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간 많이도 격조(隔阻)하였다. 공간은 그 공간에 속해 있는 사람을 지독히도 결정적으로 규정하는 것이어서, 요즘 내가 처한 여러 공간들이 나를 자유롭게 하지 못하는 일이 잦아졌고(그러나 사실, 나는 단 한 번도 '자유'로웠던 적이 없었다, 라고 나는 말할 수 있었다, 라는 것이 어쩌면 나의 유일한 자유였다, 라고 나는 어쩌면 가장 자유롭게 고백한다), 나의 또 다른 '공간'인 이곳에 대해 얼마간 예전처럼 살갑게 대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딱 그만큼의 서먹함을 지닌 채 나는 지금 다시 이곳에 글을 남기려 하고 있다. 어쨌든 이야기는 이제부터 다시 시작될 것이고, 또 그렇게 다시 시작되어야만 할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 와중에 되도록이면 '이야기하지 않으면서 이야기하려고' 애쓸 것이다. 이 '불가능성'만이 나를 사로잡는다는 사실을, 나는 그리 오래 되지 않은 경험을 통해, 그리고 오래 되지는 않았으나 깊이 각인되어 있는 경험을 통해, 오히려 더 잘 알고 있다. 하고 싶은 이야기들만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하고 싶지 않은 이야기들을 이야기해야 하는 것보다, 훨씬 더 어려운 일이다. 그 어려움을 느끼며, 똑같이 어렵게 입을 뗀다.  

 

 

▷ 하나의 시작과 끝: 책과 음악과 담배와 라이터와 재떨이가 있는 풍경. [사진: 람혼]

 
1) 나의 이야기는 객사할 운명이다:

사진과 환등기, 그 이야기의 첫 운을 뗀다면 이렇다. 그 시작(詩作)은 아무래도 내가 가장 오래 머물러 있는 나의 책상 위에서 시작(始作)되어야 할 것 같다(이 문장 안에서라면, 저 두 개의 '시작'들을 서로 뒤바꿔서 읽어도 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그렇게 '시작'된 이상, 아마도 그것은 그것이 시작되었던 바로 그 장소 위에서 끝날 것이다, 그렇게 끝날 것이었다, 아마도 그럴 것이다. 그러나 나는 또한 오래된 질병처럼 덧붙여야만 한다: 8년 동안 '침묵'의 시간을 가졌던 적이 있다. 그것은 무엇보다 내게 '강요된' 시간이었지만, 동시에 반드시 '필요했던' 시간이기도 했다(이러한 하나의 '아전인수(我田引水) 격인 해석'은 무엇을 통해서 작동하고 있는가, 하나의 '사후성(Nachträglichkeit)'을 통해서?). 이제 폭파를 준비할 때이다, 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 폭파를 위해 나는 다시 말을 아끼고 글을 숨길 것이다. 그러나/그리고 언젠가, 가깝거나 먼 미래에, 사람들은 그 폭파에 대해 지독한 채무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하지만 결코 나는 그 '빚'을 상환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사실 나의 이야기는 저 책상에서 시작되었지만 단지 저 책상에서만 끝날 수는 없을 운명에 처해 있다. 그러니까 다시 말하자면, 나의 이야기는 객사(客死)할 운명인 것이다. 

 

 

▷ 연주되기를 기다리는 피아노: 서울의 한 스튜디오에서, 녹음하기 전의 망중한. [사진: 람혼]

 
2) 음악은 유물론적 투쟁이다:

