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괴물〉, 반미의식의 산물 

 〈괴물〉은 괴수 영화인가? 분명, 나름대로 정교한 컴퓨터 그래픽(돈이 많이 들어가면 안되는 것이 없다)으로 구현된 괴물의 형상은 이제까지 한국 영화에서 볼 수 없었던 구경거리이기는 하다. 대다수 한국 관객들이 이 영화를 보며 우리도 이제 헐리우드에 못지않은 괴수 영화를 갖게 되었다는 자부심을 보이는 것도 이해가 간다.

  그렇다면 왜 봉준호는 2006년 7월의 한강에 괴물을 등장시켰을까? 그것에 담긴 의미가 무엇인지 살펴보지 않고서 이 영화에 대한 논의를 발전시키는 일은 어려워 보인다. 영화 초반의 장면들이 암시하듯 괴물과 미군 부대가 한강에 무단 방류한 포름알데히드는 무언가 관련이 있다. 여기서 ‘암시’라는 표현을 쓴 것은 그것의 인과관계가 명확하지 않기 때문이다. 멀쩡한 한강의 물고기가 어느 날 갑자기 괴물로 변해버린 것이 단지 독극물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는 근거가 어디 있는가? 그럼에도 우리가 이 영화에서 괴물 탄생의 배후로 미국을 자연스럽게 인지하는 것은 감독이 의도적으로 삽입한 독극물 방류 장면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이 영화는 반미에 대한 노골적인 정서를 드러낸 매우 정치적인 영화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왜 반미의식이 극렬했던 1980년대가 아닌 2000년대에 미국에 대한 적대와 분노가 새삼스레 괴물의 형상으로 나타나야하는가에 대해 물을 수밖에 없다. 그 이유를 독극물 방류 사건으로 한정짓는 것은 손쉽기는 해도 설득력은 떨어진다. 그 보다는 언제부터인가 우리 사회에 일상화된 반미 의식의 표출이라고 보아야하지 않을까? 괴물이 반미 의식이 격렬한 아랍 세계가 아닌, 혈맹이라는 이름으로 미국을 부르던 한국에 나타났다는 점도 의미심장하다. 

  영화 〈괴물〉에 나타난 반미의식은 매우 분명하고 노골적인 것이라 우리의 흥미를 그다지 끌지 못한다. 한때 운동권에 몸담았던, 그러나 이제는 무기력한 삶을 이어가고 있는 둘째 아들 박남일의 존재도 그러하다. 오히려 이 영화에서 눈길을 끄는 부분은 가족에 대한 묘사이다. 한강 매점을 운영하고 있는 강두네 가족을 들여다보는 일은 이 영화를 이해하는 가장 빠르고 안전한 길을 제시해준다고도 할 수 있다.


2. 위기상황에서의 가족주의

  강두네 가족은 그야말로 전형적인 서민 가정의 모습을 보여준다.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고단한 일상 속에서도 가족에 대한 애정만큼은 각별한 그들을 결집시키는 매개체는 바로 혈연, 핏줄이다. 그것은 너무나도 강력해서 죽음에 대한 두려움마저도 무화시킨다. 박희봉에게 현서를 찾는 일은 아들 강두의 앞날과 직접적으로 연관이 되어있다. 왜냐하면 약간 모자라서 어떻게 살지 늘 걱정스러운 아들에게 그나마 버팀목이 되어줄 수 있는 것은 손녀인 현서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핏줄이 안정된 삶을 영위하는 일은 박희봉의 존재가 세대를 이어 기억됨을 의미한다. 

  혈연은 오랫동안 한민족(韓民族)으로 이상화된 공동체를 유지시켜온 가장 강력한 가치였다. 그러니 그것이 〈괴물〉의 강두네 가족에게 있어 유달리 부각되거나 특별하다고 할 것도 없다. 우리가 주목해야할 것은 위험과 재난 상황에서 혈연에 바탕을 둔 가족주의가 작동하는 기제에 대해서다. 왜 사회체제, 국가는 생명의 위협에 처한 개인, 가족을 보호하지 못하는가? 그렇다면 누가 어떻게 그 위협에 맞서 싸워야 하는가? 

