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당신이 〈히든〉을 다 보고나서도 누가 테이프를 보냈는지 알고 싶어 한다면, 그것은 당신이 영화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는 의미다 - 미하일 하네케


  볼프강 보르헤르트의 희곡 『문밖에서』에는 진실에 관한 의미심장한 표현이 있다. 보르헤르트는 진실을 ‘한낮에 거리를 배회하는 창녀’로 비유한다. 진실의 얼굴은 보는 이를 불편하고 고통스럽게 만들기 때문에 누구든 그것을 밝은 빛이 아닌 어둠 속에서나 보려고 한다는 것이다.

  잊고 있었던 과거의 진실이 어느날 갑자기 한낮의 빛 속에서 자신의 얼굴을 바라볼 것을 요구한다면? 조르주와 안나 부부에게 닥친 일이 그것이다. 그들의 일상을 담은, 예사롭지 않은 비디오 테입이 배달되면서 이 가족의 삶은 혼란과 공포에 휩싸이게 된다.

  영화는 처음엔 스릴러 장르의 공식을 충실히 이행해나간다. 관객은 과연 저 테입을 촬영해서 그들 부부에게 보낸 이가 누구일까에 대해 의문을 품는다. 그러나 조르주의 어린 시절과 관련된 기억들이 드러나기 시작하면서 테입 보다는, 과연 숨겨진 진실이 무엇이냐가 더 중요하게 된다. 

  조르주가 기억하지 못하는, 또는 말하고 싶어 하지 않는 과거의 진실이란 이런 것이다. 어린 시절 그는 자신의 집에서 일하던 알제리인의 아이를 부모가 입양하려 하자 거짓말을 하여 아이를 집에서 쫓겨나게 만들었다. 그 이유를 묻는 부인에게 그는 대답한다. 자신이 혼자 쓰던 방과, 그 밖의 것들을 나누기 싫었을 뿐이라고. 그의 거짓말로 인해 입양의 기회를 박탈당한 아이, 마지드의 삶은 이후 철저히 무시되고 잊혀진다. 조르주에게 배달된 테입은 표면적으로는 마지드에 대한 기억을 소환해내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 테입이 궁극적으로 겨냥하고 있는 것은 단순한 기억의 재생이 아니라, 과거의 잘못에 대한 양심의 가책, 죄책감이라고 할 수 있다. 마지드가 자살한 후, 그의 아들이 조르주와 대면하여 나누는 대화는 그 점을 잘 보여준다. 그는 조르주에게 말한다. 평생 동안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사람의 얼굴이 어떤지 보고 싶었다고.

  조르주에게 마지드의 일은 잊혀진, 사소한 과거의 편린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 이유로 그는 자신의 거짓말로 인해 영락해버린 마지드의 삶에 대해 아무런 책임이나 감정의 동요를 느끼지 못한다. 조르주는 자신의 삶에 불편이나 위해를 끼칠 수 있다고 판단되는 것은 무엇이든 제거하는 것이 당연하며, 선이라고 믿는다. 그러한 조르주의 신념은 자신의 소유물과 공간에 침입하는 그 어떤 대상, 즉 타자에 대한 끊임없는 배제를 전제로 하는 것이며, 결국 타자에게 행하는 폭력과 야만적 행위를 정당화시키는 데에 이르게 된다. 그러므로 그는 마지드의 아들에게 답한다. 

  “내게 양심의 가책 따윈 바라지 마. 네 아버지의 인생을 망쳤다는 것 말이야. 난 아무 잘못이 없어!”

  그가 보여주는 이러한 모습은 1961년의 파리 대학살과 관련하여 프랑스 사회가 보여주었던 기만적이고 위선적인 자세를 떠올리게 한다. 국가를 유지하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며 자신들의 범죄와 살인에 면죄부를 주며 진실에 대해 침묵하는 프랑스 지식인의 행태는, 과거 서구의 제국주의가 식민지에 대해 행했던 지배 논리와도 맞닿아있다. 〈히든〉을 통해 하네케가 직격탄을 날리는 곳은 바로 그 지점이다. 

