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명적인 은총 아르망 가마슈 경감 시리즈
루이즈 페니 지음, 이동윤 옮김 / 피니스아프리카에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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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즈 페니의 소설에는 '가마슈 경감'이란 경찰이 등장한다.

캐나다의 퀘벡이란 지역의 특수성을 감안한다면,

이 소설은 상당히 프랑스스러운 인간상을 드러내고 있기도 하다.

또한 불어의 진한 어휘의 향을 가득 풍기려 노력하는 소설 같기도 하다.

 

프랑스인이나 불어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별로 없지만,

작가가 창조해낸 가마슈 경감이란 남자, 참 맘에 든다.

이제 나잇살이 점점 중력의 영향 아래 놓이는 나이여서,

나이 들어 흉한 사람들을 워낙 많이 만나다 보니,

저렇게는 나이들지 않고 싶다는 희망 사항을 가지게 되는데,

이 책에서 가마슈 경감이 드러내는 날카로움과 지적인 통찰력, 그리고 인간미까지...

그를 따라 나이들 순 없으리라만, 암튼, 멋진 중년 남자를 하나 만날 수 있다.

 

가마슈가 집에 들러 아내와 만났을 때, 평범한 만남이지만 아름다움을 읽을 수 있다.

 

그는 그녀를 끌어안고 코트 사이로 그녀의 부드러운 몸을 느끼며 키스했다.

두 사람 모두 처음 만났을 때보다 살이 올라 있었다.

양쪽 다 결혼식 때 입었던 옷을 더이상 입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다른 면에서도 역시 성장했고, 가마슈는 살이 붙은 것 정도는 남는 장사라고 생각했다.

인생이란 사방으로 성장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가마슈는 현재 모습이 마음에 들었다.

렌 마리는 그를 다시 안아 주었다.

그의 코트는 눈을 맞앗 그녀의 스웨터마저 축축해졌다.

그러나 그녀는 남는 장사라고 생각했다.

약간의 불편함을 감수해서 커다란 위안을 얻었으니까.(169)

 

그래. 살면서 불편함을 감수하더라도,

커다란 위안이라는, 또는 현재 모습이 마음에 들게 해 준,

배우자를 향하여 <남는 장사>라고 생각한다면, 불만은 없을 것이다.

 

모든 색을 하나로 합치면 어떻게 되는가? 흰색이 된다.

흰색은 신성과 균형의 색이다.

목표는 균형이다.

이를 달성하기 위한 유일한 길은,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것,

더 나아가서 흰색의 장막 아래 두는 것이다.(82)

 

과학 시간에 배우는 바로는 '색'을 합치면 '검정'이 되고, '빛'을 합치면 '흰색'이 된다.

번역이 잘못되었거나, 원문이 잘못되었을 수도 있고, 불어의 번역상에서 실수가 있을 수도 있겠다.

이 소설의 원 제목인 '동사'를 영어권에서 내용을 고려한 '치명적인 은총'으로 바꾼 것은,

내용을 살려보려는 의도는 있었으나,

다시 한국어로 번역되면서 '숙명적인, 운명적인' 의미를 지닌 fatal이 '치명적'으로 번역되면서,

죽음을 부르는...의미에 한정되게 된 점은 못내 아쉽다.

 

이 소설의 주제는, 삶의 균형에 관한 것이다.

세 그루의 소나무 마을 - 스리 파인스에 사는 사람들의 평범해 보이는 삶 사이로,

삐뚤어진 삶 역시 공존하게 마련이다.

모든 빛이 뒤섞여 흰 빛이 된다지만,

그리하여 세상은 균형을 이룬 흰 빛의 세상이라지만,

그렇게 스리 파인스 마을은 흰 눈 아래 뒤덮이지만,

그 안에는 지워버리고 싶은 추한 빛 역시 존재할 터이다.

 

모든 색을 결합하면 흰색이 된다는 거예요.

반면에 검은 색은 모든 색이 부재한 상태인 거고요.

그래서 CC에 따르면,

모든 감정은 색이고 사람들은 감정적이기 때문에

분노나 슬픔, 질투 같은 어떤 감정이든 하나의 색이 우세하게 되면 균형 상태가 깨지게 되죠.

이 사상의 요점은 흰색을 달성하는 거예요.

모든 색, 모든 감정을 가지런하게 정리해 놓으면서요.(250)

 

중도를 말하는 이, 중립을 지키라는 이가 저지르기 쉬운 오류는,

중도나 중립이 이미 가진자들의 이데올로기에 기여한다는 것을 간과한다는 점이다.

이처럼 균형을 말하는 자들 역시, 인간의 다양성을 무시할 수 있는 두려운 가능성을 가진 존재란 것.

 

나는 사람이라는 집의

마지막 방을 조사하면서 하루하루를 보냅니다.

스스로에게도 걸어 잠그고 숨기곤 하는 방 말이에요.

