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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보는 눈 - 손철주의 그림 자랑
손철주 지음 / 현암사 / 2013년 10월
평점 :
서머싯 몸의 '달과 6펜스'란 소설이 있다.
현실적으로 직업을 가지고 살아야 하는데(6펜스) 예술적 감성을 감추지 못하고 자꾸 튀는(달) 주인공이 나온다.
박완서는 '나목'에서 주인공 이경을 등장시켜,
존경하고 사랑하는 화가 '옥희도'와는 맺어주지 않고,
지극히 현실적인 전기공 '황태수'와 살게 하는데,
주인공은 영원히 메워지지 않을 허전한 마음을 '뚝 떨어진 나무들'로 그려내고 있다.
예술가의 '필선'은 그냥 무미건조한 줄이 아니다.
그 굵기의 정도와 빛의 농담, 차근차근 그린 필획과 재빨리 그린 필획의 차이가 화폭에서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그런 것을 굳이 말로 풀어낸다는 일은 <사족>일 것이나,
그 일도 손철주 정도 눙치는 재주가 뛰어난 사람의 말이라면 듣는 재미도 푸지다.
손철주의 말 속에는 조곤조곤 읽어주는 '그림에 대한 독법'도 있고,
우리말의 맛깔난 재미를 느끼게 해주는 '신선한 해석'도 있고,
시조나 한시에서 가져온 '화제 풀이'도 있어서,
그림을 더 풍성하게 음미할 수 있게 해주는 '감칠맛'이 가득해서 좋다.
술 마시는 사람은 술집에 가서 이런저런 삶의 얼룩을 주절주절 떠들지 않는 법이다.
그저 술 이야기, 안주 이야기만 오갈 뿐.
술도 주류 불문, 안주 불문, 청탁 불문, 남녀 불문, 원근 불문
주어지는대로 부어라 마셔라 하면서
잔을 주고 받을(수작 酬酌) 뿐.
그림을 드리워 두고, 혼잣말을 주절거리는 사람은
술집에서 윗사람 뒷담화나 떠드는 사람처럼 별로다.
술맛이 입에 착착 붙으려면, 이런 저런 말 없이,
싱긋이 웃거나 헤실헤실 웃으면서 술잔 부딪는대로 떠끔떠끔 마시는 게 좋은 상대이듯,
그림에 대해서도 자기가 아는 것이라고 많이 늘어놓는 사람은 별로다.
안주에 찰싹 들러붙는 맛있는 이야기를 늘어 놓고,
오늘의 재미난 술자리를 즐기는 사람과 마셔야 제대로 즐길 수 있다.
최북의 '풍설야귀인'을 읽는다.
더 말이 필요없다.
눈보라가 생애를 쓸고 간 사람만이 그릴 수 있는 그림이다.
날이 차가워서가 아니라,
마음이 시리면 절로 불우해진다.(58)
이 정도면, 이 대목에서 한 잔 부딪칠 만 하다.
김정희의 '죽로지실'을 풀이한 대목도 일품이다.
'대나무 화로가 놓인 방'
척 봐도 차 달이는 김이 모락모락 난다.
대나무는 곧은 것과 비틀린 것이 섞였고,
화로는 다리굽이 네 개인데 불씨가 겨우 살아 있다.
지에서 향기로운 훈김이 피어오르고,
실에서 찻주전자가 놓여 있는 방이 금세 떠오른다.(261)
그림에서 방의 분위기가 그대로 느껴지게 읊었다.
![](http://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13/1113/pimg_724300183923476.png)
술이 한 순배 돌고 나면,
질펀한 남녀의 사랑 이야기로 접어들 만도 한데,
임제와 한우의 이야기는 참으로 명문이다.
북천이 맑다커늘 우장 없이 길을 나니
산에는 눈이 오고 들에는 찬비 온다
오늘은 찬비 맞았으니 얼어 잘까 하노라.(임제)
어이 얼어자리 무슨 일 얼어 자리
원앙침 비취금을 어디 두고 얼어 자리
오늘은 찬비 맞았으니 녹아 잘까 하노라.(한우)
우리 말을 이렇게 자유자재로 부려 쓴 사람들도 굉장하지만,
이런 것들을 적재적소에서 불러오는 재주도 대단한 힘이다.
기녀 한우의 이름을 빗대 '찬 비'를 맞았으니 '얼어 자고 싶다'(운우지정을 나누고 싶다)고 둘러 말하는 남자나,
얼어 자다를 못 알아 들은 체 눙치면서, '녹아 잘까' 하는 시를 읊는 여인네도 고단수다.
또, 이런 화제라면,
정지된 스틸 컷의 한 장면이어도,
그 아련한 마음이 영화 2시간 분량의 마음으로 묵지근하게 남아있을 수도 있을 듯.
혼이 그대를 따라가 버리니
텅 빈 몸만 대문에 기대네.
나귀가 더뎌 내 몸 무거운 줄 알았더니
하나가 더 실려 있었구려, 그대의 혼.(206)
그의 글을 읽노라면,
푸지게 한 잔 걸치고 난 기분인데,
그의 말투를 빌리자면,
<사랑옵기> 그지없는 그의 글을 계속 읽기 위해서,
그의 건필을 빈다.
Cheers~!(웬 건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