  봉준호는 〈괴물〉의 강두네 가족에게 닥친 재앙에 대한 해결을 전적으로 그 가족 자신의 몫으로 돌려놓는다. 이 가족이 괴물에게 대항하기 위해 가진 것이라곤 낡은 소총과 화염병, 양궁 활이 전부이다. 사회와 국가는 이 가족의 안위에 아무런 관심이 없다. 미국의 지휘를 받는 비상본부와 미디어는 오로지 바이러스의 실체 규명에만 집착한다. 사회, 국가가 그 구성원을 보호해야할 의무를 저버릴 때 개인이 희망을 둘 수 있는 유일한 곳은 가족이라는 익숙하고 오래된 가치이다. 그러므로 강두네 가족은 괴물로부터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무장한다.       

  괴물이 어떻게 등장하게 되었고, 강두네 가족이 괴물과 사투를 벌일 수밖에 없는 이유를 알게 되었으니 이젠 도대체 이 괴물의 정체가 무엇이냐에 대한 질문이 남는다. 이 점에 대해서는 감독이 이미 영화 초반부에 포름알데히드라는 열쇳말을 주었으므로 추측이 어렵지 않다. 괴물은 전부터 우리와 함께 존재했던 그 무엇이었다. 단지 예기치 못한 상황에 의해 돌연변이된 개체가 된 것이다.  


3. 〈괴물〉, 한국 사회의 무의식적 지층을 탐구하다

  영화 속의 괴물을 보면서 관객이 복합적 감정에 사로잡히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잔혹하게 사람들을 잡아먹고 해치는 괴물, 현서를 죽음에 이르게 하는 괴물의 모습은 분노와 증오의 대상이 되기에 충분하지만, 인골을 고통스럽게 내뱉는 모습이라던가, 화염에 휩싸여 최후를 맞이하는 장면에 이르면 도대체 이 괴물이 왜 이렇게 밖에 될 수 없는지 일말의 동정심이 일기도 한다. 그러한 이중적 감정을 촉발하게 만드는 근원에는 이 사태의 근본적인 책임을 괴물이 아닌 독극물을 방류한 미군, 미국으로 보는 시각이 자리하고 있다.

  〈괴물〉에서 괴물의 존재론적 해명은 매우 모호하다. 그것은 괴물이 최후를 맞는 순간까지 해소되지 않고 남는다. 괴물은 분명 우리 자신은 아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미국의 대리자라고 볼 수도 없다. 그것은 어떤 면에서 그 둘 사이의 비극적 공존이 낳은, 말 그대로 알 수 없는 괴이한 생명체, ‘괴물’인 것이다.

  봉준호는 전작인 〈살인의 추억〉으로 한국 사회의 80년대를 관통하는 무의식을 담아내었다. 그의 〈괴물〉은 2000년대의 한국 사회의 무의식적 지층을 대변한다고 볼 수 있을까? 반미와 가족주의의 문제를 괴물로 형상화시켜서 그려낸 그의 역량은 확실히 뛰어나다. 그러나 새로운 것, 혁신적인 것을 담아내기에 〈괴물〉은 여전히 미흡하다.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고 있는 이 시대에 우리가 가지고 나아갈 것이 가족주의, 그것도 혈연에 바탕을 둔 가치일까? 봉준호는 혈연이 아닌 이들 사이의 연대의 가능성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결말 부분에서 강두는 죽은 딸 현서와 함께 붙잡혀 있었던 세주를 가족으로 받아들인다. 그러나 그가 그렇게 한 것은 세주가 현서의 기억을 갖고 있다는 점 때문이다.

  어쨌든 가족은 지속된다. 그러나 그것은 일시적인, 잠정적인 것이다. 마지막 장면에서 눈 오는 한강변을 바라보던 강두는 무언가 이상한 기척을 느끼곤 소총을 집어 든다. 가난하고 배우지 못한 한 사내가 언젠가 다시 나타날지도 모르는 ‘괴물’과 대면해서 자신의 가족을 지켜낼 수 있을 거라는 보장을 과연 그 누가 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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