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 제1회 문학동네신인작가상 수상작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00년 9월
평점 :
절판


있나? 있을까? 과연 이 작가는 '나'가 어떤 존재인지 상상해 본 것일까? 따뜻한 물 속에다 몸을 담그고 혈관의 액체를 빨리 순환시킨 다음 동맥을 그으면, 나를 파괴할 수 있는 것인가? 과연 '나'란 '나'의 본질이란, 그렇게 내 이 칠십 킬로그램짜리 몸뚱아리에 한정된 것이란 말인가. 껍데기를 안고 다니는 나, 이 나의 껍질이 나라면 나는 나를 파괴할 수도 있다. 그러나, 과연 그것이 나란 말이냐. 최후의 심판에 나오는 미켈란젤로의 껍질처럼, 우리가 뼈다귀와 수분, 또는 줄이고 싶어하는 체지방과 단백질 세포들에 불과하다면 내 몸의 순환을 멈추는 일은 단순하다. 옥상에서 뛰어내릴 수도 있고, 깊은 물로 들어갈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껍질이 아니지 않은가. 아무리 세대가 가벼워졌다고는 해도, 그렇지, 늘상 엘리베이터이 끼어있는 가엾은 존재로 사는 것이 나라고 해도. 그렇게 허둥거리고 산다는 것이 늘 싸구려 자판기 커피잔처럼 무가치하고 금세 식어버리는 존재라 하더라도, 그토록 쉽게 목숨을 포기하는 것은 권리하고 할 수 없다. 물론 어떤 종교인들은 신의 존재를 역설하면서, 신의 뜻에 따르지 않기 때문에 자살을 범죄라고 지껄이기도 하지만, 신의 존재 이전에, 나는 '나'란 존재는 로빈슨 크루소가 아닌 것이다.

나를 정의하는 것은, 늘 나의 본질이 아닌,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바라보는 대타적 존재로서의 '나'이지 않았던가. 나는 한 사람의 남편이고, 아이의 아빠고, 부모의 자식이고, 형제의 형제고, 사위고, 자형이고, 동서고, 제부고, 선생님이고, 동료교사고, 후배고, 선배고, 제자도 되고, 강사도 되고, 대학원생도 되고, 교통위반자도 되고, 손님도 되고, 행인도 되고, 도서관 출입자도 되고, 국민이기도 하고...

그런 것들 다 젖혀 두고, 나는 무엇인가. 그러고도 나가 아무 것도 남지 않는다면, 나는 껍질이다. 죽어도 되고,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그러나, 과연 그러한가. 나를 파괴할 권리를 세 편의 그림과 얽어서 역설한들, 그 권리가 긍정되지는 못 한다. 세 번의 경험 또는 실험을 통해 결론을 내린 것은, 귀납추리의 논리가 될 수 없다. 유비추리의 오류를 범하게 되는 것으로 보인다. 물론 소설이 논리적일 필요는 없다. 그러나, 그는 제목부터 도발적으로 논리적인 양 지껄이고 있다. 아니다.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없다. 그에게 우리는 설득당해서는 안 된다. 정말 '나'를, '나의 본질'을 고민해 본 사람이라면, 이런 글을 쓰진 않을 것이다.

그는 외로워보인다. 사진 속에서도 몇몇의 행인들을 배경으로 외로워보이고, 그의 글의 편린들에서 비치는 날카로운 금속성의 함석조각같은 반짝이는 빛깔들도 차가워보인다. 개똥철학의 레고들을 조합해 놓은 듯한 글들은 간혹 매력적이긴 하지만, 그에게 결론적으로 동의할 수 없다. 센(千)과 치히로(千尋)는 한 글자 차이지만, 본질을 놓쳐버린 치히로는 목욕탕 때밀이일 뿐이다. 가치로운 삶을 추구하지 못하는 치히로. 자기가 어떤 존재인지, 어떤 미래가 다가올지... 전혀 예감도 기대도 할 수 없는 존재인 센. 그러나 치히로는 원래 사랑받는 딸이었고, 단란한 가정의 훈기를 느끼는 존재였다. 우리는 센이 아니다. 우리는 각자의 허상인 센을 과감히 떨치고 '자기의 치히로'를 찾아야 한다. 하쿠가 그런 말을 한다. '절대로 자기 이름을 잊어서는 안된'다고. 치히로를 잊고 센으로만 살아간다면... 자기를 파괴하고 싶을 것이므로... 

