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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락 한알 속의 우주
장일순 지음 / 녹색평론사 / 1997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장일순은 글을 남긴 것이 별로 없다. 이 책에도 글은 별로 없고 여기 저기서 대담한 내용을 모아 놓는다.
하는 일 없이 안하는 일 없으시고
달통하여 늘 한가하시며 엎드려 머리 숙여
밑으로 밑으로만 기시어 드디어는
한포기 산속 난초가 되신 선생님
출옥한 뒤 내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비록 사람자취 끊어진 헐벗은 산등성이
사철 그늘진 골짝에 엎드려 기며 살더라도
바위틈 산란 한포기 품은 은은한 향기는
장바닥 뒷골목 시궁창 그려 하냥 설레노니
바람이 와 살랑거리거든 인색치 말고
먼 곳에라도 바람따라 마저 그 향기 흩으라.
김지하 시인의 <말씀> 전문이다.
이 시만 보더라도 무위당이라는 호에서 드러나듯, 노자의 팬임을 감추지 않는 분이다. 그리고 전우익 할아버지처럼, 권정생 할아버지처럼 살아가고자 하셨다. 그러나 시대는 그분을 그저 두진 않으시고...
90년대 초반, 죽음의 굿판을 집어 치워라!고 죽음의 배후 세력 운운하여 욕을 배불리 먹은 김지하가 선배님으로 스승님으로 삼은 원주 사람.
칠십년대부터 한살림 운동으로, 피폐해져 가는 농촌에서 우리의 미래가 삶을 위한 것이 아니라 죽음을 위해 마련된 것으로 전개될 것임을 알아 보았던 이. 그래서 그는 유위보다 무위의 삶을 옹호한다.
독재정권에 맞서 계란으로 바위치던 그 운동의 시대에 '유니폼은 같이 입고 속에서 매일 싸우는 同而不和여서는 안된다는 이야기를 서슴없이 하시던 분. 내가 대학시절 이런 분의 이야기를 만날 수만 있었더라도 그렇게 피폐한 대학 시절을 보내진 않았을 것을. 대학생이던 나를 그토록 미워하진 않았을 것을... 논어에 나오는 화이부동(和而不同)의 마음으로 온 인간을 위해서 자기를 통제하라는 운동의 자세를 이야기하던 분.
세상 살이는 동고 동락의 과정이어서 공생도 각자를 긍정해 주는 것이어야 하며, 고와 락이 함께 있어야 하는데, 요즘은 공생이라면서 고는 없이 락만 추구하는 것 같다는 이야기는 21세기를 살아갈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나이 들어 암에 걸려서도, "암은 시대의 병인걸. 자연도 지구도, 자연 전체가 암을 앓는데, 사람도 하나의 자연인데 왜 암이 안 걸리겠는가. 병을 앓는 것이 벼슬하는 것이다."시며, 순리로 받아들이시는 모습을 보고, 눈물이 짠하니 나는 것은, 정신 맑은 선비를 만난 기쁨과 그런 분이 남기신 글이 적음을 아쉬워하는 마음 때문은 아닐까...
그분이 즐겨 인용하시던 서산대사 휴정의 한시는 그분이 사셨던 삶의 궤적과, 우리에게 걸어 보라고 권하는 오솔길이 겸해져 있는 것 같아 반갑다.
만국의 서울은 개미집 같고,
천가의 호걸들은 초파리와 같구나.
밝은 달을 베개하고 고요히 누웠으니
끝없이 부는 바람 갖은 곡조 아뢰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