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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조선미술 순례
서경식 지음, 최재혁 옮김 / 반비 / 2014년 11월
평점 :
드디어 서경식이 '우리/미술(조선/미술)' 순례로 돌아왔다.
그는 늘 '디아스포라(고향을 잃은 방랑인)' 이방에서 예술을 접하는 글을 써왔다.
나의 서양미술 순례
나의 서양음악 순례
고뇌의 원근법 등이 있다.
표지에 ㅇ ㅜ ㄹ ㅣ ㅁ ㅅ
이런 여섯 자모가 적혀있다. 이것을 조합하면 우리미술이 된다.
여기 탐구한 작가도 여섯 명이다.
그런데 책의 제목은 출판이 임박하여 '조선미술'로 바꾼 모양이다.
책의 간지에도 ㅇ ㄹ/ㅁ ㅅ 이락 세로로 적은 걸 보면 그렇다.
그만큼 작가가 '우리'라는 말 속에 담긴 '우리민족'의 배타성보다는,
'조선'이라는 말이 가지는 <재일 한국인>의 디아스포라적 시선을 담아내려는 의도가 크다고 보겠다.
이 조선은 '북조선'과는 다르고 '이씨 조선'과도 다르다.
그런데 표지의 자모를 가만 보면, 자모 안에 그가 탐구한 그림들이 등장한다.
예를 들면 'ㅅ'에는 '개자지'가 불끈 발기한 채 들어있다.
왜 '개자지'란 말을 쓰는지는 읽어보면 안다.
달을 보고 짖는 개, 성질이 가득 난 것 같다.
우린 그만도 못한 거 아닌가 싶은 자괴감을 부르는 그림이다.
첫만남은 '신경호'이다.
그의 '넋이라도 있고 없고 : 남아평생도'에 들어있는 달을 보고 짖는 개가 가장 인상적이다.
친구들이
"야, 네 그림 하나 사주고 싶은데 상스러워서 못 사겠다"고들 합니다.
그러면 저는 이렇게 말하죠. "너는 천생 신부님처럼 사는 사람이냐?"(50)
10년을 거슬러 참담하게 견뎌냈을 이 사람의 30대는 엄청난 절망과 상실감 속에서...
달을 보고 짖는 저 누렇고 야윈 개는 신경호 선생 자신의 자화상인 동시에
둘 곳 없는 울분을 터뜨릴 대상, 절망적인 한국 현실의 표상이기도 했으리라.(51)
1979년 작이라 하니... 그래, 지금과는 비교도 되지 않던 압제의 시절이었다.
우리에게 모더니즘은 무엇입니까?
우리에게도 벗어나야 할, 포스트를 붙일만한 모더니즘이 실재했을까요?
저는 이 질문에 대단히 회의적이며 나아가 매우 화가 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보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55)
이런 대화를 읽는 일은, 자신을 제대로 돌아보게 만든다.
외국에 가서 예술을 배워와서 그것이 마치 자기의 생각인 양 떠드는 사람들,
무슨 사조가 어떠니~ 어떤 경향이 어떠니~ 이런 사람들의 이야기는 ~인듯 ~아닌 '사이비'이기 쉽다.
서경식이 '신경호'를 처음으로 인터뷰한 이유를 알겠다.
관찰자의 입장에서 예술이란
어떤 면에서는 중립적이라고 할까요
균형감각을 가지고 관객들에게 그대로 보여줌으로써 관객들이 다양한 해석을 만들어 내는 것이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86)
정연두는 사진 작업을 하는데, 그이의 작품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상록타워'라는 사진이다.
우리는 똑같은 구조의 아파트에서 살수밖에 없는 가엾는 나라의 백성들이다.
전 국토의 절반을 친일파나 재벌들이 차지하고 있다.
그 똑같은 삶의 기록은 신선했다. 그것을 보면서, '우리/미술'은 어떠한 것이어야 하는지,
왜 '우리'는 이렇게 사는지를 돌아볼 수 있는 기회가 되리라 싶었다.
요즘 질주하던 가요가 갑자기 '복고'로 돌아오는 시즌이란다.
걸그룹이란 것들이 일본의 90년대를 모방하는 짝퉁이었으니, 다시 '우리' 것을 돌아봐야 하리라.
