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에서 철학하기 - 낯익은 세상을 낯설게 바꾸는 101가지 철학 체험
로제 폴 드르와 지음, 박언주 옮김 / 시공사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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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에서 농담으로 '인문대 금속 공학과'라고 부르는 철학과.

사주 운명 이사 취업... 포렴을 늘어뜨리고 관상과 운명을 읽어주는 철학관.

정신병자 내지 또라이와 실업자 사이의 유사성을 가진 것으로 등장하는 소설 속 인물 유형, 철학자.

 

이리 보아도 뜬구름, 저리 보아도 헛손질이다.

철학을 사전에서 의미발견하는 것만큼 황당한 일도 없다.

사물의 진리를 탐구한다거나 궁리하는 일이라고 아무리 적어 놔도,

그건 철학의 정의라고 보기 어렵다.

 

그런 철학을 나는 엉뚱하게 배웠다.

대학 들어가서 처음 배우는 커리큘럼은 (수업 말고, 언더 서클의 세미나에서)

철학 에세이라는 책이었는데, 그게 변증법인지도 제대로 모르겠는데, 암튼 공부를 했다.

 

세상의 모든 것은 연관되어 있고, 상태가 변하고 있으며,

양이 쌓이고 쌓이면 질적 변환을 일으키는 법이고,

부정된 것 역시 부정되도록 생겨먹은 것이 이 세상이라는 것.

그래서, 세상은 변혁의 대상이기도 하고, 인간 역시 변혁의 대상이라는 것.

그 다음엔, 한국 사회의 여러 가지 모순에 대하여 공부하고,

멀리 세계사적 모순에 대하여도 공부했다.

러시아, 프랑스 혁명에서부터, 베트남 전쟁, 중국 혁명, 쿠바 혁명,

프란츠 파농의 '대지의 저주받은 사람들' 같은 책들...

그리고 리영희 선생의 저작들과 경제학 서적들...

 

이런 공부를 조금 하고 나면, 세상은 이전에 인식하던 것과 전혀 다른 것이 되어버렸다.

고등학교 시절까지 '데모하는 빨갱이들은 나쁜 놈들'이었는데,

그들이 데모하는 이유를 알게 되니, 그들이 변혁의 주체라고 이해하게 되고,

변혁의 주체인 목동 아줌마, 사당동 아줌마들의 도시빈민 투쟁을 이해하게 되고,

곧 이어 노동자 투쟁, 농민 상경 시위, 교사의 교육 민주화 운동의 의지를 이해하게 되었다.

 

이렇게 전투적으로 변해버린 내 철학은,

시방도 뉴스를 보면 뒷골이 당기게 굳어져 버렸고,

종일 세상을 향해 시빗거리를 천만 가지도 더 뇌까릴 수 있는 인간으로 만들어 버렸다.

 

도대체 철학은 뭘까?

철학은 '인간이 있는 시간, 장소, 사람들' 사이에 일어나는 오묘한 일을 '생각하는 일'일 것이다.

 

도대체 우리 나라는 왜 이런가.

도대체 저 사람은 왜 저렇게 행동하고 말하는가.

도대체 지금 일어나는 일은 왜 저럴까.

이런 생각을 스스로 하는 일.

 

천안함이 북괴 도당의 폭격으로 침몰하였습니다.

--- 바보의 반응 : 저런 죽일 놈들...

--- 철학적 반응 : 북한이 폭격했으면 전쟁이 일어나야 하는데, 남한은 뭘 하고 있으며, 전쟁때 죽은 사람은 다 영웅인가?

 

국정원이 모 직원이 대선 관련 댓글을 졸라 달았습니다.

--- 바보의 반응 : 저런 바보같은 넘을 봤나.

--- 철학적 반응 : 국가 기관이 대선에 개입하고도 개인적 문제로 넘기려 하는군.

 

그래서, 철학이란 것은 하나의 학문이 아니라,

모든 공부의 기저에 깔린 '공동의 사고'가 바탕이 되어 있어야 한다.

한국에서 공부한 학생들에게 철학이 없는 이유는 단답형을 외워서가 아니다.

철학을 가지지 못하도록, 단답형 주입식 교육만을 하며,

교사는 중립이란 이름으로 가치를 가르치지 못하도록 억압하고,

학생들은 이유도 없는 무한 경쟁으로 체제에 순응하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이 책은 철학을 가르치는 책이 아니다.

세상을 낯설게 보는 방식을 직접 몸으로 느낄 수 있게 해주는 책이다.

 

어둠 속에서 길을 잃어 봄으로써,

흔히 우리가 현실, 정상적 생활이라고 부르는 것들은 언제라도 부서질 수 있는 얇은 껍질 속에 자리잡고 있음을 알게 한다.

(62)

 

진짜 나가 무엇인지를 계속 찾아다님으로써, 정확한 나를 생활 속에서 절대 발견할 수 없음을 사고하게 한다.(28)

 

버스가 정상적으로 나를 목표지점까지 태워줄 것이라는 사실에 의문을 가해본다.

버스가 사고가 나거나, 납치를 당하고, 또는 기사가 외계인이거나 특이한 세계로 가는 등,

정상적으로 이어지는 일상에는 언제든 미세한 균열과 틈이 생길 수 있음이 사실이다.(90)

 

톱가수 수지가 엄마인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올해부터 동지에는 낮과 밤이 길이가 같아질 것으로 예상됩니다.

한나라당의 반성으로 내년 초 새로 대선을 치르기로 결정했답니다.

이런 말도 아닌 기사를 떠올리노라면,

홍수처럼 쏟아지는 정보들이 사실은

얼마나 똑같은 소리의 반복인지를 실감해보게 한다.(186)

 

철학은 다른 사람들과 다른 또라이가 되는 길은 아니다.

다만, 우리가 일상적으로 워낙 자주 접해서 '자동화된 기제'를 조금만 벗어나도,

세상은 전혀 그렇지 않은 곳이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책이다.

 

그래.

해외 여행만 가도, 내가 가진 돈, 내 언어, 내 지위, 내 지식이나 상식은 아무 쓸모없는 것들이 되고 말지 않는가.

 

나와 다른 인생들의 이야기를 읽는 일도 그래서 중요하다.

독서 자체가 철학의 하나인 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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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립간 2013-12-02 09: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철학을 하면서 너무 멀리, 자세히 보고, 남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게 되면서 이상과 현실과 괴리감, 고독감, 무기력감 등, 본인 당사자는 감정적으로 너무 힙듭니다.

글샘 2013-12-02 09:39   좋아요 0 | URL
맞습니다.
분노하게 되고, 하지만 독재 국가에서 사는 현실에선,
저항할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어렵고,
쉽게 좌절하는 무기력을 학습하게 돼서, 정신 건강에 무척 해롭습니다.

그렇다고 정신 건강에 좋자고... 바보가 될 순 없잖아요. ㅋㅋ
이건 불가역반응이걸랑요.

turk182s 2013-12-10 01: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철학 에세이를 지금도 공부들 하려나요?ㅎ
저도 그걸로 스터디하긴 했는데,,
당시에는 선배들 스터디가 뜬구름같고
답답해 혼자 '독일이데올로기' 보는게 더 재밌었던 기억이 나네요.

'모든 공부의 기저에 깔린 '공동의 사고'가 바탕이 되어 있어야 한다'
->저도 격하게 동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