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자 문학과지성 시인선 313
이정록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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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 이름을 정하는 데 오래 걸렸다.

망설였던 제목 가운데 18.44가 있다.

야구에 관심이 있는 사람은 알겠지만,

투수판에서 홈플레이트까지의 거리다.

여기사 스트라이크가 나오고 번트가 나오고 장외홈런이 나온다.

병살타도 나오고 데드볼도 나온다.

이만큼이 너와 나, 사랑과 이별, 탄생과 죽음의 거리가 아니겠는가?

뜻은 좋은데, 두어번 읽다 보니 '씨팔, 좀 사, 사!'로 읽힌다.

시집을 제발 좀 사달라고 떼를 쓰는 꼴이다.

우습기도 하고 짠하기도 해서 지워버렸다.

'의자'라고 이름을 올려놓으니,

세상이 다 제 무게를 놓고 바닥에 스미는 것 같다.

이 쓸쓸하고 환한 자리에 발목 아픈 그대를 부른다.(뒤표지에서...)

 

같은 우리말이라도,

그걸 가지고 언어 유희를 즐기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같은 낱말 꾸러미를 몇번이고 머릿속에서 굴려보는 사람들이다.

시인은 그걸 또 어딘가에 적어둔다. 짠하기도 하고 굉장한 재주이기도 하다.

 

삶은 모두 쓸쓸하다.

인생이란 길은 모두 허전하고 그러면서도 무겁다.

그런 타인에게 의자 하나 내민다.

발목 아픈 타인이 쓸쓸하고 허전하고 무겁던 몸으로 힘들어하다가,

마음 한 켠,

환해진다.

 

수처작주 입처개진(隨處作主 立處皆眞)

처하는 데 따라 주인이 되면

서는 자리 모두 진실된 곳이다.

 

삶의 고통은, 타인에게 내가 짓눌리는 무게가 싫어서다.

나를 의자로 내줄 염을 내려면...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야 한다.

싫어하는 이가 나를 깔고 뭉갤 때, 삶은 고통의 바다인 법.

 

돌부처는

눈 한 번 감았다 뜨면 모래 무덤이 된다

눈 깜짝할 사이도 없다

 

그대여

모든 게 순간이었다 하지 마라

달은 윙크 한 번 하는데 한 달이나 걸린다 (더딘 사랑, 전문)

 

삶의 고통, 타인에게서 겪는 지옥을 이겨내는 힘을 천천히 차오른다.

그리고 그 힘은 금세 바닥으로 게이지가 떨어질 수도 있다.

천천히 차오르는 더딘 사랑의 힘을 믿어야 산다.

 

진창에 처박힌 벼 이파리의 안간힘 때문에

몸살을 앓는 봄 논,

물은 저 떨림으로 하늘을 품는다...

물끄러미, 개구리밥을 헤치고

마음 속 진창을 들여다본다

눈물 몇 모금의 웅덩이에 흙탕물이 인다

언제 눈물샘의 물꼬를 열고

깊푸른 하늘을 들일 수 있을까

정처만이 흙에 뿌리를 박는 것,

마음 바닥에 물끄러미라고 쓴다

내 그늘은 얼마나 오래도록

물끄러미와 넌지시를 기다려왔는가?

물꼬 도란거리는 마음과

찬물 한 그릇의 눈을 가질 때까지

나는 왜가리 발톱이거나

꺾인 벼 이파리로 살아가겠지만, 끝내

무논의 물결처럼 세상의 떨림을 읽어내기를

써레처럼 발목이 젖어있기를 (물끄러미에 대하여, 부분)

 

물이 잡힌 논

써레질을 해 놓은 논은

<진창에 처박힌 벼 이파리의 안간힘 때문에 몸살을 앓는 봄 논>이다.

겨우내 메말랐던 논에 물기 가득해 마음 든든한데,

시인은 물끄러미 그 물을 바라보다

물결이 읾을 본다.

떨림

그 떨림을 바라보는

<물끄러미와 넌지시>한 마음...

 

십 년도 더 된 옻나무 젓가락

짝짝이다. 이것저것 집어먹으며 한쪽만 몰래 자랐

나? 아니면

한쪽만 허기의 어금니에 물어뜯겼나?

 

  어머니. 이 젓가락 본래부터 짝짝이였어요? 그럴

리가. 전 그럴 리가가 아니고 전주 이간데요. 저런 싸

가지를 봐. 같은 미루나무라도 짧은 쪽은 네 놈 혓바

닥처럼 물 질질 흐르는 데서 버르장머리 없이 크다가

물컹물컹 제 살 아무 데나 쓸어 박은 것이고, 안 닳은

쪽은 산 중턱 어디쯤에서 나마냥 조신하게 자란 게지.

출신이 모다 이 어미라도 동생들 봐라. 물컹거리는 녀

석 있나? 장남이라고 고깃국 먹여 키웠더니, 뭐? 그

럴 리가가 아니고 전주 이가라고? 배운 놈이 그걸 농

이라고 치냐? 젖은 혓바닥이라고. (옻나무 젓가락, 부분)

 

 

이정록 시의 팔할은 농촌 사회와,

농촌 사회 그 자체인 부모에게서 나온 것들이다.

 

하긴, 인간의 무엇 하나 땅에서 신세지지 않은 것 없지만,

시인의 예리한 눈길과

그걸 부지런히 적어대는 손길은

멋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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