작곡가에게 연주가는 가장 중요한 인물 중의 하나일 것이다. 작곡가로서 내가 만든 곡을 연주해주는 연주가에게 품게 되는 고마움의 크기는 아무리 해도 잘 설명할 수 없지만, 아무래도 녹음 때는 작곡가나 연주가나 서로 또는 각각 까칠해지기 마련이다. 이 피할 수 없는 긴장의 관계를 잘 풀 수만 있다면 하나의 좋은 음악이 탄생하게 된다. 그리고 나는 이 과정에서 언제나 하나의 '화법'을 발견하고 발명하게 되는데, 때로는 그 화법 자체가 내 자신을 피곤하게 만든다. 그러나 그러한 화법 또한 음악이라는 과정의 일부분이다. 그러므로 음악을 만드는 과정이란 단지 작곡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 작곡이라는 '무형의 물질'에 뼈를 세우고 살을 입히는 모든 과정이 바로 음악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 진부하리만치 단순한 진리를 익히고 겪는 데에만 해도 많은 시간이 걸린다고 고백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렇게 시간을 통과할 때에만 하나의 음악이 완성된다. 음악은 그렇게 시간을 통과하고 관통한다. 그 시간이 전혀 아깝게 느껴지지 않는 이유이다. 그러나 다행이면서 또한 불행인 것은, "우리에겐 그만큼의 시간적 여유가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 자본주의화된 시간 개념이 적용되는 스튜디오를 탈피하는 순간, 아마도 새로운 음악이 다시 열릴 것이다. 음악은 그토록 '물질적'인 것이며 또한 그토록 '물질-의존적'인 것이다. 음악을 만드는 일은 유물론적 투쟁의 일환이다. 

 

 

 

 

▷ 람혼재(襤魂齋)의 낮과 밤. [사진: 람혼]

 
3) 나의 밤은 당신의 낮보다 아름답다:

이념의 시대는 가고 실용의 시대가 왔다는 말만큼 공허한 것은 없다. 이념 논쟁을 끝내라는 말은 인간이기를 포기하라는 말과도 같기 때문이다. 인간을 움직이는 것은 이념이며 그건 현재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무뇌충(無腦蟲) 집단은 이념을 포기하라는 또 다른 이념을 강요한다. 문제는 이들이 '이데올로기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해 극도의 무지를 노출하고 있다는 점이다(그 물음에 대한 대답에 무지한 것이 아니라 그 물음 자체에 무지하다는 사실이 바로 이 무지의 무시무시한 실체이다). 저 실용의 시대라는 괴물은 그 자신이 하나의 편협한 이념으로부터 탄생했다는 사실을 스스로 보지 못한다. 그런 맥락에서 이 시대는 그 어떤 시대보다도 더욱 더 강렬하게 이론적 투쟁의 지점들을 소환하고 있다. 우리는 이 지점들 사이에서 다시금 느슨하면서도 촘촘한, 곧바르면서도 기우뚱한 투쟁의 전략들을 새롭게 세워야 한다. 지극히 이원론적으로 말하자면, 나의 낮은 물질의 시간이며 나의 밤은 관념의 시간이다. 그러나 나의 밤이 마주치는 저 관념들은 오히려 지독히도 간절하게 낮의 낮은 물질들을 꿈꾼다, 비유하자면, 태양 아래의 구체적 육신을 얻고자 한밤중에 개처럼 침을 흘리는 한 무리의 유령들처럼. 물질들을 꿈꾸는 한에서만 그것들은 관념일 수 있고 또 유령일 수 있다. 그래서 나의 관념들은 지독히도 낮고 지독히도 비천할 수밖에 없는 것(abject). 오늘 밤도 나의 관념이 너의 물질에 흘레붙는다. 하지만 나의 밤은 당신의 낮보다 아름답다, 아니, '앓음'답다. 

 

ㅡ 襤魂, 合掌하여 올림. 

 

추신: 요즘 나의 유령이 더욱 자주 출몰하는 곳은 트위터이다.
http://twitter.com/rawscie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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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nca 2010-07-13 20: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찬찬히 읽어 보게 됩니다. 격조하였습니다. 람혼님. 공간도 사람과 같아서 수시로 가까이 왔다가 멀리 물러나기도 하고 그런 것 같습니다. 저는 완전히 결별한 사이버 공간으로 싸이가 있어요^^;; 그냥 나의 모든 것을 추잡스럽게 가장하고 또 그런 상태로 상대와 일대일 소통도 아니면서 사생활을 낱낱이 중계받아 친밀해졌다고 착각하다 또 그게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 과정이 견딜 수가 없어서요.(별 얘기를 다하게 됩니다.) 신기한 것은 그 공간의 결별이 사람들과의 결별로 이어지더군요. 딱 그 만큼의 소통 수준이었던 가 봅니다.

