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근에는 정말이지 가히 '살인적'인 스케쥴의 연속이다. 지난 주 아르코 소극장에 사카테 요지(坂手洋二) 원작의 연극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를 위한 음악을 작업해 올렸고, 지난 주말에는 부산으로 무용 공연을 다녀왔다(Trisha Brown 무용단 소속의 젊은 무용가 정현진의 솔로 작품을 위한 라이브 연주였다). 하루에도 두 번씩 서울과 부산을 비행기와 열차로 오가는 힘든 일정이었다. 이번 주말에는 LG아트센터에서 공연을 해야 하고, 다음 주에는 다시 아르코 대극장에서 다른 무용 공연 한 편을 준비해야 한다(그런데 이게 끝이 아니다!). 지금 내 마음은, 손오공이 자신의 머리카락을 뽑아 무수한 분신들을 만들어냈듯, 나의 '미니미'를 대략 열 마리쯤 만들어 이곳저곳에 마구 뿌리거나 심어놓고 싶은 심정이지만, 다른 이들에게는 방바닥에서 굴러다닐 그 흔한 머리카락 한 올도 나에게는 없으니(!), 이게 또 문제라면 문제다. 마파람에 게 눈 감추듯, 『한국연극』지 2009년 7월호에 기고했던 글을 옮겨놓는다. 지난 6월 사카테 요지의 <블라인드 터치> 공연을 위한 도쿄 방문이 이 글의 소재이자 모태이다(나의 '도쿄 공연 여행 이야기'도 따로 쓰고 싶은 마음인데, 현재로서는 언제 쓸 수 있을지 전혀 기약이 없다). 본래는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의 개막에 맞추어 연극의 소개와 함께 이곳에 올리려던 글인데, 예의 저 살인적인 스케쥴 때문에 다소 늦게 올리게 되었다. 연극은 7월 12일 일요일까지, 아르코 소극장에서 상연된다(며칠 안 남았다). 관심 있는 분들의 일람(一覽)을 권한다, 아니, 강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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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뚝이, 자빠졌다, 일어난다
— 보편성과 특수성 사이에서, 연극과 음악의 '정치성'을 다시 생각하기
최정우 (작곡가/번역가)
지난 6월 초 도쿄의 이케부쿠로에 위치한 Owl Spot 극장에서 사카테 요지(坂手洋二)의 <블라인드 터치>를 무대에 올리고 왔습니다. 이 연극을 위한 음악을 작곡한 관계로 방문한 것이었는데, 개인적으로 제게는 일본의 많은 연극인들과 관객들을 만날 수 있는 즐거운 경험이자 새삼 우리 연극계의 상황을 돌아볼 수 있는 소중한 계기였습니다. 이 연극은 본래 작년 2~3월에 산울림 소극장에서 국내초연을 했던 작품인데요, 최근 사카테 요지의 작품들이 한국 무대에서 많이 상연되고 있는 상황에서(6월에는 <다락방>의 공연이 있었고, 7월에는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원제: <오뚝이 아저씨 자빠졌다>)의 공연이 예정되어 있습니다) 제가 오늘 드리고 싶은 말씀은 연극과 연극음악의 어떤 '정치성'에 대해서입니다.
▷ 坂手洋二, 『 戱曲集 I: 屋根裏 / みみず 』, 東京: 早川書房, 2007.
▷ 坂手洋二, 『 戱曲集 II: 海の沸点 / 沖繩ミルクプラントの最后 (外) 』, 東京: 早川書房, 2008.
