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 베어지다


아침 8시, 눈이 떠진다 웅웅거리는, 방바닥을 울리는 소리,
그날이구나 오늘은 이 아파트의 33년 된 백합나무가 사라지는
날이다 나는 나무의 아픈 울음소리를 듣는다 나를 베이게 만든
자들에게 화가 있을지니 나무가 33년을 살았으면 영물(靈物)이라는
말을 쓸 법도 하지 그런 나무를 낙엽을 많이 떨군다고, 뿌리가
배관을 휘감는다고 베어버린다는군 나무를 베는 것도 순서가 있어
우선 잔가지들을 잘라내고 그다음에 윗부분을 자르고, 그리고 중간,
마지막으로 밑동을 베는 것이지 나무의 사지는 산산조각이 나서
철저히 찢기지만 피 한 방울도 튀지 않고 신음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나는 하루 종일 이상한 오한을 느낀다 타이레놀을 하나 꿀꺽, 삼키고는
발골(拔骨)하듯 차례차례 바수어지는 나무를 본다 덩그마니 남은
밑동들, 동그랗고 정갈한, 나는 너희들에게 바람 소리와 그늘과 때로는
눈물,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가느다란 통로를 내주었거늘, 이렇게
나를 베어내는구나 나무는 안녕, 이라는 말 대신에 저주를 퍼붓고는
사라진다 제일 큰 백합나무의 윗쪽에 있던 까치집도 허물어졌다
나는 까치가 알을 낳았을까 궁금해진다 사람도 아파서 죽어나가는데
그까짓 까치의 알 따위, 관리사무소에 까치가 새끼를 낳아 기를 때까지
벌목 일정을 미룰 수 없냐고 물어보려다 말았다 사람이 정이 많으면
못써 살기가 어려워 이 험한 세상, 그래도 살아내려면 독기(毒氣)가
있어야지 단 한 방울지라도, 나는 내 안의 독기를 가만히 헤아려 본다
늙음을 견디는 독기, 가난을 견디는 독기, 바스라지는 꿈의 잔해를
응시하는 독기, 뿌리 없는 것들을 멸시하는 독기, 그런 독기가 없어서
삶은 서러웠고 눈부셨으며 무작정 아팠다 오늘 베어지는 나무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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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비에 지워진 그 글씨


여자는 놀이터를 대각선으로 가로질러서 걸어갔다 그리고는
미끄럼틀 앞에 서더니, 거기에 쌓인 눈을 잠깐 들여다 보고는
손가락으로 죽죽 글씨를 써내려 갔다 눈발이 미친듯이 휘날리고
있었다 베란다 창밖으로 눈이 오는 것을 내다보던 나는 여자가
대체 거기에다 뭐라고 썼는지 궁금해졌다 저런 건 조그만 애들이나
하는 장난 아닌가? 이십 대 후반이나 서른 즈음으로 보이는
그 여자는 그렇게 눈 위에 글을 써놓고는 휘적휘적 커다란
보폭의 걸음을 내디디며 곧 내 시야에서 사라졌다 무슨 글을 썼을까?
나는 어떻게든 나가서 그 글씨를 확인하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하지만 구태여 그 글씨를 보기 위해 따뜻한 집을 떠나는 일은
귀찮기도 했다 어쨌든 있다가 나가 봐야지 곧 눈이 비가 되고, 글씨는
물이 되어 놀이터의 흙바닥에 스며들었다 아쉽군 여자가 뭐라고
썼는지 알고 싶었는데 말이지 아무개야, 사랑해! 아니면, 부자 되게
해주세요 같은 것이었을지 아, 그건 아니었으면 좋겠다만 나로서는
전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지워진 글씨, 나는 새삼스럽게 그를 떠올린다
그에게 하지 못했던, 아니 할 수 없었던 어떤 말에 대해서, 내 머릿속에서
마구 엉켜 휘날리는 눈발, 나는 곱은 손으로 글씨를 써내려 간다
시간이, 오래되고 아픈 시간이 그 글씨를 지워나가는 것을 본다
그는 나의 글을, 내가 하고 싶었던 그 말을 영영 알지 못한다 내 머리가
차디찬 땅에 뉘여질 때 그는 알게 되리라 눈비에 지워진 그 글씨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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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 찬바람이 분다