관념, 이념. 그래도 이런 것들을 쳐다 보며 낮에 버티고 싶습니다. 그래야 견딜 수 있으니까요. 서재가 너무 부러워서 몇 번이나 보고 갑니다. 저는 역시 물질적인 인간인가 봅니다. ㅋㅋㅋ 오늘 밤도 나의 관념이 너의 물질에 홀레붙는다,이런 문장. 감탄하고 가요.

람혼 2010-07-14 06:02   좋아요 0 | URL
"딱 그만큼의 소통 수준"이라는 말씀이 제게 어떤 울림을 줍니다. 찬찬히, 섬세하게 문장의 결을 따라 읽어주셔서 제가 감사할 따름이죠. 말씀하신 대로 저 또한 관념의 밤을 통해 물질의 낮을 버텨내고 싶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무엇보다, 그 낮이 더 이상 '버텨내야' 하는 것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2010-07-14 01: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7-14 06: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다락방 2010-07-14 09: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그래도 요즘 보이시질 않아 궁금하던차에 반가운 글입니다. 트위터는 제가 하질 않으니 그곳에서 람혼님의 유령을 만날수는 없을테고, 저는 그저 아무쪼록 이 공간에 람혼님이 좀 더 자주 나타나주시길 좀 바라보겠습니다.

반가워요, 람혼님.

람혼 2010-07-14 15:16   좋아요 0 | URL
네, 저의 다른 유령도 이제 서재에 좀 더 자주 출몰하려고 하는 듯합니다.^^
저도 너무 반가워요, 다락방님!

푸른바다 2010-07-19 12: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람혼님 오랫동안 보이지 않으셔서 해외 공연 나가신 줄 알았습니다. 서재가 아주 훌륭합니다. 파이프 담배도 인상적이구요.^^ 장마철이라 습하고 무덥습니다. 건강관리 잘 하시고 종종 뵐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람혼 2010-07-20 00:23   좋아요 0 | URL
정말 후텁지근한 날씨의 연속이죠? '푸른바다'님의 이름이 더욱 반가워지는 그런 시간, 그런 계절입니다.^^ 그간 격조하였습니다. 일전에 보내주신 문자는 이튿날 확인했음에도 불구하고 정신이 없어 따로 답문을 못 드렸어요. 이 자리를 차용해 사과의 말씀을, 그리고 더불어 감사의 말씀을 올립니다. 사실 조만간 해외 공연 '투어'도 할 예정에 있어요(언젠가 남극에서도 공연 한 번 할 수 있기를 기원해봅니다...^^). 저 또한 자주는 못 되더라도 종종 반갑게 뵐 수 있기를 바랍니다. 좋은 하루 보내시길!

2010-08-01 01: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8-02 02: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독립만세 2011-08-10 20: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 알라딘 산책을 하다가 님의 서재를 발견 했습니다 .
님의 지적 무게가 저를 압사시키는 군요 가끔 들르도록 하죠

람혼 2011-09-11 16:35   좋아요 0 | URL
독립만세님, 너무 반갑습니다. 방문해주셔서 깊이 감사드립니다. 종종 뵐게요! ^^
 

 

매도와 애도.

정부, 군대, 주류 언론들은 모두 입을 모아 천안함 사고 희생자들을 어떤 '영웅'으로 매도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무엇을 위한' 영웅인가?) 
그렇다, 나는 이러한 영웅화가 정확히 어떤 '매도'에 해당한다고 생각한다.
정확히 '매도(倒/)'의 두 가지 의미에서,
그러니까 그것은 영웅이라고 '욕하기'이자 또한 동시에 영웅으로 '팔아넘기기'이기도 한 것.
또한 그렇기에 이러한 '매도'를 통해 이뤄지는 '애도'란 어떤 정신병적 행태에 근접하고 있다.

ㅡ 襤魂, 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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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4-19 22: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4-19 22: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글샘 2010-04-20 08: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렇게 본질을 흐리기 위해 제멋대로 사실을 기술하는 것을 <날조>라고 하지요.
어렸을 때 맨날 역사를 날조하는 북괴... 운운 들었던 것처럼...

