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길 (반양장) - 박노해 사진 에세이, 티베트에서 인디아까지
박노해 지음 / 느린걸음 / 2014년 2월
평점 :
품절


박해받는 노동자의 해방을 위해... 박노해라는 이름으로 '노동의 새벽'을 썼고,

사노맹을 결성한 죄목으로... 뭐, 이런 건 '국가보안법'으로 ㅋ 사형 선고, 무기징역을 살다가,

7년여만에 풀려나... 다른 길을 걷고 있는 박노해.

 

그가 계속 '노동 현장'을 돌면서 르포를 쓴다거나,

노동 문제를 제기하는 눈엣가시처럼 산다면... 삶이 참 팍팍할 것이다.

다시금 '국가보안법'의 유신 시대가 돌아왔으니, 공안 통치의 와중에서

다시 감옥으로 돌아가는 일이 두려웠을지도 모른다.

 

아무튼, 그는 다른 나라의 길들을 걷는다.

그 길들에서 길어올린 생각의 두레박들이 제법 깊어서 읽을 만 하다.

 

버마의 아이들은 일생에 한 번, 단기 출가를 한다.

출가 축제인 '신쀼의식'으로 화려하게 치장했던 아이들은,

사원에 들어오는 순간 가사 한 벌, 밥그릇 하나, 빈 몸만 남는다.

이른 아침 맨발의 스님들이 찬 이슬을 밟으며 밥동냥을 나간다.

일곱 집을 돌아도 밥그릇이 차지 않으면 가만히 돌아와

이렇게 모자란 밥을 씹으며 가난한 민중의 배고픔을 함께 느낀다.

세계 최장기 군부 독재 속에 버마 불교의 고위층은 타락했어도

이 가난한 절집의 어린 출가승들의 맑은 뱃속에서 울려 나오는

독송은 성성하고, 눈빛은 푸르기만 하다.(233)

 

이 책 말고 화보집이 있는데, 그 책은 무려 10만원이다.

이 책도 컬러 화보지도 아닌데, 값은 19,500원이다.  배부른 책이다.

 

장소에는 고유한 시간의 흐름과 무드가 존재한다.

장소가 바뀌면 시간의 기운도 무드도 바뀐다.

인디아의 전통 마을 입구에는 침묵의 성소가 있다.

외부이 다른 시간으로 넘어오는 '시간의 문턱'이다.

이곳에서 숨을 고르고 마음의 옷깃을 여미면서

새로운 만남과 세계 속으로 스며들어가는 것이다.

이 신성한 '시간의 문턱'을 잃어버리면 인간은

어디서나 대체 가능한 획일적 존재로 쓸려가고 만다.(289)

 

지구상 가장 빠른 LTE 속도를 자랑하는 땅에서,

지하철에서 다들 스마트폰을 두드리는 나라에서,

시간의 문턱을 이야기하는 것은 조금 낯설다.

과연 우리의 문턱은 '시간'에 관한 것일까?

더 위험한 것은... 인간간의 관계에 대한 문턱을 점점 높이는 나라에 사는 것이나 아닌지... 두렵다.

 

오늘 무슨 일을 했는가 못지 않게

어떤 마음으로 했는가가 중요하지요.

모든 것은 물결처럼 사라지겠지만

사랑은 남아 가슴으로 이어져 흐르겠지요.(222)

 

가난하지만 날마다 물 위의 밭인 '쭌묘'에서 재배하는 꽃 한 송이를

부처님께 바칠 줄 아는 마음 가진 이들...

 

 

 

농촌은 망해버린 나라에서

다른길을 걷는 그는 느림의 미학을 애써 예찬한다.

이제 그야말로 노동자의 목줄을 죄는 유신의 시대가 창궐하여,

전태일의 후예들이 크레인 위에서, 굴뚝 위에서 목숨건 고공 농성을 펼치는 땅에서 떠나...

 

 

씨앗이 할 일은 단 두 가지다.

 

자신을 팔아넘기지 않고 지켜내는 것.

자신의 대지에 파묻혀 썩어내리는 것.

희망 또한 마찬가지다.

헛된 희망에 자신을 팔아넘기지 않는 것.

진정한 자신을 찾아 뿌리를 내리는 것.

 

그대, 씨앗만은 팔지마라.(194)

 

 

다 좋은 말인데...

젊은 시절 그가 그렸던 '노동자의 신새벽'이나 '새벽 시린 가슴 위로 쓴 소주를 붓는' 마음,

동료의 '손 무덤'을 안쓰러이 눈물 그렁그렁한 눈으로 지켜보던 글의 힘에 비하면,

씨앗이 훨 힘이 덜하다.

