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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의 노래
김훈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1월
평점 :
우륵은 대숲으로 들어섰다.
바람이 잠들어 숲은 고요했다.
새들이 가지를 떠날 때 빛은 흔들렸고,
새들이 가지에 머물 때 빛은 깊고 편안했다.
우륵은 숲의 안쪽으로 걸어갔다.
오동나무 널판에서 이슬이 스러지고 있었다.
널판은 비와 이슬을 모두 빨아들이면서 말라갔다.
이슬은 널판을 미끄러져 내리다가 나뭇결을 따라 맺혀 있었다.
우륵은 망치로 널판을 두들겼다.
가장자리로부터 가운데 쪽으로 두들겼고,
나뭇결을 따라서 두들겼다.
나무의 안쪽에서 소리는 젖어 있었다.
소리는 재료에 들러붙어서, 재료를 뚫고 나오지 못했다.
소리는 재료의 안쪽으로 끌려 들어갔다.(92-92)
김훈의 문체는 담백하고 화사한 건조체이다.
그는 줄거리를 이야기하지 않고 묘사하면서 상황을 보여주고,
몇몇 단어들의 대조를 통하여 속내를 드러낸다.
이 책은 '소리'를 언어로 잡아내려는 노래인데,
그 속에는 삶의 소리보다는 죽음의 소리가 더 흔하게 겹쳐진다.
전쟁터의 죽음도, 임금의 죽음과 순장자들의 죽음도... 모두 소리로 승화된다.
우륵의 가야금이 내는 소리를
나무의 안쪽으로부터 살려내는 솜씨가 김훈답다.
방 안의 울음소리는 가팔랐고 마당의 울음소리는 느렸다.
방 안의 울음이 잦아들면 마당의 울음이 일어섰다.(100)
임금의 죽음이 울리는 울음도, 이렇게 묘사되면서 현장감이 살아난다.
야로는 온도의 오묘함을 생각했다.
불의 온도는 몸을 찌르고,
물의 온도는 몸에 스몄다.
장적이 타는 열기가 쇠를 녹이고 물을 덥혔다.
불이 세상을 녹이고 날을 세우고,
날을 또 무너뜨려, 불이 세상을 가지런히 하는 것인가...
불과 물과 쇠의 틈바구니에서 야로의 피로는 깊고 황홀했다.(117)
대장장이 야로의 경험을 통하여
불과 물과 쇠의 이야기를 적었다.
경험은 어떤 세상이든 한 세상을 가지런히 하는 역할을 한다.
굵은 더덕뿌리가 우러난 술은 몸속에서 낮게 깔리면서 퍼졌다.
깊은 산 바위틈에서 가뭄을 견디어낸 더덕 뿌리는 오히려 물의 성정이 깊어서,
술은 크게 굽이치는 강과 같았다.
술이 사람의 몸을 찌르지 않고 먼곳을 돌아서 다가왔는데,
유역이 넓어서 깊고 느리게 스몄고, 그 취기는 들뜨지 않았다.
여자들의 비릿하고 물컹거리는 속살을 야로는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그 속살들은 늘 깊이를 알 수 없이 모호했고 정처없이 보였다.
야로는 몸속에서 크게 굽이치고 낮게 깔리는 더덕술의 흐름과 무게를 좋아했다.(122)
더덕과 물과 강과 술과... 여자...
비교가 될성싶지 않은 것들이 얽혀서 깊이와 무게를 그린다.
그 언어의 결이 깊다.
소리에는 무겁고 가벼운 것이 없다.
마르지도 않고 젖지도 않는다.
소리는 덧없다.
흔들리다가 사라지는 것이다.
그것이 소리의 본래 그러함이다. (153)
악기란 소리를 표현하는 도구이다.
소리는 숨소리를 따라 길게 울리기도 하고,
현의 울림에 따라 인간의 손을 떠나기도 하고,
쇠가죽이나 징의 울림이 길게 길게 여운을 남기며 조금씩조금씩 스러진다.
소리는 널판의 빈 통 속을 돌면서 흐르다가 밖으로 퍼져나왔다.
통이 소리를 누르지 않았고,
소리가 통 속을 돌면서 퍼졌다.
우륵의 눈에, 소리는 통 속의 나뭇결을 따라서 도는 것처럼 보였다.
그 소리는 나무의 소리이기는 하지만, 빈 것을 지나온 소리였다.
빈 통이 단단한 나무의 소리를 펴서 둥글게 돌려내고 있었다.
-- 니문아, 봐라, 비어야 울리는구나. 소리란 본래 빈 것이다.
비어있지만 없는 것이 아니라 확실히 있는 것이다.(217)
이 구절을 읽으면,
사리자, 색불이공 공불이색 색즉시공 공즉시색...이 떠오른다.
오즈의 마법사에 등장하던 허수아비, 양철나무꾼, 겁쟁이 사자들이 모두 무언가를 결핍한 것으로 등장하다가,
오즈의 마법사를 만나서 허수아비가 뇌를 원했지만 지혜로웠음을, 양철나무꾼은 심장을 원했지만 다정다감함을, 겁쟁이 사자는 용기를 원했지만 친구를 위해 용감한 행동을 보여주었음을 알려 주는 스토리이듯,
인간이 없음이라고 느끼는 거기서 있음을 깨닫도록 하는 일깨움이 '소리'이기도 하다.
악기와 소리는 인간 사는 세상의 당파와는 무관하다.
가야의 악사들이 신라로 넘어가 살게 되면서 나누는 이야기들은,
요즘 세상 혼란한 정치 구도를 떠올리게 한다.
니문아, 이제 신라 왕 앞에서 춤을 추고 소리를 내야 하는 모양이다.
죽은 가야 왕의 무덤에서 춤을 추는 것과 산 신라 왕 앞에서 춤을 추는 것이 다르겠느냐?
아마도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소리는 스스로 울리는 것입니다.
이제 신라가 가야를 토멸한다 해도 그것이 다르지 않을 것이냐?
소리는 왕의 것이 아니니 아마도 그러할 것입니다.(287)
김훈이 '소리'에 집중한 것도 이런 생각을 형상화하기 위한 것 아니었을까?
소리는 스스로 울리는 것이고,
소리는 어떤 국가나 단체에 소속된 것이 아니듯,
인간의 삶 역시 스스로 태어나 살게되는 것이고,
어떤 집단에 소속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냐고 묻는 듯...
'국가보안법'이라는 것이,
'우리 편'의 이익을 위하여 '너희들'을 억압하는 법이라는 것은 자명하다.
인간의 삶은 '우리 편'과 '너희들' 어느 쪽에만 살아지는 것은 아니다.
인간의 삶은 '누구의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