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연극』지 2009년 6월호에 기고한 글을 옮겨놓는다. 실로 오랜만에 쓴 콜테스에 관한 글이다. 이와는 그리 상관 없는 이야기 같지만, 나는 여기서 이 나라의 문화부 장관이라는 작자에 대해서 한 마디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인간의 언행과 작태가 날이 갈수록 가관에 접임가경이다. 아무한테나 반말을 찍찍 내뱉는 이 인간의 품성이야 지극히 기본적인 인성 부족의 문제로 치부하고 넘어가면 그만이겠지만(이런 인간이 '문화'부 장관을 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이 정부의 '수준'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 인간이 문화부 앞에서 일인시위를 하는 학부모를 욕보이고 학생들에게 모욕적인 언사를 퍼붇는 장면을 보고 있자면 주민등록증을 반납하고 납세를 거부하고 싶어진다(불필요한 오해를 피하기 위해서 말하자면, 나는 한국예술종합학교와 아무런 이해관계가 없다). 나는 이런 인간이 문화부 장관을 해먹을 수 있는 나라의 '국민'이고 싶지도 않고 또 내가 내는 세금이 이런 인간의 뒤를 닦는 데에 쓰이는 것을 용납하고 싶지도 않은 것이다. 도대체 언제까지 이런 인간들에게 우리가 사는 나라를 맡겨야 하는가. 도대체 언제까지 이런 인간들이 소위 '문화' 정책을 좌지우지하게 내버려둬야 하는 것인가. 무식하면 용감하다고들 말하지만, 이 인간의 무식함은 무례함을 훌쩍 넘어 후안무치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지 않는가. 고로 이 인간의 무식함은 용감함을 담보하기는커녕 오히려 가장 비열하고 치사한 비겁함을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 시민의 광장을 전경 버스로 둘러싸고 '아늑하다'고 말하는 나라, 헌법이 보장하는 집회와 결사의 자유를 반국가적 불법의 온상으로 몰고가는 나라, 용산 참사에 희생된 '국민'은 국민도 아니고 인간도 아니게 되어버리는 나라, 이런 나라가 '지옥'이 아니라면 무엇인가. 우리는 지옥에 아주 가까이 있다. 어쩌면 단지 모를 뿐이다, 이곳이 바로 지옥이라는 사실을, 너무 가까 있다고도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그 지옥이 너무 가까이에 있기에, 여기가 바로 지옥이기에, 단지 제대로 느끼지 못할 뿐이다. 그러나,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이곳은 지옥이다. 하지만 그 지옥을 탄생하게 한 사람들은 누구인가? 자문하고 자답하고 또 자문해야 할 것이다. 당신 자신이 그 지옥 속에서 울부짖고 있는 민중의 고혈을 빨아먹는 흡혈귀가 아니라면 말이다. 저 흡혈귀들이 빨아들인 피를 어떻게 회수할 것인가. 반동의 피로 붉게 도색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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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옥으로 아주 멀리, 또는 지옥에서 아주 가까이
ㅡ '불가능한 소통'의 형식으로서의 연극음악
최정우 (작곡가/번역가)
'소통'이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가장 극명한 장소, 곧 가르치기/배우기의 과정에서 드러나는 진정한 타자(他者)의 장소는, 서로 다른 언어들 사이에 있습니다. 타자의 문제가 가장 직접적이고 육체적으로 드러나는 장소는 이러한 '사이'로서의 언어라는 장소이며, 무엇보다 바로 이러한 '언어-사이' 속에서야말로 소통할 수 없는 타자의 문제는 역설적으로 '소통'의 문제를 가장 극명하게 드러내주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어쩌면 너무 당연하게도, 언어는 하나의 텍스트(text)이기 '이전에' 이미, 가장 적극적인 의미에서 하나의 콘텍스트(context)가 됩니다. 연극음악은 언어와 몸짓이라는 텍스트에 대한 콘텍스트의 '개입'과 '침입'을 가리키는 다른 이름이기도 할 것입니다.
▷ Bernard-Marie Koltès, Combat de nègre et de chiens, Paris: Minuit, 1989.
▷ Bernard-Marie Koltès, La fuite à cheval très loin dans la ville, Paris: Minuit, 1984.