아침부터 비가 흩뿌리더니 바람이 분다 부는 모양새가 예사롭지가 않다
춥다 기온이 뚝 떨어진다 포근해진 날씨에 이제 롱패딩 따위, 얼른 옷장에
넣어버려야지, 그래서 세탁을 해놓았는데 갑자기 쌀쌀한 바람이 뺨을
때린다 중학생 아들이 춥다는데 패딩을 다시 입혀야 할까요? 인터넷 게시판에
어떤 여자가 글을 썼다 아이가 춥다고 하면 입혀야죠 아니, 추운 아들 옷
입히는 것도 사람들한테 물어보냐 우문현답이네 참 갑갑한 사람도 많지
나는 혀를 끌끌 차면서 게시판을 떠난다 새 대표는 칼질하러 온 사람이야
사람들 자르러 왔다고 전화기 너머 들리는 목소리는 무겁게 가라앉아 있다
매서운 감원의 바람이 불어닥칠지도 모른다 물가가 너무 올랐다 최저가
검색에 최적화된 삶이지만 요새는 더욱 버겁게 느껴진다 엊그제는
집에서 생두를 볶다가 연기와 냄새 때문에 숨이 막힐 것 같았다
바람이 몹시 부는 날에 집안의 창문을 죄다 열어놓고 볶았는데도
그랬다 벽지와 옷과 가구는 사흘 내내 커피 냄새를 분수처럼 내뿜었다
정말이지 토할 것만 같았다 오늘 아침에 세수를 하고 얼굴을 닦는데
수건에서 커피 냄새가 났다 내게는 그 커피 냄새가 궁상스러운 냄새처럼
느껴졌다 원두 가격은 미친듯이 오르고 있다 인스턴트커피도 올랐다
커피를 마시지 않고 살 수는 없을까? 문득 2차 세계대전 때 생필품 부족에
시달리던 독일 사람들이 커피 대신 마셨다는 대체 커피가 떠오른다
치커리 뿌리를 볶아서 마셨다던가 황금광 시대의 찰리 채플린이
배고픔에 시달리다가 신발 밑창을 요리해서 먹는 장면도 있지
물가가 너무 오르고 있는데, 그걸 말하는 사람들은 어째 찾아보기가
힘들다 과일값은 말 그대로 미쳐버렸다 사과를 먹고 싶은데 너무
비싸다 찾아보니 주스용 사과라는 것이 있다 멍들고 흠 있는, 그런 부분을
대충 도려내고 믹서기에다 갈아먹는 사과, 의외로 값이 싸서 주스용
사과를 사보았다 생각보다 사과 상태가 괜찮았다 사과를 깎는데, 손이
덜덜 떨린다 비싼 사과를 이렇게라도 먹을 수 있다니 하지만 왜 이딴
사과를 보냈냐고 길길이 날뛰는 구매자도 있다 이봐, 당신이 산 건
주스용이라고 그런 걸 먹고 싶지 않으면 돈을 더 내면 되잖아 참으로
자본주의는 명쾌하기 짝이 없다 나는 주스용 사과의 흠있는 부분을
크게 도려낸다 상한 부분을 먹고 배탈이 날까 봐서이다 사람의 눈에
보이는 상처보다 더 많은 부분이 상할 수 있거든요 무슨 화학자는
유튜브에서 그렇게 떠들어댄다 그렇군 도려내고 도려내어 조막만 해진
사과를 감사히 먹는다 부엌의 조그만 창문으로 보이는 집 앞의 벚나무는
휘어지고 흔들리면서 소리를 낸다 올해는 더디게 오는 봄, 찬바람이 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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삭제, 타인의 삶