그런 방에는 악취가 나도록 썩어가는 괴물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내 직업은 생명을 앗아가는 사람들을 찾는 겁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 동기를 알아내야하지요.

그러기 위해서는 그 사람들의 머릿속으로 들어가서 마지막 문을 열어야 합니다.

하지만 다시 밖으로 나오게 되면...

세상은 갑자기 더욱 아름다워지고, 더욱 생기가 넘치며,

그 어느 때보다도 더욱 사랑스러워집니다

최악의 상황에 직면했을 때야말로 최선을 알아볼 수 있는 겁니다.(443)

 

이렇게 자기 직업의 의미를 말할 수 있는 중년의 남자는 멋지지 않은가?

나 역시 사람이라는 집의 방들을 조사하면서 하루하루를 보내는 직업이긴 하다.

그 대상이 생명을 앗아가는 사람들은 아니지만,

한창 자랄 나이의 아이들이 갖고 있는 방들 역시,

악취가 나도록 썩어가는 괴물이 기다리고 있는 방들을 가지고 있다.

그 방들의 마지막 문을 열어 젖힐 것인지 말 것인지,

범죄를 재구성하기 전까지는 판단 보류할 수밖에 없다.

인간의 선함과 악함,

얼룩진 인간과 균형잡힌 인간성.

이런 것들을 어느 한 편의 손을 들어줄 수 없는 노릇이다.

 

이 소설이 이끌고 있는 추리의 라인과 반전 역시 그러하다.

인간의 선함은 어디까지이며,

인간의 악함 역시 처벌받을 수 있는 것인지...

여러 빛의 종합적 균형인 흰색과,

빛의 없음의 저주인 검은색은,

자칫, 세상을 흑백 논리로 재단할 위험을 가진 빛들 아닌가.

 

말은 사람들에게 상처를 입히고 때로는 죽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었으니까,

그리고 때로,

말은 사람을 치유하기도 하지.(499)

 

이런 이야기를 왜 읽을까?

언어를 접하는 일은 위태로움의 지경에 대신 서보는 간접 체험을 주기도 하고,

때때로, 치유가 되기도 하기 때문일 것이다.

말로 벌어먹고 사는 사람으로서,

특히나 한창 여리고 순수한 아이들을 대하는 한 사람으로서,

치유하는 말을 써야지, 상처입히고 죽이는 말을 써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도 하게 된다.

 

사랑해, 크리.

누구라도 당신을 원하지 않을 수 없을 거야.

자기가 얼마나 아름답고 재능이 넘치는 사람인지 모르지?

당신은 세상에서 가장 멋진 여자야.

난 절대 당신을 떠나지 않아. 크리.

그리고 그 누구라도 당신에게 상처를 주지 못하도록 하겠어.(501)

 

시트콤 주인공 '미달이'가 이름때문에 받았던 스트레스를 상상한다면,

영어권에서 '크라이'의 의미인 '크리'를 이름으로 준 것에 대한 저주는 상상하기도 어렵다.

인디언들은 나무를 제거할 때, 빙 둘러서서 저주의 말을 퍼붓는다지 않는가.

크리. 그 아잉게 이렇게 사랑스런 말을 쏟아부어줄 때,

언어의 힘은 가장 큰 에너지를 발산할 것이다.

 

당신은 세상에서 가장 멋진 여자야.

자기가 얼마나 아름답고 재능이 넘치는 사람인지 모르지?

 

이렇게 사랑스런 말을 듣고 자랐다면, 크리 역시 얼마나 사랑스런 캐릭터로 성장했을 것인지...

사람의 말을 곱씹어 보게 하는 소설이다.

 

사건을 해결하고 뿌듯해하기보다는,

삶의 온기를 느끼면서 애틋한 정을 느끼게하는 가마슈 경감.

 

백미러에 비친 스리 파인스가 보였다.

가마슈는 차에서 내려 마을을 내려다보았다.

집들은 따뜻하게 손짓하는 불빛으로 빛나며,

가끔은 너무 차가운 세상으로부터 사람들을 보호해주려는 것처럼 보였다.

그는 눈을 감고 달음박질하는 가슴을 진정시켰다.(515)

 

이런 따뜻함이 루이즈 페니의 소설이 가진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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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2-27 09: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2-27 15: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2-27 20: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아무개 2013-02-27 11: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요새 정말 심각하게 노후가 걱정스러워요.
저렇게 되고 싶다는 사람보다는 저렇게 늙지 말아야지 하는 사람만 주위에 있다보니
왠지 노후가 더 공포스럽게 느껴지는거 같아요.

글샘 2013-02-27 15: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 그렇더라구요.
인덕이란 게,
사람들이 날 돌봐줘서가 아니라,
저렇게 되고 싶다~ 이런 사람 많이 만나는 게 인덕이 있는 거 아닌가 합니다.
잘 둘러보면... 멋진 사람도 많아요~ 세상에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