잃어버린 채 가죽이 허옇게 들떠 있었다. 하도 쓰지 않아서 조각난 구두 왁스를 꺼내어서 구두에 조심스럽게 발랐다. 그리고 구두 닦는 천으로 로퍼를 닦기 시작했다.

  "이 정도면 뭐 괜찮지."

  주희는 광택이 되살아난 로퍼를 만족스럽게 쳐다보았다. 그런데 로퍼에 발을 넣어보니, 그 불편한 느낌이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푹신한 쿠션이 있는 운동화만 신고 다니다가 구두를 신으니, 이건 마치 신발로 벌을 받는 기분이었다. 그렇다고 결혼식에 운동화를 신고 갈 수는 없었다.

  토요일 오후의 날씨는 무척 좋았다. 초가을의 선선한 바람에다 햇살도 그리 따갑지 않았다. 뒤꿈치의 통증을 조금씩 느끼며 주희는 지하철역을 향해 천천히 걸었다. 그나마 걷는 이동 거리가 그리 길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결혼식장은 3호선 고속버스 터미널 근처에 있었다. 결혼식이 열리는 시각까지는 무척 여유가 있었다. 오랜만에 아는 얼굴들을 만나게 되면 이야기도 나눠볼 생각이었다.

  지하철은 의외로 승객이 많지 않았다. 서 있는 사람이 드문드문 있을 뿐이어서 내리는 사람이 있다면 곧 자리가 날 것도 같았다. 두 번째 하차 안내 방송이 끝나고 나서, 주희는 비로소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사람들이 각자의 스마트폰에 고개를 파묻고 있어서 지하철 안은 마치 독서실처럼 조용했다. 주희도 스마트폰을 꺼내어서 자주가는 주부 커뮤니티 사이트의 자유게시판을 들여다 보았다. 삼식이 남편 때문에 너무 괴로워요. 매 끼니 밥을 챙겨야 하는 퇴직자 남편을 흉보는 여자의 사연을 읽다가 자신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웃음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살짝 입을 막았다. 그 순간, 바로 건너편에 앉은 남자 승객과 눈이 마주쳤다.

  남자는 베이지색의 야구모자를 쓰고 있었는데, 챙을 눈썹 아래까지 눌러썼다. 그럼에도 슬쩍 보이는 그늘진 그 눈빛이 좀 섬뜩하게 느껴졌다. 남자는 회색의 바람막이에다 검정색의 등산바지를 입고 있었다. 갈색의 트레킹화는 무척 낡아서 군데군데 터진 부분이 보였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남자가 끌어안고 있는 흰색의 백팩이었다. 그 부피가 상당해서 백팩이 미어터질 것 같았다. 어디 먼거리의 산행이나 여행을 다녀오는 길인가? 도시 사람들의 짐은 대개가 간소하기 짝이 없는데, 커다란 부피의 백팩은 뭔가 특이해 보이는 구석이 있었다.     

  누군가 자신을 탐색하는듯한 시선을 느끼자, 남자는 곧 야구모자를 깊게 내렸다. 마치 거짓말을 하다 들킨 아이처럼 주희는 살짝 당황하며, 이내 스마트폰으로 시선을 돌렸다. 눈빛이 안좋은 사람은 반드시 피하세요. 주희의 귓가에는 아침나절에 들었던 관상가의 확신에 찬 말투가 천천히 울려 퍼지고 있었다. 지금 당장 저 사람이 나에게 뭔가 위해를 가한 것도 아니다. 여기서 내려 다음 지하철을 타는 일은 번거롭다. 그 지하철에 이렇게 편하게 앉아 갈 자리가 없을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주희의 손은 조금씩 떨리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손이, 그다음에는 호흡이 조금씩 가빠졌다. 참으로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더니 이내 곧 토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새 신문을 펼쳤을 때의 진한 석유 냄새가 나는 것도 같았다. 주희는 자리에서 일어나서 출입문 앞에 섰다.