지난 석 달 동안 썼던 블로그 글이 갑자기 사라져 버렸다 내가
블로그 설정 메뉴에서 뭔가를 잘못 눌러서 그리된 모양이다
그래서 삭제된 글을 다시 올릴까 생각을 하다가 그만 두었다
그 글들을 찬찬히 살펴보니 꼭 찾아서 올릴 필요도 없어 보였다
내 일상의 작은 편린들인 셈인데, 그걸 읽는 사람들에게는
타인의 삶, 그것도 스쳐 지나가는, 별 의미도 없는 짧은 글일 뿐이다
나는 새삼 내가 하루 종일 그렇게 무심코 듣고 잊어버리는
타인의 삶에 대해 생각한다 배경 소음처럼 틀어놓는 라디오에서는
이런저런 사연들이 꾸역꾸역 나온다 어제는 장애아를 20년 동안
키웠다는 여자가 사연을 보내왔다 도망치고 싶었을 때도 많았지만,
여자가 쓴 그 문구에서 목이 콱, 메이는 느낌이었다 얼마나 힘이
들었을까? 얼마나 간절히 자신의 현실에서 도망치고 싶었을까?
그래도 버텨내고 살아낸 여자가 참으로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내가 사는 아파트를 담당하는 야쿠르트 여자에게는 자폐아 아들이
있다 그 아들은 덩치가 크지만 그저 해맑게 엄마만 따라다닌다
언젠가 여자와 그 남편, 그리고 아들이 함께 있는 것을 보았다
그들은 웃으며 즐겁게 이야기하고 있었다 나는 행복이란 무엇일까를
생각한다 어떠어떠한 것이 있어야지만, 또는 없어야지만 행복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모든 것은 내 마음가짐에서 나온다, 고 다시 한번
다짐을 한다 그래도 힘든 것은 어쩔 수 없겠지 베란다 앞의 벚꽃은
이제 꽃을 피울 준비를 하고 있다 까치 한 마리가 소리를 내길래
들여다보았더니 둥지를 지을 나뭇가지를 있는 힘을 내어 부러뜨리는
중이었다 그 까치가 날아간 곳은 얼마 안 있어 베어지게 될 나무이다
그 나무 꼭대기에 있는 자신의 둥지를 까치는 아무것도 모른 채 고치고
있다 소용없는 짓이지 까지의 둥지는 삭제된다 내가 무심코 듣게 된,
알게 된 타인의 삶도 내 머릿속에서 삭제된다 그래도 그들의 삶은 이어진다
까치는 새집을 어딘가에 지을 것이며, 타인의 삶에도 봄이 깃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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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역성(非可逆性)


불행 중 다행이야 얼굴뼈에 금이 가지도 않았고
이가 부러진 것도 아니잖아 동생이 그렇게 말했다
그래, 네 말이 맞아, 그렇게 말하면서 나도 고개를
끄덕이고 싶지만 어째 그게 쉽지가 않다 찢어져서
꿰맨 입술에는 봉합사가 너덜거리고 있고, 얼굴에는
듀오덤이 덕지덕지 붙어있다 철사로 이어 붙여놓은
치아는 계속 욱신거린다 그냥 가만히 정류장에서
버스나 기다릴 것이지, 뭐하러 좀 걸어간다고 길바닥에
넘어져서는 이렇게 고생을 하나, 그 생각부터 해서
땅바닥에 찰떡같이 들러붙는 운동화 때문이다, 하는 생각,
아니다, 거지 같은 SUV 차량을 피하려다 넘어졌으니
그걸 운전한 놈이 웬수다, 까지 오만 생각이 머리를
스친다 돌아가고 싶다, 그 재수 없는 사고 이전의 시간으로,
그렇지만 그건 아무리 생각해도 불가능한 일이다
그렇군, 인생의 많은 것들은 결코 되돌릴 수가 없어
흰머리를 아무리 뽑아도 검은 머리는 나지 않고,
눈꺼풀은 시간의 중력을 이기지 못하고 천천히
내려앉기 시작하지 어쩔 수 없는 것 투성이야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기로 하자 아스팔트 바닥에
되게 넘어지고도 얼굴이 부서지지 않은 것을,
아직까지 앞니가 붙어있는 것을, 마침 큰 병원이
가까이 있어서 응급실에 걸어갈 수 있었던 것을,
젠장, 아무리 그렇게 생각하려고 해도 그냥 혼자
잘근잘근 화를 씹게 된다 인생의 그 빌어먹을
비가역성(非可逆性) 따위, 그렇게 회한과 분노와 안도가
뒤엉킨 침울한 성탄 전야에 캐럴을 듣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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