결국 문제는 '무엇'을 하는가 하는 텍스트의 문제가 아니라,
그 텍스트들이 '우리'와 어떤 관계인가 하는 '콘텍스트(문맥, 맥락)'의 문제라는 것이 서경식의 지론이다.
정연두의 작품이 다루고 있는 어떤 종류의 외로움은 '가족'과 '민족'을 문맥으로서 객관적으로 파악하려고 할 때
피해갈 수 없는 감각이다.
오히려 그 외로움의 끝에야말로 사람과 사람의 새로운 유대에 관한 가능성이 잠재되어 있으리라 생각한다.
앞으로 그는 이 외로움을 어떻게 예술적으로 형상화해 나갈까.(123)
이 책을 통틀어 내가 가장 애정해 마지않게 된 작가는 단연 '윤석남'이다.
'미친년 프로젝트'에서 보여주는 그 표정부터 압권인데,
그이의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박완서가 마흔 넘어 글을 쓰기 시작했다는 것과 흡사하다.
그런 그의 작품들은 어디서 주워들인 나무 파편들인데도, 따스하고 부드러웠다.
그의 여인들이 함축하고 있는 이미지들은 둥글고 부드러우면서도,
어쩔 수 없이 참아야했던 그 시대를 오롯이 증명하고 있었다.
화가 윤석남 이야기 <나, 화가가 되고 싶어>라는 책을 봐야겠다.
그는 긴 손을 갖고 싶어하는 화가다.
그래서 '천수천안'의 관음보살의 마음처럼 모두를 돌봐줄 수는 없지만,
원피스의 루피처럼 먼 곳까지 관심을 보여줄 수 있으리라.
나눔의 집에 걸려있는 그림은 참 인상적이었다.
긴 팔을 한 여인이 들고 있는 것은 '연꽃'이기도 하고,
고구마처럼 투박하게 생긴 '심장'이기도 하다.
그 여인이 하염없인 바라보는 상대에게 내미는 것은,
오롯한 '마음'이다.
그 마음은 어머니의 마음일 수도 있고, 인간의 마음일 수도 있다.
그와 매창의 공감을 그린 그림도 좋다.
그의 그림을 보고 있노라면... 마음이 편안하다.
화가들이 멋도 모르고 들쑤석거리면서 '서양'을 베끼기 바쁠 때,
그의 그림은 전통도 아니고 고전도 아닌,
그저 '우리의 마음'속에 흘러오던 그런 것을 '은근'히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매창의 손을 두 손으로 마주잡은 그의 표정이 더이상 편안할 수 없다.
그의 그림을 그저 '페미니즘'이라고 일컫기에는 생경스럽다.
그의 예술은 '페미니즘' 아류가 아니다.
저런 권위의 송곳들을 비판한 작품도 있으나,
김혜순이 들려주듯, 그의 마음은 <토템>이랄까... 암튼 그런것이다.
그의 개인전 도록에 김혜순이 <애타는 토템들의 힘찬 눈물>이라는 글을 썼다.
그에 "맞다. 정확한 지적이다.
토템들이다.
사라져버린 땅속에 묻혀버린 우리 여성들을 다시 세우고 싶었다."(136)
그래. 사라져버린 우리 여성들의 '벽 앞에 섰던 심정'들을
토템으로 되살리는 것이 그의 예술이다.
북으로 가버려 남한에서는 설 곳이 없는 '이쾌대'의 <푸른 두루마기를 입은 자화상>도 멋지다.
그를 하나의 '텍스트'로서 독해하기보다
이 화가 안으로 들어가 서로 모순되면서도 뒤얽혀 있는 복수의 '콘텍스트'
-이를테면 동양과 서양, 조선과 일본, 전근대와 근대, 식민지 지배와 피지배, 개인주의와 집단주의,
분단과 대립 - 가 갈등하고 충돌하는 '장'으로서 읽어보는 시도가 도움이 되리라.(187)
이쾌대의 여성상이 이루어낸 공적은
민족 의상을 입은 조선 여성을 그저 전통적인 표상을 드러내지 않고
그 내면에 숨쉬는 근대를 향한 지향성을 그려냈다는 점.(199)
신윤복의 여성을 탐구하다가 '바람의 화원'의 작가 이정명을 인터뷰한 것도 재미있고,
입양 출신의 작가 미희 씨의 인터뷰도 인상적이다.
