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그래도 사랑할만한 인간 
  홍상수는 이전의 영화들에서 항상 자신의 분신들을 등장시켜왔다. “오! 수정”에서 문성근이 분한 영화감독, “극장전”의 김상경이 분한 영화 감독 지망생은 어느 정도 감독 자신이 반영된 캐릭터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제 “해변의 여인”에서 홍상수는 그 자신을 날 것으로 내놓는듯한 느낌이 든다. 중래가 바로 그 인물이다. 
  중래란 인물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아이와 같은 철없음을 지닌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처음 문숙과 만나고 헤어진 일을 보면 그가 매우 즉흥적이고 자신의 감정에만 충실한 인물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문숙이 후배의 애인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어떻게든 자신에게 넘어오게 만드려고 부리는 수작이라던가, 하룻밤을 보낸 후에 문숙이 보이는 친근함이 부담스러워 “산뜻해지고 싶다”고 단번에 감정적으로 밀쳐내는 장면이 그러하다. 그러나 그의 행동에 계산적이거나 비열한 구석이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중래는 그렇게 문숙을 보내고 혼자 다시 서해안으로 돌아와서는 미안한 마음에 어쩔 줄 모른다.  
  그런 중래의 캐릭터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어쩌면 해변가 나무 앞에서 꺽꺽 소리를 내며 우는 장면이 아닐까? 그렇다. 중래는 그런 인간이다. 횟집 종업원은 마구 무시하며 욕을 퍼대는 그가 나무 한 그루가 주는 알 수 없는 도저한 감동 때문에 눈물을 흘린다. 
  중래란 인물의 그러한 자기중심성은 선희에게 인터뷰를 하고 싶다며 접근해서 이것저것 묻는 대화 장면에서도 등장한다. 살아오면서 무엇이 제일 힘들었느냐는 중래의 질문에 선희는 그다지 힘들었던 일이 없었다고 말한다. 그러자 중래는 “난 초등학교 3학년 이래로 사는 게 힘든데.”라며 혼잣말을 한다. 중래의 그 말은 결코 우스개 소리가 아니며 아마도 그가 믿는 진실일 것이다. 사는 건 누구에게나 힘들다. 그러나 중래에게는 자신을 둘러싼 삶의 모든 일이 매우 심각하고 극적인 것이 된다.   
  그러나 그러한 자기중심성은 누구에게나 존재한다. 문숙을 보자. 문숙은 중래와 선희가 술에 취해 쓰러진 자신의 머리를 넘어갔는가를 집요하게 물고 늘어진다. 중래에게는 정말 사소하고 아무 의미가 없는 일이 문숙에게는 그토록 중대한 관심사였던 것이다.  
  중래와 문숙이 보여주는 말과 행동은 그러한 자기중심성이 만들어내는 파열음 속에서 어긋나게 배열되어 있다. 하늘의 별은 자신이 불러주기 전까지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게 아니나며 천진스럽게 말하던 문숙은 선희의 지갑이 침대 밑에 있는 것을 알고도 선희에게는 못보았노라고 말한다. “해변의 여인”에 나오는 인물들이 보여주는 다면적인 모습과 감정의 과잉, 극대화된 자기중심성을 이해하기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닌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홍상수는 이에 대해 친절한 모범 답안을 제시해준다. 그의 전작들에 그러한 모습들이 있었는가? 결코 아니다. 그런데 이제 그는 그림까지 그려서 관객들에게 답을 알려주는 것이다! 
  그 답은 중래가 문숙에게 사물과 대상을 인식하는 방법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 장면에 들어있다. 하나의 실체를 온전히 인식하기 위해서는 한 가지, 또는 두세 가지 정도의 정보나 사실에 의존할 것이 아니라, 보다 자세한 관찰을 통한 많은 정보를 취합해 판단할 때 실체적 진실에 접근할 수 있다고 설파하는 것이다. 이 장면에서 중래는 알기 쉬운 도형 그림을 그려가며 문숙에게 자신의 의견을 납득시킨다.     
  중래가 그려낸 도식은 어떤 면에서는 홍상수가 견지하는 인식론인 것처럼 보인다. 그는 인간의 내면에 도사린 이기심과 극도의 불합리함을 매우 잘 알고 있는 사람이다. 하지만 동시에 인간에게는 의미 있고 숭고한 것을 찾고, 그것에 매혹되기 쉬운 면이 있다는 것 또한 놓치지 않고 보여주려 한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중래나 문숙은 결코 속물로 단정짓고 내칠 수 있는 인물이 아니다. 그들은 삶의 진정한 의미를 찾아가는 도정(道程)에 있는 인물인 셈이다. 그러므로 홍상수에게 그들은 치졸함과 어리석음, 지나친 자기중심성에 빠진 인물들임에도 ‘그래도 사랑할만한 인간’인 것이다.