  "다음 정차할 역은 약수, 약수역입니다."

  심한 현기증을 느끼면서 약수역에 내린 주희는 승강장의 플라스틱 의자에 기진맥진하다시피 쓰러졌다. 닫힌 문 안쪽에서 남자가 웃고 있는 것이 보였다. 왼쪽으로 비뚤게 기울어진 웃음이었다. 남자가 들어올린 모자 아래로 그 눈빛이 보였다. 무엇이든지 다 집어삼킬 듯한 검은 심연 같은 죽음의 기운이 느껴졌다. 주희는 그 남자의 얼굴이 사라질 때까지 오금이 저려서 도저히 일어날 수 없을 것 같았다.

  "당신, 벌써 온 거야? 결혼식이 일찍 끝난 모양이네."

  주희는 로퍼를 벗어 신경질적으로 바닥에 내팽개쳤다. 남편의 시선은 TV 야구 경기에 꽂혀 있었다.

  "나, 점심 안먹었어."

  주희는 문득 시어머니의 얼굴을 떠올렸다. 남에게 싫은 소리를 잘 하지 못했던 시어머니는 아들에게도 그러했다. 그러니 아들이 자기 손으로 밥을 차려 먹는 법을 가르치지도 못한 것이다. 지금의 남편을 만든 절반이 시어머니라면, 나머지 절반은 자신의 몫이었다. 남편의 밥 타령을 그러려니 하고 넘어간 것이 53살의 삼식이를 만들었다.

  불편한 로퍼에 까진 발뒤꿈치에 반창고를 붙이고 나서, 주희는 냉장고를 들여다보았다. 아침에 끓인 미역국을 데우고, 김치 볶음과 김을 내놓으면 될 것 같았다. 타타타타. 가스렌지의 불이 켜지면서 파란색으로 변했다.

  "어, 저게 뭐야? 무슨 사고가 있나 본데. 3호선에서 무슨 폭발 사고가..."

  주희는 발뒤꿈치의 통증을 느끼며 TV 앞으로 황급히 걸어갔다. 남편의 손에서 리모컨을 빼앗아 YTN 뉴스 채널의 번호를 입력했다. 연기에 휩싸인 지하철역에서 쏟아져 나오는 사람들이 뉴스 화면 속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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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거야


  사업 실패와 부모님이 진 빚 때문에 죽고 싶다는 선생님의 글, 잘 읽었습니다. 정말로 죽을 결심을 하신 것은 아니지요? 아니, 죽을 결심을 하고 찬찬히 준비를 하고 있나요? 사람이 말입니다, 죽는 게 그렇게 쉽지가 않습니다. 제 이야기를 들려드리죠. 작년 여름의 일입니다. 저는 등산을 참 좋아합니다. 회사 일이 바빠서 자주 가지는 못하지만요. 그래도 한 달에 한 번은 꼭 가자, 그렇게 마음을 먹고 그걸 지키려고 해요.

  그날은 날씨가 무척 좋았습니다. 등산하기 전, 날씨를 확인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죠. 비 예보도 없었구요. 그런데 자연이란 것이 사람의 예측 따위는 손바닥 뒤집듯 뒤집어 버려요. 산 중턱에 다다랐을 무렵, 하늘에 먹구름이 몰려오더군요. 나는 배낭에서 우비를 꺼냈습니다. 비가 쏟아지면 입을 생각이었으니까요. 그리고 얼마 안 있어 천둥 번개가 치더니, 후드득 빗방울이 떨어지는 겁니다. 소나기치고는 무척 세차게 내리는 비였죠. 우비를 뒤집어쓰고 근처 나무 아래에서 비가 그치길 기다렸습니다. 하지만 빗줄기는 더 세질 뿐이었습니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나는 하산하기로 마음먹고 걸음을 재촉했습니다.