  사실 자신의 소유물, 집, 가족, 삶의 안락함을 지키고자 하는 욕망 그 자체가 추악하거나 지탄의 대상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욕망의 추구가 타자의 권리, 더 나아가 생명을 담보하는 것이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여기에서 타자는 단지 프랑스 내의 알제리 인, 유색인종만을 지칭하지는 않는다. 강대국에 의해 침탈당하는 약소국까지 포함한다고도 볼 수 있다. 조르주와 안나 부부의 집 거실에 있는 TV가 쏟아내는 뉴스들을 보면 이 점은 더욱 명확해진다. 이라크 전을 비롯해 전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분쟁에 관한 화면은 서구 유럽과 미국이 가진 근원적인 두려움을 보여준다. 그것은 자신들을 둘러싼 세계가 외부의 불온한 타자에 의해 습격당하거나 오염될지도 모른다는 공포이다. 두려움과 공포는 즉각적인 공격을 감행하게 만든다. 그러므로 그 어떤 예외 없이 대규모의 전면전과 학살로 귀결되는 것이다. 미디어는 그러한 모든 과정에서 학살자의 거짓과 공모한다. 거짓은 순식간에 진실이 되고, 곧이어 역사로 자리 잡는다.  

  그렇다면 진실은 어떻게 자신의 얼굴을 드러내는가? 여기에서 다시 〈히든〉에 나오는 비디오 테입을 언급해야할 필요성이 생긴다. 감독 자신이 언급했듯 테입을 누가 만들었느냐는 우리의 진정한 관심사가 될 수 없다. 사실 〈히든〉에서 현실과 테입의 화면에는 아무런 차이가 존재하지 않는다.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면 그 시선의 주체가 다르다는 점이다. 서로 다른 시선에 의해 재현되는 현실은 파편화된 진실을 담고 있다. 그러므로 안나는 진실을 계속 숨기는 남편 조르주에게 테입은 ‘그와는 다르게 자신에게 사실을 알려주려는 것’이라고 말한다. 

  테입은 배회하는 진실이 택한 하나의 도구일 뿐이다. 〈히든〉에서 진실은 마치 살아있는 생물체처럼 떠돌아다니는 것처럼 보인다. 그것은 과거의 기억에서 달아나버린 가해자 조르주의 무의식 안에서도 살아남았다(영화 초반부에 피를 토하는 아이가 등장하는 두 번의 인써트 장면을 기억하라). 중요한 것은 진실이 결국에는 자신의 얼굴을 드러내고 말을 하게 된다는 점이다. 이 영화의 논쟁적인 마지막 장면은 그 점을 입증해주고 있다.

  조르주의 아들 피에로는 학교 수업을 마치고 친구들과 함께 나오는 길이다. 그 때 마지드의 아들이 그에게 다가가 이야기를 하기 시작한다. 두 사람은 잠시 이야기를 하다가 헤어진다. 그 둘은 과연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을까? 하네케는 이 마지막 장면에 대해 ‘무수한 해답과 해석이 있을 수 있다’며 열린 결말임을 강조한다. 그 장면은 화해와 소통의 시도로 읽힐 수 있는 여지가 있기도 하다. 그러나 상처 입은 진실은 그렇게 성급히 서둘러 봉합되고 치유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온전히 자신을 드러낼 때까지 세대를 통해 전달되어 살아남으려 할 것이다.     

  자신의 일상에 손톱만큼의 균열을 허용하지 않기 위해 타자의 삶에 가하는 거짓과 폭력은 그 무엇으로도 정당화될 수 없다. 〈히든〉은 가진 자가 지키고자 하는 일상의 안온함 속에 감추어진 추악한 욕망을 여지없이 드러내 보인다. 진실은 가해자에 의해 수탈당하고 도륙되지만 살아남는다. 그것은 끊임없이 가해자의 수치심과 죄책감을 건드리고, 세대에 세대를 이어 자신의 생명력을 보존해나간다. 이제 모든 일이 해결되었다고 믿는 조르주는 수면제를 먹고 편안히 잠이 든다. 그러나 피 흘리는 진실의 얼굴은 여전히 그의 주변을 서성이고 있다. 그것은 잊혀지기 위해서가 아니라, 기억되기 위해서 존재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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