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곳


그곳이 특별했던 이유는
네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네가 떠난 뒤에야 깨달았다

이제 나는 네가 앉았던 그곳에
오도카니 앉아
너의 행복을 바라지 않는다
눈물이 이유 없이 흐른다

마지막으로 남은
휴대용 티슈 한 장을 뽑는다
늙음이란 싸구려 미용 티슈 같은 것
얇고 거칠고 쓰라려
조금만 세게 닦아도 생채기가 난다
그래도 쓰다 보면 익숙해져

청춘은
무료하고
무지했으며
무자비한 일상이었다

툭툭 자리를 털고 일어서며
바투 자른 손톱으로
아픈 눈가를 세게 문질렀다
그곳에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았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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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발하는 밤


누군가 그에게 귀띔합니다
당신의 집에 불이 날지도 모른다고
남자는 놀라고 두려운 마음으로
한달음에 집으로 갑니다
거실 한가운데에는 아픈 아버지가
두꺼운 이불 아래
겨울 몽고의 마눌(manul) 고양이처럼
고요히 부풀어 있습니다

벽은 시뻘건 열기로 금이 가있고
어디에선가 끓는 소리도 들립니다
임계점(臨界點)을 느낍니다
콘크리트와
나무와
뼈와


폭발하기 직전입니다

아버지, 눈을 뜨세요, 제발요

남자는 너무나 무서워서
더는 그곳에 머물 수 없습니다
문을 향해 달려갑니다

그 순간, 눈을 뜬 아버지가
거적때기같은 이불을 두르고
휘청휘청 걸어 나오는군요

집이 폭발합니다
밤이 소리를 냅니다

남자는 아버지와 함께 길을 떠납니다
바보가 되어버린 아버지를
내다 버릴 수는 없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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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오후 4시


머리가 하얗게 센 할머니 혼자
놀이터 옆 벤치에 앉아있다
가만가만 숨을 내쉬며
천천히 부채질한다
사람들을 기다리는 것이다
늘 그 시간에 나오는 동네 사람들

누런 염색 머리의 늙은 여자는
비척거리며 걷는 아픈 개를 풀어놓고
말 많은 영감은 젊은 날을 늘어놓는다
누군가 쪄온 옥수수를 나누어 먹으며
그들만의 정겨운 오후 4시

하지만, 오늘은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
검은색 스카프를 두른 외로움이
할머니의 어깨 위에 앉아서
재잘거리는 소리를 낸다

어디를 가시오?

이쪽 집에서 저쪽 집으로요

행인이 상냥하게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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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삭(添削)


바람이 불어오는 방향을 등지고 날면
더 잘 날아갈 수 있다고
그런 말을 해주는 사람이
내게는 없었다

어깃장을 놓으며
악다구니를 쓰며
욕을 퍼붓다가
울음을 터뜨린다
백날 해봐야 안 되는걸

바람의 첨삭(添削) 선생을 진작에 찾아갈 걸
바람의 독에 말라버린 황무지의 공항
마지막 남은 관제사는 도망가 버렸다

다시 한번 시동을 걸어본다
바람의 소리를 들어라
바람의 결을 읽어라
바람과 함께 노래해라
바람을 첨삭할 수 있다고 믿는
바보들과 작별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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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31일


장마는 끝났다
참외는 끝물이다
옥수수는 조금 더 먹을 수 있다

아침 6시 반
아파트 경비는 기다란 삼각 괭이로
놀이터의 흙을 고른다
쿡쿡 탁탁 
굳은 흙을 헤집었다가
다시 평평하게 만드는 일
아무 의미도 없는 일
매일 똑같은 하루

살아온 여름보다
살아갈 여름날은
이제 적게 남았다

열대야로 설친 잠이
푹 꺼진 낡은 소파로
꾸벅꾸벅
쏟아져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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