  갑작스러운 비에 산길은 고랑이 생기며 무척 미끄러웠습니다. 마음이 급하다 보니 발을 좀 헛디뎠죠. 완만한 경사길이었는데도, 발목이 꺾이면서 데굴데굴 굴렀지 뭡니까. 정신을 잃었던 것 같아요. 눈을 떠보니, 지나가는 사람들이 나를 에워싸고 있더군요. 누군가 신고를 해서 산악 구조대의 헬기를 타고 인근 병원에 실려갔습니다. 응급실에서는 골반이 부서진 복합 골절이라 큰 수술이라는 겁니다. 좀 더 큰 병원에서 수술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면서요.

  다시 구급차에 실려서 1시간을 달린 끝에 대학 병원에 도착했어요. 거기서 CT, MRI 찍은 걸 보더니 의사가 그러는 겁니다. 골절이 문제가 아니라 뼈에 종양이 생겼는데, 암 같다구요. 결국 골육종(骨肉腫)으로 판명되어서 다리뼈 몇 군데를 잘라내야 했어요. 다행히 다리 병신은 면했죠. 쇠로 된 뼈며 인공 관절을 구멍난 그릇 땜질하듯 끼워넣었거든요. 물론 남은 생애, 다리를 질질 끌면서 살게 될 것 같기는 합니다.

  내 힘으로 대소변을 볼 수 있다는 거, 그게 얼마나 중요하고 대단한 행복인지 아십니까? 나는 그랬어요. 의사가 암이라서 뼈를 잘라내야 한다고 말할 때, 평생 휠체어에 앉아서 누군가의 도움으로 화장실에 가야 한다면 그냥 죽는 게 낫다고 여겼으니까요. 그래서 나는 지금의 현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행복해요. 행복이란 게 별게 아니에요. 병원에 입원해 있으면 그날의 식단 메뉴에 신경이 곤두서요. 맛있는 고기반찬 나오면 기분이 좋아져요. 아주 사소하고 우스꽝스러운 그런 일상의 행복. 그런 게 있으면 사람은 누구나 살아갈 힘이 생겨요.

  자, 어떻습니까? 선생님의 사소하고도 우스꽝스러운 매일의 행복은 뭘까요? 한번 잘 생각해 보세요. 뭔가가 있을 겁니다. 없다고 생각하면 이제부터 만들면 되지요. 선생님이 너무나 부러워하는 누군가의 인생도, 그 속내를 들여다보면 다 힘든 구석이 있을 겁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그래도 그냥 살아가요. 그런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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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나의 벤치


  "아이구, 어르신. 날도 더운데 여기서 이렇게 앉아계세요?"

  양산을 쓰고 지나가던 중년의 여자가 연이 할머니를 보고 그렇게 말했다. 오후 2시, 실버 유모차를 끌고 나온 연이 할머니는 놀이터 벤치에 앉아있었다. 9월이 되었지만, 늦더위의 기세는 맹렬했다. 조금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앉아있는 할머니를 보고, 여자는 딱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연이 할머니는 무어라 대꾸할 기운도 없었다. 할머니가 별다른 말을 하지 않자, 여자는 머쓱해져서 가던 걸음을 재촉했다.

  10분 거리의 아파트 노인정에 가면 에어컨이 잘 나온다는 것은 알고 있다. 하지만 연이 할머니는 그곳에 가고 싶지 않았다. 감때사나운 총무 인천댁과는 상종하고 싶지 않았다. 인천댁은 노인정의 살림살이를 꽉 틀어쥐고 그곳 할머니들에게 오만 참견을 했다. 연이 할머니는 그 여편네가 아주 싫었다. 집이 답답해서 나오기는 했지만 딱히 갈 곳이 없었다. 그나마 놀이터 옆의 벤치가 앉아있기에는 마음이 편했다. 벤치 옆의 보도블록으로 이런저런 사람들이 지나가는 것도 구경할 수 있었다. 정신 사납게 내달리는 오토바이며, 시끄럽게 악을 쓰는 조그만 애들이 지나갔다. 더러는 숨이 막히는 담배 연기를 맡을 때도 있었다. 입술을 빨갛게 칠한 여중생들이 연이 할머니 옆에서 담배를 피우며 키득거렸다. 그럴 땐 연기 때문에 숨이 막힐 것 같아도 그냥 참았다. 막돼먹은 것들. 연이 할머니는 속으로 그렇게 되뇌일 뿐이었다.  