2. 우연성이 지배하는 이 세계 
  “해변의 여인”에는 이해하기 어려운 몇몇 장면들이 등장한다. 이러한 연출은 홍상수의 전작들에서도 종종 봐왔던 것이기도 하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해변에서 개를 산책시키던 젊은 남녀는 왜 개를 도로에 내버리고 가버릴까? 중래가 욕을 퍼댔던 횟집 종업원은 매우 소심한 인물이었음에도 왜 해변가에서 중래와 선희에게 위협적인 행동을 보였던 것일까? (그가 매우 소심한 인물이라는 점은 선희에게 얻어맞은 뒤 겁에 질려 소변을 보는 장면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러한 장면들은 마치 하나의 알레고리처럼 읽힌다. 왜 별로 중요한 것처럼 보이지 않는 인물들이 만들어내는 사건이 지나치듯 제시되는 것일까? 영화 초반부에 중래가 횟집 종업원에게 한 언사는 분명 모욕적이고 지나친 면이 있다. 중래는 그것에 대해 사과하라는 후배 창욱의 요구를 애써 무시한다. 중래에게 그 일은 ‘아무 것도 아닌’ 일이었기 때문에, 그것에 대해 심각해지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그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는 일이 한밤의 해변을 거닐고 있는 중래에게 예기치 않은 일로 나타난다. 그는 굉음을 내며 오토바이로 위협하는 낯선 이로 인해 겁에 질린다. 그를 이 위기에서 구해주는 것은 선희의 대찬 행동이다.  
  그런가하면 주인에게 버려진 개 똘이는 새 주인과 함께 전혀 다른 이름으로 문숙 앞에 나타난다. 그 순간에 문숙이 똘이에 대해 이전에 확실하게 알고 있었던 사실과 믿음은 배반당하고 어긋나버린다. 아무렇지 않게 무심코 지나버린 사물과 사건이 시간이 지난 후, 전혀 다른 모습으로 되돌아와 나타나는 것, 그것은 마치 멀리 가버렸다 생각한 부메랑이 다시 되돌아오는 것과도 비슷해 보인다.  
  홍상수가 생각하는 이 세계란 그처럼 인과론(因果論)으로 촘촘히 짜여진 그물망 속에 우연(偶然)이 슬그머니 끼어드는 곳이다. 중래가 처음에 구상한 영화가 우연히 일어난 세 사건 사이의 연관성을 탐구해 가는 인물에 대한 것이란 점도 그러한 감독의 세계관과 무관하지 않다. 처음 던진 곳으로 다시 되돌아오는 부메랑처럼 우리네 삶은 아주 사소해 보이는 사건들이 전혀 다른 예기치 않은 결과를 가져오는 결정론적 숙명에 갇힌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홍상수는 여기에 우연성이 선사하는 헐거운 매력을 덧붙인다. 문숙과 선희가 맺은 유대 관계를 생각해보면 그 점을 잘 알 수 있다.  
  문숙과 선희는 술을 마시며 서로의 마음을 알게 된다. 문숙은 그 다음날, 침대 밑에서 아무렇지 않게 지갑을 빼내어 든다. 그 지갑은 선희가 그토록 찾던 것이었지만 문숙이 결코 보지 못했다고 말한 것이었다. 그것을 마침내 문숙은 선희에게 돌려준다. 중래라는 한 남자를 두고 신경전을 벌이던 두 여자 사이에 적대감이 아닌 새로운 유대감이 생겨난 것이다.  
  이것은 과연 이전의 홍상수 영화에서 무시당하고 소홀히 다뤄져왔던 여성성에 대한 변모된 시각을 반영하는 것일까? 혹자는 이것을 페미니즘적인 관점에서 여성들간의 연대의식이 드러난 것이라고 말한다. 일면 수긍이 가는 말이기도 하지만, 홍상수의 관심은 그와는 다른 것처럼 보인다. 그는 두 여자의 만남 그 자체가 갖고 온 우연한 결과에 더 무게 중심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중래와 문숙, 선희는 우연히 서해안의 해변가에서 만났다. 그리고 떠났다. 중래는 새 영화의 시놉을 건지고, 선희는 잃어버린 지갑을 찾으며, 문숙은 해변 모래사장에 빠져버린 차를 빼내어 마침내 우리의 시야에서 벗어난다. 그들은 함께 지내는 동안 즐거웠을까? 아마 충분히 즐거웠을 것이다. 그들이 새롭게 발견한 것이 무엇이든 간에, 삶은, 이 거대한 우연성이 지배하는 이 세계에서 그 자체로 놀랍고 의미 있는 것이다. 그 발견의 여정을 홍상수는 여유와 유머를 담아 그려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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