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골목이 품고 있는 것들
김기찬 사진, 황인숙 글 / 샘터사 / 2005년 7월
평점 :
절판


수잔 손택의 사진에 관하여... 를 읽다 보니, 가난한 사람들의 모습을 찍는 것도 사진이 담는 한 장르란 것을 알 수 있었다.

사진은 원래 사람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그리고는 자연의 멋진 풍경을 보이는 그대로 남기려고 개발된 것이다. 그렇지만, 사진이 전쟁터에서 파괴의 모습을 그대로 담아 내는 비판 정신을 발휘하고, 파괴되어가는 가족의 모습을 앨범에 남겨 추억거리로 만들어 주듯이, 가난한 사람들의 모습을 여과없이 비추어주는 일도 사진의 큰 몫이 되었다. 가난은 물질이 부족해서 생기는 현상이 아니라, 분배에 실패하고 있어서 나타난 결과이므로.

김기찬이란 사진가가 집착한 곳은 바로 골목이다.
197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까지의 골목길.

그 골목길 어귀마다 한낮의 햇살을 마중나오는 것들은 강아지들, 노인들과 엄마와 어린애들, 어디 핀들 꽃이 아니랴먄 발리다 만 시멘트 틈사귀를 비집고 나오던 노란 민들레, 그리고 갖가지 풀꽃들... 또, 조금 구김은 가지만 햇살을 받아 환하게 날리던 바지랑대 끝의 빨래들... 그 맵싸한 내음과 살을 콕콕 찌를 듯한 햇살의 따가움이 담긴 감촉들.

골목길 모퉁이마다 하나씩 있던 구멍 가게. 오후가 되면 계란도, 파도, 미원 한 봉지도 사 나르던 가게의 추억. 해가 저물녘, 굴뚝마다 가느다란 연기가 피어 오르고, 골목이란 골목마다 사내 아이들은 뛰어 다니며 전쟁 놀이에 여념이 없고, 계집애들은 조금 평평한 땅을 골라 고무줄을 뛰기도 하고, 땅에 공주를 그리며 환상으로 들어가기도 한다. 그러다 엄마들이 밥먹으라고 부르는 소리에 골목길은 저녁이 된다.

밤이 되면, 어떤 날은 낮에도 켜 있던 외등 불빛이 빛나기도 하고, 또 어떤 날엔 밤에도 꺼져 있는 외등의 외로운 불빛을 바라 보며, 자신의 쓸쓸한 그림자를 이끌고 지친 몸들은 연탄가스냄새 가득한 집으로 올라간다. 골목길을 오르는 일은 가쁜 숨을 내뱉으며 한 걸음씩 자기의 무게를 이겨나가는 일이다. 저녁마다 골목길을 오르는 지친 몸뚱이는 시지프의 헛된 노동마냥 힘이 들지만, 저 골목길의 끝에는 저마다의 가정이 된장찌개 냄새와 아랫목에 파묻힌 한 공기 밥그릇을 품고 기다리고 섰지 않는가.
그 골목길에 사는 사람들은 서로 가족의 수와 서열을 정확히들 알고 있어서 시골의 대가족제도와 비슷하지만, 벽 하나를 공유하며 살아가는 그 사람들은 남의 집 부부 싸움에 날아다니는 악다구니와 울음 소리의 내용을 사실은 공유하지 못하며, 지쳐 잠이 들다.

김기찬 선생의 사진들을 뒤로 하고 황인숙 시인의 골목길 감상들이 늘어섰다.

눈이 많이 내린 다음날 아침이면 연탄을 깨 가면서 조심조심 내려서던 그 골목길.
빼앗길 것이 두려워 담과 문을 치기 보다는, 서로의 남루함을 감추고 싶어 담을 치고 문을 달아 만들어냈던 골목길의 서정을 느끼게 하기에 충분한 사진들과 글이 여기 있다.

내 나이도 이미 지나가 버린 것들을 추억하는 나이에 들어선 모양이다.
30대는 아직 20대의 청춘에 가깝다고 생각하지만, 40대는 이미 50대의 장년기에 가깝다고 생각한다고 하듯이... 지나간 사진들을 보면서 자꾸 그 담벼락에 낙서된 것들에... 그리고 한여름 동네 아저씨들의 영양을 보충해 주는데 자기 한 몸을 보시했을 그 멍멍이들에... 자꾸 눈길이 가는 것을 보면.

아랫도리에 바지를 입지 않은 꼬마와, 런닝에 반바지 차림으로 문앞에 선 아저씨를 보면, 예전의 골목길이 떠오른다. 길 위에도 지붕이 있지만, 길 아래도 지붕이 있던 그 골목길. 까칠한 담벼락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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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팽이 2006-04-30 23: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 나라 경제개발 속에서 소외되었던 사람들이지만 그들만의 풋풋한 정과 애환이 고스란히 담겨있을 것 같은 골목길...
골목길이 좋습니다.
이 책 읽어보고 싶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