홍성담은 아직도 핍박받고 있는 '세월,오월'의 작가다.
홍성담의 이야기는 그대로 영화고 눈물이다.
저는 태어나서 처음 사람 취급을 받았습니다.
그것도 여기 광주 시민들 모두한테요.
그러니까 제가 대신 지키지 않으면 안 됩니다. (344)
그렇게 도청에서 죽어간 이들의 이야기는 '우리'의 이야기다.
파독 간호보조원에서 화가가 된 송현숙의 이야기 역시 '우리'의 이야기로 가득하다.
서경식이 찾아가는 미술가들은 돈을 많이 버는 소위 미술계의 중심에 선 이들은 아니다.
한때 하던 말로 <민중>의 삶을 면면히 이어오는 화가들과 두런두런 나누는 노변정담을 통하여,
우리는 어떻게 살아왔으며,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맥락이 어떻 것이고,
앞으로 살아갈 길은 어떤 것인지...
자랑스런 자유 대한의 <민족 중흥>의 그늘에 가려진 '우리의 눈물'은 얼마나 처절한 것인지...
이런 이야기들 속에서 한숨과 함께
예술이 담지하는 '힘'을 느끼게 된다.
그가 이 책을 내고 한숨을 포옥~ 내쉬는 모습이 머리에 그려진다.
힘들었을 것이다.
애가 많이 쓰였을 것이다.
두 형이 박정희의 감옥에서 온갖 옥고를 치른 역사를 뒤로 하고,
다시 그 딸이 되돌리는 유신의 국보법이 횡행하는 시대를 만났으니... 더 한심스럴 것이다.
'조선 왕조'는 우리의 본질이 아니다.
'일제 강점기' 역시 '친일 부역'을 처단했어야 했지만,
분단과 함께 미국의 앞잡이들이, 그리고 그 앞잡이들과 결탁한 정치 군인들이...
<우리 조선>의 민중들을 철저하게 압살했다.
이 땅의 <우리>가 해결해야 할 문제는 <자주>적이고 <평화>적인 <통일>이면서도,
여지껏 쌓여온 더께가 덕지덕지 앉은 <친일>과 <독재>의 <정경유착> 세력이 국민의 부를 착취해가는
<계급문제의 해결>이기도 한 것이다.
그것들은 복잡한 맥락 속에서 얽히고설켜 한칼에 베어지는 '쾌도난마'를 기대할 수는 없다.
실타래가 너무나도 엉켜버려서 '뒤집어진 유람선'을 조사하는것 하나 하지 못하는 현실을 만들었고,
겉모습은 아파트인데, 아파트가 아닌... 그래서 불이 나도 방화시설이 없는 부실 주택에서 타죽게 만들었다.
결국 문제들은 '순례'를 통해서 하나하나 만나야 한다.
문제들이 '발생, 본산지, 현실'을 하나하나 만나는 순례를 통하여,
후손을 제대로 가르치고 부정부패를 조금씩 고쳐나가야 하는데...
세상이 캄캄하여 실마리를 찾지 못하게 하니... <우리>는 더 눈물지을 일 많을 모양이다.
윤석남과 음악을 들으러 가서
서경식이 아내와 나눈 이야기는 미술이야기와는 조금 다르면서도 맥락이 닿는다.
결국, 아름답고 훌륭한 것, 듣고보는 이에게 좋을 것...도 중요하지만,
예술가는 소통과 함께 드높은 이상을 가져야 감동을 줄 수 있다는 말을 한다. 멋지다.
듣는 이를 생각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의무겠지만
동시에 연주자는 고립을 두려워하지 않고
자신의 바람과 동경을 천상을 향해 드높게 간직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 긴장감이 관객에게 단순한 친근함과 즐거움을 뛰어넘는 감동을 전해주는 것이다.(130)
110. 오타... 마침이 들어가야 할 자리에 '아침' 뉴욕에서.... 이렇게 적혀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