천안함과 함께 침몰하는 정권의 앞날을 감지한 쥐떼들처럼 날조에 열을 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들이 무슨 전사를 했는지, 왜 불쌍하기만 한 그들에게 위로를 하지는 않고 영웅으로 떠받드는 체 하는지... 그렇게 날뛰면 군대 안 간 지들한테 민심이 올 걸로 믿는지...

여러 모로, 국가의 품격에 어울리지 않는 정치가들입니다.

천안함과 함께 수몰된 장병들, 그 가족들에게 침통하기 그지없을, 그리고 국가에 대한 믿음조차 한 순간에 산산조각났을 모든 이들에게 위로와 애도를 표합니다.

람혼 2010-04-20 13:17   좋아요 0 | URL
참으로 날조의 제왕들입니다. 도대체 이 때아닌 영웅화 앞에서 할 말이 없어지는데요, 이 타칭 '영웅들'을 '영웅'으로 부르지 않는 이들은 저들의 논법에 따르자면 '좌빨'이자 '매국노'가 되어버리겠지요... 죽은 자들의 이름까지 매도하는, 곧 죽은 자들의 이름까지 더럽히며 팔아넘기는 후안무치한 정치가들과 언론들이 앞으로 걸어갈 미래를 진심으로 '애도'해주고 싶습니다!

모딜리아니 2010-04-25 20: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와, 너무 예리한 지적입니다.

람혼 2010-04-27 02:58   좋아요 0 | URL
그 어떤 예리함도 무색해지는 둔한 정부, 무서운 나라입니다...
 

 

문제는 또 있습니다.  

 

사고 후 며칠이 지나도록 초계함 인양조차 하지 못하고 있는 우리 군과 정부, 그리고 "군이 초기대응을 잘해 더 큰 피해가 없었다"고 자축하는 이명박 대통령...  

'더 큰 피해'와 '더 적은 피해'의 기준이 뭔지는 모르겠으나(죽었다 깨어나도 모르겠으나), 그렇게 죽음을 수치화하고 계량화하는 '경제주의적'인 우리 CEO 대통령의 말을 들으면서, 저 바다 밑에 수장되어 있을 군인들의 부모와 친척들은, 그리고 '국민'들은 무슨 생각을 할까요?  

소위 대한민국 정부의 '수뇌부'라는 집단이 어이쿠나 큰일 났구나 하면서 자기들만 지하벙커에 '무뇌부'처럼 꽁꽁 숨어 대책이라는 걸 논의한다고 할 때, 그들을 바라보는 소위 '국민'들은 무슨 생각을 하며, 또 무슨 생각을 해야 하겠습니까?  

 

지금 이 순간, 오직 한나라당의 원내대표라는 안상수라는 추잡한 인간만이 이 사건을 내심 반기고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큰' 사건이 터져 주는 덕분에 봉은사 외압 논란에 휩싸였던 자신의 '작은' 사건이 다행히도 세간에서 묻히게 되었으니까요.   

그리고 아마도 이것이 바로 저들이 생각하는 '크고 작음'의 기준이겠지요...

 

자, 이런 작자들이 바로 저들 스스로 '대한민국'이라고 자랑스럽게 부르는 나라를 이끌어가고 있다는 정치 지도자들입니다.  

누가 이들을 지도자로 선출했습니까?  

누가 이들을 소위 '대통령'으로 만들었습니까?  

누가 이들을 소위 '집권여당의 원내대표'로 만들었습니까?  

 

이것이 진짜 문제입니다. 

 

ㅡ 襤魂, 泣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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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천안함 침몰 사고를 보며
    from 뻥 Magazine 2010-03-29 10:56 
    침몰사고를 보면서 드는 생각, 위기상황이 발생했을 경우 조치를 취하는 시스템이 굉장히 융통성이 없다는 것이다. 침몰 사고가 나고 나서 거센 조류 때문에 요원들이 잠수도 못하지만 국방부 발표와 뉴스에선 '인양작업 장기화'라는 말이 계속 타전되고 있다. 왜 '장기화'를 매번 언급하는 것일까. 신속한 조치체계가 갖춰지지 않았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 밖에 더 되나. 구조함인 광양함이 진해에서 출발해 서해안 백령도에 도착한 것도 하루나 걸렸다. 사고는
 
 
2010-03-29 09: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3-29 09: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MB야, 2MB야, 이제 지하벙커 회의는 좀 그만 하지?
무슨 일만 터지면 자기들만 살겠다고 부리나케 쥐구멍부터 찾아들어가는 쥐새끼들 같아, 진짜.
MB가 '머저리 바보'의 이니셜은 아니잖아? (아니지?)