차라리, 황지우의 글들에서 나는 훨씬 나와 유사한 고민을 읽는다. 김영하의 술술 잘 읽히는 소설을 읽어 놓고, 다른 유사한 풍의 작가들보다 훨씬 덜 지겹게 읽어 놓고 이런 화풀이를 하는 것은 포스트 모던의 방향상실을 인정할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어느 날 나는 흐린 주점에 앉아 있을 것이다

                                                                         황 지 우

초경을 막 시작한 딸아이, 이젠 내가 껴안아 줄 수도 없다

생이 끔찍해졌다.

딸의 일기를 이젠 훔쳐볼 수도 없게 되었다

눈빛만 형형한 아프리카 기민들 사진,

'사랑의 빵을 나눕시다'라는 포스터 밑에 전가족의 성금란을

표시해 놓은 아이의 방을 나와 나는

바깥을 거닌다, 바깥

누군가 늘 나를 보고 있다는 생각 때문에

사람들을 피해 다니는 버릇이 언제부터 생겼는지 모르겠다

옷걸이에서 떨어지는 옷처럼

그 자리에서 그만 허물어져 버리고 싶은 생

뚱뚱한 가죽 부대에 담긴 내가, 어색해서, 견딜 수 없다

글쎄, 슬픔처럼 쌍스러운 것이 또 있을까


그러므로, 어느 날 나는 흐린 주점에 혼자 앉아 있을 것이다

완전히 늙어서 편안해진 가죽 부대를 걸치고

등뒤로 시끄러운 잡담을 담담하게 들어 주면서

먼눈으로 술잔의 수위만을 아깝게 바라볼 것이다


문제는 그런 아름다운 폐인을 내 자신이

견딜 수 있는가, 이리라

 

 

 

겨울-나무로부터 봄-나무에로


나무는 자기 몸으로

나무이다

자기 온몸으로 나무는 나무가 된다.

자기 온몸으로 헐벗고 영하 십삼 도

영하 이십 도 지상에

온몸을 뿌리박고 대가리 쳐들고

무방비의 나목으로 서서

두 손 올리고 벌받는 자세로 서서

아 벌받은 몸으로, 벌받는 목숨으로 기립하여, 그러나

이게 아닌데 이게 아닌데

온 혼(魂)으로 애타면서 속으로 몸 속으로 불타면서

버티면서 거부하면서 영하에서

영상으로 영상 오 도 영상 십삼 도 지상으로

밀고 간다, 막 밀고 올라간다

온몸이 으스러지도록

으스러지도록 부르터지면서

터지면서 자기의 뜨거운 혀로 싹을 내밀고

천천히, 서서히, 문득, 푸른 잎이 되고

푸르른 사월 하늘 들이받으면서

나무는 자기의 온몸으로 나무가 된다

아아, 마침내, 끝끝내

꽃피는 나무는 자기 몸으로

꽃피는 나무이다

 

어떤가, 김영하씨. 아름답지 아니한가. 자기를 파괴하지 않고도 흐린 날, 주점에 앉아 나무를 바라볼 만도 하지 않겠는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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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leinsusun 2004-12-17 08: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글을 잘 쓰시네요. 국어 교사이신가요?

특히, '본질을 놓쳐버린 치히로는 목욕탕 때밀이일 뿐이다'란 부분이 마음에 와 닿네요. 김영하 소설 그저 재미있게만 읽었었는데.... 황지우 시 <어느 날 나는 흐린 주점에 앉아 있을 것이다> 처음 만났는데, 마음이 저립니다. 서재 즐겨찾기 했어요. 앞으로 자주 올께요.

글샘 2004-12-18 15: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반가워요. 네. 국어교사가 직업이긴 하지만, 글을 잘 쓴다는 소린 별로 듣지 못하고 살고 있습니다. 낯선 말이군요. ^^ 그래도 칭찬은 들으면 기분 좋은 일이에요. 그쵸?

코마개 2005-01-03 13: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국어선생님 이시구나. 저도 그 직업이 부러웠는데 아이들을 매우 싫어하는 관계로 생각만 해봤습니다. 김영하의 책중에 포스트잇에 보면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는 책이 영화엔가 나오는 장면을 서술한 글이 있습니다. 읽어보셨는지? 전 한참을 깔깔대고 웃었답니다.

글샘 2005-01-04 02: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국어선생님. 참 매력적인 직업이죠? 전 그런 주제는 못 되지만... ^^ 전 김영하를 싫어했는데, 가끔은 그런 객관적이고 쿨한 글이 편할 때도 있더라구요.

2005-01-17 02:11   URL
비밀 댓글입니다.