사카테 요지는 일본 사회에 대한 철저한 '자기비판'으로 무장하고 있는 작가입니다. 그만큼 그는 자신이 속해 있는 일본의 사회적 문제들에 대해서 비판적 시각을 드러내는 많은 작품들을 써오고 있죠. 반면 동시에 사카테는 자신의 작품이 일본 내에서의 공연보다 오히려 외국 공연을 통해서 더 잘 이해될 수 있을 거라는 요지의 발언을 하고 있기도 합니다(이 두 입장은 제게는 일종의 '발전적 모순'처럼 느껴집니다). 그렇다면 사카테 자신이 말하는 이 연극의 의미, 곧 '커뮤니케이션의 부재 혹은 어려움'이라는 일종의 보편적인 주제는, 예를 들어 '전공투(全共鬪)', '천황제(天皇制)', '전향(轉向)' 등 지극히 일본적인 문맥에서 이루어진 여러 운동들과 제도들과 정세들의 세부적인 사항에 무지한 대부분의 한국 관객들에게 어떻게 다가갈 수 있을까요? 곧, 공통의 구체적인 특수성 혹은 역사성을 결여하고 있는—그리고 사실 어쩌면 이렇듯 결여하고 있는 것이 당연한—'외국' 관객에게 드러나고 느껴지는 저 주제의 '보편성'이란, 이러한 특수성과 역사성을 결여하고서도, 과연 여전히 '연극적 보편성'이라 이름 할 수 있는 것일까요? 어쩌면 이러한 질문은 이미 처음부터 그 대답이 정해져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러한 특수성의 추상과 사장 안에서도—어쩌면 바로 그 안이기에 더욱 더—우리는 어떤 보편성을 찾을 수 있고 또 찾아야만 한다는 지극히 진부한 정답 말이죠(각자 자신이 외국 관객 앞에 선 작가라고 상정하고 대답해보시길, 모두 '정답'을 도출할 수 있을 테니까요). 하지만 무엇보다도 먼저 물어야 할 질문은 어쩌면, 이러한 질문이 과연 '질문'의 형식을 띠고 있기는 한 걸까, 그렇게 묻는 질문이어야 하지 않을까요? 제가 원하는 것은 그런 당연한 '정답'이 아니며 차라리 어떤 '오답'에 가깝습니다.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다' 따위의 코즈모폴리턴을 가장한 지극히 도착적인 국수주의로써는, 시정잡배 정치가들이 염원해마지 않는 저 '세계화'는 물론이고, 이른바 '한국성'과 '세계성'이라는 개념이 진정 뜻하는 바를 모두 놓치게 될 테니까요. 연극음악은, 그리고 그 음악을 담고 있는 연극은, 지극히 폭력적인 '민족주의적' 감수성으로써만 그러한 특수성을 강요하는 것도 아니고, 허울 좋은 세계화라는 미명하에 마치 '국운'을 걸듯 그러한 보편성을 지향하는 것도 아닐 겁니다. 오히려 우리는 '한국성'과 '세계성'이라는 이 지극히 국민[민족]국가적인 개념 그 자체를 문제 삼을 수 있는 형식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요? 이러한 의미에서도 역시나 연극과 연극음악은 하나의 '실천'이 되고 있습니다.
▷ 坂手洋二, 『 最後の一人までが全体である / ブラインド・タッチ 』, 東京: れんが書房新社, 2003.
이러한 질문으로써 제가 겨냥하고자 하는 것은, 사실 가장 기본적으로는 보편성에 대한 일종의 '신화'에 다름 아닙니다. 하나의 예를 들자면, '외국인'으로서의 한국 관객에게는 하나의 보편적 '연극 예술'로 다가갈 수 있을 <블라인드 터치>는, 어쩌면 일본 국내에서는 '예술적'이라기보다는 하나의 '정치적' 사건일 수 있습니다. 번역극을 할 때마다 느끼게 되는 제 개인적인 딜레마 내지는 아포리아가 바로 여기에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곧, 번역극이 자신의 본래 '국적' 안에서 지니고 있는 '정치성'을, 우리는 너무도 쉽게 하나의 '예술성'으로서만 느끼고 수용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물음이 바로 그것이죠. 우리는 '당연히' 하나의 연극 속에서 어떤 보편성을 바라고 기대하며 또한 그러한 보편성을 필요로 하고 요청하기까지 합니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하나의 연극이 지닌 '국적' 또는 그러한 국적에서 오는 어떤 '역사성'이 이해되지 못하고 추상되어버린 보편성이란, 일종의 '감정이입의 번안' 내지는 단순한 '구조의 대입'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얄궂은 것은, '소통'이란 이러한 '번안'과 '대입'의 단순한 과정 안에서조차 또한 존재한다는 것, 아니, 보다 적극적으로 말해서, 어쩌면 가장 넓은 의미에서 [외국어의] '소통'이란 바로 이러한 간극과 거리 안에서만 존재할 수 있다는 것, 보편성의 획득이란 어쩌면 구체성과 특수성을 추상하고 사장함으로써만 얻을 수 있는 이 지극히 '외국적'이고 '이국적'인 어떤 상황에 대한 다른 이름이 아닐까 하는 것이죠. 노파심에서 부연 설명을 하자면,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구체성과 특수성을 추상한 결과가 바로 보편성이라고 말하는 저 지극히 '보편적인' 결론이 아닙니다. 오히려 문제는, 보편성이란 개념 자체가 '외부'의 존재를 상정할 때에만, 곧 '이국'과 '외국'이라는 타자, 그리고 그러한 '외국[어]들 사이의 소통과 간극'이라고 하는 실로 '번역적인' 상황을 전제할 때에만 성립될 수 있는 개념이라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일본 내에서보다 외국에서 나의 연극이 더 잘 이해될 수 있을 것'이라는 사카테의 말은, 사실 바로 저 일본 사회가 지니고 있는 '특수성'과 '구체성'을 외국인인 한국 관객이 더 '보편적으로' 이해할 수 있으리라는 느낌의 한 표현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사카테의 작품을 통해 우리가 봐야 할 것은 '일본의 연극'이 아니라 '우리의 정치'가 되고 있습니다.
▷ 사카테 요지, 『 다락방 / 오뚝이 아저씨 자빠졌다 / 공연되지 않은 "세 자매" 』
(기무라 노리꼬, 성기웅 옮김), 연극과인간, 2009.
