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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세 걸음 (무선) ㅣ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00
모옌 지음, 임홍빈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11월
평점 :
병아리의 걸음걸이는 사람의 걸음걸이와 똑같지만,
참새는 그저 두 발로 폴짝폴짝 뛸 줄만 알죠...
참새가 병아리처럼 한 발 한 발 걸어가는 걸보면 하늘에서 행운이 뚝 떨어진다구~
한 걸음 내디디면 횡재수를, 두 걸음을 내디디면 관운을, 세 걸음을 내디디면 여복을...
열두 걸음을 내디디면 자네 아내와 애인이 화목하게 자매처럼 친하게 된다네.
하지만 절대로 열세번째 걸음을 보아선 안 된다네.
만일 참새가 열세번째 걸음을 내딛는 걸 보았다가는...
앞서의 모든 행운이 죄다 곱절의 악운으로 바뀌어 자네 머리 위로 뚝 떨어져 내린다지 뭔가!(423)
열세 걸음의 의미는 이렇게 드러난다.
이 소설의 스토리는 다소 난삽하고 짜증나게 시작해서,
초반을 진득허니 읽지 못하면 뭐 이런 소설이 다 있어? 할 수 있다.
그런데, 황당하기 그지없어 보이는 시작도,
모옌의 소설이 가지고 있는 힘을 믿고 읽어 나가노라면,
소설이란 장르가 가지고 있는 힘과 재미를 한꺼번에 얻을 수 있게 될 것이다.
줄거리가 통 안 잡혀 관둘까? 했던 독자라면, 뒷부분의 해설을 먼저 읽는 것도 좋은 방법이겠다.
줄거리를 안다고 스토리가 흥미진진하지 않아지는 소설은 아니니 말이다.
이 소설은 '너, 나, 그'가 마구 뒤섞여 쓰인다.
사회가 혼란스런 만큼, 존재의 주체, 객체성 역시 마구 뒤섞이고,
결혼 밖의 정사, 혼전 정사 등도 자연스럽게 욕망의 분출이 내비치도록 쓰고 있다.
초반부의 혼란만 넘기고 나면, 책을 손에서 떼기 힘들만큼의 모옌의 필력이 독자를 끌어들인다.
과연, 현대 중국은...
한 걸음, 두 걸음... 열두 걸음까지의 행복을 향유하고 있는 과정인데...
향후는? 두 눈을 질끈 감고 현실을 강화할 것인가?
자본주의와 결합한 특구뿐만 아니라 열세 번째 스텝을 내디딜 불안한 미래를 두 눈 뜨고 바라보아야 할 것인가...
정말 옛이야기처럼, 앞서의 행운이 곱절의 악운이 되어 떨어질 것인가...
생각해보게 만드는 소설이다.
담뱃갑을 들고 장사를 떠난 장츠추의 눈에 비친 사람들의 모습...
나이가 많은 사람, 적은 사람, 걸음 걸이가 둔한 사람, 잰 사람, 빨리 걷는 사람, 천천히 걷는 사람,
얼굴 표정도 저마다 달라 웃는 사람, 근심 가득한 사람, 무표정한 사람도 있었다.
그 가운데 가장 많은 것은 무표정한 사람들이었다.(452)
작가가 진단한 현대 중국의 고뇌가 여기 있다.
국가의 지도에 열정적으로 호응하던 시대는 끝났다.
국가가 개인의 삶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던 시대는 끝났다.
무표정한 사람들의 시대... 현대 중국은 국가와 국민이 유리되고 있는 것이다.
장츠추와 팡푸구이는 개성을 잃고, 자신의 삶을 잃어버리고 떠도는 유령같은 '가오나시'들이다.
자기 존재감과 국가가 유리되어 불안한 삶을 살 때, 어느날 장츠추가 바라본 낙엽길은 쓸쓸하다.
그는 시멘트 바닥에 고요히 누운 황금빛 낙엽들을 차마 밟고 지나갈 수 없었다.
하지만 그 황금빛 낙엽들을 밟고 지나가야 했다.
왜냐하면 발걸음을 돌릴 수도, 길을 선택할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517)
한번 선택하여 걸어가기 시작한 걸음은, 돌릴 수 없다. 더이상 선택의 여지는 없다.
국가의 흐름 역시 그렇게 강물처럼 나아가기만 할 뿐이다.
그것은 피가 흐르는 날개를 끌며 일어섰다.
참새의 피가 너의 눈에 홍채를 한 겹 덧씌웠다.
햇빛은 핏빛으로 붉고, 참새는 황금 같았다.
피를 흘리고 금빛으로 반짝이고, 비둘기만큼이나 커다란 참새 한 마리가 너를 향해 한 걸음씩 걸어오기 시작했다.
걸음마를 배우는 갓난아기처럼 걸음걸이가 휘청휘청 흔들렸다.
그것은 너를 향해 오고 있었다.
우리를 향해, 그리고 너희를 향해 오고 있었다.
우리를 향해 오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는 묵묵히 그것의 걸음 수를 세기 시작했다.
1-2-3
4-5-6
7-8-9
10
11
12 (마지막 페이지)
황금과 핏빛은 공존한다.