바로 이런 의미에서 콜테스(Koltès)의 『검둥이와 개들의 싸움』은 서로 다른 언어가 만났을 때 어떤 '비극'이 일어날 수 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백인 여자 레온의 독일어와 흑인 남자 알부리의 월로프(Ouolof)어는, 서로 번역되고 추측될 수는 있지만 애초에 '완전한 번역'이 불가능한 역설적 관계에 있는 언어들인 것이며,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또한 그 두 언어는 공통적으로 프랑스어에 대해 '외부적 타자'의 위치를 갖습니다(콜테스의 연극들 안에서 이러한 '다른 언어들 사이의 소통가능성'이라는 문제 또는 심지어 '같은 언어 안에서의 소통불가능성'이라는 문제는 거의 언제나 가장 핵심적인 주제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이 두 이방인 사이에서, 그만큼이나 서로 이질적인 언어들로 이루어지는 대화들, 그 속에서 그 둘은 서로에 대해서도 역시나 '이방인'이 됩니다. 레온은 알부리를 향해 마치 일종의 '언어 연습'을 행하듯 괴테의 시 「마왕(Erlkönig)」을 읊조리기도 하고, 그에게 물을 찾으러 같이 가자고("Komm mit mir, Wasser holen") 제안하기도 합니다. 한편 알부리는 레온에게 "당신에겐 여자들이 우는 소리가 들리지 않나요?"라고 묻지만, 그녀에게서 그에 합당하고 적절한 대답을 기대하기란 힘듭니다. 레온은 마치 무엇으로부터 도망치듯 구원의 '물'을 찾는 것이지만, 알부리에게는 회수되지 못한 시체 때문에 자기 부족의 여자들이 흘리는 '눈물'이 더 중요한 것이죠. 반면 '식민지의 공식언어'인 프랑스어는 그들에게 공히 폭력적인 '동일자의 언어'입니다. 그 사실을 확실하게 또는 어렴풋이 의식하고 있는 알부리와 레온에게만이 아니라, 심지어 프랑스인인 오른과 칼에게도, 그것은 그 '자신의 언어'조차 되지 못하는 하나의 폭력적인 언어일 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들에게 언어란 '필수불가결한 것'임과 동시에 또한 한편으론 '불가능한 것'이기도 합니다. 어긋난 타자들의 언어가 지닌 비극성이 여기에 있습니다. 물론 독일어와 월로프어가 프랑스 관객에게 주는 문화적이고 심리적인 효과는 우리가 받는 느낌과 많은 부분에서 다를 수밖에 없을 테죠.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서로 다른 특수한 언어들이 지닌 비극성에서 드러나고 있는 소통불가능이라는 어떤 '보편적' 상황입니다. 그 언어들은 자기 자리를 찾지 못하고 객지에서 산화되고 휘발됩니다. 콜테스의 다른 작품들, 예를 들어 『서쪽 부두』에 나오는 스페인어와 케추아(Quechua)어, 『사막으로의 회귀』에 나오는 아랍어 등을 떠올려봅시다. 그 언어들은 모두 '제자리에 있지 못한' 언어들, 자신의 자리를 벗어나 먼 곳에 떨어져버린 언어들, 국적과 장소를 잘못 찾은 언어들, 하지만 또한 그 객지와 타지에서 여전히 헛되이 발음된다는 바로 그 사실을 통해 '가까스로 소통되는' 언어들인 것입니다(지극히 역설적이지만, 이 언어들이 이러한 타자의 장소에 있지 않다면, 오히려 그 언어들은 '소통'의 문제를 이토록 극명하게 제기하지 못할 겁니다). 우리의 인물들은 모두 제각각, 바로 이 뒤틀리고 어긋난 언어들을 통과해서, 콘래드(Conrad)의 저 두렵고도 마력적인 제목을 빌리자면, 곧 '어둠의 심장(Heart of Darkness)'으로 나 있는 길을 향해, 서로에게 한 걸음씩 다가가거나 멀어집니다. 또는, 콜테스의 첫 소설에 붙은 몽환적인 제목을 다소 변형시켜 말하자면, 그 언어들은, 지옥으로 아주 멀리, 말을 타고 달아납니다. 말을 타고 달리는 아버지와 아들에게 마왕이 바람처럼 따라붙습니다. 그들은 말[馬]을 타고 달아나려 하지만, 말[言]이 그들을 구원해주지는 못합니다. 연극음악이란 어쩌면 이 말[言]의 말[馬]이 되어주고자 하는 '대체'와 '보충'의 형식, 따라서 일종의 '구원 없는 구원'의 형식일 겁니다.
▷ 연극 <검둥이와 개들의 싸움>의 몇몇 장면들: 인물과 언어들의 '불가능한' 만남.
