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방송(KTV)에서 월요일 새벽 1시에 방영되는 'KTV 시네마'는 주로 오래전 한국 흑백 영화들을 방영한다. 1950, 60년대 흑백영화들은 대부분 한국 영화의 진부하고 신파적인 주제와 내용을 보여주고 있기는 하지만, 간혹 비전형적인 영화 문법을 보여주는 좋은 작품들도 발견하게 된다. 이 시간에 방영된 박성복 감독의 1961년작 '해바라기 가족'이 그러했다. 그 시대에도 작가의식을 가지고 치열하게 영화를 만드는 감독들이 있었고, 그 가운데 유현목 감독은 여러편의 주목할만한 영화들을 만들어 냈다. '구름은 흘러도'는 그가 1961년도에 만든 문제작 '오발탄' 이전에 만든 영화로 감독의 독창적인 연출 솜씨를 발견할 수 있다.
영화는 탄광촌에서 부모를 잃고 가난을 견디며 사는 4남매의 고단하고 힘겨운 일상을 그리고 있다. 영화의 내러티브는 막내 말숙이의 일기를 통해 이어지는데, 말숙이의 내레이션이 이 영화 그 자체라고도 할 정도로 큰 비중을 차지한다. 큰오빠가 탄광촌에서 벌어오는 돈으로 근근히 생계를 이어가던 이 가족은 오빠가 탄광 파업에 참여하다 해고당하자 세상의 풍파 속으로 떠밀려 나간다. 큰오빠는 다른 도시의 탄광으로, 둘째는 식모로, 그리고 남겨진 남매는 기름집 아저씨 집에 얹혀서 눈칫밥을 먹으며 학업을 이어간다. 말숙이의 유일한 위로는 일기를 쓰는 것으로, 일기장에 자신의 모든 소망과 꿈을 적어가며 뿔뿔이 흩어진 가족이 다시 만날 날을 기다린다.
말숙이가 감당해야 하는 극심한 가난은 너무 처절해서 영화 내내 말숙은 거의 단벌 옷에 맨발로 나온다. 그 맨발을 보면 누가 저 아이에게 양말이라도 사서 신게 해주었으면 하고 바랄 정도다. 둘째 오빠의 행색도 마찬가지여서 터지고 헤진 단벌 바지를 말숙이가 대충 꿰매주어 입고 다닌다. 이 영화는 당시 가난한 사람들의 일상이 어떠했는가를 말 그대로 여과없이 보여주는 리얼리즘 영화 같다. 끼니조차 제대로 잇지 못하는 말숙이에게 늘 일기를 읽고 격려해주는 여선생은 빵을 사주는 호의 뿐만 아니라 학비 문제도 해결해서 학업을 잇게 해준다. 이 일기야말로 말숙이의 인생에 변화를 가져오는 가장 큰 계기가 된다.
영화는 말숙이의 일기가 출판되어서 세상에 큰 반향과 호응을 일으키고, 그 결과 4남매가 다시 탄광촌에 모여서 단란하고 행복한 삶을 이어가게 되는 것으로 끝이 난다. 영화는 그렇게 좋은 결말로 끝났지만, 이 영화의 내적인 유기성은 성글게 이어져 있고, 그렇게 비어있고 단절된 영화 자체의 내러티브는 보는 사람에게 뭔가 미진한 느낌을 주기 충분하다. 나는 영화를 보고나서 관련된 내용을 찾아보았는데, 그제서야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이 영화의 원작은 재일교포 소녀 야마모토 스에코가 쓴 일기로, 1958년 일본 출판사 광문사에서 '니안짱'이라는 책으로 나왔다. 이 책은 폭발적 인기를 끌어서 NHK에서 라디오 방송극으로 나왔을 뿐만 아니라, 일본의 유명 감독 이마무라 쇼헤이가 동명의 영화로 만들어서 세계 영화제에서 수상을 하기도 했다. 우리나라에서도 두 군데의 출판사에서 이 책이 출판되었는데, 저작권자의 허락을 받지 않고 무단으로 출판해서 문제가 생기기도 했다. 결국 정식 계약을 맺고 출판하는 우여곡절을 겪으며, 인기를 끌었던 이 책은 영화화의 과정까지 밟게 된다.