그런데 이것은 찬사임과 동시에 하나의 저주이기도 합니다. 왜 찬사일까요? 그것은 표면적으로 한국 관객의 '예술적 이해력'에 대한 상찬을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한편 왜 저주일까요? 그것은 '정치적 몰이해'를 '예술적 감동'으로 손쉽게 치환하는 어떤 무지를 상찬하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소통'이라는 보편적 주제를 이해하고 내재화하려는 저의 이 특수하고도 구체적인 '실천'은, 아니 오히려 언제나 바로 이 '실천' 앞에서 머뭇거리게 되는 저만의 이 특수하고도 구체적인 '현기증'은, 이렇듯 제게 언제나 저 착종된 '역사성'의 문제를 환기시킵니다. 조금 더 넓은 범위에서, 우리가 우리의 '근대'를 생각할 때, 그리고 그 '근대'를 생각하며—저로서는, 거의 언제나—일본과 한국을 서로 연결시키게 될 때 제가 느끼게 되는 이러한 '위화감'이 단지 저만의 것이 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은, 실로 간절하다 못해 절실하기까지 합니다. 우리가 하나의 연극을 통해 이해할 수 있고 또 이해해야만 하는 것은, 어쩌면 연극의 '예술성' 같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삶의 '정치성'일 것이며, 또한 특수한 상황과 정세들을 통해 도출할 수 있는 어떤 '연극적 보편성'이 아니라 오히려 그런 보편성이라는 폭력적 문법 아래 묻혀버리는 어떤 '삶의 특수성'일 것입니다. 이는 '모든 것이 정치적이다'라고 말하는 몰정치적 '범신론'을 뜻하는 것도 아니고, 또한 '모든 예술 안에는 정치가 있다'고 말하는 비예술적 '음모론'을 뜻하는 것도 아닙니다. 연극과 연극음악은 오히려 일견 '중립적'으로만 보이는 어떤 보편성으로부터 우리만의 '편향적' 특수성을 추출하고 고민하는 어떤 작업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연극과 연극음악이 추구해야 할 '내용'이란 어쩌면 이러한 실천의 '형식'일지 모릅니다.
▷ 도쿄(이케부쿠로) Owl Spot 극장에서의 리허설 장면. 배우 윤소정과 이남희, 그리고 연출가 김광보의 모습. [사진: 리나짱]
저는 현재 한국 연극이 처한 어떤 단면을 '정치극의 부재'라는 고색창연한 말로 표현하고 싶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제가 말하는 '정치극'이란 단지 일차원적 의미에서의 풍자극이나 세태극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흔히들 연극이 '배우의 연극'이라고 말합니다. 지극히 맞는 말입니다. 하지만 연극은 또한 무엇보다 '연출의 연극'이기도 하며, 특히 제게는 '음악의 연극'이기도 합니다. 단, 이 모든 것들이 '삶의 정치'를 환기시키고 창출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말이죠. 오랜 시간 힘들여 얻어왔던 것들을 너무도 쉽게 잃게 되는, 따라서 맞서 싸워야 할 것들이 나날이 너무나 많아지는, 그런 우울한 세상입니다. 오늘날 연극을 하고 연극을 본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이 '교과서적' 질문이 전혀 '교과서적'으로 느껴지지 않는다는 사실에 우리의 불행이 있겠지만, 동시에 우리의 결의 또한 거기에 있습니다. 이는 이 글을 쓰고 있는 저와 이 글을 읽고 있는 여러분, 곧 우리가 함께 연극 안에서 끈질기고 집요하게 물어야 할 질문이 되고 있습니다. 팔과 다리가 다 떨어져나가도 꿋꿋이 칠전팔기(七顚八起)하는 저 오뚝이처럼 말이죠.
ㅡ 襤魂, 合掌하여 올림.
▷ 음악 리허설 중에, 작업 노트를 펼쳐보는 람혼. [사진: 리나짱]
*) 글을 마치기 전에, 도쿄에서 만났던 소중한 인연에 대해서 잠시 언급해야 한다. 네이버 블로그를 통해 만났던 이웃 리나짱님이 바로 그 주인공(리나짱님 또한 자신의 블로그에 <블라인드 터치> 도쿄 공연에 관한 소중한 감상을 올려주셨다: http://blog.naver.com/ynsohn51/40072633234). 귀중한 시간을 내어 훌륭한 리허설 사진들을 찍어주셨고, 새벽 늦게까지 영업하는 도쿄 구석구석의 알짜 서점들을 소개해주셨다. 여러 감사한 일들 중에서도, 특히나 80년 넘는 역사를 자랑하는 시부야의 고전음악다방 '라이온(ライオン)'을 내게 소개시켜주신 기억은 아주 아주 오래 갈 것 같다. 부족한 말이지만, 이 자리를 빌려 리나짱님께 깊은 감사의 말씀을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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