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3 아이들은 이적지 빈둥거리고 한 달을 쉬었다. 마음에 큰 생채기 난 자국 몇 개 끌어 안고. 지난 화요일에 성적표가 나갔고, 내일부터는 면담을 해야 한다.

대학에 진학하려는 아이들과, 어떻게든 학생을 모집하려는 대학의 사이에서 고3 담임은 당황스럽다. 각종 학원들에서 나오는 진학 자료들이란 것은 실상 믿을 것이 못 되고, 대략 작년 커트라인, 내지 평균에서 어림잡아 지원시키는 것이 고작이다. 담임의 '감(感)'을 믿는 것이다.

내일부터 우리 애들을 울리고, 심각하게 고민하게 하고 할 일 주일이 두렵다. 차라리 시험치기 전이 훨씬 아름다운 관계였다. 희망의 잔소리를 들려줄 수 있었으니까... 이제 냉혹한 결과 앞에서 좌절하고 있는 아이들에게 상처주지 않는 상담을 하려고 이런 저런 생각 하다보니, 잠을 벌써 저만치 달아나 버렸다.

열흘 전에 아이들이랑 샤갈전을 본 기억이 난다. 마르크 샤갈.

그 전에 달리를 볼 때, 초현실주의 작가 달리의 정신병적 상상력에 구역질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에, 아이들 단체 관람은 당연히 샤갈 쪽으로 결정했다. 누구는 이런 지 모르지, 달리가 훨씬 아이들 상상력 자극하기에 좋다고...

난 샤갈이 너무 맘에 들었다. 전날 과음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푸른 색과 붉은 색, 그리고 닭대가리가 너무 맘에 들었다. 하늘을 나는 연인들과 환상적인 꿈의 한 장면처럼 느껴지는 화면 배치들, 여기 저기서 초등학생들이 제목을 베낀다고 서서 그림은 안 보고 떠들고 있어 진로를 간혹 방해하긴 했지만, 샤갈의 부드러운 터치가 정말 쿨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간혹 샤갈보다 달리가 좋다는 아이도 있었다. 우리반 희야는 확실히 이과 쪽 성적이 높더니, 그런 탓일까, 대다수의 아이들은 샤갈이 좋다는 반응이다. 하긴, 달리의 작품도 괜찮은 것들이 있다. 그런데, 이번 부산 벡스코 전시엔 별로 볼 만한 것이 없었다. 아이들에게 무엇이 좋으냐고 물어 봤다. 아이들은 현실에서 오는 부담이 없단다. 하늘을 날고, 얼굴이 뻘개도 전혀 이상하지 않고, 시퍼래도 이상하지 않다. 허긴, 그 전날 이주노동자의 삶 강연을 들을 때, 아이들은 스리랑카인 샤골과 악수를 잘도 했다. 색이 다른 사람도 이상하지 않은 세계, 그 곳은 환상의 세계고, 현실이 아니었으리라. 샤갈은 아이들을 고통스런 현실에서 잠시 떠나게 해 주었던가?

한 일주일 비행기 타고 뜨거운 햇살 비추는 바닷가에 가서, 썬글라스 끼고 숨어서 지내다 왔으면 좋겠다. 27일 원서 접수 마치고 조용히 들어왔으면... 하고 꿈꾸는 담임을 아이들은 믿고 지원을 해야 한다.

학원 자료를 아무리 분석해도 명확한 잣대를 잡을 수 없다. 대한민국 대학 입시 커트라인은 하느님도 예측할 수 없는 것이다. 점수를 맞춰서 지원하고, 지원률을 보고 낮은 데로 지원하고, 세 군데 중 한 군데 정도는 배짱 지원도 해 보고... 이런 건 입시 지도가 아니라, 도박에 나오는 거 아닌가?

아, 비행기는 아니더라도, 오늘 밤엔 샤갈의 시퍼런 닭대가릴 타고 빠리의 에펠탑 보이는 붉은 하늘 위로 날아보고 싶다. 우리반 애들 손 잡고 시원한 하늘을 날면서, 희망도 추억도 이야기해 보고 싶다. 막연하고 답답한 진학 이야기에서 벗어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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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여우 2004-12-20 17: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올 여름에 샤갈전을 봤어요. 평생 기억할 만한 기념비적인 추억이었습니다. 상상력이 없는 현실이란..........참, 남루하지요. 상상력을 동원할 여력이 없는 현실....참,고단하지요

글샘 2004-12-20 18: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샤갈의 환상과 상상력은 폭력적이지 않아서 좋았습니다. 요즘 설치미술이네, 퍼포먼스네 하는 것들은 보기 싫어도 보라는 투의 폭력적인 것이 많잖아요? 상상력이 없는 남루한 현실... , 상상력을 동원할 여력이 없는 고단한 현실...

여우님의 탁월한 단어 선택의 폭을 보여주는 코멘트군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