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가사리


죽어가는 산호초에서
불가사리가 번성하고 있다더군
과학자들은 불가사리를 사냥하고 있어

불가사리는 그저
죽어가는 산호의 몸뚱이를
먹고 살기 위해 뜯어먹을 뿐인데
그걸 죽이다니

그 불쌍한 불가사리를
내 머릿속에 풀어두자
너의 푸르스름한 눈웃음과
희디흰 손과
단정한 입술을
천천히 뜯어먹을 수 있게

붉은 촉수가 잘라버린
불온한 손가락 하나
불가사의(不可思議)한 그리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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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대어


전국 대부분의 지역에
폭염특보가 발효 중입니다
라디오는 기계음의 목소리를
미적지근한 온수로 흘려보낸다

휘적휘적 더운 물길을 헤치며
집안을 천천히 걷는다
이 바다는 참으로 따뜻하다

작은 열대어 한마리
스르륵
갈라진 아가미에는 커다란
낚시 바늘이 눈물처럼 꿰어져 있다
나는 눈물을 똑똑 떼어서 버린다
너는 눈물을 뚝뚝 흘린다

너의 바다는 참으로 먼 곳에 있으며
어쩌면 나는 그곳에 닿지 못할 것이다
그 바다를 떠올리는 일은 끝없이 가여워

손바닥만큼 열려 있는 부엌의 창문
자그맣게 웃는 소리를 내며
스르륵
열대어가 가버린 자리
내 손바닥에는 바늘 모양의 문신이
희미하게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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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지(未知)의 시


에어컨이 없는 작은 방
목에다 젖은 수건을 두르고 시를 쓴다
슬픈 시 좀 어디 알려줘 봐요
시란 원래 슬픈 거야
사는 게 즐거우면 시를 쓸 수 없어
어느 머저리의 시학을 떠올린다

나는 방바닥을 천천히 긁으며
미지의 시를 탐구한다
멸종된 공룡의 뼈가 만져진다
시커먼 세월의 때가 낀 지층 속
화려한 깃털은 보이지 않는다

너는 한때 크게 울었고
땅이 울리도록 달렸으며
사랑스러운 새끼들을 품었었지
하지만 이제 한낱 뼛조각으로 이렇게

언젠가 내가 죽어서 누울 관을 생각한다
나의 뼈와 나의 시들이 우는 소리를
아주 아주 먼 훗날의 누가 듣겠는가

15년 된 낡은 컴퓨터는 밭은 숨을 내뱉는다
목덜미의 젖은 수건은 반쯤 말라버렸다
땀에 절은 탱크톱에서는 어설픈 쉰내가 난다
미지의 뼈를 가만히 만져보다가
나는 서둘러 묻어버렸다

로그아웃하시겠습니까?
Y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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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끼리


도무지 알아먹을 수 없는 말들뿐이다
나는 장님이 코끼리를 만지는 것처럼 심사평을 읽는다
언어라는 것은 얼마나 우습고 복잡한가
지금 막 써넣은 '장님'이란 단어가
자기검열에 걸린다 요즘 세상에
'장님'이란 말을 써도 되는지 잠깐, 생각해 본다
아니, 심사평에 대한 시를 쓰려는데
초장부터 '장님'이란 단어에서 걸려 넘어진다
자, 그럼 '장님' 대신에 '시각장애인'을 쓰면 어떨까
이건 좀 뭔가 밋밋한 느낌이 난다 어쩔 수 없다
그냥 '장님'으로 밀고 나가자

언어를 단련하는 기본도 안 되어 있는 응모작들이 많았다,
고 어느 심사위원은 한탄했다
언어를 단련하라고? 언어가 칼이니?
불에다 달구어서 두들기고 단련하게?
결국은 당신들 입맛에 맞는 거, 그런 거 뽑은 거겠지
그러니까, 당신들이 휘두르는 권력의 언어를 탐하라는 거지

코끼리를 읽는다
코끼리를 만진다
코끼리 다리를 살짝 꼬집어 본다
싸구려 커피 한 잔에도 감사하며 이렇게 코끼리를 써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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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면증


언니, 나 요새 잠을 잘 못 자 잠을 자다 깨다 그래
잠을 못 자니까 몸도 피곤하고 기억력도 엉망이야
주말에 집에서 반찬을 만드는데, 반찬 만들어 놓고
뚜껑을 닫는다며 접시를 덮어놓았지 뭐야
회사에서도 회의하다가 졸기도 하고
뭐랄까, 정신이 멍해 머리에 안개가 낀 것처럼
작년에 정리해고로 사람들 많이 내보냈잖아
이제 정년(停年)까지 일하는 건 불가능해
나이든 사람은 알아서 나가줘야 하는 분위기지
나도 언제 나가라는 말 들을지 몰라
눈칫밥 먹는 뒷방 늙은이 같은 기분

얼마 전에는 꿈을 꿨어
엄마와 횡단보도를 건너는데 건너편 건물이 보였어
거긴 너무나도 칙칙한 회색의 건물이었는데
엄마와 내가 거기에 가야만 하는 거야
건물 안에 들어가니까 계단이 다 허물어지고
물이 뚝뚝 새는 그런 곳이었어
엄마는 붙잡고 있는 내 손을 뿌리치려 하고
언니, 졸음이 쏟아져 이렇게 자도 한두 시간 있다
깨겠지만 그래도 자둬야지 내일 일해야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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