아니면 국민 1명당 지하벙커 1개씩 국가에서 지어주든가.
(4대강 사업 예산 쓰면 충분히 가능하다, 어차피 무상급식도 안 할 거잖니?) 
우리도 벙커 들어가 생수로 목도 좀 축이면서 회의 같이 시청하게.
웹캠 달고 1:1로 화상 통화도 좀 하고. 

전 국민 상대로 성실히 통화하면,
MB가 그렇게 원하는 '열심히 일하는 CEO 대통령' 된다~!

 

ㅡ 襤魂, 大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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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한국연극』 2009년 9월호에 기고했던 글을 역시나 뒤늦게 옮겨놓는다. 이 글에서 내가 문제 삼고자 했던 것은 역시나 지극히 역설적인ㅡ그러므로 내 경우에 있어서는 대단히 '일반적인'ㅡ주제인데, 이 주제는 이하의 글 안에서 그만큼이나 역설적인 하나의 모토로 요약되고 있다. "정적(靜寂)의 비명, 다성(多聲)의 침묵"이 바로 그것. 말하자면 나의 질문은, 연극음악 안에서, 그리고 연극음악을 통해서, 소리 없는 비명은 어떻게 들리게 되는가, 그리고 웅성거리는 침묵은 또한 어떻게 들리게 되는가, 하는 일견 모순적인 문제들인데, 나는 이러한 지극히 역설적 형식의 질문들이 연극음악을 위한 핵심적인 물음들이 될 수 있으며 또한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바로 이렇게 '생각'한다는 데에 아마도 나의 가장 큰 '역설'이 있을 것이다. 연극음악은 '기형적 공감각'의 산출을 목표로 해야 하며, '연극적 실재'를 [찰나적으로] 드러내주는 것이어야 한다. 이것은 내가 생각하고 상상하고 추구하는 연극음악의 '역설적 존재론'임과 동시에 '이상적(理想的/異常的) 방법론'이기도 하다. 고로, 환면(幻面)을 어떻게 내파(內破)할 것인가.

2) 내 글을 읽는 과정에서 독자에게 기대되는 어떤 역설적 효과를 배가시키기 위해, 사족(蛇足)이 아니라 일종의 사두(蛇頭)를 붙여보자면, 나는 얼마 전에 김온 작가 덕분에 새러 케인의 「4. 48 정신이상」의 불역본을 구할 수 있었다. 말하자면 이는, 이하의 글에서 내가 문제 삼고 있는 영어 원문과 독일어 번역에 '임상적 증례'를 하나  더 덧붙일 수 있는 기회가 된 것. 불역본에서 해당 부분은 다음과 같이 옮겨지고 있었다: "la capture/ la brûlure/ la rupture/ d'une âme" 이것이야말로 실로 최고의 번역적 '사치'ㅡ혹은 최고의 번역적 '무위'ㅡ라고 할 수 있지 않겠는가? 이러한 상황을 보다 적극적으로, 곧 '[연극]음악적'으로 다시 '번역'해보자: 그러므로 문제는 '리듬'인 것이다, '의미'가 아니라. 또한 문제는 '사유의 전이'인 것이다, '주제의 이식'이 아니라.

(2010. 2. 16.)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소리 없는 비명은 어떻게 들리는가
— '기형적 공감각'으로서의 음악과 '연극적 실재'

 

최 정 우 (작곡가/번역가)

 

 

Maurice Blanchot, Le livre à venir, Paris: Gallimard(coll. "Folio essais"), 1986[1959¹].

