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명 〈8과 1/2〉은 잘 만든 영화이다. 펠리니는 예술가로서의 자신의 갈등과 고뇌를 현실과 무의식의 모호한 경계를 넘나드는 매혹적 영상으로 승화시켰다. 하지만 영화를 다 보고나니 나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왜 그랬을까? 문득 머리를 스쳐가는 생각은 그런 것이었다. 작가는 자기 자신의 고통을 후벼 파내어 팔아먹고 사는 존재라는. 펠리니에게도 그런 것이 있었던 모양이다. 가톨릭에 대한 부채의식, 복잡한 여성 편력, 제작자와의 갈등, 창작의 어려움, 언론과 대중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들이 이 영화에 고스란히 드러난다. 
  영화는 펠리니의 삶과 예술에 대한 근원적 태도를 이해하는 데에는 정말 좋은 자료가 되어준다. 〈8과 1/2〉은 감독 자신에게는 일종의 자기 고백이자, 세상과 사람들을 향한 예술적 선언을 했다는 면에서 의미있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8과 1/2〉에서 펠리니가 추구하는 작가적 태도에는 독선의 가능성도 내포되어 있음을 간과할 수 없다. 펠리니의 후기 작품들이 지나치게 형식주의적이고 탐미적이라는 비판을 받는 것도 어찌보면 당연한 것이다. 〈사티리콘〉은 그 결정판이었다. 펠리니는 세상을 변화시키거나 구원의 가능성으로서의 영화 만들기를 포기하는 대신 자신의 내면과 상처들로 침잠하는 것을 선택했다. 

  어떤 의미에서 본다면 펠리니가 〈8과 1/2〉을 만들 수 있었던 것은 운이 좋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전지구적 자본주의가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이 시대에 작가가 상업성을 떠나 생존한다는 것, 그것도 자신의 예술적 태도를 포기하지 않고 작품을 만들어낸다는 것은 너무나도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8과 1/2〉과 같은 영화는 시간이 갈수록 제작이 불가능한 프로젝트가 되어가고 있다. 그와 동시에 감독의 작가적 지위는 불안하고 모호한 것으로 변해간다. 

  오늘날 멀티플렉스의 폭주하는 관객들을 떠올려본다. 그들에게 감독의 내면세계를 이해하는 일이 관심사가 되고 있는가? 결코 아닐 것이다. 대신 그들이 원하는 것은 시각을 압도하는 볼거리이다. 제작자와 투자자가 원하는 영화는 돈이 될만한 영화이며, 감독이 가진 역량은 그러한 영화를 만들어낼 수 있는가로 평가받고 있다. 지금의 시대에 펠리니가 추구하는 예술적 태도, 작가적 역량은 그다지 유용한 것이 되지 못하는 것도 사실이다. 

  마지막 장면에서 주인공 구이도는 자신이 만들려는 영화 속의 모든 인물들을 불러모아 서로 손을 맞잡고 춤추게 만든다. 구이도를 통해 펠리니는 자신의 과거와 진실하게 조우하고, 그가 처한 고통스러운 현실과 화해하고 싶었을 것이다. 진정한 작가가 탄생하는 순간은 허위의식과 겉치레를 포기하고 자신의 상처를 솔직하게 직면하게 될 때이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8과 1/2〉은 펠리니의 작가적 정체성을 명시적으로 알리는 이정표와도 같은 영화라고 할 수 있다. 
  예술로서의 영화적 위치가 자본에 의해 위협받고 있는 이 시대에 과연 펠리니가, 그리고 〈8과 1/2〉과 같은 영화가 나올 수 있을지에 대해 한번 생각해본다. 이 영화는 우리가 진정으로 작가의 탄생을 기다리고 있는지, 그리고 작가의 예술적 선택에 얼마나 인내하고 관심을 보여줄 수 있는지에 대해 진지하게 묻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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