  "어머니, 우리도 더는 못 하겠어요."

  2년 전의 낙상 사고로 연이 할머니의 거동은 무척 불편해졌다. 부러진 다리뼈가 어렵사리 붙기는 했지만, 걷는 것이 무척 고통스러웠다. 원체 굽어진 허리에다 다리까지 말썽이니 연이 할머니의 괴로움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거기에다 화장실 가는 일도 힘들어서 소변을 실수할 때가 많았다. 막내딸이 기저귀를 사서 부쳐주었다. 차곡차곡, 마치 시골집에 쌓여진 장작처럼 연이 할머니의 비좁은 방에는 기저귀 상자가 높다랗게 쌓여있었다. 같이 사는 며느리는 집에서 지린내가 도무지 빠지지 않는다면서 싫은 소리를 자주했다. 그러던 것이 한 달 전, 연이 할머니가 이불에 실수하자, 집안 분위기는 더 싸늘해졌다. 큰아들의 입에서 요양원 말이 나오기 시작했다. 가기 싫다고 해서 가지 않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연이 할머니는 아들 내외에 대한 분하고 괘씸한 마음과 이렇게 내쫓김을 당하는 자신의 신세에 서글픔을 느꼈다.

  "승미야, 네가 이 에미하고 살면 안 되겠나?"

  휴대폰에 저장된 1번을 눌러서 연이 할머니는 막내딸에게 그렇게 물었다. 그러나 되돌아온 것은 '엄마하고는 못살아'라는 짤막한 대답이었다. 내가 저것들을 어떻게 키우고 가르쳤는데, 어쩌면 저렇게도 매정할 수 있을까? 연이 할머니의 붉어진 눈에 눈물이 고였다. 배 아파 낳은 자신의 새끼들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는 것 같았다. 어쩌면 그 아이들은 너무나도 먼 곳으로 진작에 떠나버린 것인지도 몰랐다. 내일은 요양원에서 연이 할머니를 데려가기로 한 날이었다.

  더운 바람이 연이 할머니의 얼굴을 휘감았다. 허연 머리가 끈적거리는 땀에 엉키며 엉망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손을 들어서 머리를 매만질 기운도 연이 할머니에게는 없었다. 더위에 입이 바짝바짝 말랐다. 연이 할머니는 인견 치마의 호주머니를 뒤져보았다. 엊그제 유모차를 끌고 지나가는 길에 교회 선교를 하는 여자가 나눠준 사탕 하나가 손에 잡혔다. 사탕 껍질을 까는 손이 덜덜 떨렸다. 연이 할머니는 사탕 껍질을 호주머니에 다시 넣으려 했지만, 손아귀에서 힘이 빠지면서 청포도 맛 사탕 껍질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조그만 사탕이라도 하나 먹으니 침이 고이고, 조금은 기운이 나는 것 같았다. 제 부모를 어디 모르는 데다 내다버리는 몹쓸 종자도 있다는데, 그래도 내 자식은 그렇지는 않지. 연이 할머니는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청포도의 신맛이 입안에 더이상 남아있지 않자, 연이 할머니는 벤치에서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실버 유모차의 손잡이에 검버섯이 핀 양 손을 무겁게 얹었다. 꼬질꼬질 때가 탄 회색의 천 손잡이에는 '주인 정복연'이라는 매직펜 글씨가 삐뚤게 쓰여 있었다. 연이 할머니는 유모차를 끌려다 말고는 잠시 벤치를 내려다보았다. 잘 있어라. 마치 다시는 만날 수 없는 사람의 얼굴을 쓰다듬듯, 연이 할머니는 자신이 앉았던 벤치를 두어 번 쓸어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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