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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 사는 즐거움 - 시인으로 농부로 구도자로 섬 생활 25년
야마오 산세이 지음, 이반 옮김 / 도솔 / 2002년 5월
평점 :
품절
여기에 사는 즐거움이란 서재가 있다. 달팽이 님의 서재명인데, 그것이 책 제목인 줄도 모르고 있었다. 우연히 도서관에서 이 책을 만난 반가움은 그래서 더 컸다.
저자는 일본의 한 섬에서 생활하며, 자연 속에 묻혀 사는 삶의 행복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 말투가 소박하고 겸손하며 생활 자체가 자연스럽기 그지없다.
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눈의 띄는 단어는 역시 <가미>다. 종교의 신적 개념과는 달리, 정령 신앙의 대상인 영적 존재를 이 책에선 <가미>란 용어로 사용한다. 모든 성스런 영물들에는 가미가 있을 것이라는 것. 책에 실린 조몬 나무를 보면 가미가 없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우연히 이 책을 읽게 된 것은 제주 여행에서다. 아내가 신혼 여행 이후 그토록 고대하던 제주 여행을 여유는 없었지만 일단 저지르고 말았는데, 틈틈이 읽은 이 책은 역시 제주도에서 읽는 맛이 났다.
뭍의 자연과는 사뭇 다른, 제주 섬의 풍광은 그야말로 <가미>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내가 아파트 담벼락 사이에 끼어서 이 책을 읽는 빠빠라기였다면 <가미>가 주는 어감의 아우라가 그토록 황홀하진 않았으리라.
산록의 <산굼부리>와 <비자림>에서 느끼는 자연의 풋내음은 그야말로 <가미>의 숨결 그 자체가 아닌 무엇이란 말인지... 대자연에 웅장하게 뿌리는 섬의 빗줄기는 아열대 밀림의 훈김을 내 폐부에 그대로 꽂아 주었다.
이번 제주 여행에서 느낀 것은, 역시 인간이 뭔지 만들어 내는 짓거리들은 조잡하기 그지없다는 것이다. 예쁘긴 하지만, 시멘트로 장난친 것에 불과한 미니랜드가 주는 감흥은 대자연의 품에 안기는 비자림의 새천년 비자나무의 영성스러움에 비하면 너무도 조잡스런 것이었다.
제주 섬사람들의 삶이 그대로 녹아 들었던 성읍 마을은 이미 파괴되어버렸고 주막촌으로 변해버린지 오래 되었고, 야트막한 현무암 돌담 사이로 쪼그린 듯이 누웠던 집들은 이제 많이 사라져 버렸다. 역시 무슨 박물관 하는 것들은 볼품 없었고, 자연 그대로인 것이 주는 넉넉한 빛깔만이 우리에게 휴양을 줄 수 있었다.
몇 년 전만 해도 없었던 해안 도로들을 따라 즐비하게 늘어선 무슨무슨 펜션, 민박들은 천혜의 자연 제주 섬을 질펀하고 음란한 <러브 랜드>로 변신 시켜 빛 좋은 개살구로 만들어 버린 것이나 아닌지...
도저히 도회지에선 맛볼 수도 없고, 1인분으로 볼 수도 없는 마라도 선착장 앞 <송악 전복죽>집의 죽맛은 일품이었고 우리 새끼손가락만큼이나 굵게 썬 전복의 씹히는 맛은 아직도 천연스런 사람들의 맛을 새삼 일깨워 준다.
이번 여행에선 아내와 아이와 함께 미처 돌아보지 못했던 명승지와 유원지들을 돌아봤다면, 다음에 갈 기회를 잡는다면, 제주도의 특산품, 바로 대자연을 흠뻑 느낄 수 있는 기회가 된다면 좋겠다. 각종 휴양림과 이번에 비가 내려 잠시 들러버린 한라 수목원, 그리고 지리 공부의 산실인 한라산과 각종 오름들에게서 <가미>의 말씀을, 선사 시대의 울림을 듣고 싶다.
오늘 잠시 돌린 채널에서 시청자의 시선을 잡기 위한 임무를 띤 무슨 특공대란 프로그램에, 대자연의 습격이 방송되었다. 어느 마을에선가는 파리떼가 극성이어서 하루에도 몇 톤을 잡아 버린다는 둥, 또 어느 마을에선가는 말벌들이 기승을 부려 119 대원들이 퇴치 작전을 편다는 둥, 어느 도시에서는 공사장 수준의 소음을 내는 매미 소리에 공익 요원들이 동원되어 나무를 흔든다는 둥... 대자연이 보내는 경고의 메시지들이라고 볼만한 뉴스들이 방송을 탔다. 보통 유명한 먹거리들을 소개하기 쉬운 그 프로그램에서 이런 무서운 뉴스들을 내보이는 걸 보면서, 역시 자연의 일부인 인간의 오만이 부른 재앙이 두려운 것이긴 한가보다... 하는 생각을 했다.
문명과 거리가 먼 작은 섬에서 사는 즐거움. 대자연 속의 일부인 나를, 그 보잘것 없는 우리의 삶을 인식하고, 뭔가가 되고자 하고(becoming) 가지고자 하는(having) 나의 욕심을, 집착을 버릴 것을 저자는 삶으로 보여준다. 중요한 것은 바로 우리가 존재한다는(being) 것임을...
세계적으로 생각하면서 지역에서 행동해야한다는... 쉽고도 어려운 진리를 잊지 않고 살아야 한다. 이 좋은 책을 많은 사람이 읽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