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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테판 츠바이크의 에라스무스 평전 - 종교의 광기에 맞서 싸운 인문주의자, 아롬옛글밭 2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정민영 옮김 / 아롬미디어 / 2006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내가 애정해 마지 않는 슈테판 츠바이크가 주목한 사람이 왜 에라스무스란 사람일까? 몹시 궁금했다.
슈테판 츠바이크의 글은 예술이다. ^^
보통 사람들이 평전을 쓰면 '그는 이렇게 태어나 살다 죽었다'가 되는데,
츠바이크의 글에서는 온갖 비유와 수사를 곁들여 읽는 양념맛을 풍부하게 즐길 수 있다.
그냥 풀을 뜯어 먹는 것과, 샐러드 드레싱을 즐겨가며 먹는 맛은 천양지차일 거시다.
최초의 의식있는 세계주의자이자 유럽인, 에라스무스.
그의 비극을 통해 츠바이크는 자신의 비극을 읽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에라스무스는 레가토를 사랑한 남자였다. 비유하자면...
레가토는 피아노 연주할 때, 음과 음 사이를 최대한 이어지듯 부드럽고 자연스럽게 소리내는 주법이다.
스타카토와 상반되는 개념인데, 혁명과 열기가 스타카토라면, 에라스무스의 고귀한 인문정신에 대한 숭고한 찬양은 레가토인 셈이다.
광신과 폭력으로 점철된 종교전쟁이란시대의 혼란 속에서,
극단으로 치닫기 쉬운 루터파의 의도에는 충분히 공감하면서도,
극단을 거부하는 에라스무스는 결국 평화와 자유를 지키는 편을 선택한다.
그렇지만, 그 격동의 시기에 인기를 얻은 것은, 아이러니컬하게도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이었다.
세상은 그런 곳이다. 역사는 그것을 보여주는 교과서다.
에라스무스, 실망한 이 늙은 남자.
그렇다고 우리가 실망해서는 안 될 이 늙은 남자가 전쟁과 유럽의 분열이라는 혼란 한 가운데서 유산으로 남겨 놓은 것은,
다름 아닌 앞으로 도래할, 그리고 결코 막을 수 없는 인류의 인간화에 대해 모든 종교와 신화가 갖고 있는 희망의 원초적 꿈이었으며,
이기적이고 일시적인 격정에 분명하고 공정한 이성이 승리하리라 희망하는 꿈이었다.
떨리는 손으로, 때로는 자신감을 잃은 손으로 그려 놓은 이러한 이상은 항상 새로운 희망으로수십 세대에 이르도록 유럽의 시각에 활력을 불어 넣었다.(253)
세계사를 배운 내가 기억하는 그에 대한 것은 '우신 예찬'이라는 책 제목 뿐이다.
르네상스와 에라스무스, 우신예찬... ㅠㅜ
이제 츠바이크를 통해, 잔인한 정치의 시대에 인간이 가져야 할 품성에 대하여 생각해 본다.
츠바이크가 살았던 시대 역시 나치즘의 잔인한 시대였지만, 어느 한 시대 잔인하지 않은 시대는 없으므로,
에라스무스를 읽는 일은, 극단에서 벗어나기를 한없이 간구하는 수도자 아닌 수도자의 열망이기도 한 셈이다.
츠바이크를 읽는 재미는 이런 것이다.
그는 나쁜 소식을 듣고 나서야 놓쳐버린 순가은 다시 되돌릴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179)
루터와의 논쟁에서 그가 적절한 시간에 논박할 용기를 내지 못하고 편지만 써대고 있었던 것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결정적인 힘, 운명과 죽음이 아무런 경고도 없이 사람에게 다가서는 일은 드물다.
그들은 매번 얼굴을 감춘 사자를 조용히 보내지만,
그를 맞은 사람들은 대부분 비밀스러운 그의 말을 흘려듣는다.(139)
아~ 에라스무스가 루터의 편지를 받았으나 대수롭지 않게 해석한 대목을 이렇게 표현하다니...
츠바이크의 광팬이 될 수밖에... ^^
인문주의 세계 제국의 군주(209)
츠바이크에게 에라스무스는 이런 존재였다.
그러나 그 군주에 대하여 이야기해야 하는 츠바이크에게 그 군주의 치명적 결함 역시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인문주의의 근본적인 결함은 인문주의가 민중을 이해하고 그들로 부터 배우려 하지 않고,
위에서 그들을 그르치려 했다는 데 있다.
속을 깊이 들여다보면 그 영역은 단지 얇은 상층부만 포함하고 있었고 현실과의 관계는 상당히 약했다.(133)
이런 글을 읽으면, 왜 돌아가신 전 대통령과 유시민 같은 사람들 생각이 나는 걸까?
난 어느 편에도 속하지 않는다.(27)
종교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아니, 종교 전쟁의 촉발을 제공하였다고도 볼 수 있는,
가톨릭의 부패를 조롱하고 풍자한 '바보 예찬'의 저자로서 중도를 지키겠다는 그의 의지는 가상하지만,
어쩌면 그것은 애초에 가능하지 않은 줄타기였는지도 모른다.
가만히 있는 광대는 줄에서 떨어지게 마련이다.
끊임없이 무게중심을 변화시키면서, 이쪽과 저쪽의 균형을 조절해 나가는 것이 줄타기의 유일한 방법일지니...
츠바이크에게 에라스무스가 그만한 무게로 다가선 것은,
에라스무스가 처한 광포한 현실과,
그가 추구한 이상이 그만큼 절실한 것이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