 
모리스 블랑쇼(Maurice Blanchot)가 말하듯, 창조적인 경험의 일기는 그 은밀한 움직임이 심화될수록 "추상성이라는 비개인성(l'impersonnalité de l'abstraction)"에 접근하는 경향을 보입니다(『도래할 책(Le livre à venir)』). 제가 연극 안에서 음악을 생각하는 방식, 혹은 저 추상성의 음악적 '번역어'로 즐겨 선택하는 구절은 '정적(靜寂)의 비명, 다성(多聲)의 침묵'입니다. 이것은 어떤 일반적 사실에 대한 서술이 아니라 제가 음악에 대해 지극히 개인적으로 지니고 품게 되는 일종의 다짐이자 고백이기도 합니다. 비명은 소리 지르지 못한 채 속으로 파열하고, 침묵은 여기저기서 하나가 아닌 여러 가지 다른 목소리로 울려옵니다. 하지만 물론 말은 음악이 아니고 음악 또한 말이 될 수 없겠죠. 하지만 음악과 연극은 지극히 '번역적'인 관계 안에 놓여 있습니다. 가장 극명한 예를 하나 들자면, 우리는 새러 케인(Sarah Kane)의 희곡 「4. 48 정신이상(4. 48 Psychosis)」에서 다음과 같은 구절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the capture/the rapture/the rupture/of a soul." 저는 이 구절 앞에서 일종의 '번역 불가능성'을 감지하게 됩니다. 물론 당연하게도 이 말들은 '옮겨질'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가 여기서 말하는 '번역 불가능성'이란 단순한 번역상의 좌절감이나 당혹스러움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쩌면 그것은 근대와 현대, 유럽과 아시아, 혹은 지금의 이곳과 그때의 저곳을 가르는 묘한 '현기증'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번역을 되씹고 곱씹고 있는 저의 눈에 이 문장에 대한 독일어 번역("die Verhaftung/die Verzückung/die Zerreißung/einer Seele")은 하나의 사치로까지 느껴지기도 합니다. 인구어(印歐語)와 알타이어 사이의 간극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저 구절에 대한 번역이 '불가능'하게 되는 것은 무엇보다 한국어가ㅡ독일어와는 다르게ㅡ그 구절의 선율과 리듬을 '번역'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물론 그 逆도 마찬가지입니다). 

 

       

Sarah Kane, Complete Plays, London: Methuen, 2001.
Sarah Kane, Sämtkiche Stücke, Hamburg: Rowohlt, 2002.

 

그러나 흥미로운 것은, 바로 이러한 불일치와 어긋남 속에서 연극과 음악 사이의 관계가 지닌 독특한 일면을 발견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연극 안에서 음악은 언제나 넓게는 이러한 '번역'과 '번안' 사이를, 좁게는 '독주'와 '반주' 사이를 오고갑니다. 이러한 현기증의 해결은 요원하며, 우리가 흔히 '해방'이라고 부르는 것(그것이 개인적인 것이든 집단적인 것이든) 또한 이에 대한 적절한 해답이 되지 못할 겁니다. 결국 지금 여기의 문제는, 다시 한 번 새러 케인의 구절을 차용하자면, 일종의 "독주 교향곡(solo symphony)"을 만들어내는 일, 하지만 동시에 그러한 '단성의 합창'을 배반하고 위반하며 그것을 '다성의 침묵'으로 은밀하게 확장하는 일입니다. 따라서 '소리 지르지 않는 비명', '다성의 단선율'이라는 지극히 역설적인 표현은 어쩌면 '불가능한 번역'으로서의 연극음악의 자리를 가리키는 말일 것입니다. 하지만 연극음악은 바로 이러한 '불가능'의 조건으로부터 비로소 '가능'해지는 무엇입니다. 연극음악은 무엇보다 연극에 대한 단순한 번역이 아니라 그 어조와 선율과 리듬을 어긋나게 옮겨오는,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고 들리지 않는 것을 들리게 하는, 하나의 역설적 형식이기 때문입니다. 

 

 

▷ 하나의 현기증: <4. 48 정신이상>의 한 장면.