 

대지에 파묻힌 힘을 일어버리고, 다른 길로 떠도는... 부평초같은 느낌이랄까...

 

 

 

 

 

 

 

 

 

 고산족 마을 어디서나 보이는 이 중심 자리엔

한 생을 마친 오백년 된 고목이 솟아 있는데

그 머리에는 다음 생을 이어갈 종자 싹이 트고 있다.

짐승들이 종자를 먹어치울까봐 그리했겠지만 내겐

희망의 싹을 모시는 종묘사직의 성소처럼 느껴진다.(168)

그의사진을 보면서 쌍용자동차 굴뚝이 오버랩되는 건...

오늘 바람이 유독 추워서 그랬을까...

대한이 소한집에 가서 얼어 죽는다는 속담이 떠올라서였을까...

 

나라와 부모를 선택해 태어날 수는 없지요.

사람으로서 '어찌할 수 없음'은 기꺼이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어찌할 수 있음'은 최선을 다하는 거지요.(90)

 

힘없는 민중을 그렇게라도 스스로 위안을 얻어야 할 노릇일지도 모르지만,

깨어있지 못한 민중들 위에서 독재자들은 떵떵거리고 배불리는 나라를 다니면서,

낭만적인 시선으로 렌즈를 들이대는 일은, 글쎄... 역시 다른 길인가?

왜 이런 글을 읽으면,

"아부지, 이만하면 잘 살았지예~ 근데, 내 진짜 힘들었거든예."

이것이 주된 메시지인데도,

부부싸움 하다가도 애국가가 나오면 '충성'하는 국민이 되자는 말을 하는 위정자가 떠오르는 건지...

 

이 의자는 아이가 처음 말하던 날 만든 것이구요.

이 목마는 아이가 첫걸음마 하던 날 만든 것이구요.

오늘은 대나무를 갂아 새장을 만들어 줄 거예요.

아빠가 아이에게 주었던 것은'시간의 선물'

사랑은, 나의 시간을 내어주는 것이다.

먼 훗날 한숨지으며 내 살아온 동안을 돌아볼 때

'아, 내가 진정으로 살았구나.' 생각되는 순간은

오직 사랑으로 함께한 시간이 아니겠는가.

그 시간을 얼마나 가졌는가가 그의 인생이 아니겠는가.(68)

 

'오래된 미래, 라다크'가 감동을 준 이후, 라다크 사람들은 돈독이 올라 닳아 빠졌더라는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다.

자본의 세상은 인간에게서 '시간'과 추억을 앗아가 버렸다.

아니, 몸소 선뜻 나서서 시간과 추억을 자본의 속도에 팔아넘긴 것은 인간의 편이다.

어쩌면 그의 시선이... 퇴행의 시선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이미 다 잃어버린 것들을... 아직도 가지고 있는 마을에 가서,

추억의 책장을 넘기며... 그 장면을 애써 찾아내는...

그 장면들을 담아온 장면들은 다시 '십만원' 짜리 자본으로 변화하는 세상인데 말이다.

 

아이들이 뛰노는 모습이야 어디서나 흐뭇하지만

인도네시아 아이들이 뛰노는 모습은 특별히 감동이다.

네덜란드, 일본의 350년 식민지 나라.

그들은 저항운동의 싹부터 말리고자

초등학교부터 아예 운동장을 만들지 못하게 했다.(62)

 

쓰나미가 휩쓸고간 아체 앞바다를 바라보며 이런저런 상념에 잠기는 일들은 애잔하다.

 

박노해의 사진들을 보고 있으면, 참 예술감이 뛰어난 몸이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말을 요리하는 솜씨도 뛰어나고, 순간을 포착하는 힘과 이야기를 엮는 힘이 대단하다.

 

그렇지만... 그의 '다른 길'이...

류시화나 한비야 류의 여행담이 가지고 있는 한계처럼... 낭만적 시선에 머무른다면...

그저 '다른 길'을 갈 따름이지... '대안'을 가진 '다른 길'로서의 힘은 얻기 힘들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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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15-01-07 00: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박노해라면 뭔가 너머의 더 나은것을 보여줄수도 있지 않을까 기대하다가도,
충분히 열심히 살았던 그에게 더 많은 것을 요구하는건 무리지 않을까 하다가....
하여튼 딱히 뭐라고 집어서 얘기하기가 힘든 그런 감정입니다.

글샘 2015-01-07 09:09   좋아요 0 | URL
그래요. 열심히 살았던 그였으니...
사고가 깊어진 만큼 더 간절한 사람에 대한 애정을 찍고 썼으면... 하는 바람에서 투덜댄 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