이제까지, '너, 그, 나'가 뒤섞여 혼란스럽던 주체 일탈의 중국인들에게,
'그것'은 <우리>를 향해 오고 있다.
열두 걸음까지의 행복을 향유하는 것도,
열세 걸음의 곱절의 재앙을 받아들이는 것도, <우리>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는 이야기는,
슬프면서도 힘이 있다.
이런 힘있는 상징을 구사하는 이가 있는 중국은 행복하다.
억압적인 전체주의 사회에 대한 상징.
개인은 더이상 자기 삶의 주재자가 아니고, 주체란 없다.
다들 본래의 자신을 잃은 채, 자신이 아닌 남이 되어 비극을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걸어가면서
파국을 맞는 것이다.(해설)
삶은, 사회에서 삶은 걸음을 걷는 일과 같다.
어제와 같은 오늘은 없고, 오늘과 같은 내일은 없다.
뚜벅뚜벅 걸어나가기 때문이다.
그런데, 미래는 갈수록 혼미하고 혼란스럽다. 전망은 불확정적이고 불투명하다.
한 마리는 호랑이 머리에 사자 몸뚱이,
다른 한 마리는 사자 머리에 호랑이 몸뚱이를 하고 있었다.
다시 한번 운명 같은 광경이 재현되고 있었다.
지난번은 역사의 재현이었고, 이번은 미래에 대한 예감 같았다.(190)
라이거는 불완전한 합체의 결과물이다.
어울리지 않는 두 개체가 결합하여 하나의 결과물이 탄생하지만, 그 결과물은 결국
불완전한 이식이고 결합이며, 그를 낳은 호랑이는 살해당하고 만다.
공산주의와 자본주의의 결합을 '흑묘백묘' 운운하면서 쥐만 잘 잡으면 된다고 했는데,
그 쥐잡던 고양이가 이제 주인집 살림을 좌지우지하게 됐다면,
그 비유에 머리를 내두르는 사람들도 적지 않은 수가 될 것이다.
살다보면 늘 돌발적인 사건 때문에 계획이 완전히 틀어지기 십상이지.
이렇게 틀어진 계획은 운명의 변화를 야기하고,
역사적인 변화를 불러일으키는 상황이 날마다 모든 개인의 신상에,
모든 가정에, 모든 나라에 일어나고 있어.(119)
마치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백년 동안의 고독'을 읽는 일처럼,
환상 속 이야기들 속에 진득허니 녹아있는 중국의 현실이 오롯이 전해진다.
여러 가지 야채들을 기름에 볶아 걸쭉한 탕 속에 넣어서 향을 내는 중국의 음식처럼,
그 음식을 먹는 일은 냄새만으로 판단할 것도, 느낌만으로 판단할 것도 아니다.
그 음식이 익숙해질 때까지 입이 적응할 때까지 느긋하게 맛보지 않으면 진미를 놓치기 쉬울 것이다.
이 소설은 무엇에 대한 비유라고 보기 힘들다.
중국에서 살아온 작가가 문화대혁명과 자본주의의 착상 과정을 보면서,
뒤틀려가는 인간 본질의 문제를 오랫동안 고민하며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딘 결과물이기 때문에,
쉽사리 이렇다할 본질을 파악하기 쉽지 않다.
이 소설에서 생기발랄한 부분이라면,
남녀의 감정을 묘파하는 부분에 있다.
회색빛 사회 속이라고 분홍빛 사연이 없을 수는 없는 것.
분홍빛이든 농염한 장밋빛이든, 풋풋한 사랑이든 육욕에 물든 사랑이든,
숨길 수 없는 인간의 본성은 잿빛 사회에 대조되어 더 두드러져 보일 수밖에...
자본의 힘에 신체가 휘둘리는 것은 중국 역시 자유로울 수 없는 경지일 것.
아무리 암담한 시절이라 해도 애인은 있는 법이니까.
'애인'의 동의어는 '간통한 남녀', '정부', 심지어 '간부' 처럼 부정적 의미가 포함된 말들뿐인데.
왜 사람들은 애인을 찾지 못해 안달일까?
'도덕이 문란해졌다'는 말 한마디로 명확한 답변이 될까?(61)
시대와 풍속은 뗄래야 뗄 수 없는 것이지만,
세대를, 시대를 불문하고 개인의 관심은 '사랑'에 있다.
잿빛 사회 속에서 중국의 대작가가 바라본 사랑에 대한 이야기들을,
그 찐득한 호기심 가득한 인간들의 눈빛을 읽는 일 역시 하나의 재미의 축을 제공한다.
이 작품을 수십 년간 기획하면서 작가 스스로 얼마나 울고 웃었을까?
말도 안 되는 '서술자'를 등장시키면서,
그 서술자는 일종의 '괴물'인데, 작가 스스로 '괴물'임을 자처하고 나설 수밖에 없는 닫힌 사회의 발화가 얼마나 고통스런 것인지를 넘겨짚게 만들기도 한다.
장편 소설에 진득한 눈 묻어두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꼭 읽어보기를 권하는 책.
고치면 싶은 구절 하나...
164. 이렛날,...은 이튿날...의 오기가 아닌가 싶다. 제7일, 이레가 되는 날...을 이렛날이라 하니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