 

장 주네(Jean Genet)의 연극 <발코니(Le balcon)>을 떠올려보죠. 그 작품의 장소를 이루는 매음굴, 그 공간의 바깥은 없습니다. 실제의 혁명도, 실제의 여왕도, 사실은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단, 존재라는 것이 고집스럽게 '실존'만을 의미한다면, 그리고 '사실'이라는 것이 여전히 순진한 솔직함으로밖에 기능하지 않는다면, 그렇습니다. 그것들이 '진짜로'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다면, 그것은 현실의 시뮬라크르(simulacre)로서 축조된 이 고급스러운 매음굴 속에서, 오직 그 안에서만 그렇게 존재한다는 뜻일 겁니다. 진짜 없는 가짜, 원본 없는 모사. 세상의 모사화(模寫畵)인 이 매음굴은 자신의 원본을 모르는 공간입니다. 이 공간은 세상의 '거울'이자 욕망의 '텔레비전'으로 기획되었지만, 그 환면(幻面)이 비춰 보여주는 어떤 세상이 바깥에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그 자체가 하나의 온전한 세상, 어쩌면 그 밖에서는 어떤 것도 실존할 수 없는 단 하나의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이 매음굴 안에서 욕망되고 있는 저 모든 이미지들은 언제나 실존의 지위를 초과하고 잠식합니다. 여기서는 오히려 그러한 이미지가 '욕망의 수요'를 조절하고 '실존의 가격'을 결정하는 절대적인 지표로서 기능하는 것이죠. 영원히 반복해서 들려오는 연극 속의 저 총탄과 폭탄의 소리들은, 그래서 단순한 폭발(explosion)의 소음이 아니라 어떤 내파(implosion)의 징후들이기도 합니다. 

 

 

Jean Genet, Le balcon, Paris: L'Arbalète, 1983.

 

인물들이 매음굴 안에서 펼치는 놀이는 주인과 노예의 은밀한 변증법을 따르고 수행합니다. 이들의 '가학-피학(SM)' 관계가 의미하는 것은 '사드(Sade)'와 '자허-마조흐(Sacher-Masoch)'의 이름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먼저 '노예(Slave)'와 '주인(Master)'의 이니셜일 겁니다. 그곳에서 사고파는 것은 단순한 성(性)이 아니라 하나의 '이미지', 진짜 몸이 아닌 기호(sign)로서의 몸이며, 그들은 그 기호와 이미지를 소비하고 유통시키면서 욕망이 언제나 무엇보다 타자(他者)의 욕망임을 증거하고 상기시킵니다. 우리의 무대는 욕망의 시장인 매음굴인 동시에 '죽음의 왕궁'이자 '삶의 감옥'입니다. 그들은 그렇게 이미지 속에서 죽음의 '절대성'으로 나아갑니다. 죽음으로 완성되는 존재, 이는 주네가 이미 『장미의 기적(Miracle de la rose)』(1946)에서 아르카몬에 대한 동경과 그와의 '신성한' 합일을 통해 보았던 악(惡)의 절대성에 대한 또 하나의 변주이기도 합니다. 그들이 향유하는 놀이는 무엇보다도 죽음의 놀이이며, 이 놀이는 때로는 다른 이름을 달고 때로는 다른 역할의 의상을 입고 영원히 반복되는 것입니다. 음악과 연극 역시 이러한 '놀이' 안에 위치합니다. 그 안에서 음악은 연극의 '다른 이름', '다른 의상'이 되고자 합니다. 

 

 

▷ 환면의 환면: <발코니>의 한 장면.

 

