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휴, 진이 다 빠지네."

  여자는 내 옆자리에 앉으면서 그렇게 혼잣말을 했다. 나만 그런 것이 아니군. 병원이란 곳은 사람들의 기를 쏙 빼가는 곳인가 보다. 성탄절 다음 날의 종합병원 대기실은 북새통 같다. 나의 진료 예약 시간은 오전 11시 50분. 나는 11시 20분에 도착해서 내가 진료받는 과의 대기실에 앉아있었다.

  진이 빠진다고 혼잣말하던 여자는 진료실에 들어가면서 목도리를 떨어뜨리고 갔다. 나는 여자가 진료실에서 나오는 것을 보고는, 목도리를 가져가라고 알려주었다. 여자는 고맙다고 인사를 한다. 여자의 나이는 50대 중반으로 보였다. 여자는 목도리를 주워 들고는 내 앞자리에 앉았다. 여자의 옆에 남자가 앉으면서 말한다. 여자의 남편 같았다. 남자는 자신이 들은 어떤 죽은 사람 이야기를 한다. 아마도 고독사한 사람인 모양이다. 남자는 천장을 보고 누운 채로 발견되었다는 시신의 모습을 흉내 낸다. 양쪽 팔을 개구리처럼 발딱 들어보인다. 참으로 생경스러운 광경이었다. 대기실이 혼잡해서 남자의 이야기가 더는 나에게 잘 들리지 않았다. 

  얼마나 기다렸을까? 간호사가 내 이름을 부르더니, 체온계를 귀에다 대고 체온을 측정한다. 내 주치의의 진료실에는 몸이 불편한 할아버지가 지팡이를 짚고 천천히 들어가고 있었다. 간호사는 저 할아버지 다음이 내 차례라고 알려주었다. 그 할아버지는 전동 휠체어에 계속 앉아있었다. 보호자는 보이지 않았다. 몸도 불편한데, 어떻게 혼자서 병원에 온 것일까? 그 영감님은 진료실에서 좀 오래 있었다. 노인 양반이 이야기하다 보면 좀 길어질 수도 있지. 나는 기다리는 시간이 짜증스럽거나 하지는 않았다. 주치의 선생은 환자들이 말을 길게 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인데, 저 할아버지에게 싫은 티를 냈을까? 마침내 할아버지 환자가 나왔다. 간호사는 수납을 하고 처방전을 받아 가야 한다고 설명을 했다. 영감님은 귀가 잘 들리지 않는지, 간호사에게 되물었던 것 같다. 나는 보호자 없이 병원에 온 저 할아버지를 보며 뭔가 짠한 생각이 들었다.

  한 달분씩 타던 약을, 이번에는 두 달분을 처방받았다. 병원에 가는 것은 매번 싫고 귀찮다. 여자의 말대로 병원에 갔다 오면 기운이 다 빠지는 느낌이 든다. 나는 병원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얼마나 기력이 강한 사람들일까에 대해 생각한다. 나 같은 사람은 병원에서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며칠만 있어도 골병이 들 것 같다. 올해는 이래저래 몸이 아파서 병원을 자주 왔다 갔다 했다. 병은 쉽게 낫질 않는다. 아마도 내년에도 이렇게 병원을 다녀야 할지도 모른다.

  나는 앞으로 내가 아파서 힘들게 지내게 될 날들과, 지출해야 할 병원비에 대해 가늠해 본다. 누군가 했던 말을 떠올린다. 노년에 접어든 사람들에게 가장 좋은 주거 환경은 큰 병원이 근처에 있는 곳이라고. 병원만 있어서는 안 된다. 병원에 갈 수 있는 교통 인프라가 잘 갖추어져 있어야 한다. 종합 병원급의 대형 병원이 근처에 있고, 거기에 갈 수 있는 교통이 편리한 곳. 그런 곳은 집값이 비싸지 않을까? 결국 노년에 겪게 될 병고의 문제는, 삶의 많은 문제의 해법이 그러하듯 '돈'으로 귀결된다. 아프지 말아야지. 내년에는 좀 안 아팠으면 좋겠다. 늙어감과 병에 대한 우울한 상상을 더는 하고 싶지는 않았다. 병원에 다녀온 날 저녁, 나는 진이 빠진 마음이 덜그럭거리며 내는 소리를 가만히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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