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진과 유진 푸른도서관 9
이금이 지음 / 푸른책들 / 2004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유진과 유진.
요즘 정말 흔한 이름이다.
내가 처음 아이들을 가르치던 80년대 후반만 하더라도 영자, 영숙이... 이런 애들이 제법 있었는데,
요즘은 유진이 류의 이름이 많다.

오늘도 학교에서 선생님들과 이야기를 한참 나누었다.
우리 아이들이 꾀죄죄하고 구질구질하고 패배감에 찌들어 하루하루를 살아도,
그 아이들이 이 나라의 미래라도.
그 아이들의 그 구질구질한 오늘이 그 아이들의 인생에서 가장 화려한 시기라고...
좀 슬픈 이야기였다.

그래서 겨울 방학을 이용해 전문 상담 연수를 받아 보기로 했다.
이번엔 이론보다는 실제를 많이 다루기 때문에 귀찮지만 받으려고 신청을 했다.
전에도 원격 연수로 상담 연수를 두 번 받았고, 전교조에서 하는 상담원 교육도 3일 참가한 적이 있었다.
상담 공부는 하면 할수록 <내가 깨어나는 느낌>을 받는다.
그래서 상담 공부를 하고 아이들을 대하면 조금은 착해진 선생님이 된다.
전문 용어로 하면, 수용의 자세를 갖추고 상담하게 된다는 말이다.
취조하는 교사에서 벗어나서.

이 이야기는 이금이 선생님의 청소년 성장소설이다.
요즘 청소년들이 인터넷에 자기들 이야기를 적어 올리는데, 그런 활동을 하는 것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지만, 지나치게 폭력적이고 선정적이며, 이야기의 구성이 '헐리우드 키드'를 보는 듯 할 때가 많다. '도꾜짱'들이라고나 할까. 일본 만화에서 많은 장면들을 차입한다는 느낌을 털어낼 수 없다.

하늘말나리를 쓰신 이금이 선생님의 글이니, 읽고 싶었는데, 도서관에서 손을 번쩍 드는 녀석을 발견했다.

이 책의 주제는 표지 그림에 다 나와 있다.
왼편의 나무는 곧게 자란 키큰 나무다. 그 애가 큰유진이다.
오른편의 나무는 중간에 굴곡이 졌고, 나무도 작다. 작은유진이다.

한 챕터가 넘어갈 때마다, 나무가 한 그루씩 그려져 있다.
곧은 나무가 그려진 곳은 큰유진의 이야기고, 굽은 나무가 그려진 장은 작은유진의 이야기다.

삶이란 누구 때문에 사는 것. 그런 건 없다.
그래, 시작은 누구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지만 결국 자신을 만드는 건 자기 자신이다.
살면서 받는 상처나 고통 같은 것을
자기 삶의 훈장으로 만드는가 누덕누덕 기운 자국으로 만드는가는 자신의 선택인 것 같다.

청소년으로 접어드는 아이들을 기르는 어머니로서, 작가는 아이들에게 이런 말을 들려주고 싶었던 것이다.
특히 유교적 가부장적 사회, 독재 정권 사회에서 형성된 여성 비하적 문화가 성폭력을 당하고도 부끄럽게 생각하는 현실을 문제시했다는 점에서 이 소설은 획기적이라 할 만하다.
여느 청소년 성장 소설이, 가정의 불화 내지는 파괴에서 오는 청소년기의 갈등과 접합을 그리는 데 비해, 충격적인 소재를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이 소설은 다른 색을 띠고 있다.
그리고 청소년 소설에서 부모는 문제의 핵심이자, 반성의 대상이기만 했던 여느 소설에 비한다면, 부모도 인간이고 부모도 나약한 감정을 조절하기 어렵다는 진실을 드러낸 소설이다.

같은 반에 배정된 동명 이인, 그리고 기억의 공유... 지나치게 작위적인 측면도 있지만, 진실의 무게에 비한다면 이 소설은 과도한 해피엔딩인 것은 아닐까 싶다.

장애인들에 대한 지나친 차별이 오늘날의 황우석 신드롬을 일으킨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해 본 적이 있는데, 한국 사회의 딱딱한 각질을 점차 벗겨내는 노력으로 평가할 수 있을 것 같은 소설이다.

공부만 잘 하면 다인줄 아는 아이들,
공부도 못하면서 공부밖에 없는 학교를 다녀야 하는 여중생 아이들의 섬세한 감정이
한 해 만큼 닳아서 반들거리는 교복 치마 엉덩이처럼, 조금은 해어질 듯한 동복 소맷단처럼
새 학기가 시작되는 날 교실에서 맡을 수 있는 매캐한 먼지 냄새까지 그려낸 좋은 작품이다.

부모가 관심을 주기 어려울 정도로 어렵게 살거나, 이혼한 가정에서 살고,
그래서 성적이 못미치게 되어 실업계로 진학한 아이들.
새 교복을 입고 입학식을 하는데도 왠지 반짝이는 느낌이 없는 아이들과 한 해를 살고난 느낌은 그간 살아왔던 16년간의 교사 생활과는 판연하게 다르다.
그래서 상담 공부를 하고 싶어졌는지도 모른다.
입에서 상스런 말들이 툭툭 튀어 나오고, 폭력 앞에서나 조금 비굴하고,
여선생님 앞에선 한없이 거만하고 불량스러워 보이는 열일곱 아이들.
그 아이들이 가진 열일곱의 나이가, 마흔의 나보다는 훨씬 아름다운 것임을 깨우치는 역할이 나에게 주어진 일이란 것을 이 소설로 말미암아 생각하게 한다.

매일 하느님께 감사드릴 일이다.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은 어떤 방식이든 나를 깨우치려는 일이니 말이다.
도서관에서 앞다투어 달려 나온 이 책에게도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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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여우 2005-12-07 22: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슬프고 아름다운 이야기인것 같습니다.
아이들의 성장 이야기는 언제나 벅차오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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