콜테스에 대해서 '텍스트의 부활'과 '작가의 부활'을 이야기하는 것은 단지 문학계 쪽의 '자위'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베르스펠드(Ubersfeld)의 말을 빌리자면, 희곡은 이미 애초부터 '구멍 난 텍스트(texte troué)'일 뿐입니다. 이러한 희곡에 대한 정의는, 그 자체로 '완전무결한' 하나의 구조물로 여겨지는 시나 소설 등 여타 문학 장르에 대비해 상대적으로 '불완전한' 것으로 규정된 '소극적' 정의이기도 하지만, 이는 그 자체로 희곡과 연극이 지닌 '비(非)텍스트적 텍스트성'을 가장 '적극적으로' 인정하고 향유하는 정의이기도 합니다. 콜테스 작품의 중요성은 물론 '읽는' 희곡으로서의 텍스트가 지닌 문학성에도 있겠지만, 무엇보다 저 '구멍'이라고 하는 연극성에 대한 가장 근본적인 사유를 떼어놓고는 생각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의 작품은 텍스트의 여백과 그것이 불러일으키는 상상력으로서의 구멍뿐만 아니라 말 그대로 깊은 심연으로서의 구멍 또한 활짝 열어놓습니다. 우리가 굴착해 들어가야 할 구멍은 아마도 그곳일 겁니다. 콜테스는 이 작품이 아프리카에 대한 것도, 흑인에 대한 것도, 네오콜로니얼리즘에 대한 것도 아니라고 말합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이 작품은 '정치적인' 작품도 아니고 '참여적인' 작품도 아니라는 말이죠. 그의 말을 충실히 따를 때, 아마도 우리는 이 작품 안에서 사르트르(Sartre)적인 의미에서의 "흑인성(négritude)" 같은 것을 찾으려고 해서는 안 될지도 모릅니다. 아마도 그렇겠죠. 하지만 우리가 19세기식의 고루한 의도주의 비평을 완고하게 고수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면, 그래서 작품에 대한 작가의 발언을 외형 그대로 곧이곧대로 따라갈 결심을 한 것이 아니라면, 적어도 우리는 이 작품의 정치적이고 미학적인 진폭을 우리의 시각에서 다양하게 생각해볼 수 있어야 합니다. '정치가 아닌 정치'에 대하여, '텍스트가 아닌 텍스트'에 대하여.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지도상에 표시되는 영토를 지배하는 외면적 식민주의가 아니라 내면과 의식을 지배하는 내재적 식민주의에 대하여, 오히려 작가의 의식적인 말이 비껴간 곳에 숨어 있는 작가의 무의식적인 '말'에 대하여. 아마도 바로 그 자신이 '영원한 타자'이기도 했던 콜테스를 이해하는 '지금, 여기'를 사는 독자와 관객의 몫은 오히려 그런 식민주의와 그런 언어를 사유하는 일인지도 모르니까요. 그 내면의 풍경은 어쩌면 어둠이거나 고독일 수도 있고 또한 타자라는 지옥이자 소통과 번역의 불가능성일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물론 어디에서나 문제가 되고 있는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주제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그러한 '보편성' 안에서 유독 깊이 사유해 보아야 할 것은, 그 보편적 교집합에 포섭되지 않는 또 다른 가능성, 하나의 여집합입니다. 연극음악은 어쩌면 이러한 '여집합' 속에서 '교집합'을 찾으려는 역설적 형식일 겁니다.
▷ Bernard-Marie Koltès, Quai ouest, Paris: Minuit, 1985.
▷ Bernard-Marie Koltès, Le retour au désert, Paris: Minuit, 1988.
아마도 사르트르의 저 유명한 경구처럼, 타자는 지옥일지 모릅니다. 콜테스는 어쩌면 우리에게 그 지옥의 풍경을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도 있겠죠. 하지만 그 지옥을 벗어나 달리 달아날 다른 곳은 없습니다. 최소한 콜테스는 그런 손쉬운 도피처를 제공하지는 않습니다. 이것은 그 자체로 하나의 근본적인 '절망'일까요? 하지만 쉽사리 희망을 이야기하고 쉽사리 희망을 보여주는 것이 오히려 그 자체로 절망적인 것은 아닐까요? 우리가 사는 이곳이 그 자체로 하나의 '지옥'일지 모르지만, 또한 이곳은, 우리가 오직 이곳 안에서만 이곳을 벗어나려는 의지를 갖고 살아갈 수 있다는 의미에서, 따로 떨어진 곳에 다른 천국을 갖고 있지 않은 지옥, '불가능'하며 동시에 '필수적'이기까지 한 지옥이기도 합니다. '이곳'이 지닌 저주와 축복의 양가적 성격이 바로 이 점에 있습니다. 콜테스의 공간은 흑인들의 아프리카도 아니고 프랑스인들의 공사장도 아닙니다. 그의 공간은 바로 여기, 이곳입니다. 우리에게는 각자 우리만의 서로 다른 추억과 시간들이 있습니다. 그 기억의 시간들은 서로 겹치기도 하고 서로 헤어지기도 합니다. 이 일견 지극히 당연하게 들리는 이야기를 새삼 꺼내는 것은, 이 우울한 시대에, 우리가 본래 품어 갖고 있던 것은 무엇인가, 그리고 우리가 지금 잃고 빼앗긴 것은 무엇인가, 이런 더욱 지극히 당연한 질문들을 다시 묻고 던지기 위함입니다. 연극음악이 가장 간접적이면서 동시에 가장 직접적인 '회상'과 '환기'의 형식인 것처럼 말이죠.
ㅡ 襤魂, 合掌하여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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