일본 탄광촌이 배경인 일기는 한국의 현실에 맞게 각색되면서 상당한 사실성을 상실했고, 그것이 영화 내내 무언가 잘 해명되지 않고 비어있는 느낌을 주는 데에 일조했다. 재일교포로 차별받고 정식 탄광 노동자가 될 수 없었던 스에코의 큰오빠와 4남매가 겪었던 현실은 탄광촌이라는 배경만 따온 가난한 가족의 이야기로 치환되었다. '가난'은 세대와 국적을 뛰어넘어 많은 사람들에게 호소력있는 주제였기에 스에코의 이야기는 일본 뿐 아니라 우리나라에서도 큰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스에코와 4남매가 겪어야 했던 재일교포에 대한 일본 사회의 차별과 모순은 이마무라 쇼헤이 감독의 영화에서도 배제되어야 하는 요소였고, 당시 반일 감정이 팽배했던 우리나라에서도 드러내봤자 좋을 것이 없는 배경이었다. 일본과 한국에서 각각 제작된 두 영화 모두 원작자인 스에코가 그려낸 일기의 본질과는 다소 동떨어진 영화였던 셈이다.
그럼에도 '구름은 흘러도'가 보여주는 가난한 이들에 대한 따뜻하고 연민에 찬 시선은 보는 사람들의 마음을 울리는 지점이 분명히 있다. 유현목은 영화 내내 맨발로 나오는 말숙이가 온몸으로 맞닥뜨리는 가난이라는 혹독한 현실을 아름답고 처연한 일기의 문장들로 승화시킨다. 제각각 흩어진 가족들이 하늘을 흘러가는 구름처럼 언젠가 다시 하나로 만나게 될 거라는 말숙이의 희망에 찬 내레이션은 그 시대의 모든 가난하고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바치는 헌사처럼 보인다.
'니안짱'은 산하 출판사에서 어린이용 도서로 출판되었으나 현재 절판된 상태다. 영화를 보고나서 꼭 구해서 보고 싶었던 나에게는 참으로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일기의 주인공 야마모토 스에코는 후에 와세다 대학 문학부를 졸업했고, 문필가로 활동했다고만 알려져 있다. 출판된 일기로 받게된 엄청난 인세가 4남매의 삶의 행로에 나름대로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그야말로 스에코에게는 인생을 뒤바꿔 놓은 일기였던 셈이다.
이 영화를 둘러싼 자세한 배경 이야기를 알고 싶은 사람은 2012년에 고려대학교 한국학 연구소에서 발간한 김승구의 "아동 작문의 영화화와 한일 문화교섭"이라는 논문을 참고하면 좋을 것이다. 저자 김승구는 현대시를 전공한 국문학자인데도 한국 영화사적인 측면에서도 참고할 수 있는 좋은 글을 썼다고 생각한다. 이 글을 쓰는데도 그의 논문이 참 많은 도움이 되었다.
덧붙이는 글: 영화에서 말숙 역으로 나오는 아역 배우의 연기가 매우 뛰어나서 극의 몰입감을 높이는데 큰 역할을 한다. 찾아보니 배우의 이름은 김영옥인데, 아역시절이라고 해도 원로배우 김영옥의 얼굴과는 상당히 다르게 느껴진다. 배우 김영옥의 필모그래피에는 분명히 올라와 있지만, 이 영화의 아역이 그녀가 아니라는 이야기도 있어서 확인이 필요해 보인다. 김영옥 씨의 공식적인 영화 데뷔작은 '가거라 슬픔이여(1957)'인데, 그 영화 포스터의 아역 얼굴과 이 영화 주인공의 얼굴은 동일하게 보여서 김영옥 씨가 맞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