따라서 연극 속에서 일어나는 혁명이란 어떤 직선적인 전복이나 찬탈 또는 일회성의 단절이 아닙니다. 혁명은 오히려 하나의 갱신(更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 차이를 지어내며 계속 반복되는 나선형의 순환 구조 속에 삽입된 하나의 후렴구일 뿐입니다. 이것은 하나의 '절망'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어쩌면 오히려 그 반대이지 않을까요? 혁명의 노래는 매번 다른 이름을 위해 그리고 매번 다른 사람들에 의해서 다시 불릴 테니 말입니다. 그러므로 <발코니>에서 우리가 맞닥뜨리게 되는 것은, 기존 권력의 부패나 혁명의 진정성과 같은 지극히 '상상적'인 문제가 아니라, 혁명과 권력이라는 이미지가 갖고 있는 환상성과 허구의 힘, 곧 '실재'의 문제인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연극 속으로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과 구조를 비춰봅니다. 우리는 이미지를 쫓고 뱉고 먹고 싸며 살고 있으며, 어쩌면 우리가 살고 죽는 것이 아니라 이미지가 잠을 자고 또한 이미지가 깨어나서 걸어 다니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연극 속에서 이미지의 삶과 죽음을 봅니다. 환면의 환면, 이것이 바로 '연극적 실재'입니다. 어쩌면 연극음악은 이토록 '시각적'인 은유 속에서 지극히 '청각적'인 무언가를 기획하고 실천하는 형식일 겁니다. 거울은 다른 거울 속으로 제 자신을 복제하고 연극은 또 하나의 연극을 배 밖으로 잉태합니다. 배보다 더 큰 배꼽, 배 밖으로 비집고 나온 또 하나의 배, 사실 그것은 어떤 유별난 기형이나 변종이 아니라 어쩌면 우리가 살아내고 있는 이미지의 '전형적'인 모습일지도 모릅니다. 연극과 음악은 이렇듯 배보다 더 큰 배꼽의 형태로, 그런 기형 아닌 기형의 모습으로, 서로를 향해, 서로를 위해 존재하는 무엇입니다. 지극히 개인적일 수밖에 없는 감각의 영역에서 출발하는 음악이 저 블랑쇼의 말처럼 "추상성이라는 비개인성"을 획득하는 길은, 이렇듯 그 자신의 역설을 바로 그 역설 자체로 통과하는, 이미 그 자체가 가장 역설적인 하나의 길밖에는 없을 듯합니다. 소리 지르지 않으면서 어떻게 비명을 들리게 할 것인가, 혹은 침묵하고 있는 다수의 소리를 어떻게 보이게 할 것인가, 이 지극히 역설적인 질문들은 연극음악이 언제나 근본적으로 묻고 품어야 할 청각적이며 시각적인, 따라서 지극히 공감각적인 물음이 되고 있습니다.

ㅡ 襤魂, 合掌하여 올림. 

 

 

 

 

 

서지 검색을 위한 알라딘 이미지 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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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바다 2010-02-22 19: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재 구조를 많이 바꾸셨네요^^ 연극에 대한 글들이 많이 올라 온 것 같은데, 찬찬히 읽어 보려고 합니다. 연극을 잘 모르기는 하지만, 연극에 많은 애정을 갖고 있습니다^^ 연극에는 영화에서 찾아볼 수 없는 나름의 매력이 있는 것 같습니다.

설은 잘 보내셨는지요? 시간이 되신다면 조만간 한번 뵙고 싶네요^^

람혼 2010-02-22 20:19   좋아요 0 | URL
네, 많은 분들이 이곳 알라딘을 떠나셨거나 떠나고 계신 와중에 생각한 바가 있어 대폭 개편해 보았습니다. 글이 많이 올라온 것은 아닌데요(그런 점에서 저는 '블로거'로서는 거의 0점에 가까운 인간인 듯합니다), 최근에는 연극에 관한 글 두 편과 음악에 관한 글 한 편을 올렸는데, 사실 이 '~에 관한'이라는 한정어는 제 글에는 다소 '과분'하거나 '과소'한 설명인 것 같기도 합니다.

어쨌든 연극에 많은 애정을 갖고 계시다니 저로서는 무척 기쁜데요. 아무쪼록 흥미롭게 읽어주셨으면 합니다.^^ 저 또한 조만간 뵙게 된다면 참 좋겠습니다.

모딜리아니 2010-04-25 20: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라 케인의 광팬입니다.
저도 극작가의 꿈을 안고 사는 이로써
제 우상이지요.
장주네 다음가는...

람혼 2010-04-27 02:59   좋아요 0 | URL
문제적 작가들만을 사랑하시는군요! ^^
극작가를 꿈꾸신다니 작품을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반갑습니다, 모딜리아니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